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 doctor since age 1 RAW - chapter (110)
110화 제2장 해결사(5)
하수진이 퇴근 후 몰래 남기고 간 사직서가 처리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수진의 퇴직 절차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하수진의 부재로 근무표에 구멍이 났지만 간호사들은 오히려 그편을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고로 거의 대부분의 직장은 일 그 자체가 힘든 것보다는 함께 일하는 사람 때문에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으니까.
하수진의 퇴사는 자연적인 퇴사가 아니었다.
몸이 아파서, 정신적인 스트레스 때문에, 집안 사정 등등의 이유와는 손톱만큼도 관계가 없었다.
환자를 학대로 체면을 구긴 것.
다가올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먼저 퇴사한 것이다.
그러니 퇴사한다고 해서 면죄부가 주어질 수는 없었다.
하수진의 퇴사 일주일 후 내가 김빛나에게 들은 희소식은 다음과 같았다.
-하수진은 신원대학교 병원을 포함한 신원대학교 병원의 협력 병원에 취직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
-학대를 당한 환자의 보호자가 하수진을 경찰에 고발했다는 것.
하지만 나는 하수진에게 내려진 이 두 가지 처벌조차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왜냐고?
하수진은 잠시 일탈해서 환자를 학대한 것이 아닌 상습 학대범이었다.
애초에 내가 하수진을 눈여겨봤던 이유 또한 몇몇 환자들에게서 공통되는 멍 자국과 발적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내가 근무할 때 확인한 학대 환자만 무려 4명이 넘었다.
그렇다면 그 전에 하수진이 학대한 숫자는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상상하는 것만으로 분통이 터지고 답답하고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하수진은 본인이 저지른 행동에 빙산의 일각만큼만 처벌을 받았다고, 내가 안타까워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당장은 만족하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겠지.’
어쩔 수 없이 나는 쓰디쓴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하수진을 고발할 증거가 없었고, 하수진이 추가 학대 사실을 인정할 리도 없었다.
그녀가 온전한 죗값을 치르도록 만드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렇게 하수진이 퇴사한 뒤 열흘이 지났다.
간호사들의 표정은 한층 밝아졌고, 이따금 스테이션에서 하하호호 웃음소리가 들어왔다.
하수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타 병동에서 온 간호사는 싹싹하고 일을 잘했다.
그래서 전생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김빛나는 내게 말했다.
꼴 보기 싫은 하수진이 사라지니 요즘은 근무할 맛이 난다고.
그렇게 소아 흉부외과 병동은 평화를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간호사계의 악당 하수진은 병동의 이슬로 사라졌다.
레지던트들은 대부분 순하고 착했으며 나와 김준호의 군기를 잡으려고 들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환자와 보호자 중에 진상이 있어서 스태프들이 개고생한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그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소아 흉부외과 병동은 평화로웠다.
* * *
일요일 오전.
나는 병동 복도 끝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처럼 일요일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쏴아아아.
먹구름 낀 하늘이 이슬비를 뿌려 댔다.
유치하고 흔해 빠진 표현이지만 청량한 빗소리가 몸과 마음을 씻어 주는 듯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알 수 없는 에너지가 차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좋네. 이대로 잠깐 시간이 멈췄으면…….’
내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병원 스태프에게 일요일이란 단비와 단꿈처럼 소중한 시간이었다.
당연하게도 일요일은 과장과 교수들이 출근하지 않았다.
따라서 오전 회진이 없고.
따라서 외래 진료도 없고, 수술 스케줄도 없다.
즉, 일요일은 평일에 비해 해야 할 일이 3분의 1 수준 이하로 뚝 떨어진다는 말이었다.
오랜만에 숨통이 트인 이 순간.
당직 근무가 아닌 레지던트들은 대부분 늦잠을 자고 있었다.
그동안 부족했던 수면을 열심히 보충하고 있었다.
“뭐해? 벌써부터 가을 분위기 내는 거야?”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당직 근무자인 홍선아가 창가 쪽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레지던트 2년 차임에도 일주일에 서너 번씩 당직을 서는 그녀가 가여워 보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죄인이었으니까.
무슨 죄인이냐면… 소아 흉부외과를 전공으로 선택한 죄인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나 역시 예비 죄인이나 다름없었다.
정확히 1년 뒤에 그녀가 쓰고 있는 면류관을 내가 물려받게 될 것이다.
“인턴 시작하고 처음 내린 비라서요. 계속 지켜보고 싶은 기분이 드네요.”
“좋을 때다. 나도 그런 낭만이 있었던 적이 있는데.”
홍선아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뻔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 건가.
“왜 웃어?”
“교수님들이 할 법한 말을 선배가 하니까 그렇죠.”
“1년 차이가 얼마나 큰지 넌 몰라서 그래. 1년이면 없던 애정도 생기고, 있던 애정도 사라지기 마련이라고.”
“그건 인정합니다.”
“어쭈, 네가 뭔데 나를 인정하고 말고를 결정하는데?”
홍선아가 내 옆구리를 꼬집는 바람에 나는 몸을 배배 꼬며 새된 신음을 흘렸다.
손맛이 매워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배, 소아 흉부외과에 11월까지 있어도 돼요?”
“11월? 왜? 픽스(fix)하려고?”
홍선아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후임을 잔뜩 기대하고 있는 그녀에게는 미안했지만 나는 소아 흉부외과에 픽스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저 소아 흉부외과에서 수련하는 시간을 늘려 소아 흉부외과 수술을 좀 더 흡수하고 싶을 뿐이었다.
대가들의 수술 노하우를 흡수하기에 한 달이란 시간은 너무 짧았다.
9개월 정도 수술방 어시스트를 독식한다면.
내가 수술을 직접 한다는 마음으로 지금처럼 적극적으로 수술을 관찰한다면.
대가들의 웬만한 능력은 다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야말로 일반 심장 질환, 폐·식도 질환, 소아 분야, 이 세 가지를 아우르는 완전체 흉부외과의로 거듭나지 않을까.
“소아 흉부외과를 전공으로 결정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길게 수련을 시켜 줄까?”
“…….”
“그런 케이스는 못 본 것 같은데?”
“그거야 그렇죠.”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내 부탁이자 제안이 비정상적이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이건 누구한테 이야기하는 게 좋을까요?”
“일단 넌 기다려. 내가 치프한테 이야기해 볼 테니까.”
“알겠습니다.”
대화를 마친 우리는 사이좋게 창밖을 응시했다.
잠시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았던 게 서운했는지 이슬비는 어느새 장대비로 변해 있었다.
빗발이 굵어지면서 빗소리도 한층 거칠어졌다.
부디 오늘만큼은 응급 환자 없이 모두가 평화로운 병동이 되기를.
나는 마음속으로 빌었다.
* * *
졸린 닭처럼 꾸벅꾸벅 고개를 움직이는 홍선아 옆에서 나는 공부 중이었다.
단 한 번의 콜도 없이 무려 3시간 동안이나!
이는 오로지 일요일에만 일어날 수 있는 기적 중의 하나였다.
1시간 동안은 김용 교수가 보내 준 심전도 파일을 확인했고, 나머지 2시간 동안은 수술을 복기했다.
공부의 백미는 물론 후자였다.
지난 열흘 동안 내가 들어간 수술은 무엇이었는지.
수술의 집도의는 누구였는지.
해당 집도의가 수술을 할 때마다 즐겨 쓰는 수술도구와 약물은 어떻게 다른지.
집도의가 해당 처치를 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수술을 더 빠르고 정교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등등.
소아 흉부외과 대가들이 펼친 수술들을 해체하고 질문하고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소아 흉부외과 수술의 전체적인 맥락이나 성인 수술에서 응용할 수 있는 스킬들을 말이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선 삼다(三多)가 중요하다고 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고.
그 이치는 수술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많은 논문을 읽고, 많은 고민을 하고, 많은 수술을 하다 보면 서전의 능력은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기 마련이었다.
지금처럼 국내에서 꾸준히 훈련하고.
이따금 해외 연수를 통해 신기술들을 익힌다면 국내 최고의 흉부외과의가 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야, 바람 쐬러 가자.”
어깨에 가느다란 손이 올랐다.
짝궁 인턴 김준호가 담배를 피우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홍선아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당직실을 나와 병동 옥상으로 이동했다.
오전부터 내린 비는 오후 4시인 현재까지 내리고 있었다.
“뭔가 느낌이 안 좋지 않냐?”
김준호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을 이었다.
“폭풍전야의 고요함이라고 해야 하나. 너무 조용하니까 오히려 더 불안한 거 있지.”
“…….”
“최소한 T.A(Traffic Accident, 교통사고) 하나는 터질 것 같지 않냐?”
“말이 씨가 되는 법인데… T.A 환자 오면 다 네 책임이다.”
“동기 인심 한번 야박하네. 근데 그런 걸로 따지면 네가 나한테 백 번은 사죄해야지, 이 환타 자식아.”
김준호가 버럭 화를 냈다.
순간 180도 역전되어 버린 상황.
1살부터 갈고닦아 온 화려한 말빨의 소유자인 나조차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전생과 달리 이번 생의 나는 빼도 박지도 못할 환타였다.
그러니까 환자를 몰고 다니는 환자 제조기라고 할까.
회귀를 한 덕분에 환자가 나타날 곳을 미리 찾아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내가 있는 자리에서 갑자기 환자가 발생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혼자서 새 삶을 얻었으니 다른 사람보다 더 땀 흘려 노력하고 고생해라]나는 의술의 신이 그런 의미에서 나를 환타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마음이 훨씬 편했으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김 선생님.”
“오냐, 앞으로 조심해.”
농담을 주고받은 뒤 우리는 병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병동이 아니라 하수진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하수진이 짤리면서 행복했던 건 간호사들만이 아니었다.
병동 업무를 맡고 있는 김준호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간호사가 자행하는 속칭 인턴 길들이기가 완전히 사라졌던 것이다.
인턴 길들이기란 간호사가 인턴을 고분고분하게 만들기 위해서 은근슬쩍 괴롭히는 것을 말했다.
기분 나쁜 말투를 사용하거나
의미 없는 콜을 수도 없이 한다거나
처치에 불만을 표시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렇게 인턴의 기를 죽여 놓고선 자기 멋대로 인턴을 휘두르는 것이 인턴 길들이기였다.
“역시 만악의 근원은 하수진이더라. 하수진 나가니까 병동 간호사 선생님들이 다 나이팅게일이 됐어.”
“원래 사람 한 명이 끼치는 영향이 무섭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작은 연못을 흙탕물로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은 미꾸라지 한 마리면 충분하니까 말이다.
지이이잉.
때마침 울리는 콜폰.
나는 가운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콜폰을 꺼내 통화를 연결했다.
“소아 흉부외과 이믿음입니다.”
-네, 선생님. 스테이션인데요. 403호 심정화 환자 노티(Notify, 환자 보고) 좀 드리려고요. 당직실에 전화했는데 받는 사람이 없어서…….
“괜찮습니다. 말씀해 주세요.”
-1시간 전부터 호흡 곤란 호소하고 있고요. 몸에서 식은땀도 납니다.
“바이탈 사인은요?”
-바이탈 사인은 다 정상이에요.
“다른 특이 사항은 없나요?”
-네, 현재는 없어요.
“지금 바로 내려갈게요.”
통화를 끊은 나는 김준호에게 양해를 구하고 병동으로 내려갔다.
403호에 심정화 환자라…….
얼마 전에 순환기 내과에서 소아 흉부외과로 전과했던 환자 같은데…….
진단명이 확장성 심근병증이었나?
환자에 대한 정보가 구체적으로 떠오를수록 걸음은 빨라지고 걱정은 커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