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Haired U.S. Army Marshal RAW novel - Chapter (373)
374_수확의 계절 (6)
병참 사령관 존 리 장군의 이마 주름은 날이 갈수록 그랜드 캐니언에 비견될 만치 깊어져만 가고 있었다.
당장 방방곡곡에 보급해야 할 품목은 한도 끝도 없다.
연합국 외교관과 수뇌부는 분주히 회동하며 내년 종전을 목표로 서서히 전후 세계 질서에 관해 논의를 개시했고, 이에 따라 연합군 총사령부도 내년 봄을 기해 독일 본토로 진격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당연히 적국의 심장부까지 어떻게 보급을 보낼 수 있을까를 따지는 건 그의 몫이었다.
여기에 더해 탈환한 벨기에 등지에 대규모 기근이 벌어지지 않도록 식량을 운송할 계획을 짜야 했고. 네덜란드에 벌어진 기아 사태를 극복하기 위한 작전 또한 공군과 함께 준비해야 할 새로운 숙제가 되었다.
이것으로 끝인가? 그럴 리가.
군대는 거대한 소비 집단이니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물자를 소비한다. 먹을 식량, 입을 군복, 타고 다닐 차량, 차량의 기름과 부속품, 총기와 탄약, 야포를 비롯한 중장비… 수천수만 가지의 품목을 제때제때 부족하지 않도록 보내줘야 한다. 이번에 소모가 컸으니 그 공백을 빠르게 메꿔줘야 할 터.
잠시 바깥바람이나 좀 쐴 겸 인근 카페에 나와 향긋한 커피 내음을 음미하던 그는 천천히 다가오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리 장군.”
“아, 브래들리 사령관. 좋은 아침입니다. 잘 지내고 있습니까?”
“후방에서 많은 편의를 봐주고 있어 저야 무척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 선배님과 부하들의 노력 덕택 아니겠습니까.”
브래들리는 웃으며 다가와서는 슬쩍 손을 내밀었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일은 좀 할 만하시고?”
“한시름 덜었지요. 미친 듯이 달렸으니 이제 숨 좀 돌려야 하고요.”
“흠. 그래서 혹시 그 여배우랑―”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위문차 왔길래 밥 한 끼 먹은 게 전부예요. 그냥 팬심입니다, 팬심.”
“미친개가 하는 말은 좀 다르던데.”
“장군님쯤 되는 분이 패튼의 헛소리를 귀담아들으십니까? 애초에 흑심으로 가득 찬 게 저겠습니까, 패튼이겠습니까?”
“상대가 상대니 둘 다 아닐까 싶은데.”
“빌어먹을. 담배 좀 피워도 되겠습니까?”
눈살을 찌푸리며 담배에 불을 붙이는 브래들리를 보며 리 장군은 키득댔다.
“마침 저도 제 부하들이 하도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어 답답한 마음에 바람 좀 쐬러 나왔습니다.”
“저런, 혹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인가?”
“그렇습니다. 선배님이 아니면 불가능하죠.”
“보급 문젠가 보군. 처음부터 작정하고 나왔어.”
후 하고 연기를 내뱉으며 브래들리는 슬쩍 미소만 지었다. 이래서야 안 들을 수가 없는데.
“뭔가?”
“양말이 턱도 없이 부족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줄 순 없나? 내가 벨기에까지 양말을 보내려면 산타클로스를 좀 섭외해야 하거든.”
“전방 병사들이 죽은 독일군 군화를 벗겨서 양말을 찾고 있는 판국입니다. 근데 우습게도 그놈들 중 양말 신은 놈이 백 명 중 하나도 없다더군요.”
브래들리의 입가에서 미소가 서서히 사라져 갔다.
곤혹스러운 건 잘 이해하겠다만 정말 못 보내는 걸 어쩐단 말인가. 리는 일단 회피 기동에 들어가기로 했다.
“급한 건이니 내가 총사령관에게 이야길 좀 해봄세.”
“어제 유진을 붙잡고 2시간쯤 이야기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그놈 꿈에 양말 뒤집어쓴 괴인 하나쯤은 나왔을 겁니다.”
“자네 얼굴에 멍이 없는 걸 보니 2시간은 아닌 것 같은데.”
“그놈 주먹질 더럽게 못하거든요. 오늘은 자리 비웠으니 내일 총사령부 가시면 옥좌에 앉은 판다 한 마리 볼 수 있으실 겁니다.”
“거기 갔다간 빌어먹을 칠면조 문제로 붙잡혀. 못 가.”
그렇다.
칠면조.
그 망할 칠면조가 끝도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아… 그거, 진짜 1인 1칠면조입니까?”
“장담컨대 그랬다간 한 1주일쯤 뒤 남은 칠면조 좀 그만 먹고 싶다고 반란이 일어날 거야. 히틀러가 좋아하겠군.”
“우리 장병들을 너무 고평가하시는군요. 전 사흘 걸겠습니다.”
“아무튼, 양말은 최대한 빨리 수배해 보겠네.”
“급합니다.”
양말은 중대 문제다.
원래도 그랬지만, 지난 1차 대전의 트라우마가 아직 지워지지 않은 지금 양말은 보급 순위에서도 상위에 들어 있는 물품이었다.
오랜 행군 동안 양말이 없으면 발이 엉망이 되고, 당연히 전투력에 문제가 생겨 전력 외 판정을 받는다.
행군이 없더라도 축축한 참호에 들어가 있으면 발은 젖게 마련이고, 깨끗하고 잘 마른 양말로 계속 갈아신지 않으면 그 망할 참호족이 발병해 남의 집 귀한 아들을 발 없는 병신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사람 좋은 브래들리가 직접 달려올 만하다.
“저는 그럼 믿고 일어나 보겠습니다. 예하 지휘관들에게도 전파하겠습니다.”
“아니, 이 친구야. 내가 아까 당장은 힘들다고―”
“감사합니다 선배님. 점심 맛있게 드십시오.”
“야, 야!!”
답을 들은 브래들리는 꽁초의 불을 끄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매우 빠른 걸음으로 스르륵 사라져버렸다.
“제길. 또 어딜 건드려서 트럭을 확보해야 하지?”
탄식이 절로 나왔다. 바람 좀 쐬러 나왔다가 이게 무슨 횡액이란 말인가.
잠시 고민하던 리는 또 무슨 봉변을 겪기 전에 다시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안타깝게도, 후방근무의 스페셜리스트인 그의 위기감각은 전방 지휘관들에 비해 살짝 부족했다.
“야! 존!”
“…제길.”
익숙한 목소리. 별로 뒤를 돌아보고 싶지 않다. 이 목소릴 듣기 전에 빨리 일어났어야 했는데.
“동기 사랑이 나라 사랑 아닌가! 친애하는 병참 사령관님 좀 보러 왔지!”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브래드가 알려줬네. 아무튼!”
미친개, 조지 패튼은 으르렁 멍멍 입으로 개소리를 늘어놨다.
사탄도 울고 갈 미군 관료제 피라미드의 최상층에 도달한 사람치고 성격이 비범하지 않은 이들은 드물다. 존 리 또한 그 비단결 같은 성품으로 악명이 자자하지 않았던가. 천하의 패튼에게서조차 ‘리 그 새끼한테 지랄 좀 했다간 보급으로 보복할지 몰라. 그 새낀 그러고도 남을 놈이야.’란 평판을 얻었던 리 장군이었다.
그러나 유진 킴의 마수가 닿은 이후 리는 몸을 사려야 했다.
‘이 산 제물이라는 게 말입니다. 원래 아랫사람들의 원망과 미움을 많이 받은 사람의 대가리를 잘라서 제단에 바쳐야 그 효과가 탁월해요.’
아직도 가끔 자다가도 심장이 벌렁거린다. 그놈은 위아래도 없나? 그냥 평범하게 말하면 되잖은가. 질책, 견책, 경고 뭐 그런 것들. 저래서야 연합군 총사령관이 아니라 갱단 두목 아닌가.
― 친애하는 연합군 장병 여러분. 추수감사절 칠면조를 먹여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사실은 병참 사령관 존 리가 히틀러의 지령을 받고 여러분들의 칠면조를 대서양에 처넣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잘못이 없으니 병참 사령관을 매다세요….
― 역시 원수님께서 약속을 어겼을 리가 없어!
― 병참 사령관을 죽여라! 칠면조 대신 그놈을 노릇노릇 구워버리자!
생각만 해도 살이 파들파들 떨린다. 그는 프레덴달처럼 되고 싶진 않았다.
아무튼 존 리는 그날부로 조금 더 유해졌고, 그러자 어떻게 되어먹었는지 짐승 같은 직감센서로 강약약강을 기가 막히게 실천하는 패튼이 다시 미친개의 누런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째서 우리 제7군의 보급 순위가 뒤로 밀렸나?!”
“그야 자네 부대는 후방으로 돌려져 재편 중이기 때문이지.”
“그 재편이 늦어지고 있잖아! 보급 달라고 보급! 귀여운 신병들도 2만 명쯤 보내주고!”
“다른 모든 부대가 모두 똑같은 소릴 하고 있어.”
“그럼 당연히 최강, 최정예, 최고의 부대인 제7군을 우선시해야지! 독일 놈들의 배때기를 꿰뚫고 베를린으로 달려갈 선봉은 당연히 파리를 해방한 이 위대한 부대가 맡아야 할 역할 아닌가!!”
“총사령관의 명령서를 들고 와. 그럼 우선순위를 앞당겨주지.”
“그 빌어먹을 칠면조 때문에 날 만나주지 않는단 말야!”
글쎄. 아마 그건 핑계 아닐까?
패튼은 보급 받아내기 전엔 가지 않겠다는 듯, 조금 전 브래들리가 따땃하게 데워 놓은 의자에 퍼질러 앉아 주섬주섬 호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뭔가?”
“내가 끝내주는 걸 구했지. 내 성의 표시니 이거 하나 받게나.”
“뇌물? 지금 자네 미쳤―”
패튼의 주머니에서 하나가 그 자태를 드러내자 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건―”
“서부 전선 최고의 명물 유진―바일세! 소문에 따르면 이거 하나 뜯어먹으면 독일 놈들이 부나방처럼 달려든다더군!”
“먹으면 뒈지는 게 아니고?”
“제리를 못 이겨서 뒈진 거지. 나약한 놈들. 하나 먹겠나?”
“그렇게 좋으면 너나 많이 먹어, 이 꼴통아.”
패튼은 피식 웃으며 포장지를 잡아 뜯었다. 프린팅되어 있던 유진 킴의 목이 두 동강 나며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고, 탐스러운 초콜릿이 그 자태를 드러냈다.
“나잇값 좀 하고 살 수 없나?”
“무슨 나잇값? 총사령관 아버지는 2년 뒤면 80세라더군. 근데도 대서양을 건너서 이 전쟁터에 온 거야. 나이라는 건 결국 그 정도에 불과한 거지. 오 나는 늙었으니까 똥폼을 잡아야 해, 늙으면 누워야 해 그딴 마인드로 찡찡대면 진짜 늙어버린다고.”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던 초코바가 패튼의 입 안으로 들어가 우그적우그적 형체를 잃었고, 그 파편 몇 개가 리의 앞으로 튀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정말 보급 안 줄 건가?”
“그래. 기다려.”
“남은 반쪽 이거라도 먹을래?”
썩 꺼져버리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들끓다가도 도로 내려갔다.
“그래서, 그리 젊게 살고 싶어서 그 여배우한테―”
“벌써 소문이 났나? 허 참. 브래드 그 음흉한 놈이 속내를 숨겨봤자 이 상남자, 조지 스미스 패튼 주니어와 경쟁이 될 리가 없지. 그녀는 내게 뻑 갔네!”
“…내가 전해 들은 말이랑 전혀 다른데.”
“분위기도 무척 좋았네. 내가 끝내주는 선물을 주니 그녀도 무척 좋아하더군.”
“선물?”
“새로 장만한 권총! 진주로 장식한 놈이었어. 내가 아까 말하지 않았나. 이게 다 젊게 사니까 그런 거라고.”
이어지는 패튼의 장광설을 들으며, 리는 머릿속 인명록 패튼을 위한 공간에 ‘비대한 자아… 나이 먹고 더 심해짐. 나이를 엉덩이로 처먹었나?’라 적어놓은 후 귀를 닫았다.
차라리 칠면조 보급으로 고민하는 게 더 나을 뻔했다.
못 해먹겠네, 정말.
* * *
같은 시각.
영국 런던.
“가장 최악의 순간, 우리 장병들을 도와준 점 잊지 않고 있네. 킴 원수. 영국을 대표해 감사를 표하지.”
“하하. 저희 사이에 구태여 왜 그러십니까. 다 끝난 일 아닙니까.”
“네덜란드 정부에서도 이번 일에 크나큰 감사를 표하지 않았나. 나날이 귀하의 명성이 드높아져 가는군.”
처칠은 옆에 앉아 채신머리없이 럭키 스트라이크를 뻑뻑 빨아대는 유진 킴을 힐끗 쳐다보다 말았다.
“몽고메리는 응분의 대가를 치를걸세.”
“뭐어―”
“전쟁이 끝난 뒤의 이야기지만. 그것만큼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네.”
“피해자는 제가 아니니까요. 그에 대해 악감정은 딱히 없습니다.”
정말일까?
이 음흉한 놈의 속내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패배의 충격이 가신 후, 처칠은 몇 번이고 마켓―가든의 흐름을 복기하며 혹시 눈탱이 밤탱이 당한 게 아닌가 몇 번이고 곱씹는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그때마다 결과는 NO.
마켓―가든의 실패 예측이야 상대가 현 지구상 최고의 명장 반열에 있는 이니 그렇다 쳐도, 장남의 실종은 정말 완벽한 우연 아닌가.
쓰러진 뒤 생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한 게 틀림없다, 고 다시금 곱씹으며 처칠은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서류를 툭툭 두들겼다.
“그럼 이건?”
“선물이지요.”
“선물이라! 받아먹자니 참 갑작스럽구만.”
“싫으면 빼면 됩니다. 오는 길에 드골 대통령을 뵈었는데, 그분은 시원하게 동의하셨지요.”
그놈이랑 내 사정이 같냐. 이 자식아.
물론 처칠의 속마음과 면상은 180도 다르게 따로 놀았다.
“그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앞으로 우리의 우호 관계가 영원하길 바라며, 킴 장군의 무운을 빌겠소.”
“감사합니다. 총리님께서도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그럼 현충일 기념식 때 보세나.”
“그때 뵙겠습니다.”
처칠은 그렇게 영국으로 오는 원조 품목에 칠면조를 추가했다.
도대체 뭐가 뭔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스팸이 아닌 고기를 시민들에게 배급할 수 있으니 좋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