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376
나는 어느 지주의 손짓에 따라 앞장서 걸었고, 그러자 다른 이들 역시 내가 향하는 어느 헛간을 향해 따라 움직였다.
결국 산업시대 이전까지 문명을 파괴하고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기근이다.
굶주림은 전염병보다도 많은 사람을 ‘쉽게’ 죽일 수 있는 재앙이니.
기근이 오면 사람들은 떠돌고, 떠돌이들은 도적이 되며, 국가는 각지의 통제력을 상실하니 기존의 물류체계가 붕괴하면서 복잡한 사회 시스템들이 한꺼번에 무너져내린다.
특히 인구가 적고 사회가 단단하지 못한 이 시대에는 국가 하나가 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일대의 문명 사회 전체가 주저앉기까지 한다.
결국 모든 문명의 기초에는 식량 자원의 생산과 분배가 있다.
트로이아가 세운 제국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결국 그 기초를 단단하게 해야 한다.
-끼기기기긱.
내가 문을 열자 한창 지게를 지고 움직이던 농부들이 비켜선다. 나는 그들이 옮기던 짐을 보고, 그들이 모아놓은 것들을 올려다본다.
···그래. 인구 밀도가 낮고 온 사방이 숲에다 황무지라는 건 이럴 때 도움이 된다.
떨어져 바싹 마른 나뭇가지, 이런저런 낙엽, 사람과 짐승이 먹다남은 채소 찌꺼기들 등등.
식물성의 쓰레기들.
“알려준 대로 이것들을 계속 제대로 썩히게. 그리고 적당히 흙처럼 바스라지면 씨 뿌릴 때 같이 땅에 뿌리고.”
이 시대에는 비료가 없다.
인분을 비료로 쓰기에는 역시 기생충과 병균 감염의 위험이 너무 크다. 안탄드로스에서야 대규모 하수도를 마련해놓고 사람과 가축의 배설물을 모아 체계적으로 발효시키지만 다른 곳에서 그럴 수는 없다.
결국 가장 보편적으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가장 적은 노동력을 들여 수확을 늘릴 방법을 찾아야 했다.
풀로 만든 비료인 녹비(綠肥).
이것부터 온 사방에 보급해 나간다.
“곧 있으면 안탄드로스에서 사람이 나와 자네들에게 농기구와 그 사용법을 가르쳐줄 걸세. 농부들에게 최대한 빠르게 익히도록 하게. 안탄드로스에는 여유가 없으니.”
나는 지주들에게 그리 말한 다음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러자 봄이 되어 이리저리 열매를 맺어가는 보리줄기들이 눈에 띄었다.
듬성듬성. 현대인의 눈에는 병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부실한 수확이다. 그리고 이게 저들에게는 충분한 풍작처럼 보이리라.
좆 같은 기후, 빌어먹을 지형. 3포제도, 심경도, 다른 온갖 농업 혁신도 이룰 수 없는 망할 환경이다. 프리츠 하버가 내 몸에 빙의해 질소 비료를 뿌리지 않는 한 이룰 수 있는 혁신이 너무 제약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 최대한 많은 식량을 뽑아내야 한다.
아무리 긴 추위가 몰아닥치더라도, 아무리 고통스러운 기근이 다가오더라도 수년 동안 수십만 명이 굶주리지 않을 정도로.
···가능할까?
모르겠네.
얕은 토양 (2)
-똑. 똑.
“파리스? 시간 어때?”
“그르르륵··· 그륵···.”
“···파리스?”
-벌컥.
“그으으으, 그와아아아!!”
문을 열자마자 반려가 굶주린 강아지처럼 울부짖는 모습을 본 오이노네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온힘을 쏟아 남편의 입에 단것을 쑤셔넣으며 그를 진정시켰다.
“어, 어어, 어어어어···.”
“엄마 또 뭐해요?”
“너희 아빠가 며칠 동안 밥 안 먹고 머리 싸매다가 흉포해졌어! 너희도 기억해! 이렇게 흉포해진 동물을 다룰 때는 먹을 것부터 주고 품에 안아서 달래야 하는 거야!”
“···오오, 가끔 멍멍이가 이상한 검술 수련하다가 주화입마라면서 방방 뛰어다닐 때도요?”
“물론이지! 이성을 잃은 짐승한테는 다 먹히는 방법이야. 요정들 사이의 상식이라고!”
“···.”
정신을 차린 상태로 이노가 입에 물려준 사탕을 씹고 있자니 정신이 든다. 이틀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서 이 방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막 깨달았다.
어, 이틀이 아니라 나흘이었나?
아무튼 그래도 너무하네. 반려와 딸내미를 이성을 잃은 짐승에 비유하다니.
···같은 생각을 하면서 거울을 봤더니 웬 판다와 요정과 곰탱이와 사티로스의 교잡종 같은 생명체가 서 있다.
‘이성을 잃은 짐승’.
나는 이노의 냉철한 판단에 완벽하게 납득하며 사탕을 그대로 삼켰다. 빈 속에 당분 덩어리가 들어가니 좀 머리가 잘 돌아가는 듯싶었다.
“내가··· 이런 몰골이 될 때까지 아무도 안 봐줬단 말이야? 너무한데.”
“음? 아냐! 아노이토스랑 스클레오스 둘이서 너 방 문앞에 서서 몇 시간 동안 죽치고 있어도 안 나오니까 나한테 부탁한 건데?”
“···애들은 왜 데려왔어?”
“어··· 비장의 무기? 내 말도 안 들으면 애들 목소리라도 들려주려고?”
“···.”
주위 사람들한테 신경 좀 써야지.
나는 그리 생각하며 천천히 머리를 빗고 눈을 크게 떴다. 내 책상에 놓여 있는 점토 서판은 깨끗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안 적혀 있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내가 왜 반쯤 미쳐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에게 해 유역.
이 기후와 지형과 입지··· 모두 축복받았다고 할 수 있다.
적당히 따사롭고, 강수량도 적당하며, 큰 재난도 없고, 바다와 인접해 있는 데다, 토질도 나쁘지 않다.
딱 문명의 태동기에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살아가기 좋은 환경이다.
하지만 속으면 안 된다.
이 땅은 마치 스타팅 끗발이 좋지만 밸런스를 위해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약하게 만들어놓은, 유통기한 정해진 게임 캐릭터 같은 곳이다.
내가 대단한 기술이 필요한 시도를 한 것도 아니다. 어떤 작물들을 돌려심거나 땅을 깊게 갈거나 하는 수준의 혁신을 깔짝여 봐도 금방 막힌다.
이런 땅에서 지중해 세계를 제패할 세력이 나온다고?
아니, 그건 고대의 이야기니까 그렇다 쳐도. 중세로 넘어갈 때까지 동로마는 서로마보다 훨씬 부유하지 않았나? 이런 땅을 가지고 어떻게? 3포제도, 심경법도 시도할 수 없는 이런 땅에서?
어··· 설마, 그래서 동로마가 망한 건가?
서유럽이 차근차근 농업 혁명을 일으킬 때 계속 고대 그리스 시절에 하던 그대로 농사짓다가 망한 거 아냐? 하지만 21세기 튀르키예는 농업 대국이잖아?
설마 그것도 현대 기술 때문에 가능해진 건가? 현대에는 트랙터도 있고, 대규모 댐도 있고, 화학비료도 있으니까?
···
···
···나는 내 추론이 역사적 사실에 정확히 부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내 추론이 맞다면?
당장 (사회과학 학부 전공인) 파리스가 증기기관부터 개발하고,
(철학과 대학원 중퇴한) 파리스가 트랙터를 양산하며,
(인문학 강의 플랫폼 운영하던 문과생) 파리스가 질소비료를 뿜어내지 않는 한,
더 이상의 농업 혁신은 없다는 소리다.
트로이아에서 녹비를 보급한 것도 안탄드로스만큼 치밀한 인프라를 당장 갖춰줄 수 없으니까 채택한 미봉책인데.
결국 지금 들고 있는 기술과 자원으로 어떻게든 위기를 버텨야 한다는···
“어··· 파리스?”
“으, 응?”
“왜 갑자기 막 육지로 건져올려진 다음 온힘을 다해 퍼덕거려 보았지만, 사실 바다로 되돌아갈 방법은 이제 남지 않았고, 이 뜨거운 불 위에서 몸안의 수분을 모두 잃고 튀겨져 인간들에게 잡아먹힐 운명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막 깨달은 오징어처럼 축 늘어져 있어?”
“···상세한 묘사 고마워. 기운 차릴게.”
내가 기운없어 보이니 오이노네가 개인기인 오징어 춤을 춰준다. 내가 따라서 추고 있자니 애들은 어느새 시녀들이 데려갔고.
어··· 그래. 기운 차리고 정신 차리자.
당장은 안탄드로스에서 일으킨 혁신을 사방에 퍼뜨리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낫겠다.
안탄드로스만 하더라도 순식간에 일어난 농업 혁명을 인구 증가율이 따라잡지 못한다.
그러니 단기적으로 멜서스 트랩에서 벗어나 생활 수준이 높아지고 각지로 식량을 수출하지 않나?
거기에 더해 기근에 대응하는 방식은 결국 여러 가지다.
시장 경제와 교통 인프라의 발전이 미비하던 조선에서는 한 지역에서 기근이 났을 때 타지에서 구휼미를 제때 옮겨다 해소하는 방식을 채택할 수 없었다.
고로 그들은 전국 각지에 상시 막대한 미곡을 저장하는 길을 택했다. 솔직히 자본주의 세상에 살던 내가 볼 때는 거대한 부를 쓰지도 않고 묶어놓는 미친 짓 같지만 아무튼 사회 안정에는 기여했다.
다른 곳에서는 전반적으로 유통 경제를 활성화하고 수운로와 가도를 관리하면서 각지의 기근을 관리했다. 한 곳에 기근이 들면 식량 자원이 빠르게 그곳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그 밖에도 식량 수급용 식민지를 만들어놓고 삥 뜯는다든가, 아니면 그냥 과잉 인구를 바깥으로 치워버린다든가, 방법은 많다.
물론 내가 조선식 환곡 제도를 운용하거나, 아이깁토스를 침공해 빵공장용 식민지로 만들거나, 어디 브리튼 섬 같은 곳으로 빈민들을 유배시키지는 못하겠지만··· 꼭 답이 한 가지인 것만은 아니니···
“···어?”
“응? 왜 그래?”
내가 몸을 멈추자 함께 흐느적거리던 이노 역시 뚝, 움직임을 끊는다. 나는 한동안 이노와 기묘한 자세로 마주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생각났어. 해결책.”
***
-깡! 깡! 깡!
“더 힘을 쏟아 내리쳐라. 청동과 다르게 강철은 쉬이 깨지지 않는다.
아니, 사람의 팔심으로 깨질 강철은 우리 안탄드로스에서 만들지 않는다.”
그 말과 함께 스클레오스가 주위를 둘러보자··· 족히 수백 명의 대장장이들이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망치 소리와 쇳덩이 갈아내는 소리가 고막을 찢어내듯 하는 와중에도, 그들은 아마 이 세상에서 세 번째로 위대한 대장장이일 안탄드로스의 스클레오스를 주시했다.
그리고, ‘세상에서 세 번째로 위대한’ 따위 운운하는 낯간지러운 수식어는 당연하지만 스클레오스 자신이 붙인 게 아니었다.
지금 스클레오스의 눈앞에 모인 저들이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는 이야기였다. 저들이 안탄드로스의 영향권 바깥에 있는 거의 모든 도시에서 데려온 대장장이임을 생각한다면···
세상의 모든 대장장이들이 스클레오스를 그렇게 거창한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이다.
그 사실에서 다시금 스클레오스는 고개를 빳빳이 세우게 된다. 할 수 있는 한 기품 있는 몸가짐으로 저들을 대하려 노력했다.
“쇠는 가장 뜨거울 때 두드려야 한다. 두드리면서 형태를 잡아야 한다.”
그러자 수백의 사람들이 그의 목소리를 귀에 담으며 망치에 힘을 싣기 시작한다. 휘어진 쟁기날을 곧게 펴고, 마찬가지로 곧게 펴진 쇠봉을 천천히 휘어놓는다.
망가진 농기구를 이리저리 살피며, 그들은 쇠를 만지고 다루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쇠를 만드는 법을 알지는 못한다. 그저 망가지고 깨지고 휘어진 것들을, 고치고 때우고 곧게 펴는 법을 배울 뿐이다.
그것이 저들이 각 도시에서 안탄드로스로 찾아올 수 있던 이유다.
대장장이는 도시의 가장 귀중한 기술자고 자원이다. 그들이 전사들의 무구와 신관을 위한 제기를 만드니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나.
그렇게 각지에서 꽁꽁 싸쥐고 있던 대장장이들에게, 쇠를 다루는 법을 가르쳐주리라 도시의 정부들을 설득해 데려왔다.
대장장이 자신들도 안탄드로스의 강철을 다루는 법을 알기 위해 부리나케 찾아왔다. 평생 동안 금속을 다루며 살아온 이들인 만큼 배우는 속도는 빨랐다.
이제 저들이 각자의 고향에 돌아가 간단한 설비를 세우고 밀려드는 철물들을 다루는 데까지 몇 달 걸리지 않으리라.
그리고 가까이에서 철물을 수리할 수 있게 된다면 안탄드로스에서 철제 농기구를 들이지 않던 이들 역시 기꺼이 새로운 기술을 도입할 테고.
스클레오스는 파리스가 했던 이야기들을 곱씹으며 턱수염을 쓰다듬는다.
···한참 밤을 새워 충혈되어 있던 그 눈, 긴장한 목소리.
분명 뭔가 생각이 있으니 이런 과감한 일을 벌이는 것일 테다. 그것도 이리 급하게.
아무 이유도 없이 며칠 동안 칩거할 그런 아이가 아니다. 9살 꼬맹이 시절부터 봐온 아겔라오스의 아들 파리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기근이라니? 갑자기?”
스클레오스는 천천히, 파리스가 지금 가슴속에 어떤 위기감을 품고 있을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가 머릿속에 어떤 해결책을 그리고 있을지도.
-깡! 깡! 깡! 깡!
망치 두드리는 소리들이 시끄러웠다.
***
“이대로 놓으시오!”
-끼릭. 끼리릭.
“됐다!”
“움직인다!!”
전쟁 동안 안탄드로스에는 온갖 지역의 피난민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안탄드로스에서는 끊임없이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였다.
그 덕에 안탄드로스 인근에는 토목공사에 익숙해진 인력들이 천 단위로 쏟아지게 되었다.
“이제, 일전에 말해주었던 바와 같이 목수 한 사람이 풍차지기를 맡게 하시오! 그이로 하여금 풍차를 점검케 하고 또 바람의 방향을 쫓아 날개를 움직이게 하시오!”
그 덕에 지금 내가 하천이 닿지 않는 이곳에 풍차를 세울 수 있게 된 것이고.
데메테르에게 물레방아를 지어 바쳤지만 그것이 널리 퍼지지는 않았다. 해봐야 안탄드로스 인근의 여러 개천에 작은 규모로 자기들끼리 방앗간을 지어 밀과 보리를 빻았을 뿐.
하지만 이제 농민들의 노동력을 절약하고, 거기에 들어갈 노력을 조금이라도 더 넓은 경지를 일구는 데 쓰기 위해서라도 그런 ‘기계화’가 널리 퍼져야 했다.
웬만하면 이미 만들어본 바가 있는 수차가 세우기 쉽고 쓰기도 편하다. 수차는 일단 수로와 이어놓으면 온난한 이 일대의 기후 특성상 흐르는 물이 쉽게 얼거나 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풍차는 다르다. 왜냐?
이 에게 해 근처는 온갖 섬과 산과 계곡으로 들어차 있다. 즉, 바람의 방향이 더럽게 복잡해진다는 말이다.
일정한 방향으로 바람이 불어주지 않는다면 결국 아이들이 바람개비 돌릴 때 바람을 쫓아 이리저리 고개를 꺾듯 풍차도 방향을 돌려줘야 한다.
거기서 다시 구조적 복잡성은 커지고, 풍차는 높을수록 좋으니까 들어가는 자원도 많아지고···
“파, 파리스 님께서 이리 직접 저희 농장을 돌보아주시니 영광입니다. 한데 이리 많은 이들의 공력이 들어갔으니 그 값이 만만치 않을···”
“이 풍차를 건설하는 비용은 천천히 갚아도 좋소. 천천히.”
“···감사합니다.”
하지만 내게는 지금 그런 효율을 신경쓸 재간이 없다.
“나는 그대가 이 농지에서 이룰 풍성한 수확으로 갚아주면 그것으로 족하오.”
“그, 파리스 님···”
“‘풍성한 수확’ 말이오.”
“···알겠습니다.”
물론 이 일대의 농장주들에게도 그럴 재간은 없다.
나는 트로이아와 미시아 근방의 온갖 도시를 오가며 지주들을 설득했다.
풍차와 수차를 세우고, 철제 농기구를 도입하며, 녹비를 만들어 뿌리면서, 관개수로를 만들면 몇 배의 수확이 되돌아오리라고.
내가 안탄드로스에서 이룬 기적에 가까운 성과가 있다 보니 많은 이들이 설득되었지만, 그래도 반수 정도는 여전히 미심쩍은 태도를 보였다.
상관 없었다.
“그대가 싫다고 하기에, 지금 당장 지불할 건설대금이 없다기에 내 이리 많은 편의를 보아주며 풍차를 세워주었소. 곧 철제 쟁기와 농우(農牛)들도 이곳에 오겠지.”
“···.”
“그러니 ‘천천히’ 갚으시오.”
그럼 설득을 안 하면 되는 것 아니겠나? 진보의 물결은 때로 원치 않아도 받아들여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나로서도 상당히 피를 보면서 제공해주는 계약이다.
당장 저 풍차와 수로와 온갖 시설들을 짓는 데 들어간 노임만 해도 상당하고, 철제 농기구의 값어치야 말할 필요도 없다. 이곳의 농민들에게 신농법을 가르치는 것도 수고롭다.
상대방에게 그만큼 막대한 채무를 씌우는 게 아니냐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채무는 내 덕분에 나올 잉여생산물로 갚으면 그만 아닌가?
그를 위해 내가 이 농장의 경영에 친히 도움을 줄 테고, 나온 농산물도 내가 직접 배를 끌고 와서 바깥으로 실어날라 수출할 테다.
그리고 이렇게 강제로 일을 진행하게 만든 이들은 전체의 반··· 아니 3할, 아니 2할 정도다. 나머지는 다들 좋아서 했다는 말이다!
···어.
상대에게 막대한 빚을 씌우며 설비를 건설하고, 그를 빌미로 지배권을 빼앗아가면서, 개발의 성과로 나온 산물을 다시 빚을 빌미로 거둬가고···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아니지.
걔네는 나쁜 제국주의자들이고, 나는 모두를 구하려는 선량한 영웅이니까.
완전히 다르다.
암, 그럼. 그럼.
“저··· 주군?”
“왜 그러지, 아노이토스?”
“이것이 오이노네 님과의 이야기에서 나왔다는 대책의 전부인지 궁금합니다. 단순한 기근에 대비하는 방안으로 나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주군께서 그리 걱정하신 것에 비하자면···”
“모자라 보이나?”
“예.”
그야 그렇지.
일단 이렇게 하나하나 설비를 짓고 농법을 퍼뜨리는 데 들어갈 수고와 시간이 장난 아닐 테니.
안 그래도 좀 더 먼 도시의 지주들에게는 이보다 간접적인 방식을 쓰고 있다. 내가 곡식을 비싸게 사들여 준다고 설득해서 이득을 통해 꼬여내는 방식으로.
그만큼 더 오래 걸리고 효과도 확실치 않다.
그래서.
“당연히 이게 방안은 아니지?”
“···예?”
나는 결론을 내렸다.
기근에 대응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뭐냐?
가능한 한 넓고 기름진 평야를 확보하고, 가능한 한 많은 인구를 거기에 안정적으로 정착시켜 놓는 것이다.
그를 위해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왕과 귀족과 공화정부는 농민들이 이동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통제했다.
하지만 땅이 부족하다면?
***
“혀, 형! 제기랄, 크, 큰일···큰일이···”
“또 무슨 일로 불러? 안 그래도 지금 안탄드로스에서 트리에레스로 앞바다를 견제해서 정신이 없···”
“텔레포스랑 파리스가 강철 갑옷을 두르고서 달려온다!!!!”
“···.”
“철쇄대까지 끌고서!!!!”
그 땅에서 지랄하고 있는 놈들을 족치면 된다.
파리스가 내린 결론에 하투샤의 동맹이었던 라리사의 두 형제는 몸을 떨었다.
Timeo Troianos et dona ferentes (1)
“기병대!!”
-다각! 다그닥! 다가가각!
수십, 수백의 사람이 자신을 향해 돌진해오는 광경은··· 두렵다 못해 위압적이기까지 하다.
좀비물을 본 적이 있다면 이해하리라. 그것도 반쯤 썩은 시체들이 느릿느릿 기어다니는 정통의 좀비물이 아니라 무슨 괴력과 함께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이단적인 창작물들 말이다.
그 자신을 향한 무수한 적의 어린 시선들이 주는 공포.
그리고 그런 감정적인 요인을 고려하기 이전에 느껴지는 순수한 질량감과 공간감.
저 수백 명의 돌진 아래 깔려버리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짓뭉개지리라는 실감.
“전원 가속하라!”
수십 마리의 말이 일제히 진격하는 모습이 주는 압도감을 설명하려면, 그 정도 묘사가 적당하리라.
그것도 청동 갑옷조차 제대로 구하기 어려운 시대에 철갑으로 중무장한 말과 사람이 창을 휘두르며 달려온다면···
“흐, 흐, 흩어져라! 흩어져!!”
“무기를 버리고 두 손을 들면 죽이지 않는다!! 무기를 버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