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Haired U.S. Army Marshal RAW novel - Chapter (436)
437_마지막 쇼군 (1)
한국의 군정은 매끄럽게 굴러갔다.
누구 하나 총에 맞는 일도 없었고, 인생 한 방을 노리는 쿠데타 꿈나무들도 없었다.
하루하루 끝내주게 자극적인 화젯거리들, 다시 말해 친일파 처벌과 토지개혁이라는 떡밥이 사실상 대중들을 마취시키다시피 했고, 이걸 말아먹지 않는 이상 대중들이 군정에 적대적으로 돌아서지도 않을 듯했다.
내가 계속해서 정당정치를 푸시하고 무기 드는 순간 뚝배기를 다 터뜨리겠다는 압력을 넣어서일까.
마침내 이 땅에도 각종 정당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김 장군께서 우리 당의 이름에 대해 우려가 깊다고 들었습니다.”
“그… 제가 개입할 문제가 아닌 건 알지만, 이름을 살짝 바꾸는 게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공산당이라고 이름을 내건 것도 아니고, 당장 영국에도 같은 이름의 정당이 있잖소?”
아니. 어떻게 정당 이름이 일 수가 있냐고요. 에비 지지야. 지지라고. 그냥 깔끔하게 노동당 합시다, 노동당. 예?
여운형은 의아해했지만, 겨우 당명 가지고 고집을 부리진 않았다.
우익 계열 정당이 크게 세 토막으로 나뉘어 아웅다웅하는 동안, 좌익은 일단 노동당이라는 빅 텐트를 만들고 그 아래에 여러 계파가 할거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진성 빨갱이, 친소파, 사민주의자, 중도좌파가 스까덮밥이 된 저 노동당이 과연 몇 년을 갈지는 미지수지만, 일단은 잘됐으면 좋겠다. 괜히 시끄러워져 봐야 좋을 일 없으니.
한국 군정청의 1기 정책이 일단 시동을 걸었으니, 그다음은 당연히 일본 차례.
썩어도 준치고,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고 했던가?
우리의 미슐랭 3성 르메이 쉐프가 아무리 정성껏 수비드 조리를 했거나 말았거나, 일본이라는 나라의 펀더멘털을 완전히 날려버리진 못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죽고 무수한 건물이 불타긴 했지만, 머리에 지식이 있고 손에 익은 기술이 있는 이상 재건은 결국 시간문제.
내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일본을 초식동물이 뛰노는 농업 국가로 개조한다? 말은 쉽지만 글쎄올시다.
오직 체제 안정에만 미쳐버린 북한 같은 나라가 아닌 이상에야, 잘 먹고 잘살고자 하는 국가와 민족의 의지는 그 누구도 막지 못한다.
이걸 억지로 누르려고 하면 둘 중 하나겠지. 우리가 떠난 뒤 다시 바퀴벌레 같은 꼴통들이 기어나와 도로 황국을 재건하려 들거나, 혹은 빨갱이들이 일본을 잡아먹고 친소련 정책을 펴거나.
그러니 내가 고를 수 있는 최고의 방안은 단 하나.
일본인들의 욕구를 적극적으로 이루어주고, 그들을 친미로 단단히 묶어버리는 것.
마침 내 평판이 썩 나쁘지 않으니 그리 어려워 보이진 않았다.
“잘들 오셨습니다.”
도쿄로 돌아온 내 눈앞에 있는 이들은 동양교육발전기금의 세례를 받고 고국으로 돌아온 헌헌장부들.
“여러분이 누구보다 잘 아실 겁니다. 일본제국은 국민의 의지를 거부하고, 꼭대기에 있는 권력자들의 이득을 위해 끝없는 전쟁에 나선 결과 파멸했습니다.
이제 이 나라의 새로운 운명은 여러분들에게 달렸습니다. 총칼로 타인을 노예로 만들던 스파르타 같던 일본이 아닌, 세계인의 친구이자 든든한 동료로서 거듭난 신뢰받는 일본을 재건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여러분들뿐입니다.”
캬. 눈에서 불똥 튀는 것 보소.
사실 일본계 동발 장학생 상당수는 원래부터 잘난 집안 자식들이었으니, 굳이 따지자면 그들도 꿀을 빨던 입장에 속한다.
“저희는 일본이라는 좁은 우물을 벗어나 거대한 세상을 보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진정한 동아시아인의 공영이 무엇인지 깨닫고 왔습니다.”
“저희의 땀으로 가족의 죄를 대속(代贖)할 수 있다면 무얼 못 하겠습니까? 장군께서 일본을 버리지 않겠다 하셨으니, 저희 또한 죽을힘을 다해 장군을 돕겠습니다.”
허허. 훌륭들 하구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 나라를 미국식으로 뜯어고쳐야 하는데, 일본 본토에서 한자리 꿰차고 있던 놈들은 신뢰가 안 되니 이놈들을 적극 기용해야지.
나는 뒷배를 제공하고, 이 친구들은 새 일본의 핵심 권력층으로 떠오른다.
그야말로 윈윈 아닌가.
“농촌 재건, 산업단지 신설, 신헌법 제정, 전범 심판. 해야 할 일은 차고도 넘칩니다. 다들 막히는 부분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자. 가서 물어뜯어라.
고기는 사방에 널려 있으니까.
* * *
일본제국 육군과 해군은 사방에 흩어져 있던 장병들의 귀국을 끝마친 뒤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물론 못 돌아온 자들도 제법 있다. 눈알 뒤집힌 장개석의 손에 떨어진 이들은 쉽사리 풀려나지 못할 듯하고, 만주에 있던 관동군 중 소련군 포로가 된 이들은 죄 굴라그에 끌려간 것 같지만 전 잘 모르겠네요.
“킨 장군께선, 앞으로의 일본을 어떻게 만들고자 하십니까?”
내게 찾아온 오오타가 열심히 고개를 조아리며 물어보았다.
내가 정성껏 타준 커피를 참으로 황송하다는 듯 받아 마신 그의 첫 물음에, 나는 고개만 까딱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장군께서 의도하시는 바에 따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끝내 놓았습니다. 부디 흉중에 품고 계시는 대업에 대해 알려주신다면, 제가 잡음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시종장인가 뭔가 하는 양반이 찾아왔었습니다. 조만간 천황이 방문할 예정이라던데.”
“그렇습니다. 천황께서도 언제까지 기싸움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미 황족들 사이에서도 도의적 책임을 지고 현 천황께서 상황(上皇)으로 물러나셔야 한다는 말이 오가고 있습니다.”
이건 또 의외인걸? 히로히토는 신성불가침 아니었나?
“물론 천황 폐하께선 야마토 민족을 다스리시는 현인신이시나, 외적에게 패해 진무 천황 이래 최초로 외적에게 그 국토를 점령당하는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황가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만백성의 어버이인 천황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그런 말이 있긴 합니다.”
“그 세가 제법 큽니까?”
“백중세입니다. 장군께서 누구 하나의 손을 들어준다면 손쉽게 중론이 모이겠지요.”
히로히토를 나가리시킬 수 있다, 라.
이걸 재활용하느냐, 아니면 우리 말을 더 잘 들을 것 같은 뉴 페이스를 끄집어내느냐,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그냥 ‘네놈들 황가는 끝났어! 여긴 이제 미군이 지배한다!’를 외치느냐.
결국 가장 유리한 측면에서 골라야 하고, 그러려면 히로히토와 독대를 좀 해봐야겠지.
“천황가의 처우보다는, 저 개인적으로는 신 일본의 헌법에 더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요?”
“당연히 미국식이지요. 일본제국은 프로이센이나 영국의 법률을 제법 많이 참고했다 들었는데, 그런 글러먹은 곳들을 참조했으니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른 것 아닙니까. 세계 최고의 나라 미합중국을 본받으면 앞으로 일본이 길이길이 번영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흔히들 일본인을 가리켜 윗사람에게 순종하는 민족이라고들 표현한다.
하지만 ‘미국식’으로 죽창을 쥐여줘도 정말 순종할까?
“미국식이라 하면…?”
“제가 한동안 열심히 일본의 역사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일본은 보아하니, 막부가 정권을 잡고 있을 땐 평화로웠지만 도요토미 같은 작자들이 나라를 다스리면 꼭 전쟁을 일으키더군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금, 다른 사례 같습니다.”
“일본제국이 도쿠가와를 폄하하고 도요토미를 충신으로 포장한 결과가 이 태평양전쟁 아닙니까. 애초부터 예정된 비극이었다, 이 말이지요.”
내가 생각해도 좀 헛소리 같지만, 누누이 강조하는 말이지만 전쟁 이긴 놈은 무슨 헛소리를 해도 괜찮다.
“결론만 말씀드리면, 일본 또한 미국처럼 연방제를 도입하는 것이 적절할 듯싶습니다.”
“예? 일본은 연방제와는 크게 인연이 없습니다. 이 열도는 항상 굳건히 하나의 나라라는 정체성을 유지해온지라―”
“그럴 리가요. 다이묘라고 하던가요? 천 년이 넘는 지방자치의 전통이 내려져 오는데, 이야말로 미합중국을 지탱하는 연방제 이념의 정수입니다.”
울어도 빌어도 소용없어. 이번 기회에 아주 뼛속부터 이 나라를 개조할 거니까.
내가 뭐 엄청난 수술을 하는 것도 아니잖나. 난 절대 야매 의사가 아니다. 환자의 건강을 생각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라도 해줄 수 있다고.
“너무 그렇게 상심하지 마시지요. 저는 절대 일본의 분단을 원하지 않습니다. 특정 출신지만이 우대받고, 동향 사람들끼리 다 해먹던 일본제국이잖습니까? 연방제는 각 주의 전통을 지키면서도 일본을 민주화할 수 있는 가장 빠른 해법이라고 봅니다.”
“정말, 이 나라를 갈기갈기 찢으려는 의도는 아니시지요?”
“물론입니다. 속고만 사셨나. 하하하.”
교육제도 개혁, 군제개혁, 귀족원 폐지 등 다양한 방향에서 일본의 썩어빠진 군국주의를 싹 발라낼 방안에 대해 논의하던 중.
갑자기 참모 하나가 사색이 된 채 방에 난입했다.
“대, 대원수 각하.”
“무슨 일인가?”
“도조 히데키가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죽었나?”
“아닙니다. 생명에 지장은 없습니다.”
“뒤질 거면 진작 뒤지든가. 자결 하나 똑바로 못 하는 비루한 놈 같으니.”
마지막 말은 내가 한 말이 아니다. 연신 칙쇼 칙쇼 욕해대는 오오타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저 아저씨도 한 성깔 하네.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아무쪼록 일본 정부는 치안 유지와 물가 안정에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도조라.
그래도 얼굴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병문안은 가줘야 예의에 맞겠지.
* * *
며칠 뒤.
나는 병실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는 빡빡이 전범을 찾아갔다.
“키, 킨 장군.”
“가만 누워 있으시오. 몸뚱아리에 구멍 나신 분이 괜히 일어나지 마시고.”
나는 억지로 일어나려는 그의 어깨를 꾹 누른 뒤, 옆에 있는 낡은 의자에 착석했다.
“그래, 권력이 달달합디까?”
“…나는 최선을 다하려 했으나, 운이 따라주지 않았소.”
“지랄하고 있네. 운은 무슨 놈의 운. 운이 따라줬으면 이겼을 것 같습니까?”
어이가 없어 한마디 하자, 그 순간 10년은 더 늙은 듯 그의 몸에서 생기가 솔솔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뭐야, 지금 죽으면 안 되는데.
“눈앞에 권력이, 만인지상의 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잡아챘지요. 내가 차지하지 않으면, 다른 놈이 차지했을 테니까.”
“허.”
“장군이라면 참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 기회를? 나라를, 조금이라도 더, 제대로 이끌어보리란 그 결의를?”
“내 앞에서까지 구구절절한 자기변명은 집어치웁시다. 나는 당신이 일으킨 전쟁, 그 미친 싸움을 헤치고 여기 온 거요. 그 구차한 변명을 듣고 있다간 귀가 썩을 것 같으니.”
“그렇군요. 하지만 그거 아십니까? 나는 장군께 배운 대로 따라 한 겁니다.”
이 미친 새끼가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야? 뒤질라고.
“장군보다 더, 위대한 승리자로 우뚝 서고 싶었지만, 결과물이 이 모양이니, 앞으로 남은 건 교수대뿐이겠군요.”
“잘 아시는군.”
“하지만 조금 억울합니다. 나는 전권을 얻지 못했습니다. 모두에게 등이 떠밀렸고, 내 등을 떠미는 자들이 원하는 바를 따랐을 뿐인ㄷ―”
“일어나겠소. 완전히 돌아버렸군, 이 인간.”
“이 전쟁의 궁극적인 책임은 결국 히로히토에게 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을 나서려는 순간, 도조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 마지막 호기심을 자극했다.
“…충신 어디 갔소?”
“흐흐흐. 천황이 똑바로 협조를 하기라도 했으면 전쟁이 이렇게 허무하리만치 밀리진 않았을 겁니다. 반대로 천황이 결연하게 전쟁 반대를 외쳤으면 나 또한 승산 없는 불구덩이에 뛰어들지 않았을 겁니다. 내가 왜 히로히토를 위해 죽어야 합니까?”
혼자 죽기 싫다고 이렇게 노빠꾸가 되다니. 역시 추축국 네임드들 중 제정신인 인간은 없는 건가.
“장군께선 히로히토를 계속 써먹으려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는 믿을 수 없는 종자입니다. 천황을 끼고 쇼군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려거든, 적어도 그 어리석은 자가 아닌 다른 천황을 택하시지요.”
“원하는 거라도 있어서 이러나?”
“제 아들을 살려 주셨는데 원하는 게 더 있겠습니까. 다만… 내가 이리 비참해졌는데 쇼와가 등 따습고 배부른 꼴을 보기 싫을 뿐입니다.”
일본 땅에서 이렇게 솔직한 새끼를 처음 보다 보니 좀 정신이 멍해진다. 진짜 내일이 없는 새끼가 제일 무섭다더니.
“관동군에는… 검역급수부라는 부서가 있었습니다.”
눈이 살짝 풀린 도조를 내려다보고 있음에도, 그는 천장만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그곳을 조사하면, 히로히토의 목을 옥죌 수 있을 겁니다.”
“내가 뭘 믿고?”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제가 드리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받아주시지요.”
나는 대답하는 대신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그 순간까지 도조의 기이한 웃음소리가 내 등 뒤를 쿡쿡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