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swordsmanship instructor at the Fantasy Academy RAW novel - Chapter 165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165)
군대를 다녀와선 다시 건설 현장 일을 하곤 했지만 공치는 날이 많았다.
꾸준히 일도 있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는 조선소를 택했다.
하지만 조선소라고 모두가 돈을 많이 버는 건 아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팀으로 운영되는 곳에 가서 일당을 받아야 돈을 많이 버는데 나는 회사로 들어가서 시급제였다.
일도 건설 현장보다 훨씬 힘들었다.
기본적으로 만드는 배들이 유조선, 화물선 같은 거대 선박이라 이동 거리가 무지막지했다.
하루에 최소 2만 보 이상?
거기다 사무실, 현장, 식당도 다 너무 떨어져 있었다.
배는 온통 쇠로 되어 있다 보니 잘못 부딪치면 뼈가 시릴 정도로 아팠고.
일했던 곳은 도장 파트라 독한 페인트 입자가 둥둥 떠다니고 신나 냄새도 항상 코를 괴롭혀 마스크 착용이 필수였다.
일주일만 하고 탈주할까 생각도 했다.
한 달도 못 버티고 퇴사하면 가족들 얼굴 볼 낯이 없다고 생각해 버텼다.
기대하고 기대하던 첫 월급날. 한 달을 다 채운 것도 아니고 시급제라 돈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기뻐하며 기숙사에서 치킨이라도 사 먹으려던 찰나,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얼마 안 되지만 첫 월급이니 용돈이라도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말을 할 것도 없이 먼저 이야기가 나왔다.
돈 좀 있냐고. 빚 갚아야 하니 200만 달라고.
군대에 다녀오고 나서 어느 정도 집안 사정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죽겠다는 소리를 하시기에 200은커녕 150도 안 됐지만 첫 월급에서 100만 원을 드렸다.
그 뒤로도 종종 내게 돈을 달라고 요구하셨고 나는 최소한의 생활비만 제외하고 돈을 보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참 좋았다.
스물셋으로 군대도 다녀온 어엿한 성인이었지만 다른 분들이 보시기엔 완전히 애였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젊은 형이 일찍 결혼해서 30대 중반의 초등학교 다니는 딸을 둔 아빠였고 나보다 나이 많은 자식을 두신 분들도 여럿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다들 너무 잘 챙겨 주셨다.
특히 같이 일하는 형들은 외국인 노동자들만 주로 거주하는 공단 기숙사에 살던 내가 안타깝다며 시내로 데려가 술을 사 주고, 같이 당구도 치고, 저녁도 많이 사 주셨다.
여름 휴가 땐 같이 계곡에 가서 고기도 구워 먹고.
같은 기숙사에 살던 외국인 노동자 친구들도 처음엔 어색했지만 지내다 보니 순박하고 착해서 잘 어울렸다.
자기들 방에 초대해서 자기 나라 음식도 해 주고.
고구마같이 팍팍하기만 했던 삶에 한 줄기 사이다였다.
그러나 고구마는 끝나지 않았다.
두 번째 월급을 받기 며칠 전 한창 일하던 중에 누나에게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돈이 없다고 용돈을 안 보내 줘서 생활이 어렵다고, 졸업반이라 취업 준비 하려면 아르바이트를 같이 하는 건 힘든데 혹시 매달 돈 좀 보내 줄 수 있겠냐고 요청했다.
얼마가 필요하냐고 물어보니 20만 원 정도만이라도 보내줄 수 있냐고 하기에 알겠다고 했다.
서울로 대학 가고 왕래도 거의 없고 평소에 그리 사이가 좋지도 않았는데 연락을 한 거면 많이 힘들어서 그런 걸 테니까.
대학교 4학년이 20만 원 가지고 생활이 될까 싶었지만 나도 더는 여력이 없었다.
너무 힘들고 그만두고 싶었지만 집안 사정이 안 좋다는 걸 알게 된 이상 그만둘 수 없게 됐다.
오히려 특근까지 자처하며 평균 320시간, 많게는 한 달에 400시간 가까이 일했다.
물론 저 시간을 실제로 다 근무한 건 아니고 매주 붙는 주휴 수당 8시간에 1.5배로 시간이 붙는 야간 수당, 주말, 공휴일을 포함한 거다.
그래도 거의 한 달에 많으면 이틀이나 하루 정도 쉬었던 것 같다.
조기 출근도 지원자를 뽑으면 매번 하겠다고 했고.
요청할 때마다 아버지에게 돈을 보냈고 누나에게는 매달 꼬박꼬박 월급날마다 돈을 부쳤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아마 어제 나는 돈이 없어서 누나에게 세 달 정도만이라도 한 달에 15만 원씩만 보내 달라고 이야기를 했을 거다.
늦어도 세 달 정도면 지금 쓰는 글의 수익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조선소를 1년만 다니고 그만뒀지만, 다행히 누나는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했다.
당장 작년에 일하며 매달 20만 원씩 1년 동안 보내기도 했었고 등록금과 기숙사비도 8학기 내내는 아니지만 초기는 거의 절반 정도, 중간에도 전부는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보탰으니까.
15만 원 정도는 보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거절.
누나가 내게 돈을 요구 했을 때, 나는 망설이지 않고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하지만 누나는 자기도 전셋집 구하고 취직한 지 얼마 안 돼 돈이 없다며 엄청나게 신경질을 내면서 거절했다.
전셋집 구한 것도 엄마에게 부탁해 아파트 담보로 대출받아 6천을 빌려준 걸 나는 알고 있다.
오히려 월세 살 때보다 훨씬 적게 나간다는 것도.
사회 초년생에게 15만 원씩 세 달간 돈을 보내 달라는 건 무리한 요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누나에게 매달 줬던 20만 원 역시 23세 이민찬의 청춘을 조선소 하청업체에서 갈아 만든 돈이다.
아빠에게도 뜯겨 가면서 먹고 싶은 거 안 먹고, 사고 싶은 거 안 사고….
이때 깨달았다.
내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게 하등 부질없는 일이었다는 걸.
누나와 연락을 끊은 게 이 일 하나 때문만은 아니지만 상당한 영향을 줬다.
애초에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
아버지야 원래 그런 사람이니 그러려니 했지만, 누나는 아니었으니까.
이게 트라우마였구나.
해결책도 바로 감이 온다.
“형, 치킨 시키지 마?”
아니. 치킨은 먹어야지.
“아니, 형이 나가서 사 올게. 개맛있는 데 알아.”
“진짜? 귀찮다고 밖에 잘 안 나가면서…. 알았어.”
내가 과거로 돌아온 것도 아니고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진짜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조금 더 같이 있고 싶다.
부모님과 의절했을 때 자기는 능력이 없어 따로 나가 살 수 없지만 나를 이해한다고 말했던 건 이 녀석뿐이었으니까.
치킨이라도 사 주고 싶어 기다리라 하고 바깥에 나와 20분 정도 걸으니 호프집이 하나 보인다.
군대 가기 위해 일을 정리하고 집에 왔는데 일자를 잘못 알아서 근처에 아르바이트 할 곳을 알아보다 두 달 정도 일했던 곳이다.
혹시 못 알아보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사장님도 사모님도 나를 한눈에 알아보셨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사정을 설명드렸다.
휴대폰 인터넷 뱅킹 어플로 청약 통장도 보여 드리며 내일 돈 가져다 드릴 테니 치킨 1마리만 포장해 주실 수 있겠냐고 요청했다.
“오랜만에 왔는데 치킨 1마리는 그냥 줄 수 있지. 잠깐만 기다려.”
“아니, 그러면 제가 너무 죄송한데….”
“죄송하긴. 군대 간다고 그만둘 때도 너무 바빠서 제대로 챙겨 주지도 못한게 늘 마음에 걸렸어. 우리 민찬이는 일할 때 정말 열심히 잘해 줬잖아.”
“감사합니다.”
물론 나도 그나마 안면 있는 사장님께 찾아와 부탁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이야기를 한 거지만 여기서 일한 건 고작 두 달.
조금 감동이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무지하게 맛있게 튀겨 줄 테니까. 그리고 청약은 웬만하면 해지하지 말고. 오래돼야 당첨 확률도 높아지는 거니까.”
“아, 네.”
나도 알지만, 의미 없다.
내가 없는 살림에 2만 원으로 줄여 가면서도 꿋꿋이 죽기 전까지 유지하고 여기저기 추첨을 넣었지만 당첨되는 일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포장된 치킨을 가지고 집에 오니 동생이 참 좋아했다.
프랜차이즈는 아니지만 손님들이 꽤 많은 호프집에서 가장 잘나가던 메뉴니까.
양념도 넉넉하게 주시고 콜라까지 큰 거 서비스로 주셨다.
일 구하고 있으면 주말 알바라도 하라고 권유도 해 주시고….
“형, 안 먹어?”
“먼저 먹고 있어. 컵 가져올게.”
신나서 치킨을 먹는 동생을 보니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아마 내가 죽었을 때도 이 녀석이 가장 먼저 발견했겠지.
연락도 그나마 제일 자주하고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목욕탕을 같이 가기도 했으니까.
혼자서 내 뒤처리를 했을 생각을 하니 미안하기도 하고 감정이 조금 센치해지려 한다.
“더 안 먹어?”
“아까 라면 먹었더니 배 불러서. 형 나갔다 온다.”
“또 담배 피우러 가? 좀 끊어. 폐암 걸려.”
이미 끊었다고 말하려다 그냥 한 번 웃어 주고 집을 나왔다.
동생 얼굴도 봤고 치킨도 먹었으니 이젠 돌아가 봐야 할 시간이다.
바로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또 뭐? 나 진짜 돈 없어.
내가 또 돈 받으려고 전화한 줄 아나 본데 내가 생각한 트라우마 해결책은 돈을 받아 내는 게 아니다.
애초에 선인세를 제외하면 수익이 나오기까지 한참 걸리는 편당 결제와 달리 정액제 시장은 한 달만에 글 수익을 받을 수 있어서 이런 부탁을 할 필요도 없었다.
“이세라 넌 양심이란 게 없냐?”
―뭐? 야, 이민찬! 너 지금 말 다 했어?
“다 안 했다. 그딴 식으로 이기적으로 살면 좋냐?”
―그깟 15만원 안 준다고. 지금….
“안 주면서 그깟이라고 말하는 게 우습네. 필요 없어, 양심 없는 년아. 평생 그렇게 이기적으로 살아.”
할 말만 딱 하고 전화를 끊었다.
더 말할 걸 조금 약했나 생각하는 와중에 시야가 바뀌기 시작한다.
역시 이게 정답이었구나.
실제로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마음에만 담아 두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이기적인 여자는 내가 자기를 손절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일이 있고 2~3년 뒤에 누나가 내 생일이랍시고 톡으로 10만 원을 보내 준 적이 있다.
아무 반응 없으니 날름 취소하긴 했는데 나중에 동생에게 들은 바로는 돈도 쥐뿔 못 버는 게 인심 써서 챙겨 주니 자존심만 챙긴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죽기 얼마 전 자기 결혼식 때 오라고 하는 걸 무시했을 때나 알았으려나?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당시에는 말을 하지 못했다.
말을 잘하게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방 안에 틀어박혀 글을 쓰면서부터였으니까.
“일찍 나왔네? 최저로 맞췄다고 해도 어려웠을 텐데.”
루미엘 녀석이다.
“내가 도전하고 얼마나 지났어?”
“이틀 정도.”
이틀이면 다행히 별문제는 없을 것 같다.
물론 세진이는 걱정을 하고 있을 거고, 사부에게 등짝을 맞을 것 같고. 루시엘에게도 엄청 바가지를 긁힐 것 같긴 하지만.
생각해 보니 다행이 아닌데?
“대단하네. 진짜 시련도 도전해 보는 게 어때? 너라면 금방 끝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양할게.”
맛보기일지라도 한 번 경험했던 터라 대충 어떤 내용일지 예상이 되니까.
예상이 맞든 틀리든 분명 아예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겠지.
개인적으로 트라우마라는 게 꼭 정면으로 맞서 이겨 내야만 극복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망각이 더 나을 수도 있으니까
“그럼 갈 거야?”
“가야지. 루시엘에겐 안부 전해 줄게. 뭐 따로 할 말 같은 거 있어?”
“시련에 도전하기 전에 했던 말 기억해?”
“어떤 거?”
“초코바 많이 사서 우리 언니랑 나 보러 온다며.”
아, 그랬지.
초코바를 먼저 말하는 걸 보니 언니보단 초코바가 더 우선인 것 같은데….
역시 자매라 그런가?
“루시엘도 아직 마음대로 밖에 나올 수 없어서 가능해지면.”
그런데 여기 와서 루미엘을 만나려면 또 시련에 도전해야 되는 거 아닌가?
혹시 해서 물어보니 예상이 맞았다.
그래도 루시엘만 기원의 문 근처에 보내서 만나게 하는 건 상관없다고 하니 나중에 들르겠다고 약속을 했다.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긴 하지만 워프 마법으로 순식간에 올 수 있으니까.
“아, 그리고 여기.”
루미엘이 작은 주황색 구슬을 하나 건넨다.
어릴 때 구슬치기하며 놀던 딱 그 크기다.
원작에서는 어린아이의 머리만 한 크기라고 나왔는데, 난이도 때문인가?
“이거 어떻게 써?”
“구슬을 쥐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질 거야. 그 정도 크기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겠지만.”
구체적으로 뭘 할 수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루미엘은 시간이 다 되었다며 빛과 함께 사라졌다.
언젠간 쓸모가 있겠지 생각하며 품속에 잘 갈무리하고 캠핑카가 있는 입구로 돌아왔다.
아공간 마법을 사용해 캠핑카를 집어넣고 투명화 마법을 사용했다.
조금 늦긴 했지만 예상 외 소득도 챙겼겠다, 이젠 밖으로 나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