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277
제 277화
88장. 최종 점검 – 1화
다음 날 아침부터.
나는 제국 곳곳을 순회하며, 성마 대전을 대비하기 위한 신하들의 역할 분담을 확실히 나눴다.
컨트롤 타워인 내가 정확하게 방향성을 정해 줘야, 신하들도 자신 있게 밀어붙일 수 있어서다.
알아서, 잘, 머리 써서 해 보라는 등의 무책임한 말로는 결코 좋은 효율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성마 대전이 얼마나 큰 전쟁이며, 인간에게 어떤 운명을 가져다주게 될지.
이것을 직접 체험하지 못한 신하들은 잘 모를 수도 있기 때문에 내가 직접 지도하기로 한 것이다.
이를테면 요새를 지을 때도.
견고하게 잘 지으라는 말보다.
높이는 어느 정도로 하고, 어느 위치에 철갑을 둘러 견고함을 높일까 하는 구체적인 지시가 있는 것이 건축할 때 보다 용이했다.
나는 신하들이 추상적인 의미로 미래를 대비하는 일이 절대로 없기를 바랐다.
성마 대전은 눈앞의 현실이다.
현실적인 위기감으로 준비하고 대응하지 못하면, 뜬구름만 잡는 대비만 하다가 끝나고 만다.
그러기 위해 처음으로 만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신하들 중 가장 애틋한 마음이 드는 사람.
바로 오브렌 경이었다.
“폐하, 소트라스를 충분히 생산하는 데 성공하여 대륙 전역에 보급하는 것이 가능할 듯합니다.”
“드디어 경의 노력이 결실을 보는구려. 잠을 반납하고, 건강을 잃어 가면서까지 투자한 시간들이 정말로 헛되지 않았구려.”
“하온데…….”
“음?”
“신이 한 가지 소식을 더 전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사옵니다. 폐하께서 질책하실까 하여 그간 비밀로 해 온 사실입니다.”
그 말에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불치병이라든가 건강상의 문제가 아닐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물론 심안으로 살핀 그의 건강에는 이상 지표가 없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됐다.
“무엇이오? 어서 말해 보시오.”
“사실 이번에 크리바스라는 농작물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사옵니다. 소트리나스와 기존 레트리아를 결합해서 만든 특이종이지요.”
“크리바스?”
“크리비아의 축복이라는 뜻을 담아 지은 이름이옵니다. 자, 보시옵소서.”
오브렌이 내게 불쑥 내민 것은 줄기는 수분을 잔뜩 머금고 있고, 뿌리는 레트리아가 자라며, 잎을 따라서는 달콤한 열매가 맺히는!
그야말로 특이한 농작물이었다.
오브렌의 말대로 지금껏 본 적이 없는 작물로서 여러 가지 식물의 형태가 섞여 있었다.
“이게, 이게 어떻게 된……?”
“소트리나스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 교배종을 개발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소트리나스의 뛰어난 생존력과 더불어, 레트리아 특유의 풍성한 과실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오?”
“그렇사옵니다, 폐하. 사전에 여러 검증을 했사옵니다만, 지력의 소모도 비교적 적은 편이옵니다.”
“정말 놀랍구려! 믿을 수가 없소.”
“이 사실을 폐하께서 아시면 신이 또 무리했다고 혼내실 것 같아 의도치 않게 사실을 늦게 고하였사옵니다. 불충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아니오. 그것이 왜 불충이란 말이오. 단지 나는 경이 무리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오.”
“아울러 농림부의 모든 인원을 포함, 전문가들을 다수 파견하여 전국적인 우물 점검도 끝냈사옵니다.”
“벌써 말이오?”
“예, 폐하. 이제 기존의 우물을 기반으로 해서, 추가로 파낼 양질의 우물이 있는지 탐색한 후 지하수 연구에 들어갈 예정이옵니다.”
“오브렌 경……. 그대는 짐보다 한참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구려.”
“과찬이시옵니다. 폐하께서 늘 아낌없이 주시는 영감 덕분이 아니겠사옵니까?”
“경에게는 따로 조언을 할 것이 없겠소. 지금 그대로 진행하시오.”
내가 지시하려던 것은 오브렌이 이미 진행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전쟁이 장기화되면 가장 먼저 대두되기 쉬운 문제는 역시나 물의 문제였다.
일단 전장이 아닌 곳에서 물을 수급할 수 있어야 하기에 우물의 위치를 알아 두는 것은 실로 중요했다.
하천과 같은 곳은 필요에 따라 악의적으로 오염될 여지가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물은 일단 접근을 해서 오염시키는 행위를 하지 않는 한 비교적 영향을 받을 여지가 적었다.
이런 점을 오브렌에게 주지시켜 줄 생각이었는데, 이미 나보다 생각이 앞서 있었다.
이것이 바로 연륜이라는 걸까.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 * *
이후로도 나는 부지런히 신하들을 만났다.
모두가 하나같이 성마 대전을 대비하기 위해서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인재들이었다.
다음으로 만난 모이즐과는 전쟁 이후에 대피 시설로 활용할 대피소의 ‘마법진 세공’에 대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나눴다.
단지 방벽을 높게, 두껍게 짓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육중한 거구를 가진 어보미네이션의 경우에는 벽을 겹겹이 쌓는다고 한들, 육탄 공세에 무너질 공산이 컸다.
그래서 이런 녀석들은 멀리서부터 화력을 집중해서 ‘녹여 버릴 수’있는 마법진 세공 설비가 반드시 필요했다.
대피소라는 곳에 꼭 하찮은 마물들만 오라는 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악랄한 마왕군이라면 전투 병력이 아니라도, 인간의 냄새가 나는 모든 것을 말살하려 들 것이다.
그것이 에서도 악명 높았던 마왕군의 무자비한 참살자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세로와는 켈디아 무기의 대량생산에 대해 추가적인 논의를 했다.
지금 우리 크리비아 제국군은 전원이 켈디아 무기로 무장하고 있는 상태.
하지만 칸트라 제국이나 발렌시아 왕국은 아직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도 안정적으로 켈디아 무기를 공급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제련 기술은 유출하지 않고.
아울러 모이즐과 함께 대피 시설에 세공할 방어 타워나 병장기의 모든 것도 켈디아를 이용하도록 했다.
몬스터나 마수들을 대상으로 시험해 본 결과, 켈디아는 기존의 철에 비해 3배 이상의 위력을 가진 것으로 판정됐다.
게다가 아세로가 최근 개발한 ‘강화 켈디아’의 경우에는 품질에 따라 5배까지의 강화도 가능한 것으로 판단됐다.
이 정도면 방어 타워에 설치할 석궁이라든가 장창 등에 위력을 더 높일 수 있을 듯했다.
만남은 계속 이어졌다.
율리안을 통해서는 성마 대전을 대비한 전시 행정 체제를 갖출 수 있도록 지시했다.
아울러 성마 대전이 발발할 경우, 비상시에 작동할 수 있는 별도의 체계도 만들어 두도록 했다.
아무래도 전쟁이 벌어지게 되면, 행정 기능이 제일 먼저 마비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상이 아니라 지하에서도 충분히 행정적인 영향력을 주고받을 수 있는 체계를 갖추도록 했다.
그 과정에서 통신석 연계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이 부분은 모이즐과 협업하도록 했다.
예산은 충분했고, 진행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 외에도 아빌라, 메리, 게니츠, 루크, 아르모니아 17세와도 만남을 가졌다.
아빌라를 통해서는 게니츠, 루크 제독과 연계하여 해로를 이용한 장거리 이동 및 운송에 대한 매뉴얼을 짜도록 했다.
이는 에서 내가 마왕군에 대해 경험한 특성에서 기인한 선택이었는데.
마왕군은 특이하게도 배나 함선을 잘 이용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쾌속선으로 30분 정도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섬에 거주 중인 NPC나 플레이어들이 있었음에도.
그들을 도모하려 하거나 침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육로로 닿을 수 있는 곳이라면, 산간의 오지라도 쳐들어가서는 참혹한 학살을 벌였다.
그것은 아마도 마수 본연의 물에 대한 공포감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유사시에 주요 운송 루트를 강이나 바다에 구축할 계획으로 아빌라에게 영감을 준 것이다. 그는 즉각 준비에 돌입했다.
나는 게니츠와 루크 제독으로 하여금 해군을 두 가지 상황에 대비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첫째는 마왕군이 바다를 건너가 섬을 노리려고 할 때에 화력전으로 섬멸할 수 있는 함포를 갖추는 것이었고.
둘째는 마왕군이 해상 또는 섬에 ‘소환’되었을 때, 그들이 도강(渡江)이나 도해(渡海)를 하기 전에 섬멸하는 전략에 대한 논의였다.
즉, 육로의 주도권을 필요에 따라 넘겨주더라도, 해상에서는 확실한 패권을 쥐겠다는 의지였다.
게니츠와 루크는 내 생각에 적극 동의했고, 데스먼드 제국에서 합류한 다수의 기술자들과 함께.
그간 누적되어 온 함포 연구를 실제 생산에 도입하고, 화약의 폭발력 개선에 돌입했다.
모두가 내 뜻에 공감해 동의해 주니, 일 진행이 참으로 순탄하고 빨랐다.
그리고.
교황 아르모니아 17세에게는 다소 고생스러울 수 있겠지만, 계속 안수 기도를 통해 신성력 무장이 가능하도록 해 줄 것을 요청했다.
신성력 무장이 된 2명의 병사는 그렇지 않은 4명의 병사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마물, 마수, 마족에게 신성력은 완벽한 상극이었다.
폭삭 늙은 아르모니아 17세의 모습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지만,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가시는 길이 곧 역사입니다.’
‘악마와 사탄, 그들의 마수로부터 이 세계를 지키는 과정에 이 미천한 몸이 조금이라도 힘을 보탤 수 있다면, 주신을 모시는 제게는 실로 영광스러운 자리일 것입니다.’
아르모니아 17세가 담담하게 했던 말이 내 귀에 남아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
교황이야말로 나보다도 앞서 미래를 준비했던 사람으로, 내게 젊음을 바친 사람이기도 하니까.
그의 희생을 늘 기억하기에 나 역시 성마 대전을 조금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목숨을 건 일생일대의 전투.
승리 아니면 죽음.
내게 성마 대전은 양자택일의 운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대전쟁이었다.
사나레 성지에서 일하는 마룬, 마리 남매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들과도 만났다.
이들에게는 기존의 경험을 토대로 야전 병원을 운영하게 되었을 경우 관리 체계에 대한 조언을 얻었다.
그들은 이미 사나레 성지에서 한 차례 난민들을 상대로 치료를 하며, 정말이지 전쟁터나 다름없는 곳을 경험한 적이 있어서다.
이론보다 실전에 강한 남매답게 대답은 내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술술 흘러나왔고.
나는 그 지식을 바탕으로 매뉴얼과 백서를 작성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들의 실전 지식은 무엇보다 소중해 향후 큰 보탬이 될 것이다.
* * *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날 사람과의 자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나는 그동안 내 곁에서 전력을 다해 일해 왔던 모든 신하를 만났다.
그리고 이제 단 한 사람과의 만남이 남았다.
바로 아르케네스.
로넬라 병 치료제를 팔기 위해 로넬라 영지로 향하던 도중에 산적의 손에서 구출해 만나게 된 미래의 네임드 군상.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 가장 이름이 갖는 무게감이 컸던 남자……. 아니, 남장 여자였다.
의 미래와 조금 달라지긴 했다.
오히려 그때의 역사보다 더 빨리 성장했고, 더 이른 시간에 제국 최대의 군상이 됐다.
에서는 동부 최대 군상이었다면, 지금은 명실상부한 대륙 최고의 군상이 되었으니까.
물론 아르케네스는 매번 그 결과물을 오로지 내 덕이라며 부끄러워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공격적 수완과 변수 대응에 탁월한 임기응변이 지금의 모습을 만들었다는 것을.
바로 그때.
“폐하!”
반가운 그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아키……?”
뒤를 돌아본 자리에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아름다운 자태와 외모를 갖춘.
그리고 귀족가 영애의 자태와 품격을 쏙 빼닮은 듯한 아키가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차려입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수줍게 서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