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75)
1075화. 불과 얼음 (10)
“후욱! 후욱!”
거친 호흡이 뜨거운 열기를 발했다.
얼마 만이던가. 지쳐서 호흡조차 무너질 정도로 싸워 본 것이.
‘역시.’
역시는 역시다.
다른 걸 떠나서 이 절대의 무공 앞에서만큼은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릴 적에는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따랐고, 청년이 되었을 때는 신(神)이라고 착각하기까지 했다.
나이가 들어 후계로 내정이 되었을 때, 신은 평범한 아버지가 되었다.
그리고 후계자 생활이 십 년이 넘어갔을 때, 아버지는 답답하고 바보 같은 인간이 되었다.
그 바보 같은 인간이 폐관이 들자,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독이 든 술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영원토록 이 자리에서 황량한 대지만 노려보며 살 것 같았다.
어차피 신좌(神座)에 앉을 것이라면 그 시기를 앞당겨도 되지 않을까.
나에게는 이미 충분한 자격이 있지 않나? 비록 바보 같은 인간에 비하면 무공 부문에서 약간의 하자가 있지만, 연배를 생각하면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게 자신이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바보 같은 인간도, 독이 든 술잔을 건넨 독사도 모두 물리치고 태양이 되어 천하를 굽어볼 자신이.
저 멀리 암굴에 틀어박혀 괴상한 짓이나 일삼는 핏빛 용조차도, 시간을 들인다면 확실하게 무너트릴 자신이 있었다.
자신감은 자부심이 되었고, 자부심은 자만이 되었다.
그렇다. ‘그’는 자신이 자만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런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니, 멈출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 느끼는 자만은 이유 있는 자만이다. 당장 독사 역시도, 그렇게 많은 씨를 뿌렸지만 자신만큼 대단한 천재는 본 적이 없다고 평했다.
천하를 석권할 만한 힘이 있는 절대자의 평이 그러하다면 자만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오히려 적당히 자만해 줘야 천하 군림의 과정이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자만은, 폐관에서 나온 또 다른 태양 앞에서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우웨에엑!”
피를 토하는 태양이, 답답하고 바보 같은 인간이, 아버지가, 신이, 세상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네놈이 정녕 신화의 이름을 진창으로 빠트리려 작정을 한 것이냐!”
무시무시한 일갈이었다.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공력. 그 공력이 실린 목소리는 뼈마디조차 어긋나게 할 것 같았다.
‘그’는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수행 중의 입마로 상단전이 파탄 나 버려 제힘도 쓰지 못하는 교주의 무력은, 천화의 경지에 도달한 자신조차 까마득하게 느낄 만큼 압도적인 데가 있었다.
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저리 강해질 수 있는 거지?
도대체 어떤 수련을 했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힘을 발산할 수 있는 거지?
도대체 나는…… 저 사람을 제대로 보고 있기나 했던 걸까?
‘그’는 겁에 질렸다. 그리고 자신이 겁에 질렸다는 사실에 엄청난 자괴감을 느꼈다.
씨를 뿌려 준 존재일 뿐, 저 사내는 자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흔한 교주 중에 하나일 뿐이다. 차후 천하를 석권하고 유일무이한 신(神)이 될 자신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하고 소심한 머저리일 뿐이다.
“기르는 개도 주인을 물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개만도 못한 놈! 저 교주 자리가 그리도 탐이 났더냐!”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저자의 말이, 목소리가 끊임없이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그’는 이 상황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왜 죽지 않는 거냐!”
발작적으로 외친 그 한마디에 공포와 증오가 한가득 담겼다.
그리고 그 한마디는 어떤 무공보다도 치명적인 비수가 되어 교주의 가슴에 박혔다.
“왜 죽지 않지? 왜 아직도 살아 있냔 말이다! 네놈이 죽어야 내가 천하의 주인이 된다! 그렇게 오래 살아 있을 거라면, 진즉 자리를 물려주고 뒷방으로 물러났어야 했다!”
교주의 얼굴에 허탈함이 일었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그 얼굴에 담긴다. 그 얼굴을 본 ‘그’는 크기를 불려 가던 공포가 순식간에 쪼그라드는 걸 느꼈다.
어떤 식으로든 충격을 주었다. 그렇다면 저자 역시 사람이란 뜻이다.
이길 수 있다. 넘어설 수 있다.
죽일 수 있다.
“시대는 네놈을 원하지 않아! 교도들은 나를 원해서 따랐다! 유물도 못 되는 과거의 잔재 따위는 당장 불에 타서 사라져 버려야 해!”
“……너!”
“죽일 것이다! 반드시!”
‘그’의 몸에서 푸른 불꽃이 치솟았다.
공포가 줄어들자 분노가 그 자리를 채웠다. 거대한 분노는 심장을 쥐어짜 더 강한 화기(火氣)를 생성해 냈다.
궁전 전체가 불타 사라질 정도의 압도적인 화력. ‘그’는 자신에게 이 정도 잠재력이 숨어 있을 줄 상상도 못 했다.
‘역시!’
스스로도 모르고 있던 재능에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그 힘은 반역, 역모, 패륜이라는 단어들을 완벽하게 합리화시켜 주었다. 이 정도 힘이 있으니까, 이 정도 재능이 있으니까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천도(天道)에 합당한 행위다!
“이노옴!”
“죽엇!”
‘그’가 교주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그’는 볼 수 있었다.
분노로 일그러진 교주의 눈에 떠오른 서글픔과 회한을.
그리고 불타오르는 자신의 진기가, 교주의 화정(火精)을 근간으로 하고 있음을.
번쩍!
빛이 폭발했다.
* * *
“……주님.”
아련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턱을 괸 채 잠에 빠져들었던 기우환이 눈을 떴다.
“교주님.”
“왔느냐.”
나직이 깔리는 목소리가 대전에 울렸다.
제이(第二) 화왕(火王)이 고개를 숙였다.
“수면 중에 죄송합니다.”
“어인 일이냐.”
불편한 심경이 그대로 드러나는 목소리였다.
잠에서 깼기 때문인지, 불쾌한 꿈 때문인지는 기우환만이 알 것이다.
“교의 병력이 요녕의 코앞까지 도달했다는 보고이옵니다.”
기우환의 눈이 번뜩였다.
“빠르구나.”
“그렇습니다.”
“주변 눈을 피해 가며 움직이라 하였는데, 너무 빨리 진군한 것은 아니렷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야음을 틈타 움직였으며 제삼(第三) 화왕과 무장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흐음.”
기우환이 눈살을 찌푸렸다.
표정이 변하는 것만으로도 대전 안의 온도가 살벌하게 올라가는 것 같았다.
“대륙 놈들의 정보력이 꽤 대단하다고 들었다. 정말 걸리지 않은 것인가.”
“확신할 수는 없으나 요녕과 길림은 놈들의 눈이 거의 닿지 않는 곳입니다. 더하여 제삼 화왕의 능력이 출중하니, 교주님께서는 아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걸려도 된다.”
“예?”
“걸려도 상관없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진군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걸려도 상관이 없다니?
제이 화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우환이 태사의에 등을 묻었다.
‘알아서 잘 움직이겠지.’
마음이 다소 급했음을 그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전쟁은 먼저 진격하는 쪽이 유리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대륙 놈들은 탄탄한 방비를 세울 것이다.
‘흑제성이라 하였나.’
얼마 전, 흑도 연맹이 주인을 바꾸며 그 이름 또한 묵룡부에서 흑제성으로 바꾸었다는 걸 들었다.
각지의 보고에 따르면, 흑제성이 진정 무서운 것은 무력이 아니라 정보력이라고 했다. 특히 흑도 무림은 생존을 위해 정보단이 유독 발달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흑제성은 대륙 중하부에 있었고, 아무리 정보단에 힘을 썼다 한들 변방까지 내륙 중심부처럼 보지는 못할 것이다.
게다가 주인이 교체되었다면, 기존의 체계를 완전히 무너트리고 자신의 방식대로 조직을 운영하려 할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역사상 새 왕, 새 황제, 새 교주가 취임했을 땐 반드시 기존 세력을 물갈이하고 자신만의 정치로 조직을 재단장했다.
즉, 흑제성이 완벽하게 정비되기 위해서는 아무리 빨라도 반년은 걸리리라.
그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선제 타격을 통한 초전의 승리를 거머쥐어야 했다.
‘지금까지 숨겼으면 되었다. 사음과 광혈도 우리 병력이 무엇을 노리는지 곧 알게 될 것이야.’
아직은 들키지 않았다. 아직은.
하지만 이제는 들켜도 된다. 병력이 요녕 앞까지 도달했다면 언제 싸움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이번 대륙 침공은 내가 주도한다.’
당장 보게 될 피해는 우습다. 이 전쟁을 주도하기만 하면 사음과 광혈의 전력을 주로 사용해 중원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음교주의 잔머리라면 넋 놓고 당해 주진 않을 것이다.
‘그 또한 대비를 해 두었으니.’
적들이, 나아가 사음과 광혈이 신화의 움직임을 알아차렸다면 그 즉시 반응할 터.
‘지루하기 그지없던 평화 속에서 의미 없는 개죽음을 당한 교도들이 한둘이었나. 이제 그런 죽음은 없다.’
기우환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싸워서 쟁취한다.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있더라도.’
그가 입을 열었다.
“대륙 놈들이 이쪽 병력의 움직임을 알아챈다면 곧장 정찰을 보낼 것이다. 삼화왕에게 연락을 취해 경거망동하지 말라 이르도록.”
“교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기우환이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다시 잠에 빠져든 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후련함과 기대감이 섞인 미소였다.
우우우웅.
화정이 꿈틀거리며 그 양을 불렸다.
기우환의 태사의 뒤.
불과 한 시진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었을 게 분명한 가루 뭉치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 * *
하북 북경에서 요녕성까지 도달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하지만 요녕성 역시 광활한 너비를 자랑했다.
거대한 평야와 그리 높지 않은 산들을 지난 세 사람은 순식간에 요녕성 동부로 진입했다. 바로 요동(遼東)이었다.
요동까지 도착하는 데에 걸린 시간은 무려 나흘이었다.
아무리 무극에 이른 고수들이라도 산과 강, 늪지대를 건너며 쉬지 않고 달렸으니 몸 상태가 말이 아닐 수밖에 없었다.
요녕성에는 다섯 개의 흑제성 소속 정보부가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들은 정확히 정보부가 자리한 곳들을 거쳐 요동에 도달했다. 당연히 그냥 달리는 것보다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속도를 낸 보람이 있었다.
“저기로군.”
가장 먼저 신화의 병력 유무를 알아챈 것은 기천웅이었다.
무당의 절기, 원무치상법으로 끊임없이 상단전을 가꾼 지금의 그는 자신의 기량을 거의 칠 할에 가깝게 복구했다.
작정하고 싸운다면 또다시 상단전에 타격을 입겠지만, 적어도 예전의 기량을 거의 되찾았으니 특유의 심안(心眼)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느껴지시오?”
“저쪽일세. 야트막한 산을 넘어가면 병력이 있을 거야.”
“숫자는?”
“거기까지는 알 수 없어. 하지만 이 정도 거리에서 느껴지는 화기의 농도를 보면…… 못해도 일천 병력은 우습게 넘겠군.”
“고수의 유무는?”
“그 또한 알 수 없네. 더 가까이 가야 해.”
“우리가 접근했을 때, 적들 중 무극에 이른 자가 있다면 교주를 느낄 수 있겠소?”
“아마도.”
이 정도 거리가 떨어졌으니 적 쪽에서도 기천웅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거리가 더 가깝다면, 신화교 무공의 상징인 화정(火精)끼리 이끌리며 존재를 드러내도록 만들 것이다.
“하지만 괜찮아. 화기를 충분히 억누른다면 그쪽에서도 나를 알아보긴 쉽지 않을 것이네.”
“대신 힘들게 쌓아 올린 교주의 상단전이 꽤 무너지겠지.”
“그 정도 각오는 하고 온 길이야. 괜찮네.”
“필요하다면 써도 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욘 없소. 이 거리에서 적의 존재를 알아챈 것만으로도 교주의 역할은 다한 셈이오.”
연호정이 모자선을 바라보았다.
모자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주는 여기서 기다리시오. 우리가 가서 적의 동태를 살피고 오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