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406
아마 아이깁토스로의 항해라기보다는 동지중해 순회에 가까운 모습을 띨 테다. 어차피 이 시대의 왕이란 떠돌아다니는 존재. 심지어 나는 안탄드로스와 크레타라는 서로 동떨어진 영토를 다스리고 있으니 떠나더라도 문제는 없을 테다.
큰 문제 없는 항해가 될 것이다.
나는 그리 믿었다.
“어··· 어어어···!”
“다들 피해라!!!!”
물론.
-쿠르르르르르···!!
가장 먼저 방문한 미시아에서 속절 없이 무너지는 공동주택을 보다 보니 그런 믿음은 싹 가셨다.
신나서 나를 이리 데려온 에우리필로스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
악질 독뽕 겸 서유럽뽕 밀덕으로서 세계사에 악명을 떨친 남자가 있다.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로마노프(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Рома́нов).
그는 휘하 주변 사람들에게 서유럽 복장을 강제하거나 자기 식탁에 사우어크라프트를 올리는 등의 행보를 걸었는데, 현대에 태어났다면 SS친위대 군복 입고 오타쿠 행사 갔다가 강제 퇴장당할 수준이다.
하지만 결국 누구도 그의 거침 없는 행보를 막지는 못했는데.
불행히도 남자가 자기 비슷한 방구석 철십자훈장 수훈자들과 달리 황제였기 때문이다.
일명 표트르 1세.
그는 서유럽에 행차했다가 러시아식 복장과 습관 탓에 무시받은 다음, 열등감에 사로잡혀 그때부터 악질 국까(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러까다.)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표트르는 서유럽식으로 밥을 먹고, 서유럽식으로 면도하고, 서유럽식으로 옷도 입고, 서유럽식으로 와인과 커피를 즐겼다.
이유는 간단했다. 러시아 문화는 미개하고 야만적이기 때문이다.
역시나, 현대의 동족들이 인터넷 곳곳에서 ‘19세기 에도와 한양 시내 비교www 조센징 압도적 패배www’ 따위 글을 쓰는 것과 행동 동기부터 비슷하다.
아무튼 표트르의 뇌리에는 서유럽의 ‘문명적인’ 모습과 그들 앞에서 포크랑 나이프 좀 쓸 줄 모른다고 개쪽당하던 자신의 모습이 이미 선명히 새겨진 뒤였다. 그는 자신의 덕질 행위에 작정하고 국가 전체를 가져다 바쳤다.
그 과정에서 근대화가 이뤄지기는 했지만 부수적인 사항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다.
한번 타인의 ‘압도적인’ 모습을 보고 나면, 사람은 그를 머릿속에서 지우기 어렵다. 동경하게 된 대상의 지엽적인 부분들까지 따라하려 노력하게 된다.
예를 들어 많은 피 끓는 중학생들이 천재 캐릭터를 보고 감명받지만 그들의 수학 실력을 따라잡을 수는 없으니 괴팍한 성격만 본받는 것처럼 말이다.
비슷하게 표트르 1세 역시 군제 개혁과 덕질 정도 하다 보니 이것저것 변화시켰을 뿐 러시아의 체제 자체를 일신하지는 못했는데, 자기가 건설한 새 수도만큼은 스웨덴어와 독일어를 섞어 상트페테르부르크(Санкт-Петербург) 같은 괴이쩍은 이름을 지어 붙였다.
심지어 중간에 자기 이름도 박아넣었다.
아마 그와 비슷한 느낌의 근대화 군주 고종이 수원 쪽으로 천도하면서 이름을 네오 이명복쿤 정도로 지었더라면 21세기에 먹는 욕이 두 배로 늘지 않았을까.
이와 비슷한 예시는 전세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강 미국 중부의 드넓은 옥수수밭을 보고서 ‘아, 시베리아도 넓으니까 옥수수 심자!’ 따위 생각으로 자기 정치 인생 말아먹은 흐루쇼프라든가.
대강 서구인들의 우수함은 역시 육식에서 나온다 생각하면서 도축법도 잘 모르는 누린내 나는 고기를 꾸역꾸역 먹었던 메이지 일본의 근대주의자들이 있다.
그리고···
“안탄드로스는 참 위대한 도시지요···. 그래서 본받을 것이 없나 살펴보았더니 안탄드로스의 드높이 솟은 공동주택이 눈에 띄더군요.”
이제는 미시아의 왕자 에우리필로스도 그 위인들의 대오에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텔레포스가 자랑스러워해도 좋으리라.
“안탄드로스의 공동주택은 이런저런 장점이 많았습니다! 우선 방어에도 유리할 뿐 아니라 작은 땅에 여럿이 모여 살면서 온갖 시설들을 집중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해석: 제철소와 다른 공장을 베낄 역량은 없어서 적당히 비슷하게 지어봤더니 망했다.
나는 다시 한쪽 외벽이 무너진 공동주택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날 구경시켜 주겠다면서 인부들도 뺐고, 아직 주민이 입주하지도 않은 주택이라 인명 피해는 없었다.
재산 피해는 막대하겠지만.
공동주택은 마치 철근 빼먹기를 편식하는 아기들 고기반찬 빼먹기처럼 당연히 여기는 건설사들이 지어놓은 듯 허망하게 무너졌다. 나는 저기 헛되이 투입되었을 노동력에 조의를 표했다.
“···이 도시에 공동주택은 저것뿐입니까?”
나는 혹시나 기대하며 물었고.
“아닙니다. 저것으로 일곱 번째군요. 그곳에는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맹세컨대 사고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역시 부실 공사 의혹이 샘솟는 공동주택이 앞에 여섯 채는 더 지어졌다는 사실에 다시 절망했다.
이건 두고 갈 수가 없다.
내가 안 둘러봤다가 사람 죽으면 이건 대량학살 방조다.
“···함께 살펴보지요.”
내 말에 에우리필로스는 다소 머쓱한 듯한 표정으로 앞서나갔다.
***
그러고 보면 에우리필로스는 이전에도 내 앞에 와서, 안탄드로스의 강철이면 어떤 적이든 무너뜨릴 수 있으니 강철로 떡칠한 수성무기로 하투샤인들을 때려부수자 말한 적이 있다.
아마··· 타인의 영향을 깊게 받는 감수성 있는 사람인 것 같다.
음, 좋아. 예쁜 말로 마무리지었다.
바닥까지 떨어졌던 에우리필로스에 대한 평가는 다행히 다른 공동주택들이 나쁘지 않게 지어진 것을 보고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처음에 봤던 물건은, 아래쪽이든 위쪽이든 벽의 두께가 상당히 얇았는데 여기서는 자재를 아끼지 않았군요. 당장 무너질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아, 하하하, 방금 보신 물건은 파리스 님께서 오신다기에 날짜에 속도를 맞추다 보니 그리되었나 보군요.”
웃지 마.
너 그거 시발 미친 짓이야.
내 얼굴이 싸늘해지자 다시 에우리필로스 역시 차분해졌다.
···그래도 에우리필로스가 그냥 바보짓을 한 건 아니었다.
-“우선 방어에도 유리할 뿐 아니라 작은 땅에 여럿이 모여 살면서 온갖 시설들을 집중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아까 에우리필로스가 했던 말이다.
내가 전쟁에 대비해서 공동주택을 짓기도 했고, 실제로 그 쓰임새가 가장 빛난 것은 하투샤와의 전쟁이 있던 시절이었으니 모두들 방어에 유리하다는 장점에만 집중하기 쉽다.
하지만 다른 특징도 만만찮게 중요했다.
‘온갖 시설들을 집중할 수’ 있다.
그를 누릴 인구를 집적할 수 있기 때문에.
생각해보면, 공동주택들을 지을 때부터 이미 상하수도를 비롯한 설비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만약 동일한 인구가 넓게 퍼져 있는 상황에서 상하수도를, 공용 무기고를, 그리고 온갖 인프라를 기획했더라면 그 혜택에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이들은 훨씬 줄었으리라.
물론 반대로 말하자면 인구가 집적되는 만큼 위생이나 화재, 교통, 자원 분배 등등의 문제에 훨씬 많은 신경을 쏟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물론 그렇게 신경 쓴 만큼 내부의 인구들은 확실하게 통제 아래 들어오게 된다. 그러니 내가 보기에, 에우리필로스가 알아서 이렇게 공동주택을 짓는 일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듣기로는 안탄드로스에서 영감을 받아 비슷하게 건물을 올리는 도시가 이곳 아드라미티온만이 아니라고 한다.
미시아의 중심지이자 텔레포스의 왕좌가 자리한 페르가몬부터, 새로 장악한 저 라리사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때쯤 공동주택이 가진 또 한 가지 장점을 떠올린다.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볼 필요가 없었던 장점이다. 이곳이 온난한 지중해성 기후에 속한 땅이기 때문에.
밀집.
단열.
“저기··· 오수(汚水)가 흐르는데. 저 우물 써도 되는 거 맞습니까?”
“지금까지는 별 문제 없었습니다!”
“···앞으로 생길 겁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여기 생긴 문제들을 하나하나 정리해주는 한이 있더라도.
이 도시의 공동주택을 유지한다.
그게 내 새로운 계획이었다.
안전점검진단 (2)
“자, 저쪽에도 우물이 있습니다! 한번 살펴보지요!!”
표트르 대제의 정신적 후계자(?), 미시아 근대화의 선봉장, 헤라클레스의 손자이자 텔레포스의 아들 에우리필로스가 나를 이끌고 나아갔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이 물을, 여기 사람들이 먹고 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약 300명 정도가 이 우물로 식수를 충당하고 있죠.”
“그, 어, 저기서 염소가 오줌 싸는데?”
“그야 어쩔 수 없지요. 이곳 사람들도 염소젖이든 뭐든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지옥을 보았다.
아니, 그 지옥은 당장 닥쳐오지는 않았다.
사실 놀랍게도 아직 콜레라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이 ‘지역’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콜레라는 원래 갠지스 강 근처의 풍토병이었다. 벵골 지역과 방글라데시 일대에서 오래 전부터 존재하던 병이 19세기 세계화와 함께 전세계로 퍼져나간 것이니 아직까지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노로바이러스 역시 없다. 그것도 20세기 미국에서나 발견된 질병이니까.
하지만 장티푸스는 있다.
물론 이질도 있다.
그러니까···
“이곳에 사는 미시아인들을 죄다 죽이고 싶지 않으면 이 우물은 메워버리십시오.”
“예? 하, 하지만···”
“그럼 시일을 드리겠습니다. 한 달 안에 다른 곳에서 식수를 가져오고 저곳은 메워버리십시오. 아마 빠르게 오염될 겁니다. 이전의 작은 마을에서 우물 짓듯이 하면 안 됩니다.”
인간이 모여사는 데는 이런저런 장점도 있지만, 그만큼 갖춰야 할 조건 역시 까다로워진다.
그냥 민물에서 살아가던 물고기는 누구의 ‘관리’도 필요 없이 생존할 수 있지만, 좁은 어항에서 다른 물고기들과 함께 살면 반드시 산소와 물의 산도, 쓰레기나 먹이 등을 관리해줘야 하는 것처럼.
도시의 건물을 어떻게 배치하고, 상하수도를 어떻게 관리하며, 교통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지 등등 우리에게 익숙한 작은 요소 하나하나가··· 인류가 수천 년 동안 도시 생활을 이어가면서 만들어낸 노하우의 산물이다.
“우물을 더욱 깊이 파고 외벽을 벽돌로 촘촘히 막아내거나··· 아니면 수도교로 끌어와야 합니다. 아직 아드라미티온의 인구가 그리 많지는 않으니 수도교까지는 필요 없을지 모르겠군요.”
“그럼···”
“앞서 말한 대로 하십시오. 우물에 조금 더 공을 들여야 합니다.
주기적으로 그 밑에 자갈과 숯을 깔아두고 갈아주며서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고, 그 근처에 분뇨를 버리는 이는 사형에 처하거나 그에 준하는 무거운 형벌로 다스리십시오.”
“그래야··· 겠군요. 조금 감이 잡힙니다.”
다행히 초기 시행착오로 인한 것일 뿐, 이 시대 사람들이 바보인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우물 같은 급수시설에 비해서는 아마 한국인들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으리라.
보통의 현대 한국인뿐 아니라, 우물을 일상적으로 쓰던 조선시대까지 따지더라도 말이다. 이곳은 한국처럼 개천에서도 깨끗한 물이 흘러다니는 화강암 지반이 아니라 그렇다.
그렇기에 에우리필로스 역시 내게서 짤막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뒤 곧장 기존의 우물들을 고쳐짓거나 철거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물론 이미 설사나 구역질을 이어가는 환자들이 있기는 했다.
“우···우웁···!”
“이 물을 천천히 먹이시오! 어서!”
“이, 이게 뭡니까?”
“꿀에 소금을 살짝 탄 물이오. 나중에 정확히 제조법을 알려줄 테니 그대로 따랐다가 비슷한 일이 있을 때 먹이시오.”
···미친, 조금만 늦었어도 대참사였네.
조선시대 대체역사물을 잘 안 봐서 그렇지, 다행히 내가 현대인 환생자 필수 교양 ‘경구수액’ 제조법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 현대인이라면 언제든 트럭과 버스에 치이거나 빌어먹을 기아 세x스에서 튕겨나가 이세계 여행을 할 수 있으니 이런 걸 준비해두는 건 상식이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의 수많은 선생님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고, 또한 학생의 자율성을 존중하던 직접민주주의 체제로 굴러가던 기숙사 체제의 참뜻을 깨닫고 눈물을 흘렸다.
아, 대학교 진학 이후로 내내 회의감이 들었지만 이제야 깨달았다.
안전 수업과 농사 수업을 해주는 대안학교는 자사고, 자공고보다 우월한 한국 최고의 중등교육기관이며 이는 환생자 파리스의 존재로 증명되는 것이다···!
“···파리스 님? 갑자기 왜 우십니까?”
“···병환이 나아가는 환자의 모습이 감동적이라 그렇습니다.”
아무튼, 지금 나는 환자 치료하러 온 것은 아니니 경구수액의 제조법과 사용법을 간단히 일러주고는 곧장 자리를 옮겼다.
재건된 아드라미티온 근교에 지어진 여섯 채의 공동주택. 안탄드로스의 것과 같이 ㅁ자 모양의 구조를 갖추고 있는.
그곳에 사는 약 2,000명의 시민들.
이야··· 한 채에 300명도 넘게 산다니 에우리필로스의 야심이 돋보이는 규모다.
거기에 그 구조도 요새처럼 박혀 있고, 도시로 향할 공격을 적절히 방해하고 적의 공세를 각개격파하기 좋은 입지조건도 갖추고 있다.
외벽은 성벽만큼 꼼꼼히 지었고 바깥으로 난 창문도 총안처럼 보일 정도로 좁으면서 외적의 동태를 지켜보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즉, 전략적으로는 만점에 가까운 선택이다.
에우리필로스가 지난 전쟁 이후로 혹시 모를 적침에 철두철미하게 방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볼 때 이 공동주택들은 이미 그 의무를 다했다.
“하지만 살기에는 끔찍하군. 식수를 챙기는 일은 어렵고, 오수를 버리는 일은 더 어려워보입니다.
지난 전쟁이 모두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기에 망정이지 방비에서의 이점이 없었다면 여기서 살겠다 하는 부족 따위 없었을 겁니다.”
“그야 그렇지요.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신랄하게 말해달라고 했으니 나는 신랄하게 말한다. 에우리필로스는 약간 슬퍼하면서도 일단은 내게 컨설팅 비슷한 걸 받고 있으니 조용하게 듣고 있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에우리필로스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만약 여기 사는 부족이 반란을 일으키면 어쩌려고 이렇게 지었습니까?”
시가전에 좋은 구조는 곧 반란과 농성에 좋은 구조다. 안탄드로스야 그 부분에 있어서 이런저런 대비를 해놨지만 에우리필로스는···
“땅굴이 있습니다.”
···아, 대비해놨군.
역시 마카온를 비롯한 아카이아 장수들을 죽여버린 맹장답다.
그러나 이 무거운 건물을 지어놓고서 땅굴이라니, 구조적 안정성이 떨어지기에 도시 설계 부문에서 에우리필로스의 점수는 또 다시 깎였다.
아무튼 전략적인 부문에서는 흠잡을 데가 없으니, 나는 다시 다른 각도에서 미시아의 공동주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식수는 대강 해결했고. 더러운 오수도 대강 처리 시스템을 갖췄다.’
에우리필로스에게 미리 말해 오물을 처리하는 이들을 따로 지정하도록 했다. 앞서 말했듯 이곳의 인구는 당장 2,000명밖에 되지 않는다. 대국적인 상하수도 계획을 짜기에는 인구가 그리 많지 않다.
대신 오물을 처리하고, 거름으로 만들어 인근 농가에 되파는 체계를 세워놓는다. 그러면 대강 대소변을 내다버리지 않거나 치워낼 동인은 생기니 충분하리라.
“아래층은··· 이것보다 벽이 두꺼워야 할 듯싶군요.”
“하지만 그러려면 지금 당장 주민을 내쫓고 전부 수리해야 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안쪽에 부벽(扶壁)을 세우면 괜찮을 테니. 따로 벽을 허물거나 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건물이 무너질 걱정은 마십시오. 결국 수리하면 되는 문제입니다.”
처음 난 사고 때문인지 에우리필로스가 구조적 안정성에 자신감이 떨어진 듯해 나는 그리 덧붙였다. 단순 위로가 아니라 사실이다.
결국 건물이란 건 석면을 대량으로 썼다든가, 철근을 빼먹었다든가 하는 등 근본적으로 뭔가 잘못 돼서 해체해야 할 지경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수리해서 써먹을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벽을 늘리거나 기둥을 새로 세우고 지붕을 가볍게 하는 등 이런저런 간단한 해법들을 제시해준 다음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나는 간략한 그림을 그려준 다음 에우리필로스에게 보여주었다.
“이 아궁이에 불을 뗀 다음에 기다리면 침상이 뜨거워질 것입니다. 이걸 페치카라고 합니다.”
“페치카? 일단 화력은 괜찮겠군요. 들어보니 안탄드로스의 왕께서 트로이아에 지었다는 물건과 비슷해보이는데···”
“일단 이곳에서는 따로 공동주택 지하에 땅을 팔 수 없으니 말입니다. 이건 그리고 다른 여러 집안에도 적용하기 좋을 것입니다.
아, 온돌을 활용하면 여기서도 온실을 만들 수 있겠군요. 트로이아 궁정에 조성해놓았으니 그를 참고해보십시오.”
“온실이라니요?”
“겨울철에도 공기를 따뜻하게 데워 다른 철에 날 식물을 기를 수 있는 공간입니다.”
“흐음···.”
여기서부터는 공동주택과 살짝 거리가 먼 이야기였기에 에우리필로스의 주의가 흩어지는 게 느껴졌다.
실제로 그에게는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일 테고.
갑자기 주제가 다른 방향으로 바뀌니 에우리필로스가 관심을 두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내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온돌, 페치카, 온실. 모두 집안을 따뜻하게 하기 위한 용도군요.”
“그렇지요.”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있습니다. 굳이 이것들을 공을 들여 설치할 이유가 있습니까?”
내 말을 끊고서 에우리필로스는 조심스레 이야기를 이어간다.
“파리스 님께서 말씀하셨던 바 그대로, 더러운 물은 병을 퍼뜨리고 깨끗한 물은 사람을 건강하게 합니다. 그렇기에 더러운 물은 깨끗한 것과 섞이지 않게 내버리고 깨끗한 물을 어떻게든 구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람이 모여서 정착한다면 가장 먼저 우물을 파고 개천을 둘러보는 데는 이유가 있지요.”
내가 상하수의 구분과 오수 처리, 식수 수급에 대해 이야기한 바를 정리하는 듯하다.
“거기에 무너지지 않게 기둥과 벽을 단단히 세우고, 기둥 없이 넓은 공간을 세우려면 천정을 둥글게 설계해 무게를 분산시키는 게 중요하지요.
그 역시 많이 배웠습니다. 내부 공간을 훨씬 넓고 견고하게 짜는 법을 알았습니다. 이제 다시는 이 도시의 공동주택이 붕괴하는 모습을 보지 않으실 겁니다.”
이건, 내가 중간에 짤막하게 설명해준 아치와 볼트(Vault), 돔에 대한 설명이다.
“조금 더 공동주택에서 먼 주제를 보아도, 파리스 님은 미시아인들이 모여살게 되면서 생길 문제를 여럿 지적해주셨습니다.
환자를 돌보는 법이나 사람을 끌어모으는 법, 그들을 부려 거대한 건축물을 만드는 법 등에 대해 잘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건축 중 누가 쓰러졌을 때, 아니면 인부들을 근면하게 만들고자 할 때 그런 방법들을 잘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실내를 따스하게 만드는 방법을 그리 길고 진지하게 설명하시니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시설들은 안탄드로스에도 많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차차 늘려가려 합니다. 이미 안탄드로스 곳곳에서 건축이 벌어지고 있지요.”
“파리스 님도 그 유용성을 깨달으신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그렇다 한다면 어떻게 말씀해주신 기물들이 미시아에서 유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온실이란 물건은 너무 많은 자원이 들어가기에 유희 이상의 역할을 하기 어려워보이고, 다른 것들은 그 외의 용도도 잘 알 수가 없군요.”
“필요할 날이 올 겁니다. 예를 들어 저 페치카는 차갑게 몸이 식은 이들을 돌보기 좋지요. 동상에 걸려 손가락 끝을 잘라내게 된 누군가가 저기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이들이 속출한다고 말입니다.”
“동상에··· 걸린다고요?”
내 말에 에우리필로스는 곧장 하늘을 올려다본다.
저 따스한 태양을, 건조하고 뜨거운 대기(大氣)를.
“하, 하하, 이곳에서도 동상에 걸리는 이가 한둘쯤은 나올지 모르죠. 산행은 누구에게나 험하니까요. 하지만 그런 이들이 속출하는 날이 올지 잘 모르겠···”
“올 겁니다.”
“···예?”
“반드시 올 겁니다.”
순간 내 얼굴이 굳는다. 나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미시아의 왕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미시아는 따뜻한 땅입니다. 대기는 온화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차갑게 얼어붙은 바람이 미시아인들의 뺨을 할퀼 날이 올 겁니다. 강물이 얼어붙고, 짐승들은 다리가 굳어버리며,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이 땅을 시들게 할 겁니다.”
“···.”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제가 지원하겠습니다. 페치카, 온돌··· 저 난로들이든 온실이든 제가 제 재산으로 아드라미티온에 짓겠습니다.”
“···그, 그런.”
“저를 믿으십시오.”
내 강경한 반응에 당황하여 얼어붙은 에우리필로스에게, 방금 내가 스케치한 페치카와 온돌의 구조를 손에 들려주었다. 그가 멍하니 그 양피지를 내려다보니 나는 말해주었다.
“그날은 옵니다.”
“···.”
“반드시. 그때가 되면 트로이아가 당신들을 돕기 전까지 살아남는 것부터 고민해야 할지 모릅니다.
믿어주시겠습니까?”
내 말에 에우리필로스는 먼 산을 보듯 정신을 놓았다가,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반쯤은 내 격한 반응에 기겁해서, 반쯤은 여전히 신뢰하지 못하지만 내 체면을 구길 수 없어서 예의상 억지로.
“···짓겠습니다. 그, 화로와 온실이란 물건을.”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