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265)
265화. 고백 (3)
쾅!
“자, 오늘은 여기까지.”
사방에 널브러져 있던 군병들이 재빨리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어, 너희도.”
광룡부를 메고 가던 연호정이 팽만호를 가리켰다.
“만호.”
“예, 형님.”
“보법에 좀 더 신경을 쓰는 편이 좋겠다.”
“보법이요?”
“네 도법은 힘의 무공이야. 도법이 한결 경쾌하고 빨라졌으니, 이제 무게를 실을 줄도 알아야 해. 상대를 압박하고 짓누르려면 하체에서부터 힘을 받아야 한다. 신경 써 보는 게 좋을 거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뒤이어 연호정이 여국을 불렀다.
“요새 몸이 안 좋은가? 검속(劍速)이 미세하게 느려졌어.”
“근래 둔검(鈍劍)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검속이 느려졌다면 아마 그 영향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어떤 무리(武理)를 연마할지는 네가 알아서 결정할 일이지만 실전 능력이 떨어져서는 안 돼. 지금이야 검속이 느려진 정도지만, 시간이 지나면 분명한 빈틈을 만들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둔검을 조금 더 파고 싶다면 수공(手功) 수련을 병행하는 걸 추천하지. 그게 어려우면 검을 쥐지 않은 손을 또 하나의 검처럼 여겨 봐. 그 하나의 인지만으로도 충분한 도움이 될 거야.”
“감사합니다.”
“좋아.”
마지막으로 부른 사람은 송연경이었다.
“연경.”
“네, 군장님.”
“창술의 박력이 대단해. 조만간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될 것 같아.”
“저, 정말요?”
“하지만 힘의 증대는 필연코 섬세함을 잃게 만들지. 아미파의 창술은 곧고 웅장한 강격(强擊) 위주라 더 신경을 써야 해. 창술의 경지는 깊어졌으되, 힘을 제어하지 못하면 옆에 있는 동료가 다칠 수 있어.”
“아……!”
“진기로 제어하기 힘들 때는 독비(獨臂) 수련이 좋아. 양손으로 휘두르던 걸 한 손으로도 제어할 수 있도록 노력해 봐. 자연스레 진기도 그에 맞춰 강약 조절이 될 거다.”
“감사해요.”
“다만, 중병기를 한 손으로 제어하는 만큼 관절에 무리가 갈 수 있다. 조석으로 운공하며 관절을 충분히 어루만져 주도록 해.”
“네.”
“그래, 고생했어.”
연호정의 안목은 날카롭고 정확했다.
반대로 그의 조언은 유연하기 이를 데 없었다. 군병들 모두를 똑같이 대했지만, 개인에게 조언할 때는 그 사람의 성격에 맞춰 대응해 주었다.
미세한 차이지만, 그 차이가 더 깊은 신뢰를 만들어 내는 법이다. 과격한 흑도의 방식에만 익숙했던 연호정도 어느새 섬세함이라는 걸 체득하고 있었다.
“휘유.”
제갈아연이 나직이 휘파람을 불었다.
“오늘 왜 이래?”
“뭐가?”
“오늘따라 유독 자상한데? 뭔 일 있어?”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나는 원래 자상해.”
“웃기고 있네, 이 흉악한 놈이.”
“공석이다.”
“웃기고 있네, 이 흉악한 분이.”
“아오!”
연호정이 학을 떼며 자리를 떴다.
제갈아연이 소리쳤다.
“어디가? 새로 만든 공격 진형 봐주기로 했잖아!”
“아까 봤어.”
“언제!”
“너 자빠져 쉴 때 봤다. 괜찮았어. 보완할 부분은 전술도에 적어 놨으니까 참고하면 돼.”
“억?!”
“먼저 간다. 그리고 묵비, 오늘은 유시(酉時) 초까지는 들어와라. 아버지 기다리실라.”
그 말을 끝으로 연호정이 연무장을 떠났다.
제갈아연은 뚱한 얼굴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거 진짜 무슨 일 있나?”
그녀가 묵비를 돌아보았다.
앉아서 쉬고 있던 묵비가 두 눈을 소처럼 끔뻑거렸다.
“왜?”
“언니.”
“응?”
“저놈 오늘 귀빠진 날이에요?”
“아니? 그런 말은 없었는데?”
“그런데 뭐가 바쁘다고 저렇게 서두른대요?”
“아버님이랑 다 불러서 할 얘기가 있다고 하긴 했어. 그거 외엔 모르겠는데?”
“할 얘기?”
제갈아연이 머리를 긁적였다.
듣자 하니 아무래도 집안일인 모양이었다. 아무리 친분이 깊어도 집안일까지 알아보려 드는 건 지나친 무례였다.
‘음.’
제갈아연이 다시 묵비를 바라보았다.
묵비는 괜스레 목을 움츠렸다.
“왜 그래, 동생?”
“언니는 완전히 가족이네요, 가족.”
“나? 무슨 가족?”
“저놈 가족이요.”
“응, 아버님이 식구로 받아 주셨거든.”
“그건 아는데요.”
제갈아연이 고개를 저었다.
“여하간 저 집안은 여러모로 연구 대상이야.”
묵비가 연가 소속이 된 경위에 대해서는 진즉에 들어서 알고 있었다.
연위는 묵비의 무공이 쓸 만해서 그녀를 식구로 받아 준 게 아니었다. 아들의 친구였고, 연고가 없다는 사정만으로 식구로 받아들인 것이다.
거친 강호에서 보기 드문 신뢰였다. 게다가 묵비의 성격 변화만 봐도 연씨 집안이 그녀를 얼마나 챙겨 주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강한 거지.’
무림의 세력들은 대부분 폐쇄적이다.
하지만 연가는 그렇지 않았다. 여느 문파들과는 달리 상당히 개방적인 면모를 보여 주고 있었다.
강하지 않으면 그런 배포를 보여 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배포를 보여 주었기에, 더 강해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자, 일각 후에 이거 진형 연습 좀 해 보자고요. 언니도 같이 도와줄 거죠?”
“물론이지.”
거처로 돌아온 연호정은 깨끗하게 씻은 후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휘이이이잉.
훈련 때도 그랬지만, 오늘따라 바람이 유독 거셌다. 아직 해가 질 시간이 아닌데도 어둑한 걸 보면 곧 눈이 올 것 같았다.
“징글징글하군.”
중원 온갖 지역 중 안 다녀 본 곳이 없지만, 흑도의 제왕으로서 그의 근거지는 중원 남부였다. 그리고 중원의 남부에서는 눈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다.
무림맹이 있는 대별산은 달랐다. 정말이지 하루가 멀다고 눈이 오는데, 한번 내리기 시작하면 무릎까지 쌓이는 건 예사였다.
“이래서 어지간하면 겨울은 피했는데.”
흑제성의 성주로 있을 적 백도 무림과 전투를 벌일 때도 어지간하면 겨울은 피했다.
방어진을 치고 있을 때는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공세를 이어 갈 땐 북부의 추운 날씨가 병사들의 발목을 붙들었다.
내공을 익혔다고 추위를 타지 않는 건 아니다. 물론 한서불침의 경지에 들어 더위와 추위를 안 타는 고수도 많았지만, 대다수는 그러지 못했다.
그런 이들에게 겨울의 전투는 지나치게 혹독했다.
“이제는…….”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싸움도 지겹군. 언제쯤이면 이 싸움이라는 행위가 사라질는지 모르겠어.”
아마도 인간이 이 땅에 살아가는 한, 싸움과 분란이 끊이는 날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 싸움은 끝낼 수 있겠지.’
연호정의 눈이 서슬 퍼런 빛을 발했다.
‘아마 양천도 머지않아 본격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할 거야.’
흑양을 배신자로 몰아 거처에 처박아 두었다. 양천 역시 사음교, 나아가 광신삼교 전체를 의심하고 있을 것이다.
‘사음교는 묵룡부를 중원의 교두보로 삼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양천이 알아챘으니, 간접적으로나마 중원행을 저지한 셈이다.’
화르륵.
사음교를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주작기가 치솟았다.
심장이 한순간 뜨거워지며 혈행이 빨라졌다. 맑고 깊었던 동공이 점차 붉은빛으로 달아올랐다.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훅.
타오르던 불길이 이내 잠잠해졌다.
놈들을 향한 분노는, 놈들이 없어지지 않는 한 평생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분노를 다스리는 건 가능했다.
‘이제는 방향성조차 잃어버린 이 분노는, 한껏 모아 두었다가 놈들을 만났을 때 터트려 주면 되는 거야.’
재차 눈을 뜬 연호정의 표정은 지극히 무덤덤했다.
휘이이이잉.
바람이 점점 거세졌다.
시간이 지나자 얇은 눈송이들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알려 주기 시작했다.
연호정이 탁자 위 촛불을 켰다.
후웅.
창을 들썩이는 바람에 촛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가만히 촛불을 보던 연호정은 다시 눈을 감았다.
의자에 꼿꼿이 앉아 눈을 감은 그의 모습은 마치 천년이 지나도 그 자리를 지킬 석불처럼 고요하고 단단해 보였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렀다.
“내가 너무 빨리 온 것이냐?”
연호정이 눈을 떴다.
어느새 연위가 방에 들어와 있었다.
“오셨습니까.”
“오냐.”
연위가 어깨를 털었다.
“또 눈이 오는구나. 어째 작년보다 더 많이 오는 것 같아.”
“내일 새벽에 숙소 주변을 정리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하마. 새벽부터 회의가 잡혀서.”
연위가 연호정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가 의아한 듯 말했다.
“비아는?”
“유시 초까지 오라고 했습니다. 곧 오겠지요.”
“그래.”
그것으로 잠시지간 대화가 끊겼다.
부자는 그렇게 촛불을 사이에 두고 앉아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연호정을 보는 연위의 눈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저 한없이 맑고 깊었다.
반면 연위를 보는 연호정의 눈빛은 그만큼 깊되, 끊임없이 일렁이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연위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지평에게서 서신이 왔다.”
“그랬습니까?”
“조만간 맹에 들르겠다고 하더구나.”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거리가 상당한데, 혼자 괜찮을까 모르겠습니다.”
“그간 알게 모르게 시간이 많이 흘렀다. 지평의 나이도 해가 넘어가면 열여덟이 아니더냐.”
“벌써 그렇게 됐습니까?”
연위가 혀를 찼다.
“애비 나이는 잊어도 상관없지만, 네 동생 나이 정도는 기억하거라.”
“뭐, 어련히 알아서 잘 크지 않겠습니까.”
“잘 크는 것과 챙겨 주는 것은 다른 문제다. 훗날 이 애비가 죽으면, 너희 둘이서 의지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
“형제란 그래서 좋은 것이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챙겨 줄 수 있을 때 더 많이 챙겨 주도록 노력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오냐.”
가만히 연위를 보던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
“말하거라.”
“그래도 당장 떠나실 것처럼 그리 말씀하진 마십시오.”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너희 두 녀석을 놔두고 불안해서 어딜 가겠느냐. 적어도 내 손주들이 혼인하는 것까지는 보고 갈 것이다.”
“예, 그 정도 보시면 가셔도 됩니다.”
“이놈이.”
“하하.”
그때, 한 줄기 인기척이 느껴졌다.
“비아가 왔구나.”
“그러게요.”
연호정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고, 묵비가 들어왔다.
“후, 엄청 춥…… 컥! 아, 아버님?!”
“왔느냐?”
“죄, 죄송해요. 제가 많이 늦었죠?”
“늦기는. 내가 너무 빨리 온 것이다. 그리고 늦으면 또 어떠냐? 바쁘면 그럴 수도 있는 게다.”
연호정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쟤 안 바빴을걸요.”
묵비가 도끼눈을 뜨고 연호정을 노려보았다.
연호정이 고개를 돌린 채 휘파람을 불었다.
연위가 피식 웃었다.
“앉거라.”
“아, 네!”
묵비가 후다닥 의자에 앉았다.
연위와 연호정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어깨에 묻은 눈을 털어 주었다. 묵비의 얼굴이 붉어졌다.
“괜찮은데요…….”
연위는 아무 말이 없었다.
연호정이 혀를 찼다.
“대충이라도 좀 털고 들어와라. 거 칠칠찮게 진짜.”
묵비가 다시 연호정을 노려보았다.
눈빛에 광룡부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살벌한 기세가 어려 있었다. 연호정이 후다닥 고개를 돌렸다.
연위가 연호정을 보았다.
“모일 사람은 다 모인 것 같다. 아까 제갈 군사께 여쭤보니, 한 시진 뒤에 오시라 했다면서?”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만 따로 할 얘기가 있는 것이로구나.”
“예.”
“필시 네가 지금껏 말하지 않은 비밀을 말해 주려고 부른 것이렷다?”
“이제는 아니지요.”
연호정이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더는 비밀로 두지 않을 겁니다. 오늘부터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