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266
제 266화
85장. 혈투 – 2화
같은 시각.
데스먼드 제국군은 곳곳에서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이카젤라가 10만의 군세를 동원하기 전까지만 해도, 제국군의 결속력은 크게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각지에서 정예를 뽑아 감으로써, 상대적으로 현장의 전력이 약화됐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황제를 백치로 만든 이후, 이카젤라는 모든 국정의 결재 및 진행을 미뤄 버렸다.
애초에 이카젤라에게 데스먼드 제국은 그저 시간 벌기 수단 중 하나에 불과했다.
국가를 운영하고, 체계를 갖추고, 대비 태세를 갖추는 것은…… 그의 관심사 밖이었다.
여전히 데스먼드 제국의 백성들은 알지 못했다.
단 한 사람.
이카젤라라는 사람을 잘못 들였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제국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저 주신에 대한 신앙에 충실했을 뿐 황제의 둘도 없는 심복이자 친구라고 믿었던 이카젤라가 저지른 배신의 파장은 이토록 컸다.
“나탈리 공주, 보시오. 아끼고 보살펴 주어야 할 제국의 백성을 불구덩이 속에 밀어 넣는 것이 과연 정상인지.”
라키스가 질책하듯 나탈리를 꾸짖고 있었다.
헤이즈 덕에 원기를 회복한 그녀는 양손을 포박당한 채로 크리비아 제국군과 동행하고 있었다.
전투 내내, 나탈리는 생포된 데스먼드 제국군의 포로나 백성들로부터 놀라운 얘기를 들어야 했다.
그것은 바로 인신 공양에 대한 이야기였다.
암흑 제단이 있다는 사실이야 나탈리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애꿎은 목숨들이 희생되고 있음은 알지 못했다.
이를 알았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황제인 디그론 4세가 먼저 나서서 말렸을 것이다.
“…….”
“잘못된 신념을 가진 마법사 하나가 이토록 수많은 백성들을 고통 받게 하는 것이오.”
라키스의 목소리에는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자레드야 나탈리와는 과거에 인연이 있었으니 살짝 부드럽게 대한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라키스는 아니었다.
애초에 그간 마도국이 행해 온 악행들이 너무 많았다.
움브라 교단, 카코 교단을 뒤에서 은밀히 후원했던 것도 어쨌든 데스먼드 제국이었다.
물론 나탈리의 입장에서는 국가의 안전을 수호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고 변명을 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편 입장에서 보면, 두 교단은 오랜 시간 동안 골치를 아프게 해 온 집단이었다.
특히 움브라 교단은 과거의 북부 수해를 틈타 전염병을 창궐하게 만드는 등 온갖 악행을 일삼았다.
자레드가 조기에 나서서 상황을 정리하고, 치료제를 보급하지 않았더라면 대재앙이 됐을 것이다.
“……할 말이 없어요.”
나탈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진심이었다.
황제가 백치가 되고,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크리비아 제국의 황도로 내던져진 이후.
짧은 시간에 데스먼드 제국에는 그야말로 피바람이 불었다.
이는 당연한 얘기지만, 나탈리가 원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백성들은 고통 받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크리비아 제국군이 점령 지역의 백성들을 넓은 아량으로 포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저항하는 자들은 모두 남김없이 사살했지만, 항복하는 자들의 목숨은 건드리지 않았다.
물론 교단의 단원이라면 이유 불문하고 척살했지만. 애초에 그들은 항복하지도 않았고, 끝까지 악랄하게 저항하다가 죽어갔다.
“공주가 부끄러움을 안다면, 직접 나서서 백성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좋을 것이오. 군인들도 누군가의 아들이자 연인이며, 형제란 말이오. 이대로 죽는 것을 계속 방관만 할 참이오?”
라키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나탈리의 가슴속 깊은 곳을 푹 찌르며 들어왔다.
달리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은 하나하나가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진실이었기에.
* * *
그 시각.
“크어어억……!”
이카젤라는 또 한 번 자레드에게 일격을 당하고는 볼썽사납게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고 있었다.
환상 마법이 먹혀들지 않았다.
분명 접근하기 전까지만 해도 엉뚱한 곳을 응시하고 있던 자레드는 순간적으로 자신을 노렸다.
단순히 감으로 찍어서 맞췄다고 하기에는 자레드의 공격이 매우 정확했다.
애초에 본체의 움직임을 하나부터 열까지 간파하고 있었던 것 같은 예리함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격에 가해진 자레드의 공격은 이카젤라의 약점에 해당하는 오른쪽 어깨 부위를 정확하게 노렸다.
이카젤라는 알지 못했지만, 자레드의 심안이 가진 ‘약점 분석’의 능력 덕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제법이군…….’
퍼펙트 실드를 이용해 가까스로 자레드의 퍼펙트 스톰 마법을 막았기 때문에.
그 충격으로 인해 이카젤라는 한참을 날아가는 중이었다.
공기가 끝없이 마찰하며 운동량을 줄이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참 날아갈 정도였다.
물론 대책 없이 날아가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 흑마법 특유의 위장술을 이용해 주변 배경과 자신의 모습을 동기화시켰다.
즉, 시각을 왜곡시켰다. 언뜻 보기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왜 자꾸 개수작을 부리냐?”
“……아니?”
뻐어어억!
“커헉!”
한데 그것도 수포로 돌아갔다.
정확히 위치를 간파한 자레드는 텔레포트를 이용해 자신의 위에 자리를 잡았고, 그대로 크러싱 피스트로 이카젤라의 복부를 내리쳤다.
과아아아!
엄청난 속도로 그가 추락했다.
[진실의 눈 : 위장술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본래의 모습이 아닌 위장된 모든 모습은 더 이상 당신을 혼란스럽게 하지 못합니다.]이 역시, 자레드가 가진 심안의 능력 중 하나였다. 그 어떤 위장술을 쓰더라도 본질을 간파할 수 있는 능력.
바로 진실의 눈.
‘그간 차곡차곡 심안의 필요한 옵션들을 얻은 것이 정말 큰 도움이 되고 있어.’
자레드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사이, 추락하던 이카젤라가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시전한 검은빛 구체가 날아들었지만.
콰아앙! 콰아앙!
바람의 장벽으로 쉽게 막았다.
아직까지는 자신도, 이카젤라도 서로를 탐색하는 과정에 있었다.
분명 위력적인 일격이나 반격을 가할 기회가 많았지만, 서로 나름 ‘간’을 보고 있었다.
‘이제 모든 판단은 끝났다.’
자레드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전투에 대한 전체적인 생각을 정리했다.
이카젤라에게 환상, 왜곡, 위장 마법과 같은 꼼수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경고했다.
그렇다면 녀석도 이제는 전면전을 택할 것이다.
마법사의 전면전이란, 셀 수 없이 많은 마법을 끝없이 주고받는 난타전을 뜻한다.
[옵션 1 : 반경 20m 밖에서 날아드는 마법의 속도를 20% 수준으로 크게 낮춥니다.] [옵션 2 : 단, 1번 옵션의 활성화를 위해서 왜곡의 대상을 지정해야 합니다.]자레드는 공간 왜곡의 시계를 꺼내, 왜곡의 대상을 ‘이카젤라’로 완벽하게 지정했다.
이제 20m 밖에서 날리는 이카젤라의 공격은 코딱지를 파면서도 막을 수 있는 느림보 공격이 될 것이다.
즉, 자신을 죽이고 싶다면 이카젤라도 20m 반경 안으로 거리를 좁혀 다가와야 할 터였다.
‘그간 내가 키워 온 실력, 모은 아티팩트, 특수한 능력들 모두 남김없이 사용해 주겠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샌드백을 얻었으니까!’
재차 다짐했다.
바로 그때.
“어린애 장난은 여기까지다.”
화르르륵!
이카젤라의 몸 전체가 검은 불길로 휩싸이더니, 이내 리치와 비슷한 형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리치가 본질이 아닌 것은 분명했지만, 마치 리치의 모습이 겹친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악마화.’
어떤 레퍼토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극의에 이른 흑마법사가 된 존재만이 자신의 몸에 만들어 낼 수 있는 특수한 변화.
이는 자신의 수명을 온전히 계약의 제물로 바친 흑마법사에게 주어지는 강력한 힘이었다.
즉, 마족 또는 마왕의 힘을 끌어다 쓰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그만큼 자신의 수명을 상당히 잃겠지만, 지금 이카젤라에게 그것은 딱히 고려 사항이 아닌 듯했다.
치이이이.
흑화한 이카젤라에게서 검붉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며, 사방이 온통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분명 암흑 제단의 내부는 거대한 형광등을 밝혀 놓은 것처럼 밝았지만, 이 공간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
하지만 자레드는 심안의 ‘시각 방해 보정’을 통해, 그 안에서 공격 자세를 취하는 이카젤라를 볼 수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래서 더 폭발적인 위력을 갖는 이카젤라의 마법이 준비됐다.
‘죽음의 광선.’
딱 한 번이지만, 이카젤라의 손끝에 맺힌 수인을 보고 자레드는 그 마법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9클래스의 흑마법, 죽음의 광선이었다.
메커니즘 자체는 6클래스의 백마법인 디스인티그레이트와 유사했다. 일종의 분해 광선이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디스인티그레이트는 약 2초 정도의 노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죽음의 광선은 스치는 순간, 피격당한 위치부터 반경 7.5cm 정도가 즉각 분해된다는 것이다.
가슴이나 복부 언저리가 타기팅 되면, 즉사도 얼마든지 가능한 공격이었다.
‘바람의 장벽!’
자레드는 장벽을 펼쳤다.
위이잉!
이카젤라의 손끝에서 출발한 위력적인 광선이 굉음을 내며 날아들었다.
‘디스펠(Dispel).’
동시에 이카젤라가 꺼내 든 선택지는 마법사가 마법사에게 치는 하드 카운터.
바로 디스펠이었다.
클래스의 우위를 바탕으로 상대의 마법을 무효화시키는 위력적인 일격이다.
물론 무조건 성공하지는 않고, 상대의 마법적 지혜(지식)에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오래전에 일찌감치 9클래스의 흑마법사가 된 이카젤라는 충분히 자레드를 압도할 자신이 있었다.
파팟.
이윽고 디스펠 마법 특유의 소리와 함께, 자레드의 장벽에 디스펠이 적용됐다.
‘어리석은 놈.’
파팟, 하고 들렸던 소리는 디스펠이 성공했음을 뜻하는 일종의 성공 음이었다.
그래서 연막 속에 모습을 숨기고 있던 이카젤라는 일찌감치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데 바로 그때.
“이카젤라, 뭐가 잘 안 돼?”
유유히 자신을 도발하는 자레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
분명 장벽은 뚫렸을 것이고, 죽음의 광선은 자레드의 복부 언저리를 강타했을 텐데!
이상하게도 자레드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자레드가 펼쳐 놓은 장벽 자체가 멀쩡했다. 죽음의 광선이 장벽에 완전히 막혀 버린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디스펠 마법에 면역 능력을 갖는 ‘바람의 장벽’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이카젤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시이이이잉……!
바람을 가르며 거칠게 날아온 한 줄기 광선이 순식간에 이카젤라의 왼쪽 발을 휘감고 지나갔다.
처음에는 시원했으나, 이내 따뜻한 느낌이 들었고, 점차 뜨거워지기 시작하더니.
“끄어아아아악!”
방금까지 온전히 자리를 잡고 있던 이카젤라의 왼발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발목 아래로 뼈 한 조각, 살점 한 점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게 증발해 버린 것이다.
퀸튜플 트랜센던스 디스인티그레이트.
자레드가 반격의 수단으로 시전한, 첫 초월 마법의 포문이었다.
“이카젤라,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으면 다음에는 손모가지가 날아가게 될 거야.”
자레드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이카젤라를 향해 펼친 중지를 앞뒤로 까딱였다.
명백한 도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