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the Savior of a Perish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1
21화 그림자의 정원 (1)
인과 시계를 확인해 보니, 움직이지 않고 있던 초침이 게이트에 들어온 이후부터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게 한 바퀴 돌면 양자의 탑 입장 시간이 끝이었다. 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반이 넘게 돌아갔으니, 시간 여유가 없는 게 맞았다.
[별일 없을 거다.]스승님이 나를 안심시켰다. 나도 그럴 거라고 믿었다. 윤서진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 중요한 건 내 일이었다.
다행히 내 쪽은 잘 정리하고 갔는지 아훌은 보이지 않았다. 아훌의 시체를 한쪽으로 정리해 놓은 후 바닥에 앉아 손에 든 인과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분침을 한 바퀴 돌리면 된다고 했죠?”
[그래.]내가 분침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돌아오면 내 검 알려 주마.]“약속하신 겁니다. 킬킬.”
내가 검 얘길 했던 게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다녀오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분침을 거침없이 돌렸다. 처음 인과의 시계를 받았을 땐 꿈적도 하지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지금은 분침이 부드럽게 돌아갔다.
한 바퀴가 전부 돌아가자 시야가 흐려졌다.
* * *
눈을 뜨자 석재로 된 동굴로 공간이 바뀌었다. 동굴인지, 아니면 어딘가의 내부인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든 듯한 길들이 쭉 이어져 있었다. 양자의 탑 등반 최고 기록은 10층이고, 1층은 그림자의 정원이라 불렸다.
‘그래도 아훌의 집보다는 환경이 낫네.’
시체와 산소가 없는 지하 땅굴보다 여기가 훨씬 나았다. 창문은 없으나 실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넓었다.
벽을 따라 쭉 걷다 보니, 뚫려 있는 문이 나왔다. 그림자의 정원은 수백 개의 길들, 그리고 길 곳곳에 있는 방들로 만들어져 있었다.
“야! 빌어먹을, 그쪽으로 간다!”
“망할, 고블린 놈!”
“비켜!”
양자의 탑에 오르는 자들은 등반자라고 불렸다. 먼저 온 이들은 방에서 자리를 잡고 고블린을 사냥하고 있었다.
문 너머로 바깥을 흘끔 보던 나는 고개를 확 돌려 못 본 척 지나갔다.
“이봐, 왜 그래?”
“흠. 아니다. 지나가던 뉴비였나 본데?”
“하긴 지금 뉴비 시즌이긴 하지. 내버려 둬.”
다행히 녀석들은 내가 호기심에 쳐다본 줄 알고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림자의 정원은 무척이나 넓었다. 그럼에도 중간중간 어렵지 않게 사람들을 마주칠 수 있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무기에서 손을 떼고 벽에 붙었다. 스승님은 내가 양자의 탑에서 암묵적으로 알아야 하는 규칙들을 알려 줬다.
‘확실히 이런 걸로 악령을 구분하는 거군.’
설명을 들었을 때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왜 이런 걸 알려 줬는지 바로 깨달았다.
확실히 이상한 행동을 하는 놈들이 있다면 나라도 의심할 것 같았다.
‘양자의 탑에서는 살인을 해도 상관이 없단 말이지?’
거기다 시체도 꺼낼 수 없다. 탑이 리셋되면 시체도 사라진다. 이렇게 보니 새삼 게이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뿐 아니라 리셋이 될 때마다 그림자의 정원은 물론 다른 층의 구조도 달라진다.
어쨌든 싸우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덕분인지 미로를 돌아다니는 나를 건드리는 사람은 그리 없었다.
‘신기하긴 하네.’
각성자도 아닌데, 마력을 쓰는 사람들이 탑을 돌아다닌다는 게 말이다. 내 기준에서 이면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괴물이나 외계인 같은 허상의 존재였다.
그러나 막상 마주친 자들은 나와 똑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아씨, 꽃이 있긴 한 거야? 이걸 미로에서 일곱 개나 찾으라니 실화냐?’
스승님이 말한 히든 피스, 즉 업경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건, 1층에 있는 홍예화(虹蜺花)였다. 종종 미로 석재 바닥을 뚫고 꽃과 나무들이 자라는데, 그중 홍예화라는 꽃이 총 일곱 종이 있다고 했다.
빨간색부터 보라색까지 있는 일곱 종류의 꽃을 모은 후에, 요정 파인더에게서 나오는 가루를 바르면 히든 필드인 겨울의 숲으로 가는 업경을 만들 수 있었다.
‘미로는 더럽게 넓고, 홍예화는 안 보이고.’
중간중간 꽃이 있긴 하지만 홍예화는 아니었다. 나는 몸을 숙여 꽃잎의 모양을 살폈다.
“꽝이네.”
홍예화는 다른 꽃들과 달리 뒷면에 얼음처럼 결정 무늬가 나 있었다. 종종 무늬가 있는 꽃이 있긴 했으나 찾고 있는 결정 무늬는 아니었다.
어딘가에 있을 거 같으면서도 없는 게 짜증 났다. 설마 스승님이 사기를 쳤을 것 같진 않은데 말이다.
종일 돌아다니느라 지친 나는 그리 크지 않은 크기의 비어 있는 방을 찾았다. 체감상 한 시간 정도는 사람을 만나지 않았으니 오늘은 여기서 눈을 좀 붙여도 될 것 같았다.
타악.
살짝 뛰어올라 천장에 자라 있는 나무 덩굴을 잡아당기며 검을 휘둘렀다. 넝쿨이 떨어지며 손에 잡혔다.
“이건 신기하단 말이지.”
두 달이나 탑에 있으면 식량 걱정을 할 만도 한데, 의외로 탑에는 먹을 수 있는 것들이 하나씩은 있다고 했다.
맛은 보장하지 못해서, 따로 외부에서 음식을 챙겨 오는 괴짜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어쨌든 벽에 자라고 있는 이 넝쿨들은 정화의 넝쿨이라 해서 먹을 수 있는 종류였다.
나는 벽에 기대어 넝쿨을 씹어 먹었다. 씹을 때마다 물이 나왔고, 약간 쌉싸름하고 질긴 게 인삼을 먹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엔 뭐 이런 게 있나 싶었는데, 먹다 보니 먹을 만하네.”
맛이 있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긴 하다. 매번 탑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비상용이 아니라면 쳐다도 안 본다는데, 아직 난 그 정도는 아니라 그런지 그냥저냥 괜찮았다.
두 시간 정도 눈을 붙였다. 안전지대가 아닌 곳에서는 PK가 가능하다고 해서, 뉴비나 파티가 없는 자들을 전문적으로 노리는 약탈자도 있었다.
당연히 자는 것도 조심해야만 했다. 그래서 보통은 들어오기 전에 임시로라도 파티를 구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나처럼 혼자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없냐고 하면 그건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잠이 덜 깬 상태로 정화의 넝쿨을 오독오독 씹으며 복도를 걸었다. 복도 너머에서 그림자가 보였다. 걸음을 멈췄다.
‘다섯 명. 파티네.’
파티를 마주친 건 처음이 아니었다. 싸움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검에서 떼고 걸어갔다.
저쪽도 나를 봤다. 딜러 셋에 짐꾼 하나, 그리고 탱커로 보이는 녀석 하나였다.
‘뉴비 파티는 어딜 가나 구성이 비슷하네.’
하긴 여기서도 마법사는 귀하신 몸이었다. 특히 마법사 중에서도 치유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백마법사는 거의 왕족이었다.
나와 뉴비 파티 사이로 긴장감이 흘렀다. 다섯 명이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쪽수에서 밀리기 때문에 내가 먼저 벽에 몸을 기대며 지나가라 고갯짓했다.
조용히 지나가는가 싶던 그때, 딱 봐도 키가 크고 멸치 같아 보이는 사내가 내 앞을 지나가더니 몸을 확 틀었다.
촤아아악.
“이런 썅!”
“죽여!”
“망할, 뉴비 아니었어?”
나는 단번에 멸치 사내의 목을 베어 냈다. 짜식, 약탈을 할 거면 살기라도 숨기고 오든가. 대놓고 ‘호구 새끼’라는 표정을 짓고 오니까 죽지.
나는 곧장 피 묻은 검을 쥔 채 말했다.
“선공은 니들이 한 거다.”
“자, 잠깐…! 실수였어! 실수였다고!”
갈치처럼 생긴 놈이 두 손을 들며 싸울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내가 검을 내리기 무섭게 뒤에 있던 고등어처럼 생긴 녀석이 씩 웃더니 커다란 대검을 휘둘렀다.
“으아아악!”
하지만 이번에도 내 공격이 조금 더 빨랐다. 물러나는 척하면서 반대편 손에 쥐고 있던 돌을 녀석의 얼굴에 맞혔다.
당황한 고등어가 휘청거리며 엉뚱한 방향으로 검을 휘둘러 댔다. 몸을 숙여 밑으로 접근한 후 곧장 심장을 찔러 죽였다.
‘썩 좋은 기분은 아니긴 하네.’
악령이든, 이면세계의 사람이든 살인은 살인이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라는 걸 스승님에게 이미 들었기에 크게 당황하거나 하진 않았다.
어차피 장소만 다를 뿐, 내가 살고 있던 세상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마 오래된 각성자치고 사람 안 죽여 본 놈 찾는 건 드물걸?
게다가 결국 죽으면 인간이나 몬스터나 똑같았다. 하물며 저놈들은 나를 죽이려 했던 자들이다. 살기 위해서라고, 누구나 하는 자기변명을 늘어놓았다.
검을 뽑아내자 거구의 남자가 쓰러졌다. 이후 갈치와 오징어처럼 생긴 놈까지 전부 죽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짐꾼으로 보이는 청년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청년이라고 해야 하나, 이제 막 십 대 중반을 넘긴 소년이었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저기, 뭐든지 할게요!”
“그거.”
나는 소년이 메고 있는 가방을 손가락질했다. 저건 아공간 가방이었다. 그리 크진 않았으나 꽤 많은 물건이 들어간다고 스승님이 알려 줬다.
짐꾼이 필요한 이유는 저층에서는 하급 아공간 가방을 쓰는데, 그런 건 경량화 마법이 걸려 있지 않아 상당히 무겁다고 했다.
‘경량화 마법이 안 걸려 있어도 개꿀이지! 아공간 가방이면 못해도 최소 3만 골드잖아!’
삼천만 원짜리 가방에 눈이 반쯤 돌아갔다.
“두고 가면 살려 주시는 거죠? 제가 탑 바깥에 아픈 여동생이 이, 있어요. 한 번만 봐주세요.”
“알았으니까 두고 가라.”
내가 피 묻은 검을 까닥이자 소년이 가방을 내려놓더니 뒤로 살짝 물러났다.
나는 아공간 가방을 들기 위해 몸을 숙였다. 그때 위에서 단검이 내려왔다.
퍼억.
나는 아공간 가방을 위로 휘두르며 단검을 쳐 냈다. 그러고는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은 채 소년을 죽였다.
“커헉… 대체 왜……”
피를 흘린 소년이 눈을 위로 치켜뜨며 원망 어린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뭘 왜긴 왜야? 내 앞에서 아픈 여동생을 팔아먹어? 너 여동생 있다는 말도 구라지 인마?”
내 말에 사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가까이서 보니 소년의 얼굴이 어딘가 이상했다. 손을 뻗어 그의 피부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손끝으로 팩처럼 고무가 딸려 나왔다.
오징어처럼 생긴, 중년으로 보이는 얼굴이 드러났다.
“이 개새끼가! 너, 우리가 누군 줄 알아?”
“뭐래? 근데 너네 진짜 신기한 거 많이 쓴다.”
약탈자 중에서 동정표를 얻기 위해 인피면구를 사용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아공간 가방도 그렇고, 인피면구도 그렇고, 양자의 탑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물건은 아니라고 했다.
‘들어만 봤지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
예전에 마켓에 경매로 10만 골드에 올라와 있는 걸 구경한 적이 있었다. 막상 보니 돌아갈 때 가지고 가서 팔아 볼까 하는 욕심이 들었다.
‘쩝, 관두자. 가지고 돌아간다고 해도 마켓에 등록도 못 할 텐데.’
안타깝게도 우리 쪽에선 이면 게이트 너머의 물건은 사소한 거라도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나는 차우재의 감시를 받고 있는 입장이지 않은가. 그러니 허튼짓은 그만두는 게 맞았다.
“형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으윽… 뭐, 뭐?”
“사람 몇 명 죽이셨어요?”
내가 묻자 오징어 중년이 무슨 개소리냐며 이를 악물었다. 그가 비틀거리며 일어난 그가 허리춤에 숨겨 뒀던 단검을 나에게 휘둘렀다.
서걱.
내 검이 그의 팔을 잘랐다. 팔이 잘린 오징어가 주저앉았다.
“잠깐, 잠깐, 열… 아니 스무 명. 저기 있는 저 새끼들은 더 죽였어!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건데! 대답해 주면 사, 살려 주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