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52)
1152화. 백음귀(百淫鬼) (2)
“섬서요?”
“그래.”
강량이 턱을 쓰다듬었다.
“형님 가는 곳이라면야 저도 가야지요. 그건 뭐 당연한 건데…….”
그가 힐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전 안에는 연호정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주변을 살피는 것은 일종의 습관이었다.
강량이 조심스레 말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황궁 사람들은 형님을 쉽게 보내 주지 않을 겁니다.”
정확히는 황제를 말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강단 넘치는 그라도 황궁 한복판에서 황제를 언급하진 못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끝난 얘기다. 이번 북부전이 끝나는 즉시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했다. 말하자면 임시 총군사직을 맡았을 뿐이지.”
“으음.”
연호정은 강량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았다.
강호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경험을 하고, 상상을 초월하는 정치 관계를 두 눈으로 직접 보아 온 강량이었다. 자연히 사람 마음이 측간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는 걸 아는 것이다.
연호정은 지닌바 무력을 떠나, 강호 전체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일대 거인이었다. 그런 사람이 황궁 전투가 끝나자마자 다시 떠난다고 한다.
그와 친분이 있는 무림인들이야 이해하겠지만, 황궁 사람들은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걸 무시하고 떠났다간, 당장은 아니더라도 추후 연호정이라는 신마(神馬)에 고삐를 둘러야 한다는 여론이 올라올 것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황제가 했던 걱정과 비슷한 것이었다. 눈앞의 위험이 너무 커서 생존을 도모하려 하지만, 동시에 미래를 대비하는 것도 사람 본성이다.
황궁의 백관들, 정치가들은 연호정을 그냥 놔두려 하지 않을 것이다. 연호정이 있을 땐 침묵할 테지만, 연호정이 없을 땐 그 움직임이 조금씩 드러날 것이다.
“괜찮다. 폐하도 폐하지만, 황궁 최고 권력자가 폐하와 함께 우리를 돕고 있으니까. 나아가 이번 전쟁이 끝나면 기존의 관리들과 함께 관직에서 내려오기로 했지.”
“설마 그걸 믿으시는 건 아니죠?”
“그들의 말은 믿지 않는다. 하지만 상황은 믿는다.”
“어떤 상황이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강호를 구하고 있다는 현실, 그 상황 자체 말이다.”
강량이 피식 웃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런 움직임이 보이면, 관리고 뭐고 직접 다 쓸어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물론 아주 은밀하게, 암중으로 진행될 일이었다. 대놓고 황궁 관리들을 박살 내면 제국에 큰 해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런 작자들은 지금 그럴 생각을 할 여유도 없다.”
“예?”
연호정은 황궁 이전 계획에 대해 말해 주었다.
강량은 깜짝 놀랐다.
“그런 일을 진행 중이었습니까?”
“그래.”
“허어…… 우리도 도왔다고요?”
“흑제성 자금 창고가 제법 빈곤해졌지. 무림맹이나 황궁도 비슷하다.”
강량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더 난리를 치겠는데요? 다른 곳도 아니고 강소성이라니, 형님 가문이 꽉 잡고 있는 곳이잖아요.”
“꽉 잡긴 무슨. 우리 아버지 성격 모르냐?”
“그래서 더 문제죠. 연가주님을 칭송하는 백성들이 발에 챌 정도로 많을 텐데.”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나중에 생각해도 돼.”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강량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긴, 전쟁 중에 그런 것까지 일일이 걱정해 봤자 우리만 머리 아프죠. 놈들 작살내는 걸 고민해도 답이 안 나올 판국에.”
“네 말이 맞다.”
하지만 연호정은 강량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강량이 말해 주지 않았다면, 어느 정도 생각은 했어도 가볍게 넘겨 버리고 말았을 사안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뛰어난 동료를 곁에 둬야만 하는 이유였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줄 수 있는 존재.
차후 흑제성의 정치는 강량에게 맡겨도 크게 문제가 없겠다는 생각과 함께, 연호정이 말했다.
“형님이 직접 보낸 서신이다. 봐라.”
모용우가 보낸 서신을 펼쳐 본 강량의 눈이 번쩍였다.
“필체가 좀 날아가는군요. 다급하게 쓴 것 같습니다.”
“네 눈치가 점점 예리해지는 것 같다.”
칭찬에도 강량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이거 좀 묘한데요.”
“왜 그리 생각하냐?”
강량이 고개를 저었다.
“전쟁은 이미 벌어졌습니다. 신화교가 먼저 일으켰다고는 해도, 사음교와 광혈교 역시 전력을 파견했지요. 그렇다면 각자의 속사정과 상관없이,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전력이 애매합니다. 섬서에 출몰했으니 대충 사음교 측이라고 치자고요. 그렇다면 차라리 그 은호마병인가 뭔가 하는 놈들과 함께 딸려 보냈으면 그만이지, 굳이 전투가 끝난 이 시점에 무극수 곁에 소수 정예를 딸려 보낸다는 건 이상하잖습니까?”
“광혈교 측일 수도 있잖느냐?”
“모르는 척하지 마십시오.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습니다.”
연호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삼교는 한 지역씩 담당했다. 그것도 다소 급하게 터진 전쟁이었다.
타 조직이 담당한 지역에 이리 빨리 고수를 파견한다? 그렇게까지 조율이 안 되는 조직이었다면 한 지역을 담당해 병력을 파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전투 후, 난잡해진 섬서에 쐐기를 박기 위해 뒤늦게 병력을 파견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병력 수가 너무 적습니다.”
전력의 강약 문제가 아니었다. 절대적인 숫자의 문제였다.
“정말 이만한 숫자로 섬서 전투의 방점을 찍겠다고 한 것이면, 그건 대단한 착각입니다. 사음교 놈들이 그렇게 바보는 아닐 텐데요.”
“절대 바보가 아니지.”
강량의 눈이 반짝였다.
“뭔가 의도가 있는 겁니다. 섬서의 문제가 아니에요. 싸우려고 온 게 아니라, 전략적으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비범한 한 수를 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광이랑 많이 친해졌냐? 머리 돌아가는 게 보통이 아닌데?”
“원래 좀 했습니다. 티를 안 냈을 뿐이지.”
연호정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너무 뜬금없는 순간에 파견한 병력이지. 한데 한 지역을 평정하기에는 숫자가 너무 적고, 그렇다고 그냥 무시하기에는 지나치게 강한 전력이야.”
당장 무극수 하나만 미쳐 날뛰어도 재앙이 된다. 당연히 그 이름 모를 무극수와 함께 온 백여 명의 전력도 보통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들만으로는 섬서라는 넓은 지역을 장악할 수 없다.
“그래서 직접 가시려는 겁니까?”
“그래.”
잠시 고민하던 강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급한 상황이면 지금 이곳에 저를 부를 필요가 없으셨을 텐데요?”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하는 건 내일이다.”
화급을 요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내일 출발하겠단다.
“이제부터는 흑제성주로서 움직인다.”
순간 강량의 눈이 번뜩였다.
황궁의 총군사가 아닌, 연가의 장남이 아닌.
당대 흑도 무림의 정점에 선 성주로서 움직이겠다는 말은 많은 것을 상상케 했다.
“먼저 떠나기는 하겠지만, 다급하게 움직이진 않을 것이다. 섬서 쪽에서 또 연락이 왔어. 놈들도 빠르고 은밀하게 움직이진 않는다고 하더구나. 오히려 지나치다 싶을 만큼 느리게 남하 중이라는군.”
“확실히 뭔가를 노리고 있군요.”
“그래. 설령 우리가 시간을 맞추지 못해도, 최악의 경우 남궁 노선배가 나서 주실 것이다.”
“거기에 소맹주도 있고요.”
강량이 턱을 쓰다듬었다.
“애들을 데리고 오라는 뜻이로군요.”
“그렇다.”
연호정은 흑제성주임에도 예전처럼 소수 정예로 움직였다.
물론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흑제성주로서 움직인다면 나름의 준비가 필요했다.
“안 그래도 성주 개인 호위들이 하남(河南) 비처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그래, 안다.”
“다 데리고 올까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이제부터 항상 함께한다.”
강량이 씨익 웃었다.
“다들 좋아하겠군요.”
한 조직의 수장이란 절대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존재다. 지금껏 연호정은 거치적거린다고 모두를 내버려 두고 강호를 종횡했지만, 이제부터는 다를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권위를 내세우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개인으로서가 아닌 흑도 무림의 정점으로서 움직이겠다는 것은, 흑제성 본단에 잠자고 있던 권력의 추를 자신에게로 옮기겠다는 뜻과 같다.
수천 리 떨어져 있지만, 이제부터는 연호정이 곧 흑제성이다. 최고급 호위와 정보 단체인 암무단(暗霧團)의 단주가 그와 함께할 것이다.
“중간 거점으로 애들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그래, 수고 좀 해라.”
“수고는요, 무슨.”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피식 웃고 있지만, 연호정은 내심 강량에게 미안했다.
흑제성의 새로운 오대신장들 모두가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는 이들이었고, 그들 모두 일파의 수장급 무력을 지닌 최고수들이었다.
위치를 생각하면 이런 일을 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군말 없이 연호정의 말이라면 즉시 움직였다.
그중에서도 강량은 특별했다.
‘잘 다스리고 있구나.’
이곳에는 양천이 있다.
양천은 이제 황제의 부마가 되었다. 연호정 개인과는 아무 사적인 원한이 없지만, 강량에게 있어 양천은 불구대천지수였다.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날 것이다.
그 언제 벌어질지도 모르는 결판을 위해 강량은 인내하고 있었다. 연호정 역시 예전에 양천에게 말했듯, 사제지간이라는 관계 때문에 강량을 막거나 중재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훗날 강량이 양천을 죽일 기회를 잡아도 연호정은 절대 관여치 않을 것이다. 그것은 두 사람이 처리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결판이 나지 않을지도 모르지.’
전쟁 중에 둘 중 누군가가 죽는다면, 그럴 수도 있다.
그리고 연호정은 절대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랐다. 어떤 식으로든 결판은 나야만 했다.
그것이 올바르다.
“그나저나.”
강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누님은 어쩝니까?”
“아직 몸도 안 나은 녀석을 어떻게 데리고 다니겠냐.”
“반발이 꽤 심할 것 같은데요.”
“그러진 않을 거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가끔 떼를 쓰긴 해도, 녀석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을 만큼 바보가 아니거든.”
***
강량을 보낸 연호정은 거처 옆 마구간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흑혈신마가 죽은 듯 잠을 자고 있었다. 거대한 마구간을 홀로 차지한 흑혈신마의 위용은 실로 대단했다.
연호정은 담담한 눈으로 흑혈신마를 바라보았다.
‘역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괜찮은 말이 있다면, 사음교 놈들이 했던 것처럼 우리 쪽에서도 저런 마물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하고.
아쉽게도 그건 불가능했다. 적어도 지금의 연호정에게는 그러했다.
하지만.
‘많이 부풀었군.’
우우우웅.
연호정의 안광이 은은하게 빛났다.
흑혈신마의 두뇌와 심장을 잇는 선 중간에 한 줄기 새하얀 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신왕기(神王氣)였다.
온몸 가득 무시무시한 마기가 꽉 차 있는 건 변함이 없지만, 씨앗이 된 신왕기가 개화하며 특유의 마성(魔性)을 상당 부분 지워 내고 있었다.
흑혈신마가 죽은 듯 잠에 든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인간으로 치자면 상단전과 중단전이 뒤바뀌고 있는 셈이었다. 맨정신으로는 그 변화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조만간 이 마물의 정신은 온전히 연호정에게 종속될 것이다.
‘너에게 죽은 사람이 많다. 자유로이 뛰놀게 하고 싶긴 하지만, 은원 청산은 해야지. 나와 함께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후에 너를 놓아주마.’
연호정이 흑혈신마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우우우웅.
더 강한 신왕기가 스며들자 흑혈신마의 마성이 비명을 질렀다.
한참 동안 신왕기를 구사한 연호정이 손을 떼었다.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바쁜가.”
연호정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모자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