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46)
1146화. 전선 교체(戰線交替) (6)
다음 날.
“……?”
흐릿한 눈으로 천장을 보던 묵비는 순간 눈을 부릅떴다.
“큭!”
벌떡 일어났지만, 온몸에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그녀는 힘을 잃고 다시 쓰러져 누웠다.
“여긴……?”
“일어났냐.”
“헉!”
깜짝 놀란 묵비가 다시 일어나서 옆을 바라보았다.
덕분에 온몸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지만, 그녀의 얼굴에 서린 경계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쓰러지기 직전까지 살기를 불태우며 싸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자 묵비는 다시 쓰러졌다.
“연 공자.”
“그래.”
아직 피 묻은 전포도 갈아입지 않은 상태였다. 얼굴에 묻은 핏물만 대충 닦아 냈을 뿐이다.
그런 모습으로 연호정이 자신을 간호하고 있었다면, 결과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래도 묵비는 물었다.
“전투는요?”
“이겼지, 뭐.”
너무 담담하게 얘기해서 그런지 현실감이 없었다.
묵비가 한숨을 쉬었다.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얘기는 들었어. 아주 제대로 날뛰었다면서? 북부군 사이에서는 하늘이 내린 신녀니 뭐니 하면서 난리가 났던데.”
묵비가 쓴웃음을 흘렸다. 기운은 없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부족했어요.”
“뭐가 부족해. 들어 보니까 혼자서 장판파 장비인 양 무적의 신위를 보여 줬더만.”
“그래도 부족했어요. 만약 전투가 패배로 끝났다면, 나와 함께 싸운 사람들도 다 죽었겠지요.”
“겪을 대로 겪어 봤잖아? 너만 싸우는 게 아니야. 오히려 그들은 너보다 더 확고하고 충실한 마음으로 이 전쟁에 임했을 거다. 그들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는 건, 되레 그들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있어.”
“…….”
“넌 할 만큼 했다. 아니, 네 몫 이상의 결과를 냈지. 자랑스러워해라.”
묵비는 눈을 감았다.
연호정과 둘이 대화를 나누는 자리는 참 오랜만이었다. 이것저것 많이 얘기하고 싶은데, 힘을 잃고 기절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조금만 더 힘이 있었다면.
단 한 발의 화살이라도 더 쏠 힘이 있었다면, 그 뒤에 죽은 수많은 사람 중 몇몇은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연호정은 묵비의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다 네 책임 같으냐?”
“…….”
“하긴, 모두가 아니라고 해도 홀로 죄책감을 느낀다는데 어쩔 수 없지. 그 또한 너의 마음 아니냐.”
“…….”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히 알아 둬. 그때 아버지가 적장과 함께 전선을 이탈하셨다고 들었다. 네가 나타나서 그 멋들어진 궁술로 적을 무너트리고 아군의 사기를 올리지 않았다면,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 거야.”
“알아요.”
“그래.”
“압니다. 지나간 시간은 어쩔 수 없다는 걸, 나도 열심히 했다는 걸.”
“그러면 됐어.”
“그래도 부족해요.”
묵비가 다시 눈을 떴다.
물기 어린 그녀의 눈은 혼란과 자책, 그리고 강렬한 의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부족합니다. 아직도 부족해요.”
“…….”
“더 강해져야 합니다. 적어도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묵비가 연호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떨어진 눈물 때문에 베개가 젖어 들었다.
“연 공자보다도 더 강해지고 싶어요.”
“그건 힘들지.”
“…….”
“적어도 지금 당장은 말이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너는 강해. 나야 한 번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고 기연도 많이 얻어서 이만큼 올라왔지만, 너에게는 그런 것도 없었잖아. 풍부한 내공? 내공이 무공의 경지를 그렇게 빨리 끌어올려 주진 않아.”
“…….”
“초조해하지 마. 넌 지금도 과할 만큼 강하다. 당장 너 하나 잡으려면 구파 장문인이 최소 둘 이상은 필요한데,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모르겠어?”
“…….”
“정파 무림 정점의 무학을 보유한 구대문파의 수장들조차 단기 결전으로는 널 이기지 못한다는 거야. 하물며 그들은 수십 년을 수행했고 너는 이제 서른 언저리잖아. 네 재능은 천재적이야.”
“그래도 위안이 안 되네요.”
“위안이랍시고 건네는 말이 아니야. 현실을 보라는 거지.”
“…….”
“강해지고 싶다면 초조해하지 마. 무극에 오르는 방법은 무수히 많지만, 오른 사람 중 누구도 초조함을 발판 삼아 날아오르진 않았다.”
연호정이 묵비의 손을 잡았다.
“고생했다.”
“…….”
“황궁 사람 모두가 너에게 고마워하고 있다. 너의 역할이 그만큼 결정적이었다는 뜻이야.”
묵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연호정이 유쾌하게 말을 이었다.
“심지어는 적이었던 사람들도 그 귀신 같은 궁수의 정체가 뭐냐면서 웅성대기 바빴더랬지.”
쓴웃음을 짓던 묵비는 문득, 연호정의 말 중에 이상한 부분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적이었던?”
“뭐, 그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도록 하고.”
연호정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
“원래는 전투 끝나고 곧장 길목 정리도 할 겸 빠지려고 했는데, 폐하가 꼭 보고 싶다고 하셔서 나도 며칠 눌러앉아야겠다.”
“폐하께서요?”
“응. 이후의 싸움이 어떻게 진행될 건지 꼭 들어 보고 싶으시다더군.”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그 양반도 진짜 웃긴다니까. 하긴 일국의 주인으로서 당연히 보고는 받아야겠지만, 뭣 하러 굳이 일하겠다는 사람을 잡아끄는지 원.”
묵비가 피식 웃었다.
“황제 폐하를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온 천하에 연 공자뿐일 거예요.”
“없는 곳에서는 나라님을 욕해도 무죄라는 거, 꽤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얘기 아니었나?”
“여긴 황궁이에요.”
“다행히 내가 제법 강해서 주변 수십 장의 인기척을 다 느낄 수 있군. 대역죄로 잡혀갈 일은 없겠어.”
이것이 연호정의 장점이라고 묵비는 생각했다.
적어도 제 사람들에게 연호정은, 방법은 다소 거칠지라도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재주가 있었다.
문제가 될 표현이나 말을 거리낌 없이 하면서 고민거리가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해 준다. 묵비는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아이고, 나도 피곤하다. 워낙 힘든 싸움이었어. 내일 밤에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가 열린다는데, 나는 대충 얼굴만 보이고 쓱 빠질까 싶다.”
묵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축하 연회요? 벌써요? 전쟁은 이제 시작인데…….”
“그 전쟁의 시작인 초전을 승리로 이끌었잖아. 게다가 이곳은 황궁이야. 황제 폐하의 터전을 지켰다는 것만으로도 즐길 이유가 충분해. 상황이 상황이라 하룻밤 술자리로 끝낼 수밖에 없겠지만, 지친 군사들의 심신을 다독여 주는 건 중요한 문제다.”
“하긴, 그도 그렇겠군요.”
“나도 이제 가서 씻으련다. 푹 쉬고 있어.”
“내일 술자리, 저도 참석할게요.”
“내상 입은 몸뚱이로 술 마시면 속 다 뒤집힌다. 내가 몇 번 경험해 봐서 알아.”
“그래도 가야지요.”
“그러든가 말든가.”
연호정이 문을 열고 나갔다.
문밖에서 의원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친 환자 방에 씻지도 않고 들어가면 어쩌냐는 등의 말이었다. 그에 연호정이 죽여도 안 죽을 강골이라 괜찮다는 말로 응수하는 소리도 들렸다.
묵비는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마음이 안정되자 다시 잠이 쏟아졌다.
‘이겼구나.’
그래, 그거면 충분한 거지.
* * *
전투가 끝난 후 아침까지 부상병들을 관리하느라 밥은커녕 쪽잠 한숨도 자지 못했다.
피를 씻어 내고 뜨끈한 욕조에 들어가 몸을 누이니 천하의 연호정도 무시무시한 피로를 느꼈다.
‘한 방에 오는군.’
전투 과정, 그리고 몸 상태만 보면 그렇게까지 피곤할 수준은 아니었다. 내상 역시 황룡신왕공 덕분에 빠르게 정상화되고 있었다.
문제는 정신적 피로였다.
감숙, 섬서, 황궁을 아우르며 수십 일을 고민했다. 오죽하면 닷새 넘도록 잠을 잤겠는가.
‘그걸로 대충 다 풀린 줄 알았더니만, 그게 아니었나.’
연호정은 눈을 감았다.
아무 생각 없이 푹 쉬고 싶지만, 그게 쉽지가 않았다.
‘이번 승리는 얻은 게 많다. 초전도 초전이지만 적의 상태를 더 정확히 알 수 있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어.’
하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그 정도 피해는 감수할 수밖에 없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가슴이 답답했다.
전투는 익숙해질 수 있어도,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이 죽어 나가는 현실은 몇 번이 반복되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다음을 생각해야 해. 그다음도, 그다음도.’
놈들의 다음 목표는 어디일까?
‘다음은…….’
생각을 거듭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땅히 떠오르는 답이 없었다.
특히 사음교와는 과거에 몇 번이나 부딪쳐 봤는데도 이렇다 할 답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의 사음교와 그때의 사음교는 다르기 때문이었다.
결정적으로 머리가 둔했다.
다른 생각을 하면 평소처럼 핑핑 잘 돌아가던 머리가 전쟁이나 작전을 생각하면 갑자기 무거워졌다.
그만큼 큰 부담을 안고 있다는 뜻이었다. 연호정은 전쟁이나 작전에 관한 생각을 애써 버렸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사신무…….”
닷새 동안 죽은 듯 잠을 청하며 현실감 넘치는 꿈을 꾸었다.
그 꿈에서 그는 사음교주와 짤막하게 싸웠다. 그 짧은 싸움에서 그간 잊었던 사신무의 모든 형과 깨달음을 다시 찾아올 수 있었다.
심지어 광풍구룡살까지도 달라졌다.
‘기마에 올라서 휘두르는 광풍구룡살은 더 역동적이진 않아도, 사신무의 형을 덧씌워 더더욱 섬세하고 파격적인 공방을 가능케 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워야 하는 생사대적이 앞에 있다면 당연히 기마에서 내려야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전쟁 중인 경우, 오히려 내공 소모가 더 적은 기마 무공을 위주로 적을 몰아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풍구룡살이라…….’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생각해 보니까 되게 유치하네. 내가 왜 그런 이름을 붙였지?”
답은 간단하다.
그의 깨달음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연호정의 무공은 다른 무인들보다 의지의 영향을 훨씬 더 강하게 받아서, 초식명에 빗대어 억지로 의지를 불사르는 것만으로도 파괴력에 편차가 생긴다.
그저 그때의 깨달음이 그러했을 뿐, 괜스레 멋들어지게 지으려 한 이름은 아니었다.
‘사람은 확신을 가지면 안 돼.’
부끄러운 것이 또 하나 있었다.
그는 광풍구룡살을 창안하며, 오직 도끼로 펼쳐야 제구실을 할 거라고 확신했다. 실제로 그런 식으로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전투를 지속하면 할수록, 실전을 거듭하면 할수록 한계는 자꾸만 무너지며 그 너머의 신세계를 보여 주었다.
‘무공은 무인의 깨달음과 같이 변화한다. 그때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이 다르고, 그때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도 달라.’
그때 왜 그랬는지를 생각하는 것보다, 달라진 현실을 인정하고 그 변화를 토대로 새롭게 나아가는 것이 중요한 법.
‘광풍구룡살은 무슨. 다섯 살짜리 꼬마도 웃겠다.’
뜨거운 물에 얼굴을 확 담갔다가 뺀 그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광룡공(狂龍功)으로 하자. 반쯤 미쳐야 제 위력이 나오기도 하니까. 그거면 충분하지. 이왕 말한 김에 비급이라도 쓸까?”
이렇게 중요하다면 중요하고 사소하다면 정말 사소한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슬슬 풀리는 것 같았다.
한참 무공에 관한 생각을 정리하던 연호정은 이내 천천히 잠이 들었다. 긴장이 풀린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편히 쉴 팔자가 못 되었다.
“호정, 거기 있느냐?”
깜짝 놀란 연호정이 욕조에서 일어났다.
“예, 아버지. 여기 있습니다.”
“수욕은 다 끝났더냐?”
“예에, 거의 끝났습니다.”
“하면 바로 옷 갈아입고 나오너라. 폐하께서 너와 애비를 찾으신다.”
“……예.”
연호정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지가 싸워 봐야 피곤한 줄 알고 안 부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