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393
그 혼란스러운 전장을 뚫고 돌아와서 내린 결론은 그랬다. 안탄드로스로 돌아온 뒤 한동안은 전장에 있던 때보다 피곤했는데, 그게 다 이렇게 사람들한테 말해줄 모험 얘기를 지어내느라 그랬던 것 같다.
“아빠! 아빠? 중원 얘기 조금만 더해주세요! 화산파 장문인과 남궁세가 장문인의 생사결은 어떻게 됐어요? 몇 년 동안 동굴 안에서 벽력탄만 먹고 수련한 무당파 장로는 얼마나 세졌···”
“멍멍이는 어서 낮잠 자러 가자.
그리고 남궁‘세가’에는 장문인 같은 거 없어. 장로겠지. 그리고 폐관수련하면서 먹는 건 벽곡단이야. 사람이 벽력탄을 먹으면 터져 죽어.”
“그, 그럴 수가···! 벽력탄을 먹고 입에서 불꽃을 뿜는 게 아니었어···!”
“멍멍아, 내가 말도 안 된다 했잖아.”
“오빠가 언제!!”
“헤헤, 엄마가 맞았지! 파리스! 내가 벽곡단이 맞다고 하는데 멍멍이가 계속 우겨서···!”
“···너도 애들 싸움에 끼어들면 어떡해.”
그렇게 싸우는 애들을 말린 다음 재우고 나자 슬슬 정오가 지나가고 있었다.
애들은 팔자 늘어지게 지중해의 뜨거운 햇살을 잠에 들었지만 어른은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을 때.
“파리스 님, 청원이 들어왔습니다! 새 뿌리 작물을 다른 농장주들이 나눠받고 싶다 하여···”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말하게. 디오니소스교도들과 실험하고 있으니 조금만 있으면 씨감자들이 많이 풀릴 테니.”
그리 생각하기가 무섭게 시종들이 내게 걸어와 일을 가져온다. 만약 다른 도시의 장로나 왕이었더라면 좀 느긋하게 있을 수도 있겠지만.
“왕이시여, 지금 서쪽에서 운하를 새로 파다가 부상자가 나와···”
“지금 라리사 쪽에서 본래 수출하려던 양 이상의 수확량이 나왔다 합니다. 이것까지 거둬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
“용골을 갖추어 배를 짓기로 한 다음부터 공정이 달라지니 이전 방식으로 지은 트리에레스를 보수하는 데 어려움이 생겼다 합니다. 이를 어찌 해결해야 할지···”
“당장 벽돌을 구하는 도시가 많습니다. 장로들이 말하기를 벽돌 공장이 서너 곳은 더 필요할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와···”
나는 작은 마을 하나를 관리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이 시대에, 아니 2,000년 뒤 중세에 가도 몇 없을 인구 만 단위의 도시가 내 지배하에 있다.
게다가 나 혼자만의 착상으로 벌려놓은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보니 시행착오는 장난 아니게 많이 일어나는데 참고할 선례는 없다.
결국 전부 내가 죄다 몸으로 부딪혀가면서 해결해야 하는데··· 젠장, 전쟁만 없었어도 강철이랑 가도 같은 귀찮은 거 안 만들었다.
아무튼.
“주군! 이번 상행에서도 황금을 갈퀴로 긁어모아왔다 합니다!”
“···드디어! 일단 가도를 정비하는 일꾼들에게 급료를 주고 오겠습니다!”
그래도 들어오는 게 있으니까.
나는 환호하며 들어온 시종에게서 목판을 받아들며 목록을 죽 훑었다. 근래에 어느 품목이 얼마나 주변 도시에 오가는지 대강 적어두라고 한 결과물이었다.
-탁. 탁.
“벽돌이 많이 나가는군?”
“그야, 전쟁 동안 무너진 도시들이 한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몇 년이 지나도 되돌아오기까지는 꽤 걸리겠지요.”
“···.”
그 중 반절은 나랑 이노가 부쉈는데.
솔직히 따져보면 아카이아인들보다 내가 더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을지 모른다.
···모른다?
사실 잘 안다.
명백하게 걔네보다 내가 더 많이 부쉈지.
아카이아인들이 아무리 악랄해도, 해봐야 미소년을 희롱하며 가축을 잡아먹는 수준에서 끝나지.
“지난 전쟁에서 입은 피해가 특히 커서 다른 때보다 재건이 오래 걸리는 탓도 있습니다.”
“···그렇군.”
나는 짐짓 태연한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주군!! 트로이아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프리아모스 왕께서 재건 작업에 파리스 님의 조력을 요청하셨습니다!”
“내, 내가 안 부쉈···”
“예?”
“···아무것도 아닐세, 아노이토스.”
저런 명령이 왔을 때는 나도 모르게 괜히 제 발 저렸다.
아, 진짜.
내 잘못 아니라고.
***
“···제 잘못입니다.”
“하하, 지나간 일로 스스로를 탓하지 말거라. 누구도 널 원망할 수 없을 테니. 우리 모두가 동의한 일이고, 우리 모두가 네게 은혜를 입었다.
네가 그들 모두의 목숨을 구하지 않았느냐? 집 잃은 이들을 조금이라도 더 먹이려 저 델로스의 공주들을 설득한 것도 네가 아니더냐?”
나는 프리아모스의 심심한 위로를 들으며 감사의 뜻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깨달은 사실인데···
‘···완전 내 잘못이 아니라고는 말 못 하네.’
그야 그때도 다들 미친 짓이라고는 했으니까.
심지어 뭔가를 찢고 죽이고 불태우는 데 지대한 관심을 지녔을 것 같던 펜테실레이아마저 우리의 말에 흠칫 놀랐었다.
그게 최선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지만, 사실 우리가 집이 불타게 된 사람들한테 일일이 허락 맡고 다닌 것도 아니니까.
“결국에는 모두 아카이아인들과 저 하투샤의 대왕의 탓이다. 그 중 아카이아인들은 결국 굴복하여 우리와 함께 하투샤에 맞섰고, 대왕은 이미 죽어 사자(死者)들의 왕국에 갔지 않았느냐?
이제 그 문제로 책임질 이는 없다. 내가 너를 부른 것은 그저 이 일에 네가 가장 능하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다이달로스가 뛰어났다 하더라도 너만 못하다. 그는 결국 궁전 하나를 지었을 뿐이지 너처럼 먼지구덩이에서 도시 몇 개를 우뚝 일으키지는 못했다. 이 세상에서 너 하나만이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구나.”
개인용 비행 장치와 세계 최초의 퍼슈트를 제작한 천재와 비교되니 머쓱했지만 대강의 요점은 알아들었다. 나는 주위를 돌아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프리아모스와 나를 둘러싸고 선 것은 트로아스 반도 곳곳에 자리한 도시의 왕과 장로들.
그러니까··· 청야전술의 당사자들이다.
그것만으로도, 프리아모스가 꺼낸 말의 속뜻을 알 수 있다.
-누구도 널 원망할 수 없을 테니.
→원망하지 마라.
-결국에는 모두 아카이아인들과 저 하투샤의 대왕의 탓이다.
→책임질 사람들 다 죽었다.
-다이달로스가 뛰어났다 하더라도 너만 못하다.
→그렇게 뛰어난 적임자를 너희한테 붙여주겠다.
방금 프리아모스가 내게 꺼낸 말들은, 내가 아니라 전부 이곳에 모인 이들에게 하는 말이다.
어쩐지.
이 시대의 도시란 아무리 커봐야 21세기의 현대인들에게는 마을 수준이다.
트로아스 반도 면적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서울에 1,000만 명이 살고 그보다 좀 작은 면적의 대전에 150만 명이 산다. 그 대전조차 재미 없고 조용한 도시라며 조롱하는 이들이 많고.
우리는 그런 걸 도시라 부른다.
하지만 여기서는 트로이아와 안탄드로스 정도가 만 단위 인구를 넘기고, 나머지는 꽤 크다 해도 3,000명 정도가 살 뿐이다. 웬만하면 500명 정도만 모여 있어도 도시라 불린다.
500명짜리 ‘도시’.
그런 곳들을 위해 ‘재건 사업’씩이나 벌일 이유가 있나?
그저 자금을 안겨주고 위로를 건네면 그만이다. 알아서들 허름한 공용 창고와 허술한 목책 따위를 건설하고서 다시 살던 대로 살아갈 테니.
하지만 프리아모스는 굳이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내게 재건의 책무를 맡겼다.
나를 비호하고, 나에 대한 여론을 굳히기 위한 장치다.
지금 영웅 취급 받더라도 언제든 정치적 논리에 따라 여론은 흔들릴 수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아버지.”
그래서 나는 진심으로 프리아모스에게 감사를 표했다. 내 대답을 들은 프리아모스가 인자하게 웃으며 주위를 둘러본다.
“다들 어떻소?”
어떻겠는가.
당연하지만, 싫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
-덜. 덜. 덜. 터컥. 덜. 덜. 덜···.
“쉰둘, 쉰셋, 쉰넷, 쉰다섯···”
“이백스물넷, 이백스물다섯, 이백스물여섯, 이백스물일곱··· 아, 까먹었다.”
여러 남자들이, 쌍팔년도 애들처럼 굴렁쇠 비슷한 걸 굴리며 저마다 열심히 숫자를 세고 있다. 정확히는 바퀴가 굴러가는 횟수를 세는 거다.
구경군들이 몰려들어 웬 외지인들이 와서 수선을 떤다며 수근댄다. 그럼에도 이 바보 같은 짓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주군! 둘레 측정이 끝났습니다!”
측량.
인부들이 예전에 목책이 서 있던 터 위를 돌아다니며, 옛 마을의 규모를 가늠하는 중이다.
“흐으으음··· 얼마나 되나?”
“대강 여섯 하고도 반 스타디아(σταδία, 고대 그리스의 길이 단위 스타디온의 복수형)쯤 됩니다!”
“이쪽은 그것보다 두 함마타(ἅμματᾰ, 고대 그리스의 길이 단위 함마의 복수형) 정도 덜 나왔습니다!”
“여기서는 여섯 스타디아에 일곱 함마타입니다!”
1스타디온이 대강 185미터쯤 된다. 1함마가 그 10분지 1인 18.5미터고.
6.5스타디아, 6.3스타디아, 6.7스타디아. 마침 계산하기 좋게 평균치가 6.5스타디아로 나왔군.
그럼 185 곱하기 6.5는··· 대강 1202.5미터.
···아파트 단지 하나 둘레네? 대강 머릿속으로 가늠해보니 면적도 아파트 단지 한두 개 정도다.
나는 머리를 비우고 이 ‘도시’를 지켜보았다.
팀브라(Θύμβρα).
인구는··· 약 1,400명.
한국의 평범한 아파트 단지 두 개 정도를 합친 면적에, 아파트 단지 하나만큼의 인구가 산다.
앞서 말했듯이 인구 1,000명을 넘기는 도시는 꽤 큰 축에 속한다.
안탄드로스가 그 근교의 인구까지 모두 합해 3,000명이 살았던 것을 생각하면 내 고향 역시 나름··· 원래 번영하던···.
동탄신도시 나루마을 한x꿈에그린?
아니면 일산신도시 강촌마을 선x코x롱 7단지?
번···영···하는···.
···.
“안탄드로스의 왕이시여,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저희 팀브라 역시 트로이아나 안탄드로스에 못지 않게 유서 깊은 도시로서 트로스 왕께서도 찾아오신 바가 있다 합니다.”
“···전쟁으로 불타기 전만 하더라도 몹시 아름다웠을 것 같군. 디오도로스의 아들 아민타스, 그대가 이 도시의 ‘왕’인가?”
그대가 광교 센트럴타운 푸x지오 월드마크 입주자대표회의의 회장인가?
“그러합니다. 저희 조부께서 헤라클레스의 침공 당시 혼란에 빠진 시민들을 규합하신 뒤로 제 아버지, 제 형님에 이어 저에게로 우리 왕조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흠, 4대째 입주자대표회의에서 회장직을 세습하다니. 그래도 되는 건가?
“하, 하하, 몰랐는데 꽤나 뼈대 있는 왕조였군.”
“이전부터도 저희 가족이 씨족과 부족을 이끌어왔으니 말입니다. 제 입으로 드리기 부끄러운 말씀이지만 그 피를 타고 지배자의 위엄을 물려받은 것이겠지요.”
하기사, 유서 깊은 동대표 가문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내가 애써 진지함을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팀브라의 왕 아민타스는 내게 인정받았다 여겼는지 기뻐하며 말한다.
“프리아모스의 위대한 아들이시여. 전쟁에서 폐허가 되었을지라도 이 도시를 이루는 여러 씨족의 장로들은 옛날의 영광을 되찾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때는 달마다 장이 열렸습니다. 숱한 상인들이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며 들락거렸지요.”
그렇군. 이만한 단지에서 아나바다 행사가 활발히 진행되기 쉽지 않은데. 타코야끼나 호두과자 파는 상인들도 감탄할 만하다.
그나저나 옛날의 영광이라니.
영통구 이의동 주민 체육대회 우승 같은 걸 이어가던 시절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분수대에서 미꾸라지 잡기 행사 같은 걸 열었더니 다른 단지에서도 젊은 엄마들이 애들 데리고 놀러오던 시절?
아니면···
···젠장.
나는 최대한 머리에서 21세기 물을 빼고 생각하려 노력하며 저 들판을 내다보았다. 최대한 이 도시의 왕에게 친절하게 웃어보이려 노력했다.
이제 내가 이 ‘도시’를 재건해야 하니까.
우리 단지에 어서 오세요. (2)
···1,500명, 1,500명. 아파트 단지 하나를 좀 못 채울 인구가 하나의 도시를 이룬다.
대강 1,500명 중 상당수는 농민이다.
개중 쉰 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귀족이라 할 만한 위세를 누리고 살며 장인들이 조금 있다.
근방의 이곳저곳에 농민과 양치기들이 흩어져 사는데 걔네는 시민이 아니라 1,500명 안에 포함은 안 된다.
대강 트로이아에 도자기나 양털 따위를 세폐로 바치는 게 전부고, 상인들도 많이 오가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이 도시 팀브라에 대한 대강의 정보였다.
흠, 전형적이군.
조금 규모가 ‘크다’는 것을 빼면 이런 도시가 트로이아 전역에 얼마나 많이 흩어져 있을지도 짐작이 되었다.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일단 어떻게 목책부터···”
“당장 목책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군. 아카이아인들을 격퇴했고, 하투샤가 몰락했는데 이 도시까지 쳐들어올 외적이 많겠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만약 다시 침공이 일어나더라도 이 작은 도시에서 허술한 목책 하나를 끼고 농성하는 게 그닥 유효할 것 같지 않다.
“허면 신전은 어떻게···”
“신전? 어떤 신전이 있었나?”
“저쪽에 아폴론 님과 키벨레 님을 모시는 신전이 있었습니다만.”
그 무너진 터를 둘러보니 그냥 돌 오두막이다.
좀 튼튼하고, 비 안 새고, 외풍이 잘 안 들어올 것 같은··· 약간 시골 사당 같은 데 들어가보면 비슷한 느낌인데.
“후우우우···.”
“왜 그러십니까?”
“아니, 신전 터를 오랜만에 보니 기도라도 드리려 하네. 잠시 비켜주겠나?”
“그러시지요.”
팀브라의 왕이 물러나자 나는 한숨을 쉬며 쪼그려 앉았다. 막막하네.
오랫동안 트로이아와 안탄드로스만 돌아다니다 보니 현실 감각이 사라졌었나 보다.
그 외에 다닌 도시라 해봐야 아카이아의 아르고스, 크레타의 크노소스, 나머지는 하투샤 쪽 대도시들뿐.
나는 수만 명이 살아가는 도시에 살고, 한 나라나 지역의 중심을 지키는 도시들만 돌아다녔다. 그런 곳에서는 그나마 내가 아는 느낌의 ‘도시’와 비슷한 느낌이 났다.
도시의 구성원들은 서로를 직접 알지 못하고, 그 안에서 북적북적 부대끼고 스쳐지나가며 생활할 뿐인 그런 도시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소란벅적한, 그런.
하지만 이곳은 다르다. 아파트 단지에 비유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면이 있다.
도시의 구성원 중 다수가 혈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앞집 사는 사람과도 대화를 잘 나누지 않는 아파트 주민들과 달리 이들은 서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의 가족을 생각하면 편하리라.
늘 보던 대장장이가 주물을 만지고, 도공이 흙을 주무르는데 그 사이에 웬 이방인이 나타난다면 마치 거실에 들어온 낯선 사람을 보듯 당황스러울 테니.
그렇기에.
나는 머릿속에서 ‘도시’라는 단어를 지웠다.
이만한 ‘도시’를 재건하는데 대규모 상하수도 시설이나 원형경기장, 거대 사원 따위가 필요할 리 없다.
애당초 1,000여 명이 살아가는 곳에서 생활이 성대하면 또 얼마나 성대했겠나?
이미 집이 없어 떠도는 이들은 없고 다들 적당히 간단한 오두막을 지어 살아가는 데 만족하고 있다. 전에 살던 저택이 무너진 귀족들은 아쉬워하고 있다만, 그뿐이다.
여기서 내가 재건할 부분이라 해봐야 신전과 공용 창고, 성벽 정도뿐이겠지. 서비스를 더해주자면 몇몇 귀족들에게 새 저택을 지어주는 수준이겠고.
물론 그것만 해도 큰일이다.
신전은 도시에서 일어나는 공동생활의 중심이니까.
심지어 신이 실존하는 세계다.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축복을 구하는 행위는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부다.
공용 창고는? 아까 말했듯 이 도시는 한 가족이다. 즉, 온갖 공과금과 세금 역시 묶여서 같이 낸다.
양털과 도자기와 목재를 한 데 모아다 트로이아로 실어보내야 하고, 기근이 오면 여러 씨족과 부족이 함께 양식을 나눠 먹는다. 그 식량과 자원이 모두 공용 창고에 모인다.
성벽이 있다는 건 이 도시가 외침에 독자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의미다. 튼튼한 성곽은 이 도시의 정치적 독립성을 의미한다.
“안탄드로스의 왕이시여, 기도는 끝났습니까?”
“···아. 그렇네.”
팀브라의 왕이 부르자 나는 천천히 신전(이었던 곳)에서 걸어나온다. 주위를 둘러보니 돌과 흙을 이어 지은 오두막들이 즐비하다.
“그래서 어디부터 지을 생각이십니까?”
이 도시의 왕은 내게 생각보다 호의적이었다. 도시의 우물을 메워버리고 자기 집을 불태운 사람을 맞이하는 것 치고는 상당히 친절했다.
흠···.
“저기, 보이나?”
“예. 농민들의 집이군요. 제 씨족 사람들이 저 부근에 모여 삽니다.”
“저기부터 저기까지 말일세.”
“저곳에 시민들의 반 정도가 모여삽니다.”
“다 버리지.”
“···예?”
“새 도시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군. 새로 짓지.”
하지만 이 얘기까지 나왔을 때는, 그의 친절함이 살짝 흔들렸던 것 같다.
···자기 집이 두 번째로 불탈 것 같아서 그런가.
***
목민심서였나, 아니면 북학의였나에 그런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다.
초가집이 기와집보다 당장은 값이 싸지만 기와집의 튼튼함과 내구성을 생각하면 기와를 한번 올리는 게 초가집을 매번 수리하는 데 드는 수고보다 저렴할 거라고.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농민들은 보통 시간이 넘쳐나고, 풀떼기도 주위에 넘쳐난다. 넘쳐나는 잉여 시간과 공짜 재료보다 어떻게 기와집이 더 저렴하겠나.
“안탄드로스에서 나오는 벽돌로 한 번 집을 지어놓으면 수년이 가도 무너지지 않소. 겨울에는 찬바람이 들지 않을 테고 언제든 안락할 테니 한 번만 제대로 집을 지어놓으면 오히려 이득이오!”
그러니까 나도 이게 개소리인 걸 안다는 말이다. 나 스스로 알기에 모든 이들이 뭔 소리냐는 듯한 눈으로 봐도 멘탈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 안탄드로스에서 여러 부재들을 갖춰오고 있소. 그것들을 이용해 집과 신전과 창고를 지을 것이오.”
물론 싫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애당초 이 시대에 따로 어딘가에서 재료를 구해야 하는 집을 짓는 것 자체가 대단한 사치다.
안탄드로스에서 만든 벽돌이 여기저기로 팔려 나간다지만 대부분은 궁전이나 저택, 신전을 짓는 데 쓰이니까.
“와, 왕이시여, 조금 과도하지 않겠습니까? 저희 도시가 그런 부재 값을 감당할 만치 부유하지는 않습니다만···”
“걱정 말게. 이 팀브라를 무너뜨리자 한 것이 내가 아닌가? 새로 지어지는 도시에 나의 성의가 들어갔으면 하네.”
“···파리스 님!”
웬 난민 캠프에 천연 대리석 외장을 씌우겠다는 미친놈처럼 보일지 몰라도 일단 시민들의 반응은 좋았다. 인부들이 일하는 걸 지켜만 보던 시민들도 하나둘씩 자발적으로 거들고 나선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 덕에 근방에 철로도 깔고 데메테르와 아폴론 목상에 새로 금칠도 했다.
“이게 뭐요? 이상하게 사각거리는데.”
“땅에 묻어놓고 적당히 놔두기만 해도 자라나는 작물이오. 감자(Kartofel)라 하지. 저기서 씨감자를 나눠주고 있으니 다들 받아가서 남는 시간에 길러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