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395
“그래야지. 필로스의 네스토르 왕에게 세금으로 바칠 몫은 모두 모았으니.”
“음? 그게 무슨 말이오? 이리 많은 양곡이 남아도는데 그걸 쌓아두기만 할 셈이오?”
“···그럼, 쌓아두지 않으면 어쩔 생각이오?”
“그야 당연히···”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한 어느 족장의 말에 나머지 장로들이 모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그러자 당황한 듯한 족장이 헛기침을 키더니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지금 하투샤 땅에서 밀과 보리가 황금만큼 비싸다는데, 설마 그냥 묵혀둘 셈은 아니겠지.”
“그냥 묵혀두지 않는다면 어쩌려고 하십니까?”
“옳소. 파리스 왕이 올해 이곳에 카라보스(κάραβος, 카라벨)를 몰고 올 일은 없으리라 밝혀두지 않았소?”
“···.”
밀려오는 말에 족장은 부루퉁한 눈으로 잠시 모두를 둘러보며 침묵했고.
“···.”
“···.”
“···.”
다른 모든 장로들도 그 족장을 침묵과 함께 바라보다가 급히 자리를 떴다.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는 듯이.
순식간에 회의장에 홀로 남은 족장은 혀를 끌끌 차더니 궁시렁댄다. 이런 겁쟁이들, 이런 것들이 옛 페리에레스의 고결한 백성들인가. 그들의 창끝은 녹슬고 투지는 꺾였다.
그러나 바다는 언제나 용맹한 이를 위하여 열려 있는 법.
족장은 당장 자기 씨족원들을 끌어모았다. 그들 모두가 족장과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배를 모았고, 뱃사람을 모았고, 어느 야심한 밤을 틈타 공용 창고 바깥에 쌓여 있던 밀알 포대들을 쓸어모아 실어날랐다.
그렇게 그들은 누구도 모르게 이오니아 해를 향해 떠났다. 이것으로 일은 끝났다.
족장은 물론 알았다. 갑자기 비어버린 밀알, 훌쩍 자리를 비운 자신, 그리고 자신과 함께 사라진 이 씨족원들. 이 정황만 보고서도 도시의 모두가 자신과 자신의 씨족이 저지른 일에 대해 알게 되리라.
상관 없다. 나중에 막대한 수익을 족장들에게 뿌려주면 그들은 공범으로 몰릴까 두려워 입을 떼지도 못할 테니까.
“족장! 이제 어디로 향할 겁니까? 아무래도 아시아 땅으로 가려면 키클라데스 군도 쪽을 거쳐 가는 게 아무래도 가장 빠를 텐데요!!”
“아니! 아시아 서쪽은 죄다 트로이아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으니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우리는 시칠리아를 거쳐 북아프리카로 간다!!”
들려오는 정보로만 따져보아도 옛 하투샤의 영향권 일대로 가든, 북아프리카의 여러 페니키아인 정착지들로 가든 떼돈을 만질 수 있었다.
아카이아 밖을 벗어나면 어디든 기근이다.
저 풍요로운 아이깁토스 땅 정도가 그나마 예외라고는 하지만, 그들도 차즘 안정되어가던 정세가 다시 흔들리는 걸 볼 때 무사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고로 아카이아 근방을 벗어나기만 하면 문제 없다. 어디서든, 그들은 황금을 손에 쥘 수 있다.
이 넓은 바다에서 그 누가 그들을 잡을 수 있겠나?
“요새는 페니키아인들도 뱃가죽을 두드리면 텅 빈 것처럼 북소리가 난단다! 그놈들 입에 밀을 쳐넣어주고 오지!”
“그··· 만약 저항할 힘도 없어 보이면 어떻게 합니까?”
신참의 말에 족장은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바다에 잔뼈가 굵은 나머지 선원들도 배가 흔들릴 만치 웃어댔다.
“그럼 어쩌냐고? 그냥 다 쓸어버린다!! 그 옛날의 헤라클레스과 이아손처럼!!”
“우와아아아아!!!!”
“우리가 이긴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이제 이오니아 해, 에게 해, 아드리아 해 어디에든 트로이아의 순한 양떼가 된 겁쟁이만 남았을 뿐이다. 몇 안 되게 용감하고 영웅적인 아카이아의 해상 전통을 물려받은 그들을 막을 이들은 없···
-쿵.
···쿵?
이상하다.
선원들을 향해 함성을 쏘아내던 족장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 근방에 암초 따위는 없다. 그야 그가 수십 년 동안 들락거리고, 그의 선조들이 수백 년 동안 드나들던 바다이니 확실히 알고 있다.
또한 암초 따위에 살짝 부딪혔을 뿐이라면 그와 함께 환호하던 선원들의 목소리가 갑자기 멎어버릴 이유도 없다.
소리가 들려온 지 단 몇 초 안에 그는 지금 자신이 무슨 상황에 처해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족장은 망설이지 않고 당장 뒤돌아 칼을 뽑아 올렸다. 상대가 누구인지, 그 의도는 무엇인지 확인하지 않았다. 이 바다에서 다른 배에 부딪혀오는 이가 있다면 그의 의도는 말하지 않아도 명확하다.
“해적 새끼가···!”
-서걱.
물론 족장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자신의 손목이 잘려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족장의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놀라 입을 뻥긋거리는 동안, 그의 손목을 베어낸 남자는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족장의 배에 올라 갑판 아래를 들여다보았다.
“사람의 얼굴도 확인하지 않고 베려 하다니 무례하군.”
“어··· 으, 어···.”
남자는 놀라서 입을 뻐끔거리는 족장을, 겁에 질려 몸이 굳은 선원을 보며 ‘정의(Δικαιοσύνη)’라는 글자가 수놓인 망토를 펄럭인다. 그가 다시 칼을 들어 휘두르자 갑판 아래 있던 자루에서 밀알이 쏟아져내렸다.
“이게 뭔가? 내 눈에는 곡식으로 보이네만.”
“그···”
“답할 필요 없네.”
“···.”
“···.”
“그리고 자네들은 페니키아인인가? 아니겠지. 누가 보아도 니코리아(Νιχώρια)의 백성들로 보이는데, 안타깝게도 그곳은 나의 영토일세. 그대들은 나의 신민이고.”
“···.”
“···.”
“마지막으로 곡식을 싣고 항해하는 이 배는.”
이번에는 칼을 휘두르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모두의 눈에는 남자가 손가락을 슬쩍 움직인 듯 보였는데···
-툭.
족장의 목이 떨어졌다.
“파리스의 카라보스가 아니군.”
니코리아는 메세니아 땅의 일부고, 메세니아는 필로스의 왕이 통치하는 왕국이다.
그리고 필로스의 왕은 넬레우스의 현명한 아들 네스토르다.
“트로이아의 허락을 받지 않고 곡물 무역을 시도하는 배는 모두 해적선이다.
그리고 해적은 모두 사형이다.”
그 두 마디면 모든 게 충분했다.
자신들의 족장을 잃고 겁에 질린 선원들은 모조리 달려들어 네스토르에게 창칼을 휘둘렀고.
네스토르는 다시 손가락을 슬쩍 까딱거렸다.
그러자 배 위에 두 발로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았다.
***
전등이 발명되기 전까지 인류 대부분의 노동시간은 낮 시간에 한정되어 있었다.
전기가 없는 시대의 조명기구란 대부분 귀중한 기름을 소모했고, 그 때문에 사람들의 하루는 현대인의 그것보다 빨리 시작해서 빨리 끝났다.
아니. 애당초 자본주의가 존재하기 이전의 절대 다수 사람들에게 굳이 밤을 새가며 노동할 동인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막아내야 할 카드빚도, 내야 할 공과금도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 절대 다수에 속하지 않았다.
며칠 밤낮을 새서라도 해결해야 할 일들이 있었고, 그것들은 나 아니면 다른 누가 처리하기도 애매했다.
그래서 나는 이 시대에 걸맞지 않게 다크 서클이 생기는 몇 안 되는 인간 중 하나였는데···
“흐아아아암··· 파리스, 좋은 아침.”
“···조, 좋은··· 아침.”
“어, 어어, 어어어어, 너 울어? 왜 울어? 안아줄까?”
“응, 빨리 안아줘. 나 울어.”
···상쾌한 아침이다.
실로 오랜만에 기분 좋게 맞이하는 아침이다. 새들이 울고 해가 저 고개를 넘어 솟아오르는데 내 정신이 맑게 유지되고 있다니.
아노이토스에게 소도시 재건에 대한 자잘한 업무를 짬처리··· 아니, 일임하고 나니 생활이 훨씬 여유로워졌다.
“파리스 님? 프리아모스 님께서 전갈을 보내셨습니다. 팀브라 이후로 도시들의 재건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데 대해 치하하신다고···”
“하하하, 고맙네.”
업무가 반으로 줄어드니 마음이 편안하다. 나는 이노와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고 멍멍이, 코리토스와 함께 숲으로 나가 사냥 연습을 하다가 디오니소스 신도들과 함께 씨감자를 농민들에게 나눠주고는 업무를 끝냈다.
아, 행복하다. 다가오는 재앙이고 위협이고 당장의 여유로움 속에서 그 모든 것에 대한 걱정이 녹아사라진다.
이런 나날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는데.
-똑. 똑.
“파리스 님, 네스토르 님께서 서신과 함께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
나는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는 시종의 말에 순간 몸을 떨었다.
네스토르의, 선물.
벌써 네 번째다.
이번에는 서신도 함께 왔다만 나는 그 내용이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어으··· 어··· 일단 알겠으니 그분께서 보내신 선물은 적당히 방에 가져다 놓···”
“필로스에서 온 이들이 직접 바치고자 한다 합니다.”
“···.”
그저 ‘선물’을 받고 싶지 않아 몸부림칠 뿐.
“선물!”
“아빠, 선물이면 뭐예요?”
“하하, 하···.”
나는 목 뒤 털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아이들을 데리고 알현실을 향해 나아갔다. 얘들도 이제 내 후계자고 자식들이니 이런 공식 행사에 데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알현실에서는 이노가 옥좌에 앉아 필로스에서 온 사절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사절들은 다시 한 번 인사를 올리고 내게 상자들을 내밀었다.
“크레타와 안탄드로스의 왕이시여, 우리의 왕이자 넬레우스의 아들인 네스토르께서 당신께 선물을 보내고자 우리를 이곳에 오도록 하셨습니다.”
그 말과 함께 사절이 손짓하자 축구공이 들어갈 만한 사이즈의 나무 상자들이 내 앞에 차곡차곡 쌓여간다.
‘선물’이 담긴 상자의 개수가 꽤나 많았지만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래도 억지로 웃어보이니 사절이 내게 절을 올리며 말을 이어간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네스토르 왕께서 본래 해적들이 유출하려 했던 메세니아의 양곡을 다시 거두어들인 다음 그 절반을 주군께 실어보내려 하셨습니다. ”
“···고맙네.”
네 번째 선물.
지난 세 번의 ‘선물’도 이와 같은 상자에 담겨왔었던 걸 분명히 기억한다. 처음 왔을 때까지만 해도 ‘허허, 그 할아버지는 뭘 이런 걸 다 보내고···.’ 같은 생각을 했던 게 떠오른다.
하지만 이제는 이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잘 알고 있으니.
아니다.
어쩌면 축구공 크기의 상자에 들어갈 만한 사이즈의, 앞전 세 번의 선물과는 다른 무언가가 들어가 있을 수도···
-끼릭.
“···.”
이런 시발, 냄새.
나는 썩어가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노력했다.
왜냐하면 상자 속에 들어 있는 건···
“우아! 썩어가는 사람 머리!”
“멍멍아! 소리지르면 안 돼!!”
···이게, 애들 교육에 괜찮은 거 맞나?
사절들이 물러가자마자 나는 저 머리들을 모아 화장하도록 지시하고 멍멍이와 코리토스에게 다가가 말했다.
“···죽은 사람을 보고 그렇게 함부로 말하면 안 돼.”
“네? 하지만 펜테실레이아 님이 전사라면 죽음에 익숙해져야 한댔는데.”
“맞아요. 멍멍이 훈련받는 거 구경 가니까 아마존 여왕님이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요.”
“아, 이런 망···”
···할 펜테실레이아, 애들한테 무슨 미친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라고 소리지를 뻔했지만 목구멍 안으로 겨우겨우 밀어넣으며 애들을 방으로 돌려보냈다.
멍멍이와 코리토스는 그동안 끊임없이 아마존 전사들의 신기한 생활 풍습과 상식에 대해 내게 미주알고주알 얘기해주었고.
그래서 나는 재물은 빼앗으면 되는 것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전쟁 상황에서나 그렇지, 안탄드로스가 부유해진 것도 내가 아이깁토스를 불태우고 노예와 재산을 약탈해서라는 소문은 거짓임을 확실히 말해주었고.
그리고 아이들에게 결혼 상대는 납치하는 게 아니며 강한 자가 아름다운 이를 손에 넣는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고 나는 이노에게 납치당해 너희를 낳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해주었다.
“···그럼, 엄마가 엄청 센 힘으로 아빠를 제압해서 숲으로 끌고 간 게 아니었어요?”
“바보야. 엄마는 독을 잘 쓰셔. 굳이 힘이 강하지 않아도 방법은 많다고.”
“아하!”
“아하는 무슨 아하야, 둘 다 아니니까 들어가서 잠이나 자.”
-쿵.
···힘들군.
펜테실레이아에게 한소리를 해야 하나?
음, 펜테실레이아가 한소리 한다고 들을 사람인가?
내가 사람을 처음 죽인 게 몇 살 때였···
됐다.
나는 어지러워진 머릿속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펼쳤다.
둘둘 말린 칼리폴리스제 양피지.
그 위에 쓰여 있을 네스토르의 메시지.
나는 아직도 네스토르와의 첫만남이 잊히지를 않는다. 저 베테랑 해적이 또 무슨 이야기를 건네려나 싶어 한숨을 참으며 끈을 풀고 서신을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이보게, 안탄드로스의 왕이여. 지금 아카이아의 해적들이 대규모로 밀을 반출하고 있네. 남이탈리아, 시칠리아, 북아프리카를 통해···”
그 속의 내용이 방금까지 들었던 잡생각들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기근 대비에 초를 치는 새끼들이 있다.
제우스 님, 오늘도 정의로운 해적이 되는 걸 허락해주세요. (2)
안탄드로스를 가든, 트로이아를 가든, 미케네와 필로스와 아르고스와 아테네를 가든 모두 궁전의 규모가 대단히 거대한 데는 이유가 있다.
이 시대의 경제는 정치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각지의 왕들은 올리브와 포도, 도자기와 청동 주물, 모직물의 생산과 유통을 대규모로 통제했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랬지만, 많은 양치기들은 왕이나 인근의 족장에게 귀속되어 양털을 바쳤다.
그 양털은 다시 직물로 바뀌어 각지의 궁전으로 모였고, 그 직물은 다시 그 족장의 주군인 왕에게, 다시 그 왕의 주군인 왕에게 일부가 세폐처럼 오갔다.
향유, 염료, 구리, 각종 보석 등은 더했다. 특히 금속의 경우에는 내가 아주 잘 알았다.
대장장이들은 함부로 집을 움직일 수도, 작업물이나 기술을 유출할 수도 없었다.
왕과 귀족들이 여러 금속과 기자재를 넘겨주면 그를 가지고 주물을 만들고 바쳤다.
남는 시간과 가욋돈으로 개인적인 주문을 받거나 할 수는 있더라도, 철기와 청동기의 경우 그 자체로 중요한 전략자원이고 그 기술자 역시 국가적 자원이다 보니 나름 엄격히 통제되었다.
향유 등 생산 공정이 간단한 몇 가지 품목은 아예 왕들이 공장을 대규모로 굴리고 직접 관리하였다. 초장에 내가 벽돌 공장과 제재소 등을 여럿 운영하면서 쎄빠지게 고생하던 이유가 거기 있었다.
이런 경제적 상황에서 화폐는 제한적으로만 유통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궁전은 각 왕국의 중심으로서 재화를 분배하고 유통하며 몇몇 경우에는 생산까지 도맡는 경제적 사령탑 노릇을 했다.
이제는 어렴풋한 전생의 기억이지만, 나는 이런 경제 양식을 일컫는 이름에 대해 알고 있었다.
궁전 경제(Palace Economy).
그때 당시에는 이름으로만 다가오는 학술 개념일 뿐이었지만 이제는 내 몸속을 타고 흐르듯 익숙한 ‘상식’이다.
아무튼 이 궁전 경제 체제 하에서는 품목별로 중앙 권력에 의해 통제되는 정도와 방식이 제각각이긴 했지만···
예외 없이 곡물의 통제는 매우 중요했다.
앞으로 수천 년 동안은 그럴 예정이다. 곡물은 문명 사회에서 절대다수의 인구를 먹여살릴 보편적인 수단이니까.
나는 네스토르의 서신을 읽어내려가며 당장의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해적들이 날뛰고 있는데··· 그걸 잡아내고 있다는···”
여기서, 해적이란 절대 아카이아인들 모두를 싸잡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저 아카이아인들은 트로이아의 특별 훈육과 함께 착한 야만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고로 네스토르가 서신에서 언급한 해적에서 자기자신은 포함되지 않는다. 해적은 곧 ‘에게 해 인근에서 트로이아 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 항해하는 무리’를 뜻하니까.
주로 곡물 밀수꾼들이다.
네스토르가 가져온 ‘선물’도 곧 그런 밀수꾼들의 것이었다.
네스토르는 요새 여가시간이 넘쳐나는지 시간이 날 때마다 바다로 나가 해적들을 사냥··· 아니, 소탕하고 그 머리를 잘라 내게 보내며 전리품을 동봉하고는 했다.
“그래. 맞네. 아카이아 전역에서 수확되는 곡물의 양이 막대하게 늘어나면서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으니 말일세.
메세니아는 본래 풍족한 땅이었지. 그래서 그런지 큰 몫 한 번 단단히 잡아보려는 이가 많더군.”
요 몇 년 사이에, 이제는 그런 해적 잡는 해적질이 아카이아 일대에서 하나의 경제적 흐름으로 자리잡은 듯했다.
“아카이아에서 곡물을 밀수하는 해적들이 나오고 있네. 끝도 없이들 쏟아져 나오지. 그러니 그런 이들을 사냥하는 다른 해적들도 많고. 누구든 그게 돈이 되는 걸 아니 말일세.”
“···그런데, 그걸 왜 직접 오셔서 이야기하십니까?
서신까지 보내놓고서 말입니다.”
나는 안탄드로스로 찾아온 네스토르를 보며 눈을 꿈뻑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네스토르는 살짝 섭섭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하하, 너무하군. 지난 전쟁이 우리의 교분을 완전히 망가뜨려 놓을 정도였던가?”
“그건 아니지만··· 아니. 직접 찾아오실 거라면 서신에, 사절에, 그놈의 ‘선물’은 왜 보내셨습니까?”
“상황이 바뀌었으니까.”
네스토르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내 곁으로 다가와 어떤 꾸러미를 펼쳤다.
그 안에 들어있는 건 점토판이었다. 나는 허리를 숙여 그 내용을 읽었다.
“메세니아에서 항아리 6,000개 분량 운송. 시칠리아에서 교환. 준비해놓은 목숨을 네스토르에게 전달. 확보한 곡식은 아프리카에.”
···항아리 6,000개 분량?
점토판에 기록된 막대한 수량에 놀란 것과 별개로 여러 글귀들이 짧게, 읽기 어렵게 꼬여 있어 내용을 알아보기 쉽지 않았다. 내가 머리를 싸매자 네스토르가 다가와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겠지. 내가 추적해서 파악한 바를 통해 그 실태를 조합해주겠네.”
네스토르는 우선 ‘항아리 6,000개 분량’이 적힌 부분을 가리켰다.
“당연하지만 이건 곡물일세. 항아리 6,000개 분량의 곡물.”
···예전 같았으면 웬만한 나라의 1년치 예산으로도 충분했을 양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입을 다문다.
“처음엔 보리인지 밀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남이탈리아의 창고를 급습해보니 대부분 밀이더군.”
“···.”
“시칠리아에서 교환한다는 말은, 정말 말 그대로일세. 시칠리아에 자리잡은 페니키아인들의 정착지로 가서 황금이나 온갖 잡다한 기물과 교환해 온다는 뜻이지. 그 곡식은 페니키아인들이 아프리카로 실어나를 테고.”
그러니까 이건 밀무역을 위한 계획서이자 간단한 장부들이다. 네스토르는 그를 해적들의 손에서 탈취해온 것이고.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네. 여러 도시에서 그 막대한 분량의 밀이 사라졌는데 갑자기 누군가 어디서 들고 왔는지 모를 막대한 재물을 안고 온다면 사정이 뻔하지 않나?”
“그렇지요.”
“그래서 그들은 남이탈리아의 어느 황무지에 비밀스레 본거지를 마련했네. 두 가지 목적을 위해서.”
네스토르가 손가락 두 개를 들어올린다.
“우선은 페니키아인들이 지불한 대금을 그곳에 쌓아놓고 조금씩 아카이아 내로 반입하는 것이지.”
“두 번째 목적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