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289
제 289화
91장. 그 후, 1년 – 3화
1418년 12월 4일.
“이제 석 달 남았나.”
달력에 X 표시를 끝낸 어제 일자를 보며, 오늘이 성마 대전으로부터 3개월 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간 달력을 보지 않았다.
하루하루 줄어드는 시간이 조급하고 안타깝게 느껴져서다.
그래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고 지내다가, 오랜만에 달력을 체크하니 오늘이었다.
“시간 빠르네.”
나는 다시금 오늘 날짜를 눈에 담고, 집무실 반대편의 벽에 크게 붙어 있는 대륙 전도를 살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큰 지도였다.
60평에 가까운 집무실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큰 지도였는데, 특수 제작한 지도였다.
성마 대전이 벌어지면 대륙 전체가 전장이 될 것이 분명하기에 좀 더 전략적인 판단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 지도는 필수였고, 또한 그 안에 많은 정보를 그려 넣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초대형 지도라는 괴물이 만들어졌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대만족이었다.
“레드 고블린, 다크 엘프, 그레이 엘프, 미삭스 고블린, 화이트 오크……. 이렇게 연대가 끝났고.”
나는 대륙의 외곽을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는 다섯 이종족의 위치와 준비 현황을 점검했다.
다크 엘프, 그레이 엘프의 경우에는 나와 유대 관계를 계속 맺고 있었으니 협력이 빨랐고.
레드 고블린 역시 예전부터 나이트메어 스톤을 교류하며 쌓아 온 신뢰가 손을 잡는 데 큰 몫을 했다.
다만 우리에게 생경했던 미삭스 고블린과 화이트 오크의 경우에는 레드 고블린의 도움을 받았다.
레드 고블린 로드 이바니바가 그들과의 친분을 이용, 지도자와의 만남을 주선해 준 것이다.
미삭스 고블린과 화이트 오크는 세간의 편견과는 다르게 높은 지능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미삭스 고블린은 다양한 트랩에 대한 연구가 고도로 발달된 종족이었고, 화이트 오크는 태어날 때부터 신성력을 가진 특이종이었다.
에서 두 종족은 데이터로 구현은 됐으나 적용 패치는 이뤄지지 않아, 몇 줄의 설명만 있는 존재들이었는데.
이들이 현실화되어 내 눈앞에 나타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우군(友軍)이 되어 주기로 한 만큼, 당연히 든든했고 말이다.
“이종족들이 우리에게 까다로운 험지를 전담하기로 했으니, 정말 잘된 일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신성 연합군에 협력하기로 한 이종족들의 위치는 전부 험지였다.
아무래도 그곳이 인간보다는 현지에 토착화된 그들이 익숙하게 움직일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방어 시설을 비롯한 모든 무장에 필요한 비용과 원자재를 전부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그들은 응했다.
이로써 대륙 북부와 서부, 동부의 취약 지대를 보강할 수 있게 됐다.
바로 그때.
-폐하, 311호기 제작 완료됐습니다. 더 생산 속도를 높이겠습니다.
사비오와 연결된 개별 통신석을 통해 연락이 왔다.
어느덧 311번째 타넥스의 제작도 끝난 모양이었다.
다크 엘프는 그간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타넥스의 가능성을 무궁무진하다고 봤다.
그래서 초반에는 사비오만 개발과 생산에 매달렸지만.
지금은 다크 엘프 전체가 달려들어, 타넥스 개발에 종족의 명운(命運)을 걸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혹독한 적응 훈련을 통해, 타넥스를 조종할 파일럿을 양성했다.
그 과정에는 내가 도움을 줬다.
다양한 형태로 타넥스를 활용한 것이 나였던 만큼, 나눠 줄 경험이 많아서다.
어쨌든 지금의 속도라면, 성마 대전이 벌어지게 될 그날까지 최소 600기는 확보할 수 있을 듯했다.
사비오를 일찍 만나 그때부터 꾸준히 투자해 온 것이 절대 헛되지 않았다.
내가 현생에 환생한 이후, 가장 잘한 것을 세 가지로 추려서 뽑으라고 한다면.
그중에 1순위로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타넥스를 조기에 접하고, 사비오를 알게 됐다는 것이다.
수차례 개량을 거듭한 지금의 타넥스는 최상위급 마수도 충분히 상대할 정도의 화력을 가졌다.
마족도 서열 70위권 밖이라면, 여러 기의 타넥스가 힘을 합쳤을 때 충분히 상대 가능하다는 계산이었다.
게다가 타넥스는 생물이 아니기 때문에, 여차하면 자폭 트리거를 발동시킬 수도 있었다.
이른바 자살 특공대.
비정한 수단이기는 하지만, 전략적으로 얼마든지 마왕군의 핵심 전력과 타넥스를 바꾸는 판단이 가능하다.
“헌터들의 던전 공략도 확실히 물이 올랐고…… 다들 아티팩트든 무엇이든 열심히 파밍하고 있지.”
나스 대륙 전역의 던전은 끊임없이 공략을 반복하는 헌터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는 상태였다.
내가 던전 공략집, 이른바 ‘공략 백서’를 발간한 이후 헌터들이 앞을 다퉈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헌터라는 프라이드와 사명감을 지닌 그들은 열심히 공략에 임했고, 꾸준히 성장 중이었다.
비록 그들은 정규 부대로 활동하지는 않지만, 각지에서 별동대로서 자신들의 소임을 다할 것이다.
이 부분은 헌터 협회와 협의가 끝난 상태였다. 독립적으로 활동하지만, 전략적 동선은 공유하기로.
“가장 큰 성과는 역시 내가 아끼는 동료, 제자들의 눈부신 성장인가?”
우선 라키스, 엘라, 레나는 소드 마스터의 반열에 올랐다.
다만 성향은 조금씩 달랐다.
엘라는 극단적인 공격 타입, 라키스는 자유로운 공수 전환, 그리고 레나는 ‘통곡의 벽’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방어에 특화됐다.
특히 레나의 성장은 눈부셨다.
트랜센던스 마법이 아니라면 내가 전개하는 9클래스의 헬파이어 마법을 방어해 낼 수 있을 정도로 항마력이 높아졌다.
에서 그녀의 악명이자 아이덴티티로 자리 잡았던 ‘통곡의 벽’이 실제로 부활한 것이다.
장담할 수 있다.
레나가 배치될 전선은 어지간한 마족이 투입되지 않는다면, 아무나 쉽게 돌파할 수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인간 억제기가 된 셈이니까.
헤이즈는 알다시피 디바인 나인이 됐고, 이자벨은 그저께 9성의 반열에 올랐다.
3개월 전부터 폐관에 들어가, 주술의 본질 그 자체에 몰두해 온 것이 빛을 발한 듯했다.
아슈르는 8클래스의 화력에 준하는 궁마법까지 전개가 가능한 수준이 됐다.
궁술을 활용한 물리적 공격력만 따지면, 오러 블레이드가 아쉽지 않을 만큼의 화력을 갖게 됐다.
미아 역시 8클래스 언저리의 바람 마법까지 활용 가능한 실력을 갖게 됐다.
마이라도 소드 익스퍼트급이 됐다. 후발주자로 합류한 것치고는 정말 끊임없는 노력으로 실력을 대폭 끌어올렸다.
그녀가 회고하기를, 나스 대미궁 공략이 자신에게 큰 전환점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클로이는 당연한 얘기지만…… 스승인 포르미도의 경지를 완벽하게 넘어섰다.
성마 대전에 관한 소식을 들은 포르미도는 내게 전쟁에 참여하겠다며 직접 손편지를 보내 왔다.
나는 그를 극구 말렸지만, 노장(老將)은 뜻을 꺾지 않았다.
어쩌겠는가.
포르미도는 제자인 클로이와 함께 움직이게 될 터였다.
세심한 그녀이니만큼 포르미도를 꼼꼼히 잘 챙겨 줄 것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예상 위치 특정도 끝났고…….”
베르하드와 연계해서 파악에 들어간 마왕군 소환 지점의 선별 작업도 거의 끝났다.
이제 몇몇 섬 지역의 탐색만 제외하면, 대륙 전역의 예상 지도는 확실하게 완성된 상태였다.
물론 예상 지점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전부 대규모 방벽부터 해서 다수의 방어 시설이 구축됐다.
자레드 지뢰는 거의 한 발자국 간격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대량으로 매설됐다.
진즉 대량생산 공정이 완성된 지뢰라서, 생산과 설치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정말 수많은 백성들의 보이지 않는 희생이 만들어 낸 결실이었다.
이 모든 준비를 하기 위한 ‘재원’이 게임 속 데이터처럼 뚝딱하고 찍혀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동안 안정적인 국정을 통해 충분히 불려 온 국고를 이용해서 어느 정도 감당이 가능했지만.
점점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아지면서 투자 비용이 급상승하기 시작하자 국고가 금세 바닥이 났다.
이때.
우리 크리비아 제국의 재정난에 대한 소식을 접한 백성들이 벌인 운동이 하나 있었다.
바로 금 모으기 운동이었다.
전생의 대한민국에서 IMF 시절에 국민들이 하나 된 마음으로 보여 주었던 그 저력과 근성을!
이곳에서도 느꼈던 것이다.
대륙 전역에서 금 모으기가 시작되고.
남녀노소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십시일반 국가 재정에 도움이 될 만한 금붙이를 모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얼마나 펑펑 울었는지 모른다. 백성들의 마음이 너무 고맙고, 미안해서 흘린 눈물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모든 병사들과 신하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로 뭉친 백성의 마음은 더 나아가 군인과 관료들의 마음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했다.
모두가 하나가 된 것이다.
그렇게 성마 대전은 대륙 전체의 백성들 모두를 끈끈한 한 덩어리로 만들었다.
“와라, 레크나트. 너에게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지옥을 선사해 주마.”
나는 차원의 어딘가에서 이곳으로 향하고 있을 레크나트를 떠올리며.
다시금 결의를 다졌다.
이제 녀석과의 결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어 없어져야만 끝이 나는.
끝장 승부의 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 * *
“드디어 내일이군.”
심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레크나트가 이제는 엎어지면 닿을 듯한 거리까지 다가온 차원의 기운을 느꼈다.
나스 대륙, 나스 차원이라고 불리는 곳.
과거 용마 대전의 패배를 복수하고, 지독한 악연의 끝을 맺기 위한 시간.
그 시간이 이제 내일로 다가왔다.
“아직…… 완전치는 않군.”
레크나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쨌든 차원에서 차원으로 뛰어넘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변화무쌍한 차원의 증폭과 왜곡 속에서 안정을 유지하려면, 이를 방어할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사실 이카젤라가 죽지 않았더라면, 그에게서 공급받는 암흑 기로 현신까지 이어질 수 있었겠지만.
문제는 이카젤라가 머저리같이 중간에 일을 그르치고 죽는 바람에.
레크나트가 중간에 그 배턴을 넘겨받게 됐다는 것이다.
필사적인 노력으로 결전의 날은 그대로 유지가 됐지만, 대신 레크나트의 정신력이 다소 소모됐다.
“일주일 정도의 안식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불안정할 듯하군.”
이것이 레크나트가 내린 결정이었다.
먼저 마왕군의 마수와 마족들을 모조리 나스 대륙에 투입한 뒤.
일주일 후, 열린 차원문을 따라 자신이 현신하는 것이다.
당초 계획은 전초전(前哨戰)에서부터 자신이 참여하는 것이었지만, 이는 여의치 않을 듯했다.
그렇다고 자신의 상태에 맞춰 개입 시점을 늦추기는 어려웠다.
이미 결전의 날은 정해졌고, 그때에 맞춰 차원문이 일제히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차원문만 열어 놓고 진입하지 않는다면, 인간들이 어떤 대비를 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일주일이면 된다. 그 정도의 기다림쯤은 문제없겠지.”
레크나트는 자신의 군대를 믿었고, 아울러 나약한 인간의 본성을 믿었다.
드래곤은 위대하고 고결한 종족으로서 마왕군에 격렬하게 저항하고 대응했지만.
한낱 미물에 불과한 인간은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속절없이 죽어 갈 것이다.
레크나트는 확신했다.
“이제 우리의 시대가 시작된다.”
레크나트는 다시 심연 속으로 침잠하며, 붉게 반짝이는 두 눈을 감았다.
도착까지 남은 하루를 포함하면 8일. 이 시간이 지나면, 자신도 인간계를 마음껏 누빌 수 있게 될 터였다.
“말살(抹殺).”
목적의 표현은 단 한 단어면 충분했다.
살아 숨 쉬는 모든 인명을 빼앗는다. 간결하면서도 잔인한, 레크나트의 확실한 목표였다.
그렇게 시간은…… 기어이 마지막 운명의 날로 향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