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20)
1020화. 되찾아 가는 역사 (4)
‘모용군.’
별호는 검신. 직책은 무림맹주.
‘당관.’
별호는 만독제. 직책은 무림맹 부맹주.
연호정이 회귀 전 살았던 그 인생에서 두 사람은 정파 최고의 수뇌부가 되었고, 삼교라는 희대의 난적을 맞이해 백도를 대통합, 이후 삼교와 일대 격전을 벌였다.
그 전쟁이 있기 전, 성천십삼좌의 고수 대부분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권신과 검선은 알 수 없었다. 아마 권신은 자연사했을 확률이 높았고, 검선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을 확률이 높았다.
음제 하은교는 그때도 사음교에게 당했을 것이다. 도제 종리백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전면에 나서지 않았고, 검제 남궁승 역시 죽었다는 소문만 돌았다.
비왕은 광혈교로 돌아갔을 것이며, 투왕 양천은 자신에게 죽었고, 암왕 역시 당관과 화해하지 못한 채 말년을 보냈을 터다. 창왕과 막원의 경우는 알지 못했다.
주요 무림 세력들은 또 어땠나.
지난 역사에서 남궁현은 제갈아연과 혼인을 했다. 만약 회귀 후 역사에서 연호정이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남궁세가의 협잡질에 제갈세가는 더 힘을 잃었을 것이고, 결국 제갈아연은 남궁가의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팽가는 북부 수비를 담당하다가 멸문지화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구파 중 공동파와 화산파, 종남파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황제 역시 날개를 펴지 못한 채 신화교와 암중 전쟁을 벌이다가 죽거나 끝까지 몸을 피신했을 가능성이 크다. 황제가 죽었다면 곡경도 죽었을 것이고, 황제가 피신했다면 곡경도 그의 곁에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천하는 대란을 맞이했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많은 고수가 탄생했으며, 또 그만큼의 고수를 잃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몰랐던 입장에선 당할 수밖에 없었다.’
신화교가 황궁을 담당하고, 광혈과 사음은 무림의 힘을 빼기 위해 다방면으로 뛰어들었다.
제국의 힘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까닭에 황궁은 삼교 중 하나면 족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무림의 힘은 강해진 만큼, 광혈과 사음은 각자가 맡은 영역에서 공작을 벌이며 완전한 승리를 꿈꾸었다.
그중 광혈은 백도 무림을 주로 교란하면서, 덤으로 혈교의 정통 후계를 자처해 마도 무림에까지도 손을 뻗었다.
사음은 흑도를 주로 교란하려 했으며, 덤으로 백도 정파에도 세작들을 보내 각종 정보를 빼돌리고 그 지역 일대를 장악하려 했다.
신화는 황궁을 주로 담당했으나, 무장들을 파견해 무림의 동태를 주시하거나 위험 인자로 분류된 고수들을 척살하려 했다.
그렇게 삼교는 각자의 방식대로 싸우면서도 서로 부족한 부분들을 보완하며 치밀하게 중원을 노렸다.
그들의 움직임은 비정상적이었고 파격적이었으며, 동시에 이기기 위해 합리적인 수단을 골라서 쓴 것이었다.
그렇게.
이 중원이라 불리는 대륙 땅은 처참하게 유린당했다.
하나로 뭉쳐지지 않는, 뭉쳐질 수가 없는 무림을.
마찬가지로 뭉쳐지지 않지만 철저하게 분리될 수도 없는 삼교가 뿌리부터 망가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세상에 내가 떨어졌다.’
흑암제 시절에는 당해 내지 못했던, 당할 수밖에 없었던 전쟁.
하지만 연호정은 과거로 돌아왔다.
빈말로도 이길 가능성이 있다 하기 힘든 전쟁을 겪고 온 그는,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구주명가를 무너트리고 무림맹의 정상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각종 세작들을 잡아내고 지역을 장악하려 한 삼교의 주구들을 박살 내고 다녔다.
세상은 바뀌었다.
역사도 바뀌었다.
본래 역사대로라면 아직까지도 삼교는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야 정상이었다. 중원 무림은 겉으로만 멀쩡해 보이지, 속은 썩을 대로 썩어 가야 정상이었다.
이제야 중원은, 그들의 고향은 삼교와 대등한 입장에서 싸울 자격을 얻었다. 역사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흐름이라는 것도 존재하는 법이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홍익천이 웃으며 물었다.
“가시는 겁니까?”
“나는 너를 동정하지 않는다.”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동정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동정하지 않는다. 만약 네가 애(哀)라는 것을 알았다면, 자비라는 것을 알았다면 온 마음을 다해 너를 동정했을 것이다.”
“……!”
“바보처럼 앞만 보고 달려 나갔던 나도, 이제 사람을 돌아볼 줄 안다. 저지른 행위를 떠나, 너의 과거를 짐작하기에 동정할 수 있어. 동정받을 수 있는 놈이라고 생각한다.”
“…….”
“그러나 나는 너의 과거를 동정하지 않겠다. 그래 봤자 내 마음을 전할 수도 없으니까.”
홍익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자신의 얼굴이 굳어졌다는 사실도 모를 것이다.
“상호 간에 감정적 교류가 불가능한데 어찌 마음을 쓰겠느냐. 한낱 물건에 대한 애착도 나와의 역사가 있어야 마음을 드리우는 법.”
“…….”
“우리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다.”
홍익천에게 하는 말이었고, 동시에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진정 인연의 사슬을 끊어 낼 수 있었다.
그때였다.
“제 과거를 짐작한다고 했습니까.”
걸음을 멈춘 연호정이 홍익천을 돌아보았다.
홍익천이 물었다.
“당신이 추측하는 제 과거는 어떻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었지.”
“……?!”
“넌, 주변 모두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다. 그저 필요에 따라 꺼내 쓰는 칼 한 자루에 불과했을 뿐.”
“…….”
“하물며 그 칼을 몇 번 쓰지도 않았으니, 사왕이라는 호칭이 무색하구나.”
이제 연호정은 알 수 있었다.
홍익천은, 아니 함무헌은 스스로 깨닫지 못했을 뿐 깊은 외로움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 외로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연호정과 다른 오대신장들이 그와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특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또한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도 끝까지 함께하지 못했다. 변하지 않은 지금의 홍익천이라면 두고 볼 것도 없을 것이다.
마음을 다해 이해해 보겠다?
헛소리다.
변치 않은 인연이라는 것이 있다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이라는 것도 존재하는 법.
연호정은 이 시대의 홍익천을 아깝게 여겨 그의 마음을 되돌리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당신 말마따나.”
홍익천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소설과도 같은 역사가 실제였다면, 그 속의 나는 제법 사는 재미가 있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혹 바꿀 기회가 있다 해도, 너 하나 때문에 바꾸지는 않는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내게 너는, 이 세상과 바꿀 만한 가치가 없어.”
그 말을 끝으로 연호정과 제갈아연은 뇌옥을 나섰다.
홀로 남은 홍익천은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인 채 굳어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 * *
뇌옥에서 나온 제갈아연이 입을 열었다.
“신기했어.”
“뭐가.”
“네가 말했던 그…… 가상의 얘기 말이야.”
“…….”
“마치 네가 실제로 겪고 온 것처럼 꽤 실감 났거든.”
“어릴 때부터 상상력 풍부하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
농담 같은 한마디였지만, 제갈아연은 웃을 수 없었다.
“하나 물어도 될까?”
“두 개 물어도 된다.”
“저 사람을 왜 그렇게 신경 쓰는 거야?”
연호정이 걸음을 멈추었다.
홍익천과 대화하며 그를 아꼈었던 마음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제갈아연 정도의 눈치라면 당연히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적으로서가 아니라 마치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사람처럼 대하는 듯해서.”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깝잖아. 저 능력.”
“아깝긴? 소름이 돋던데. 사술이나 마공 따위가 아니더라도 사람의 정신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엄청나.”
“대단할 것 없는 능력도 그 본질을 알고 연마하면 천하에서 유일무이한 재능으로 개화하는 법이지. 사람에게 대화라는 수단이 존재하는 이상, 저런 녀석은 끊임없이 나타날 거다.”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던 제갈아연이 이내 긴장한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한데 그 말은 진짜야?”
“…….”
“흑백 연합을 공식적으로 끊어 버리겠다는 거, 진짜냐고.”
“그럴 수는 없지.”
“그렇지?”
제갈아연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연호정이 말을 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끊어 낼 수 없어. 동맹의 파기란 그리 쉬운 게 아니야. 수백 년간 서로를 증오하며 살아온 흑과 백이 일대 난적을 맞이하여 역사적인 동맹을 맺었는데, 그걸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는 없는 문제 아니겠냐.”
밝아졌던 제갈아연의 얼굴이 재차 굳어졌다.
“그럼?”
“홍익천의 작전은 성공했다.”
“……?!”
“녀석은 사람을 관찰하고, 조종하고, 자신이 원하는 결과로 이끌어 가는 데에서 쾌감을 느끼는 놈이야. 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성향일 뿐, 저놈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상부의 명령이다.”
“……!!”
“사음교, 아니 삼교는 흑과 백의 동맹을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을 거다. 실상은 잘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이지만, 그놈들은 이쪽 사정을 환히 들여다볼 수가 없어. 드러난 결과만을 보고 생각할 뿐.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흑과 백을 쪼개 놓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할 수밖에 없는 거다.”
“그쪽에서 원하는 게 그거라면, 더더욱 단결해야 하는 거잖아.”
“아니, 놈들은 이미 이겨 놓고 싸운 거야. 정확히는 굳이 이기자고 들 필요도 없었지만.”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진압된 반흑파는 너무 극단적이었지만, 아직도 무림맹에는 그와 같은 사람들이 많아. 전쟁을 위해 합심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전쟁 하나를 위해 목숨을 건다는 사람들은 많지 않지.”
“아니야. 찾아보면 실상은……!”
“우리 생각보다 많아도, 흑도에 대한 혐오를 뿌리부터 없애지는 못해.”
“…….”
“차라리 전쟁이 언제 터진다고 하면 마음이라도 잡을 수 있겠지. 하지만 전쟁 날짜를 확정할 수 없는 지금으로선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흑도에 대한 불만이 스멀스멀 올라올 거다.”
제갈아연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치면 흑도도 마찬가지야. 백도를 향한 증오와 혐오가 얼마나 크겠어? 하지만 흑도는 무림맹처럼 극단적으로…….”
“정확히는 흑도가 아니라 묵룡부다. 묵룡부는 투왕이라는 걸출한 인물의 통제 아래 다스려지고 있어. 절대 권력을 지닌 우두머리가 결정을 내렸으니, 세대교체가 된다면 모를까 당장에 불만을 토해 내는 일은 없을 거다.”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게 흑도의 본질이야. 어제 죽일 듯 싸웠어도, 오늘은 웃으면서 대할 수 있어. 공통의 목표가 있다면 말이지.”
“…….”
“그래서 짐승이라고 불리고, 줏대가 없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흑도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하지.”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다시 눈을 뜬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쓴웃음은 아니지만 서글퍼 보였고, 어딘지 모르게 홀가분했지만 또한 답답해 보였다.
“떨어져 있으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지만, 마주하면 속에서 천불이 터지는 것이 흑백의 관계야. 나는 그걸 너무 쉽게 봤어.”
“…….”
“무림맹에서 나가야지. 전쟁이 끝나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