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62
62화. 고향 (4)
“이제 곧 있으면 안탄드로스의 권역 바깥이군요.”
10년 넘게 부임해온 도시라면 그래도 정들어서 발을 못 떼겠고 하는 기색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싶었지만, 니키스 총독··· 아니 전임 총독은 기뻐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사실 그럴 수밖에.
알아 보니 그렇게까지 대단한 가문 출신은 아니던데, 10년 동안 시골에 처박혀 있다 돌아갈 때가 되니 어마어마한 업적과 왕자라는 든든한 빽을 챙겨 금의환향하게 생겼다.
···뭐, 하기사 나도 안탄드로스에 돌아올 때 그런 설레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으니 이해한다.
스클레오스와 아노이토스, 그 외의 다른 이들에게 작별 인사를 전하고 나온 지금은 이미 예전 얘기지만.
안탄드로스 성벽의 북문 너머로 난 길을 따르다보면 이다 산의 기슭까지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되어 있다.
당연히 산골짜기로는 갈 수 없으니 곧 길은 서쪽으로 꺾어 이다 산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데···
“자, 그럼 이쯤에서 잠시 멈추죠.”
나는 그렇게 말하며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무슨 일이지?”
“출발하기 전에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 원래 가족들에게 인사를 전해야 하겠다고요. 혼자 조용히 다녀오겠습니다.”
“그럼 호위라도 붙이고 가지. 아니면 나라도 따라가는 게 낫겠어.”
“이 근처 요정들이 전부 제 사업상 동료들인데요, 뭘. 뭐가 위험하면 다 알려줄 겁니다.”
내 말을 듣는 헥토르의 표정이 어쩐지 묘하다.
“일단 같이 가자고. 다들 여기서 대기하고 있게!”
“알겠습니다, 헥토르 님.”
“아니, 형님까지 가시면 위험하지 않···”
“방금 네가 말했잖아. 여긴 네 구역이니 안전할 거라고.”
외통수다.
나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결국 달갑지 않게 헥토르라는 혹을 달고 고향마을로 향했다.
어머니, 아버지께 인사를 올리고, 자주 찾아뵙겠다 말씀드리고.
다른 마을사람들한테는 금화 움쿰씩 쥐여주면서 애들 좀 잘 먹이고 잘 키우라고 얘기해두고.
그리고··· 뭐, 별일 없었다. 평생 헤어지는 것도 아니니. 주기적으로 찾아올 거기도 하고. 전화만 없을 뿐이지 서울로 자취생활하러 가는 지방민이랑 별 다를 바 없었다.
곧 마을 사람 모두에게 인사를 마친 뒤, 우리는 이다 산 근처의 언덕배기까지 나왔다.
이쯤에서부터는,
“저는 마지막으로 볼일이 있어서 형님 먼저 가 계세요.”
나 혼자인 편이 나았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헥토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형님?”
“···파리스, 내가 이야기 하나만 해도 될까?”
“형님? 갑자기 무슨···”
“가문이 빚을 너무 많이 져서, 한 여인이 다른 집안에 팔려가듯 혼인을 하러 가게 되었어.”
헥토르는 근처의 그루터기에 걸터앉으며 목을 꺾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는 어릴 적부터 사랑하던 남자가 있었지.
이 여인이 집안이 정한 대로 혼인을 하게 되면 가문은 지킬 수 있겠지만 사랑을 저버릴 것이고.”
헥토르는 나를 측은해하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왠지 목이 타서 물주머니를 꺼내 입에 찬물을 털어넣었다.
“사랑을 택하면, 가문이 무너지고 가족들이 채권자의 노예로 전락하겠지.
이 여인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형님?”
“지금 만나려는 게 그 요정 맞니?”
나는 마시던 물을 뱉어버렸다.
“크헉, 컥, 커어어어억···.”
“괜찮아?”
“아니, 아니 그···건 어떻게?”
“너 없을 때 아이네이아스가 구석에서 혼자 울먹이면서 뭔가 중얼거리던 거 몰랐구나? 내가 그 근처로 가서 뭐라고 중얼거리는지 엿들어도 전혀 눈치 못 채던데.”
“하···.”
“오이노네라고 했던가? 이다 산의 요정이라고 들었는데.”
“···맞습니다.”
“선택은 네 자유지만, 적어도 잘 해야 한다.”
“그런 사이 아닙니다.”
“그렇겠구나. 그래서 홀로 만나려고 했던 건가?”
“···.”
사람 참 여러 번 할 말 없게 만드네.
내가 살짝 노려보자 헥토르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말했듯이, ‘그런 사이 아니’든, 뭐든 간에 선택은 네 몫이다.”
“···그럼 형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나는 선택하지 않아.”
헥토르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눈빛은 얼음이 얼듯 차가웠다.
“나한테는 의무가 전부니까. 아니, 의무가 곧 나지.
나는 내 아내 안드로마케를 사랑해야 했고, 실제로도 사랑했고, 지금도 그렇다. 앞으로도 그렇겠지. 아직 혼인한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
“나도 모든 사람이 나처럼 살 수 없다는 건 안다. 사람의 마음이란 신들의 변덕에 약하지. 에로스께서 어디에 화살 끝을 돌리실지 네가 어떻게 알겠니.”
헥토르는 그루터기에서 일어서더니 내 어깨를 투닥투닥 두드렸다.
“중요한 건 네 선택이지.”
“저한테, 꼭 선택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오이노네라는 요정이 아프로디테 님께서 약속하신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맞니?”
“···모르겠네요.”
“모르겠다, 라.”
헥토르는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뒤돌아서 마차가 멈춰선 곳을 향해 걸어나간다.
“그래, 그럼 혼자 만나고 있어라! 나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괜히 헥토르의 말 때문에 기분만 찝찝해진 채 나는 이노를 기다렸다. 괜히 근처의 돌부리를 발로 차면서 시간을 죽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스?”
“이노.”
바람을 타듯, 이노는 들판을 가볍게 뛰어온다.
“떠난다고? 같이 있는다면서!”
“일이··· 좀 꼬였어. 꽤나 오랫동안 다녀올 것 같네.”
“방금까지 네 옆에 있던 건?”
“아, 내 친형.”
나는 헥토르가 떠나간 방향 쪽을 바라보면서 헥토르가 했던 이야기를 곱씹었다.
-“선택은 네 자유지만, 적어도 잘 해야 한다.”
잘한 선택이란 게 뭔가?
원래 역사 속 파리스처럼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고 끝을 보는 것?
아니면 오이노네랑 같이 산골에 파묻혀 서로 장난이나 치면서 늙어가는 것?
나는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니 오이노네가 당황한 얼굴로 서 있다.
“무슨 일이야? 왜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어디 아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아무튼 괜찮아.”
“그럼 이번에 가면 언제쯤 돌아오는 거야?”
돌아올까?
그게 내가 안탄드로스에 오지 않겠다는 소리는 아니다. 나는 대장간을 관리하기 위해서든, 군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든, 부모님을 뵈러 오기 위해서든 나는 안탄드로스에 올 거다.
그런데 그때마다 이노를 만나느냐는··· 다른 이야기다.
-“선택은 내 몫이다.”
내 몫이 어딨다는 건지 모르겠다. 아프로디테와 에로스는 내 허락도 없이 내게 금화살을 쏴서 헬레네와 사랑에 빠지도록 만들 수 있다.
헤라와 아테네는 어떻게든 분노를 표출하고자 그를 빌미로 아카이아 연합군을 소집하여 트로이아를 무너뜨릴 수 있다.
여기서 내 몫의 선택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이노? 내가 말이지··· 왕자가 된단 말이야? 그럼 너무 바빠서···”
“나도 바보 아냐.”
“···.”
“네가 여기저기서 너희 친형이라는 사람이랑 얘기한 거 들었어.”
이노는 내 말을 자르고 한 발짝 다가온다.
“전쟁? 외교? ···그런 얘기들.
돌아올 때까지 아주 오래 걸릴 수도 있는 거 알아. 그냥 똑바로 얘기해줘.”
“난···.”
“물론 자주 돌아오겠다고 약속하면, 지난번에 제대로 말도 안하고 오랫동안 자리 비운 거 용서해줄 거지만!”
용서받을 수 있을까,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에 대해서?
나는 이노의 어깨를 잡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그리고 잠시 저 서쪽, 해가 뜨는 반대 방향을 바라본다.
저곳에서 죽음이 온다.
헥토르의 말대로라면, 이미 아가멤논은 동생 메넬라오스와 헬레네를 결혼시키려 벼르고 있다.
아카이아에서 트로이아까지 소식이 전달되어 오는 속도를 따진다면, 어쩌면 벌써 둘은 결혼했을지도 모르고.
아프로디테는 내게 헬레네를 주어야 한다.
나는 ‘여신의 선물’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오이노네는···
“대답은?”
나는 눈을 질끈 감는다. 눈앞에, 한번도 보지 못한 아가멤논의 얼굴과 히타이트의 군세가 환상처럼 떠오른다.
다시 눈을 뜨자 눈앞에는 오직 오이노네, 이노뿐이었다.
“···응.”
나는 해선 안 될 약속을 했다.
“왕자님처럼 살다가, 가끔 질리면 돌아올게.”
“아주 빨리 질리게 될 거야. 거기선 너랑 같이 놀 사람이 없으니까···.”
“맞아.”
나는 이노의 말에 웃었다.
“아마 아주아주 빨리 질리겠지.”
히타이트, 아카이아, 아가멤논, 헬레네···
잠시 잊기로 했다.
***
안탄드로스로부터 이어지는 도로의 서쪽 끝에도 항구 도시가 있다.
아소스.
도로로 연결된 도시 중에서 안탄드로스에서의 거리가 가장 먼 항구, 가장 경비가 허술한 곳이다.
아직 어둑한 시간, 물안개 끼는 바다, 뭍으로 반쯤 끌어올려진 채 흔들리는 배들.
그 사이에서 속삭이는 사람들.
한 마디씩 할 때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누가 보아도 떳떳지 못한 느낌을 주었다.
“자네는 어디 출신이지?”
“안탄드로스. 그러니까 요새 이거 만지면서 살지 않겠나?”
그리 말하며 얼굴을 가리는 모자를 뒤집어 쓴 상인은 꾸러미를 던진다.
그의 거래 상대는, 혹여나 꾸러미가 바닥에 떨어질까 공중에서 겨우 붙잡는다. 꾸러미 안쪽으로부터 ‘쩔그럭’ 하고 금속음이 울려퍼진다.
“이봐, 미쳤어? 소리라도 울리면 나중에 어쩌려고 그래?”
“요새는 경비들도 설렁설렁 일한다네. 그것들이 마지막으로 제대로 순찰을 돈 게 벌써 보름 전일세.”
“미쳤군. 밀수꾼이라도 들이닥치면 어쩌려고?”
“그 소리를 밀수꾼이 하고 앉아 있나?”
“나라도 걱정해줘야지. 안 그럼 누가 걱정하겠나?”
밀수꾼은 모자를 뒤집어 쓴 상인에게서 꾸러미를 전해받은 뒤, 뒤편의 쪽배에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아무튼 젠장, 더럽게 부럽구만. 나도 안탄드로스 출신이었으면 지금쯤 밀수 따위 안 하고도 천금을 만지고 있는 건데.”
“아서게. 결국 운 좋은 놈들이 독식하는 것 아니겠나? 그리고 자네 정도면 운 좋지. 아직까지 들키지도 않고서, 아소스에 이렇게 믿을 만한 짝패를 구해놨으니.”
“믿을 만한?”
“그래.”
밀수꾼의 표정이 급변하더니, 이내 등 뒤에서 칼을 꺼내 상인의 등에 내다꽂는다. 적절한 위치, 상인은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낼 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후, 후우우··· 좆이나 까게. 믿을 만했으면 불량을 섞어놓지 말았어야지.”
그는 방금 배에 실어놓았던 꾸러미를 열어보며 그 속에 ‘믿을 만한’ 짝패였던 상인이 넣어둔 돌멩이 따위를 바다에 던져넣는다.
“젠장, 어두워서 잘 안 보인다고 또 이따위로··· 다른 거래상대 텄으니 자네랑은 이제 안녕이라 이 말일세.”
밀수꾼은 이 시대의 상인이 그렇듯 손해보지 않는 장사의 비결을 알았다.
적당한 무력을 가지고 있으면 손해보지 않는 거래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으면 그냥 뺏어도 된다.
이는 15세기 조선과 명나라 해안을 털던 왜구들부터, 대해적시대 카리브 해의 해적들까지 모두가 가진 상식이었다.
그는 오늘도 0:1이라는 파격적 교환비로 통쾌히 거래를 진행해준 동료에게 감사인사를 보낸 뒤, 그를 포세이돈의 영토로 던져주었다.
이제 그의 죽음을 물고기와 따개비들이 함께 지켜봐주리라.
그는 낮은 음으로 휘파람을 불며 돛을 펼치고 선원들에게 명령을 시작한다.
그들은 이미 매수해놓은 경비가, 그들이 방금 진행한 ‘거래’와 같은 짓을 하기 전에 빠르게 도망치듯 아소스를 떠난다.
검은 물결을 해치고, 그들은 레스보스 섬에 들러 식량과 물과 선원을 채우고, 그들의 ‘상품’을 일부 처분한다.
그러나 어쩐지 주는 값이 헐하다. 만족하지 못한 그들은 조금만 더 멀리 가보기로 한다.
그 다음에 그들이 가본 곳은 히오스 섬. 왠지 이름부터 재수 없는 이 섬은 레스보스 섬보다도 훨씬 인심이 나빴다.
이 귀한 것들을 ‘고작 금값’에 사들이려 하는 깍쟁이들에게 온갖 저주을 내뱉고, 내친 김에 침까지 뱉어준 그들은 이내 스키로스 섬까지만 더 가보기로 결심을 해본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그들이 지닌 행운의 전부였다.
스키로스 섬까지 가는 뱃길에서 해적질에 종사하는 동종업자들을 마주한 것이다.
결국 그들 역시 바다에 붉은빛을 뿌리며 추락했고, 그들의 ‘상품’은 또다른 상인의 몫이 되어 사방을 떠돌게 된다.
‘상품’의 새 주인들은 이 막대한 물량의 철괴를 보고 기겁하여, 절대 한 곳에서 처분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이전 주인과 달리 과욕을 부리지 않았다. 해안가를 떠돌며, 강철을 조심스럽게 처분한다.
스티라, 카리스토스, 안드로스 섬을 지나 아테네, 메가라, 티린스를 거친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철괴를 본 상인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묻는다.
“이, 이런 물건은 어디서 구했나?”
당연히 그들은 출처를 모른다. 대강 자신들이 약할한 불운한 배가 왔던 방향을 기억하며, “뭐, 이런 물건은 보통 동쪽에서 오기 마련이지.”라 얼버무릴 뿐.
마치 거인이 두들겨낸 듯 순도 높고 질긴 강철을 본 대장장이들은 경악감에 몸을 떤다. 그들 역시 출처를 묻지만 “동쪽.”이라는 답밖에 듣지 못한다.
티린스에서, 내륙으로 조금씩 강철은 흘러들어간다.
가까운 도시, 미케네로.
“왕이시여, 실로 당신의 고귀한 성품에 어울리는 순정한 강철검입니다.”
“···놀랍군.”
왕은 의뢰를 맡긴 검의 품질에 크게 만족한다.
그 또한 미케네 대장장이들의 대단찮은 솜씨를 안다.
그렇기에 한번쯤 호기심에 귀한 강철검을 주문했을 때 그 결과를 대강 예상했다.
허나 지금 나온 결과는 그 이상이었다.
“실은, 바로 얼마 전에 아주 상등품의 철괴를 구하여 그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왕의 빛나는 눈을 보아하니, 사정 설명이 없다면 앞으로도 이대로의 품질을 찍어내라 주문할 것이 뻔하다 여긴 대장장이들이 알아서 고해다 바친다.
“아주 상등품의 철괴?”
“예, 평소 거래하던 이들 역시 이런 물건은 처음 본다고 하여···”
“어디서 만든 거라고 하더냐.”
“그건 자세히는···”
“어디라더냐.”
“···아카이아 바깥, 동쪽이라 하옵니다.”
아카이아의 동쪽이라 하면 얼마나 넓은가? 저 트라키아부터 히타이트, 아시리아까지 모두가 저 동쪽이 아닌가.
왕은 조용히 대장장이들을 물린 뒤 홀로 남아 저 동쪽의 지명들을 입 안으로 굴려본다.
“프리기아, 트라키아, 미시아, 리디아, 리키아, 트로이아···.”
트로이아.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맛이 가장 입 속에서 오래 남는다.
한 번은 거세게 한 번은 여리게.
두 번 입천장을 두드리며 나오는 그 이름을 다시 읊어본다.
“트로이아···.”
동쪽.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은 동쪽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