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51
51화. 순방
바야흐로 조선 후기, 영조의 치세에는 한반도 남부를 뒤흔든 이인좌의 난이 발발했다.
반란의 명분은 의료실험이었다.
한의학계의 다신 없을 혁신가 영조대왕은 소화 불량의 치료를 위해 생감과 게장을 처방한다는 신종 요법을 개발하였다.
현대 의학 역시 감과 신선하지 못한 해산물이 소화에 나쁘다는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그야말로 당대의 의학혁명이었다.
동물시험이나 임상시험이라는 개념이 없던지라 영조의 새 요법은 곧바로 환자였던 선왕 경종에게 시도되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환자가 제거됨과 동시에 병환도 말끔히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의사들에게 손씻기를 강제한 19세기의 이그나스 제멜바이스가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듯, 선구자는 언제나 고난과 역경을 겪는 법이다.
환자를 살려낸다는 구식 치료법을 선호하던 삼남 지방의 선비들은 의료과실을 주장하며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 그 이후로도 20년 넘게 천재 의사 영조대왕은 부당한 음해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그때 집에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던 소현세자의 후손 밀풍군은 반란군들에 의해 추대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목을 내놓아야 했다.
정치란 게 그렇고, 반란이란 것도 원래 그렇다.
누군가의 의지보다는 그 사람의 정치적 위치와 그 사람을 둘러싼 사람들의 의지가 더 중요할 때가 많다.
형님 경종을 생각해 밤새워가며 새로운 요법을 개발했을 영조의 따뜻한 형제애나, 반란 주모자들과는 일절 연관이 없었다는 밀풍군의 행적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을 둘러싼 상황이다.
변덕스러운 파도가 그들을 어디로 휩쓸고 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노론을 지지하던 영조의 치세에 소론이 크게 위축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영조에 의한 경종의 독살을 주장하며 밀풍군을 추대했기 때문에,
영조는 밀풍군을 죽여야 했다.
“···그러니까, 히타이트 충성파들이 저를 매개로 결집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나는 프리아모스와 안키세스의 말을 그렇게 알아들었다.
요컨대 나는 밀풍군이다.
프리아모스나 헥토르가 그닥 의료 지식에 해박한 것 같지는 않지만 영조와 비슷한 위치에 서 있다.
헤라클레스가 트로이아 왕족의 씨를 죄다 말려준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프리아모스는 경쟁자 걱정 없이 막강한 왕권을 휘둘렀다.
그 덕에 망했던 나라도 한 세대만에 재건해낼 수 있었고.
허나 강력한 왕권을 모두가 반기지는 않는다.
슬슬 자기 기반을 다져가며 상국 히타이트와 거리를 두어가는 프리아모스의 정책도 그렇고, 강력한 왕권과 왕실의 단결 때문에 자기들의 목소리가 그대로 축소되는 상황도 그렇고.
귀족들이 반길 리 없었다.
지금까지는 저항할 수단이 없어 잠자코 있었지만, 바보나 마조히스트가 아니라면 질식당하지 않기 위해서 무엇이든 시도해보는 법이다.
그리고,
“보게나.”
안키세스가 내 손을 붙잡고 하나씩, 하나씩, 그들이 시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우선, 자네라는 존재 자체가 저들에게는 매력적일 걸세.”
“어째서죠?”
“두 가지 이유가 있네.
첫번째로, 잘생겼으니까.”
“···네?”
이 또한 아프로디테에게 정신을 조작당한 안키세스의 헛소리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놀랍게도 프리아모스와 헥토르의 반응은 조용했다.
“그 미모 덕분에 이 도시의 시민들이 자네에게 호감을 느끼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걸세.
게다가 나름 눈치도 빨라서 미움 살 만한 일을 쉽게 저지르지는 않을 테니.”
안키세스의 말은 의외로 사리에 맞았다.
이 작은 도시에서, 통치자 개인에 대한 피통치자들의 호불호는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호불호를 결정하는 가장 직관적인 요소가 외모 아닌가?
“그러니만큼 놈들은 자네를 적대하기보다는 포섭하려 할 걸세. 이제 트로이아에 온 지 하루가 되었던가?”
“그렇죠···?”
“잠시만 기다려보게. 자네와 친하게 지내고자 안달이 난 이들의 초대가 빗발칠 테니.
그리고 그들 중에 ‘놈들’이 끼어있을 거야. 정신 똑바로 차리게.”
내 주위에서 제일 정신 나간 것 같은 사람에게 정신 차리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지만, 아무튼 잠자코 이어지는 얘기에 집중했다.
“그럼 두번째 이유는 뭐죠?”
“자넨 시골에서 온 노예 출신이니까.”
“···주무르기 쉬워서?”
“이해가 빨라서 좋군! 역시 훌륭해!”
안키세스는 신이 난 듯 프리아모스를 향해 돌아보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마치 ‘봐! 내가 말했지! 내가 물건이라고 했지!’라고 자랑하는 듯한 표정.
프리아모스가 손짓하자 안키세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흥분에 찬 설명을 이어간다.
“그렇지만! 자네는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야! 그렇지 않나?”
“맞습니다.”
“그 자신감조차도 아주 좋군. 자네는 노예의 몸으로 도시 하나를 잡아먹지 않았나? 저들의 얕은 술수에 마구 이끌려다니지는 않으리라 믿네.”
나는 안키세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용히 생각했다.
포섭하려던 상대가 생각보다 자신들 손아귀에 잘 떨어지지도 않는 데다가, 도리어 자기들 머리 위에 있다는 판단까지 서면 어떻게 나올까?
그러면 놈들은 나를 ‘밀풍군’해버리겠지.
고로, 나는 그 모든 난리통에서 벗어나있어야 한다.
트로이아에 있어서는 안 된다.
명쾌한 논리, 명쾌한 결론.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지점들은 있지만 이것이 안키세스와 프리아모스, 헥토르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대책이었다.
“그런데.”
하지만 내게는 질문거리가 남았다.
“그럼 전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안탄드로스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헥토르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안탄드로스라뇨? 저를 왕자로서 공표하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네 말이 맞아. 며칠 뒤면 성대한 연회에서 너는 왕의 둘째 아들로서 내 곁에 설 테니까.”
“그런데 제가 안탄드로스에는 어떻게 있습니까? 시민들이 다스리고 총독이 감독하는 도시 아닙니까?”
···양치기 노예 파리스는 안탄드로스에 머무를 수 있지만, 왕자 파리스는 아니다.
그 존재만으로도 총독과 장로들의 권위를 침범할 테니까.
“이제부터 안탄드로스에 총독은 없을 거야.”
“하지만 식민도시에 총독이 없으면 어떻게 통제를···”
···아.
트로이아의 식민도시에, 왕이 총독을 회수하고 왕자를 보낸다.
그러면 결론은 하나뿐이다.
“파리스.”
다시 프리아모스가 입을 열었다.
내 눈앞으로 천천히 다가와서는 내 손을 쥐었다.
“너는 안탄드로스의 군주가 될 게다.”
어머니, 아버지, 스클레오스, 마을 사람들, 총독, 아노이토스···
어, 어어···
고향 사람들한테 뭐라고 설명하지?
***
“방금 파리스의 표정을 보셨습니까? 어떨 때는 왕도 바닥에서 굴러먹은 정치가 같이 굴더니, 이럴 때는 또 귀엽지 않습니까?”
“너무 그러지 말게. 아이에게는 혼란스럽지 않겠나.”
“그래서 파리스가 혼란스럽지 않도록, 저희가 다시 모인 것 아니겠습니까?”
파리스는 프리아모스의 선언에 비실비실해져서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사람들 역시 그러했지만, 파리스를 빼고서는 밤 중에 다시 보기로 약속을 잡았더랬다.
이 자리에 남은 것은 프리아모스와 안키세스.
“···헥토르? 잠시 나가있지 않겠느냐?”
“알겠습니다.”
두 사람뿐.
프리아모스는 방에서 떠나는 헥토르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안키세스의 말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떻습니까? 제가 말한 대로 총명한데다, 아름답고, 인품 역시 훌륭한 아이가 아닙니까? 그런 아이가 신들의 사랑까지 받았다니?
주군, 또 하나의 영웅이 우리의 핏줄에서 나왔습니다!”
“···.”
프리아모스는 안키세스의 과장어법에 익숙해진 상태였기에, 한 귀로 흘려들었지만···
그 역시 놀랐다.
왕도에 당도하자마자 자신의 처지를, 알려야 할 사람들에게만 깔끔하게 알린다는 그 생각.
평생 흙속에 파묻혀 살아온 왕자에게 기대하기 어려웠던 영리함이다.
이 시대, 문명세계에서 통치와 정치란 후천적으로 부여된 직무보다는 생득적인 ‘감각’에 가깝다.
정세에 대한 적확한 분석, 정략적인 판단, 자신의 위치에 대한 조망과 결단 같은 일들은, 신분적으로 극히 소수에게만 허락된 일이기 때문에.
신분적 하층에서 나고자란 누군가에게 나라의 통치를 맡기는 행위는, 평생 법학을 전공하던 사람에게 복잡한 포크레인 운용을 맡기는 일이나 진배없다.
그러나 파리스는 통치자로 변모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는 듯싶었다.
···물론, 안탄드로스 전역을 장악했다느니, 강철을 마구 양산해내느니 하는 안키세스의 이야기는 대부분 과장이리라.
원래 안키세스가 좀 ‘문학적인’ 인물이니까.
허나 그 과장을 벗겨내고 직접 마주한 파리스 역시, 안키세스의 과장에 크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기묘한 아이다.
“···그래, 사촌이여. 어쩌면 반신 같은 영웅이 우리 집안에서 나왔는지 모르네.
하필 차남으로.”
위험하다.
프리아모스가 예상하기로 파리스는 ‘적당히’ 잘생기고, ‘적당히’ 총명한 아이였어야 했다.
헥토르의 권위를 위협하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파리스가 반역을 저지를 거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헥토르가 저 아이를 제대로 다룰 수 있을지 모르겠군. 다른 형제들처럼 어릴 적부터 친분을 쌓아온 것도 아니니.”
프리아모스는 고민에 잠겼고, 그런 프리아모스에게 안키세스는 말했다.
“그러면 기회를 주어야지요.”
“기회? 하지만 곧 왕자의 존재를 공표할 걸세. 그 다음으로는 며칠 안 지나 안탄드로스로 갈 텐데 트로이아에서 무슨 시간이···”
자기 입으로 말하면서, 프리아모스는 슬슬 안키세스가 할 말을 깨달았다.
“저는 어디까지나 파리스를 트로이아에서 내보내길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주군의 뜻이 그러하면 그 뜻에 따라 최선의 계책을 내놓아야죠.
···트로이아에서는 시간이 없지만.”
아까의 회의에 썼던 지도 한 쪽을 두드리며 안키세스가 말한다.
“안탄드로스로 가는 길에는 시간이 있지요.”
그렇다. 어차피 이번 공표로 흔들릴 방계 왕족들에게 허튼 생각하지 못하도록 기강을 잡을 필요도 있고.
게다가 헥토르와 파리스 사이의 개인적인 유대를 쌓아주기에도 그만한 게 없으리라.
“파리스가 안탄드로스로 돌아가는 길에, 헥토르를 따라보냅시다.”
“다른 방계 왕족들이 다스리는 도시들을 순방하면서···”
“겸사겸사 왕실의 건재함과 변치 않을 왕위 계승의 우선 순위를 가르쳐주면 됩니다.”
안키세스의 말은 사리에 맞았다.
프리아모스는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안키세스가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자신에게 말 걸기 전까지.
뭔가 불안하고 아쉬울 때의 제스처다.
“저도 제 아들에게 왕자들과의 친분을 주고 싶습니다.”
고로,
“아이네이아스도 그 여정에 같이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렵지 않은 일이다. 프리아모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안키세스는 적절한 타이밍이라고 본인이 생각한 시간에 절을 올리고 물러났다.
정말로 이제는 프리아모스 혼자다.
‘···어차피, 아이네이아스도 함께하는 게 맞았다.’
안키세스와 아이네이아스 본인들부터가, 가장 강력한 왕실 가문의 지배자들이자, 설득해야 할 1순위 인사들이었다.
거기에 헥토르, 파리스로 인해 필연적으로 흔들릴 왕위 계승에 대한 원칙을 바로잡으려면 한번쯤은 왕국을 순방시키면서 첫째 왕자의 권위를 살려주는 게 좋겠다.
···마지막으로, 파리스.
이렇게 셋.
세 사람을, 안탄드로스로 보내는 겸하여 순방을 돌린다.
“그동안 나는···“
그들을 위해 상황을 ‘정리’해 놓는다.
어쩌면 오랜만에 트로이아에서 사형수가 대거 발생할지도 모르겠다.
***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나는 출격 직전의 비밀요원처럼 철저히 정체를 숨겨야 했다. 내가 고생할 필요는 없었다. 밀명을 받은 몇몇 시종들이 알아서 해줬으니까.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내가 트로이아의 무수한 동맹국 중 한 곳의 왕자라 둘러댄다.
내 동선은 주위의 이목을 끌지 않도록 철저히 통제된다.
물론 안키세스와 함께 돌아오는 순간부터 모두에게 내 입성을 숨기기는 어려워졌겠지만, 적어도 그 소문이 불 붙듯 퍼져나가는 일은 막는다.
그리고, 차즘차즘 ‘저주받은 왕자’에 대한 소문이 사람들의 귀에 들려오기 시작할 때쯤.
“파리스 님, 준비되셨습니까?”
“어··· 그래, 내 호위로는 테오를 쓸 수 있을까?”
“포다르케이아의 테오 말씀이십니까? 전해 놓겠습니다. 여기, 망토를 둘러드리겠습니다.”
“내가 한다니··· 아닐세. 부탁하지.”
나는 준비가 끝났다.
안탄드로스에서는 구할 수 없을, 한 올 한 올 촘촘히 짜인 모직 망토가 내 어깨를 두른다.
현미경으로 들여다 봐야 할 만큼 장식이 빼곡이 들어간 금 브로치로 그 망토를 고정한다.
장미수로 세안하며 때를 벗긴 뒤, 얼굴과 머리칼에 향유를 발랐다.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테오가 가볍게 칼을 차고서 내 주위를 훑는다.
“출발하자.”
곧 나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고.
넓은 회장의 수많은 시선들이 이 낯선 참가자에게 집중된다.
내 외모가, 내 사치스러운 복장이, 궁전 안에서 대놓고 호위를 대동한 행태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천천히 그 사이를 걷는다.
눈을 잠시 감자, 안탄드로스 근처의 양치기 마을이 떠오른다. 필리포스 아저씨가 테오 형과 양의 창자를 구워먹고, 내 진짜 어머니와 아버지가 양을 치며 장작을 패던 그곳.
다시 눈을 뜬다.
나는 내 친부, 프리아모스와 친모, 헤카베의 앞에 서 있었다.
거기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모두에게 들리도록 외친다.
“아버지,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프리아모스와 헤카베는, 마치 날 처음 보는 것처럼 충격에 빠진 얼굴로 끌어안았다.
연습한대로, 프리아모스는 외쳤다.
“오늘은 나의 삶 중에 가장 기쁜 날이오. 신들이 나를 사랑하는구려!”
눈물을 흘리며 마찬가지로 외쳤다.
“잃어버린 내 아들이 이렇게 돌아왔으니!!”
···물론 이쯤 되었으면 이 연회장의 3분의 1은 내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왕자라니. 소문이 사실이었나?”
“아폴론 맙소사, 줄을 댈 왕자가 또 하나 늘었다고?”
“자네들, 그 신탁에 대한 소문 들었나? 아···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니군.”
그들 역시 서로를 위해 모르는 척해준다.
정치란 게 이렇듯 피곤하다.
이제야 공식적으로, 아겔라오스의 아들 파리스가 프리아모스의 아들 파리스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안키세스의 호언장담처럼 무수한 악수의 요청이 쏟아진다.
내가 머무는 궁전의 문 앞으로, 나를 가장 가까이서 호위한다고 알려진 테오의 면전으로, 매일 같이 유력가들이 보낸 시종들이 초대 인사를 남기고 갔다.
당연히 모두 거절했지만.
나는 가야 할 곳이 있으니까.
이윽고 포고꾼들이 트로이아 길바닥을 뛰어다니며, 모두에게 외쳤다.
“프리아모스의 둘째 아들 파리스는, 즉시 안탄드로스의 군주로 임명되었다!”
“헥토르, 아이네이아스는 그와 함께 도시들을 순방하며 번국들의 충성을 다시금 확인하고 그들과의 우애를 다지라!”
곧, 출발할 날이 다가왔다.
***
트로이아를 떠나기 전날 밤, 다시 궁전의 문이 활짝 열리고 환송을 위한 연회가 열렸다.
한참 왁자지껄한 시간이었다.
모두들 내게 아는 체하려 들어서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접객을 하고 나서야 사람들도 지쳐 나자빠졌다. 하나둘씩 피곤에 절은 몸을 이끌고 왕과 왕실에 축복을 남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쯤 되었을 때야,
“아버지, 어머니?”
주최자라 볼 수 있을 나와 프리아모스, 헤카베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우리 세 사람은 한산해진 회장을 빠져나와, 인적 드문 복도를 골라 함께 걸었다.
“내일이면··· 떠나는구나.”
내 친어머니 헤카베가 소매로 눈물을 찍어내며 울먹였다.
“너를 다시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장성한 아들이니 이렇게 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만···”
못내 아쉬운지 헤카베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나를 몇 번 끌어안고 놓아주기를 반복했다.
나는 등을 토닥이며 그녀의 울음을 달래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내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대고는 말했다.
“잘, 다녀오렴. 아버지와 대화 나누고 있거라.”
그리고 방으로 돌아갔다.
이제 나와 프리아모스뿐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내 방으로 안내했고,
“운 좋게도, 안탄드로스 출신인 상인들이 몇몇 보이더군요.”
그에게 준비해둔 상자를 보여주었다.
“그 상인들에게 제 신분을 걸고서 사온 제물들입니다.”
프리아모스는 의아한 듯, 호위병들을 물리고서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리고는 떨리는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
3살배기 아기가 두세 명 들어가서 누울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상자.
그 속을 가득 메운 황금과 강철.
“제 부모님의 몫입니다. 아버지께 드리겠습니다.”
“우리의, 몫이라고?”
“아··· 아뇨. 말실수를 했군요.”
나는 상자를 닫으며 프리아모스에게 다시 말했다.
“제 ‘부모님’의 자유를 사는 값입니다. 그 주위의 모든 땅과, 짐승과, 집과 집기들까지 모두요.”
내 말을 한동안 이해하지 못하던 프리아모스는 곧 머리를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그 다음으론 쓰게 웃었다.
“그래, 네 ‘부모’ 말이더냐?”
“예. 그와 함께 주위 133명의 양치기들의 자유까지 모두 사겠습니다.”
“···.”
“제 부모님이니까요. 그리고 제 이웃들이니까요.”
“아겔라오스와 리시마케가 말이지. 그 주위의 내 소유 노예들 모두가.”
“아버지.”
나는 프리아모스의 차가운 손을 쥐었다.
무수한 삶과 죽음 속에서 트로이아를 재건해낸 주름진 두 손을.
“제게는 아버지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돌아보니 창밖으로 구름이 걷힌 채였다.
달빛이 방 한가운데 고이더니, 금화가 그를 마시고 불처럼 환히 빛났다.
“제가 여기까지 오게 만든 건, 제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내 말을 들은 프리아모스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잠시 뒤로 물러서더니 말했다.
“내가 저 돈을 받아야 하겠느냐? 그저 선물로 아겔라오스와 다른 노예들의 자유를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냐?”
“네, 제가 제 손으로 되사고 싶습니다.”
“그래. 잘 알겠다, 내 아들···.”
프리아모스는 굳은 표정을 풀고 웃었다. 어쩐지 처연해보였다.
“나도 언젠가 네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있기만을 바라마.”
이제 트로이아에서 해결해야 할 모든 일을 끝냈다.
프리아모스도 수마와의 싸움에 지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으니, 나는 다시 회장으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역시 기운이 빠진 아이네이아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출발이다.
“저 밖에서 헥토르 형님이 기다리신다, 아이네이아스.”
다시 안탄드로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