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47)
1147화. 전선 교체(戰線交替) (7)
황제의 눈빛과 분위기는 여전했다.
하지만 그 외에 많은 것이 달라졌다.
허리를 펴고 가부좌를 튼 채 앉은 그의 몸은 예전보다 많이 말랐다. 그러나 그것은 피로 때문도, 잘 먹지 못해서도, 병에 걸려서도 아니었다.
‘대단하군.’
연호정의 눈동자가 절로 반짝였다.
‘무공은 몰라도 내기(內氣)를 다스리는 능력 하나만큼은 천재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겠다.’
오랜 세월 황제만이 익힐 수 있는 양생술로 몸을 보했다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양생술일 뿐 무림의 내공심법과는 거리가 있다.
화정 역시 여느 내공심법과 다르긴 했다. 하지만 호흡으로 인한 화기의 흡수와 증폭, 탁기 제거 등은 두말할 것 없는 내공심법의 그것이다.
‘어지간한 절정고수 수준만큼이나 발달되었다.’
황제의 심장에서 타오르는 기운이 선명하게 보였다.
화정의 성취만큼은 신화교의 무장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짧은 시간, 그가 얼마나 화정에 심취했는지 알 수 있었다.
“왔는가.”
연위와 연호정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를 뵙습니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인사였다. 쓸데없는 예법을 좋아하지 않는 황제에게, 두 사람의 담백한 목소리는 그 자체로 마음을 편안케 해 주었다.
“여러 얘기를 나누기에 앞서, 이번 초전을 승리로 이끈 그대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찌 황궁이 무사했겠는가.”
연위가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한 일은 크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장의 그림을 그린 제 장남의 덕이 컸고, 나아가 목숨을 걸고 적과 싸운 무수히 많은 병사들의 덕이 가장 큽니다.”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연가주 말이 맞다. 다만 짐의 처지가 이러하여 병사들 앞에 나설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야. 짐은 누구보다도 병사들의 노고가 크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니, 가주는 걱정하지 말게.”
“송구하옵니다.”
“본래라면 충분한 휴식을 준 후에 만나고자 했겠지만, 아무래도 시일을 당겨야 할 듯하여 부득불 두 사람을 불렀다. 짐의 덕이 부족함을 알고 있으니, 부디 대화가 끝난 후 질책해 주었으면 한다.”
기천웅과 마주했을 때와는 말투부터 분위기까지 전혀 다르다.
스스로의 위치를 잘 알고 있지만, 기천웅을 대할 때의 황제는 더 편해 보였다. 기천웅 역시 새외의 절대자로서 황제나 다름없는 이였기에 조금은 친구처럼 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위는 오직 신념 하나만으로 제국을 위해 황궁으로 들어온 충신이자 은인이었으며, 연호정은 이 전쟁의 주역이자 차후 무림의 가장 큰 기둥으로 발전할 중요한 인재였다.
하여 황제는 두 사람을 보다 더 조심스럽게 대했다. 두 사람의 충심과 올바른 주관을 알고 있기에 더더욱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그런 마음은 연위와 연호정에게 충분히 잘 전달되었다.
“승리든 패배든, 전투가 끝났다면 장수는 폐하를 찾아뵈어 전쟁의 결과를 알려야 함이 마땅합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곧장 찾아뵙지 못한 소신들의 불충을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연위 역시 처음보다 더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황제를 대했다.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봐 왔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스스로 죽음을 가장한 것은 짐이었다. 그리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
“황송하옵니다.”
“다만.”
황제의 눈빛이 조금 더 강렬해졌다.
“관(棺)에는 충분히 누워 있었으니, 이제는 다시 태양 아래 서려고 하네.”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황제가 말을 이었다.
“본디 짐의 숨겨진 아들 행세를 하여 새로운 황조를 일으키려 했지만, 생각이 달라졌다.”
“…….”
“그 목적이 숭고하다 한들 세상을 속이면서까지 제국을 번영케 하고 싶진 않다.”
“세상을 속인다는 말씀은…….”
“백성이 곧 세상이다. 짐은 백성들을 속이고 싶지 않아.”
연호정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황제 스스로가 백성을 속이는 데에 부담을 느낀다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정국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솔직하게 지금 상황을 만천하에 고하는 것이 낫다.
연위 역시 비슷한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성심이 그와 같으시다면 마땅히 그리하심이 옳은 줄 압니다.”
“하지만 진실을 드러낼 경우, 훗날 여러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역모 말씀이로군요.”
연위는 깜짝 놀라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과연, 임시나마 황궁의 총군사 역할을 겸할 만한 지혜다. 짐은 정말이지 그대를 곁에 두고 싶은데.”
“나쁜 쪽으로만 눈치가 빠른 일개 무부에 불과합니다.”
“겸손함이 과하구나.”
연호정이 얼굴을 굳혔다.
“일국의 주인이 장수하면 그 나라는 복 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좋은 정치로 세상을 이롭게 한다면, 폐하의 장수를 칭송하는 백성이 넘쳐날 것입니다.”
“그렇겠지.”
“문제는 모두의 상식을 초월하는 일이 벌어졌을 경우입니다.”
황제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 미소에는 감탄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성주의 말이 맞다.”
연위는 말을 아낀 채 황제와 연호정의 대화를 경청했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화정의 성취가 지극히 높으십니다.”
“그대 눈에도 보이는가?”
“저보다 아버지의 눈에 더더욱 잘 보일 것입니다만, 그렇습니다.”
황제가 쓴웃음을 지었다.
“기천웅 교주가 끌어 주었기 때문이야. 그의 덕을 많이 보았다.”
“끌어 주는 사람의 역량이 뛰어나도, 그 손을 잡고 달리는 사람의 재능이 부족하다면 결코 이와 같은 결과를 얻지 못했을 겁니다.”
“허허.”
우우웅!
연호정의 동공이 금빛으로 명멸했다.
“제 눈에는 폐하의 몸에 깃들었던 탁기와 악기가 모두 제거된 것이 보입니다.”
“그러한가.”
“천자의 수명을 짐작해 보는 것은 불충임을 알고 있습니다만, 감히 말씀드리자면 족히 반백 년은 너끈하실 듯합니다.”
황제가 피식 웃었다.
“인내였다고는 하나 정국을 팽개치고 쾌락만 좇은 세월이었다. 남은 인생이 오십 년이라면, 한시도 쉬지 않고 천하를 위해 생을 불태울 것이다.”
“…….”
“하지만 오십 년간 천하를 위해 힘쓴다 해도, 그것을 버티지 못하는 이들이 생길 것이다.”
언제나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 중 막강한 권력을 지닌 이들 대다수가 천하 정점을 원한다.
그중 가장 위험한 이들이 백관들이다. 지금은 황제와 천하를 위해 힘쓰고 있지만, 시간이 흘러 세대가 교체되면 욕심을 부리는 자들도 생길 것이다.
평범한 제국이라면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림이라는 집단이 버젓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무림이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면 필경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무력을 앞세워 새 세상을 만들려 할 것이다.
대화의 의미를 깨달은 연위가 조심스레 말했다.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것이 세상이라 하나, 소인의 생각으로는 지나친 걱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친 걱정일 수 있지. 굳이 지금 논할 문제가 아닐 수도 있어.”
“…….”
“그러나 제국이 제대로 힘을 키우지 못하면, 구시대를 무너트리고 새 시대를 열려는 움직임이 무조건 발생할 것이다.”
“……!”
“심지어 백성들의 삶이 썩 나쁘지 않아도 그런 움직임은 생길 것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질적인 힘이 없는 국가는, 외부는 물론 내부에서도 갈등이 터질 수 있습니다.”
“짐의 말이 바로 그것이다.”
황제가 한숨을 쉬었다.
“이번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대단한 통찰력이 없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
“…….”
“하물며 전쟁은 이제 막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벌어지지 않는 미래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그리 올바르지 않을 수 있다.”
연호정의 입이 열렸다.
“하지만 가벼이 여길 주제는 아니지요.”
황제가 흐릿하게 웃었다.
“그대는 짐을 이해해 주는군.”
“전쟁은 현실입니다. 하지만 제국은 미래입니다. 설령 전쟁에서 패배하여 중원이 무너진다 해도, 지금 당장 미래를 설계하지 않는다면 전쟁에서 승리해도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질 수 있습니다.”
“짐의 생각이 바로 그러하다. 그렇기에 짐은 이전과 달리 스스로를 직접 드러내려 한다. 허나 그리될 경우, 짐과 황궁을 지켜 줄 존재가 있어야 한다.”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황제는 자신의 목숨을 그리 대단치 않게 여긴다.
그런데도 그가 아득바득 화정을 연성하고, 막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두 사람을 불러 황궁 수호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은 백성들을 위해서였다.
중원은 저 동방의 국가나 바다 건너 왜국(倭國)과는 차원이 다른 크기를 자랑한다.
그래서 천하를 통일하기가 어렵고, 통일 후 다스리기도 어렵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막기가 힘든 이유 역시 넓은 땅덩어리 때문이다.
“짐보다 뛰어난 위정자가 나타난다면, 그가 짐의 핏줄이 아니더라도 마땅히 정국의 주도권을 건네줄 것이다.”
연위는 깜짝 놀랐다.
“폐하.”
“하지만 그것은 짐이 최선의 노력을 해 본 이후에 판단할 문제다. 하늘이 짐의 목숨을 전쟁이 벌어진 지금까지도 거둬 가지 않은 이유는, 아직 짐의 천명(天命)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황제가 눈을 부릅떴다.
“고로 짐은 전쟁 중에도, 전후에도 죽을 수 없다. 백성들에게 진 빚의 십분지 일이라도 갚은 후에야 죽을 수 있다. 그것이 짐의 삶이다.”
“…….”
“그러기 위해선 그대들의 힘이 필요하다.”
두 사람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이번 전쟁의 주역, 무림의 힘을 뜻하는 것이다.
“지금 황궁에는 인간의 경지를 초월한 반선(半仙)들이 많다.”
“…….”
“짐은 오랫동안 곡경을 보았어. 정파니 사파니 하는 것은 짐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 짐에게 있어 곡경은 단순한 호위 무사가 아니라 제국의 생명을 지키는 방벽 그 자체였다.”
“…….”
“그 뒤에 나타난 연가주와 흑제성주, 그리고 짐의 부마가 된 양천 역시 더할 나위 없는 호걸들이요, 출중한 지혜를 지닌 이들이었다. 심지어 저 기천웅 교주조차도 남다른 지혜와 좋은 품성을 지닌 이다.”
“…….”
“짐은 전후에, 충분한 자격을 증명한 무극수들을 각 지역의 왕(王)으로 봉할 생각이었다.”
연위는 물론 연호정조차도 깜짝 놀랐다.
“그것은 성품과 지혜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무림의 존경을 받는다. 그들이 그 지역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해당 지역 무력의 중심점이 될 수 있다.”
설령 그중 누군가가 반역을 저질러도, 각 지역을 담당하는 왕들이 연합하면 반역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무극수들은 인간의 경지를 초월한 이들이야. 그런 이들을 자유롭게 무림에 풀어놓는 것은 더더욱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
“그들이 짐의 뜻을 따르겠다면, 제국을 위해 봉사해 주기를 바랐지.”
황제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하나, 기천웅 교주와의 대화에서 무극수들의 정신이 온전치 않다는 말을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