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302
제 302화
95장. 종막을 향해 – 2화
끝없이 남하하던 내 눈에 보인 것은 빗줄기를 가르며 묵묵히 걷고 있는 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게 이름을 말하지도, 소속을 밝히지도 않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네가 바로 레크나트구나.’
마왕 레크나트.
내가 현생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단 한번도 잊어 본 적 없는 성마 대전의 원흉.
‘그런데 생각한 것과 많이 다르다.’
내가 늘 상상했던 마왕의 모습은 다부진 거구의 몸에 악마의 뿔이 달린 존재였다.
아마 선입견이나 편견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에서 공개했던 몇몇 티저 영상에서는 뒷모습만 나왔고.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정형화된 마왕의 모습은 앞서의 무라스카나 아카로프트 같은 마족이 이미 내게 보였던 모습이었다.
반면, 레크나트는 인간을 쏙 빼닮은 모습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나신에 피부가 온통 붉고 인간과 달리 생식기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
그것이 유일한 인간과의 차이점이라고 해야 할까?
게다가 매끈한 피부로 보이는 외관은 자세히 살펴보니 콘크리트보다도 더 단단할 듯한 외피가 둘러싸인 상태였다.
‘탐색전을 해 보고, 냉정하게 승산 여부를 판단한 뒤에 반지를 쓰자.’
이미 생각은 확고하게 해 뒀다.
딱 한 번의 탐색전에 모든 것을 걸 생각이었다.
그 탐색전에서 내가 호각 이상을 이룰 자신이 없으면, 미련 없이 레크나트를 격리할 생각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내 안전을 위해 반지의 사용을 뒤로 미룰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많은 병사와 백성들이 희생될 것이다.
레크나트 앞에서는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동료들의 목숨 또한 부지할 수 있을지 어떨지 장담할 수가 없다.
모든 동료를 희생하고 나만 살아남은 채 성마 대전에서 승리한다?
그것은 내가 가장 원하지 않는 최악의 승리다.
‘보통 그런 경우를 상처뿐인 승리라고도 하지.’
꾸우욱.
결연히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흐음.”
멀리서 나를 확인한 레크나트의 발걸음이 멈췄다.
덩달아 마왕군의 움직임도 멈췄지만, 레크나트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진군을 명령했다.
처억! 처억! 처억!
수십만의 붉은 눈빛이 반짝이며 북쪽으로 향하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지만, 동시에 재앙의 전조이기도 했다.
‘일격에 승부수를 던져 보자.’
나는 레크나트에게 시선을 집중한 채, 첫 번째 공격의 포문을 열 준비를 했다.
뒤틀린 장화에 장착되어 있는 옵션으로, 처음에 한해 999%의 대미지를 주는 일격이다.
지금까지 이 6번 옵션을 작정하고 노림수로 써 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럴 만한 적수를 만나 본 적이 없기도 했고.
하지만 레크나트에게는 일격 하나하나가 매우 중요했다.
“…….”
나는 아공간에서 필요에 따라 즉각 멸살의 단검을 소환할 준비도 마쳤다.
[옵션 4 : 단검을 활용한 모든 공격을 100% 확정 크리티컬 히트(치명타)로 만듭니다.] [옵션 5 : 크리티컬 히트의 대미지는 최소 2.5배에서 최대 15배입니다.]단검 공격은 모두 치명타로 들어가게 되고, 확률상이지만 15배의 ‘로또’가 터질 가능성도 있었다.
여기에 뒤틀린 일격이 더해지면, 일회성이지만 그야말로 핵폭발급의 한 방이 터질 것이다!
바로 그때.
“쥐새끼는 내가 처리하고 가겠다. 엄호는 필요 없으니 모두 진군하라!”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레크나트가 모든 마왕군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스파아아아앗!
정말 찰나의 순간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사이에 다섯 개의 마법 구체를 일제히 만들어 냈다.
‘암흑 마법!’
에서 추후 업데이트가 될 예정이었던 암흑 법사의 원류(原流)인 암흑 마법이었다.
분명 마법이지만.
사용하는 힘이 마력이 아닌 ‘암흑 기’이고, 안정성이 떨어지는 대신 화력이 극대화된 마법이었다.
마왕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존재이고, 동시에 악신의 가호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나는 레크나트의 스탯을 심안으로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직관화 : 대상의 체력과 마력, 신성력과 암흑 기의 현재 보유 상태를 구 모양으로 출력합니다.]그저 심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레크나트의 체력과 암흑 기 잔여량만 볼 수 있으면 됐다.
명색이 마왕인데 나보다 주요 스탯 – 마력과 지혜를 제외하고 – 이 낮을 리 없을 테니까.
악신의 가호도 줄줄이 사탕처럼 목록이 꿰어져 있을 텐데, 세상 속 편하게 그걸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결론만 말하자면 ‘알아서 뭐해?’였다. 알아서 괜히 생각이 많아지느니 차라리 속 편하게 모르고 용감한 게 낫다.
슈아아아!
이내 암흑 마법이 여러 갈래의 경로로 내게 날아들었다.
암흑 마법은 일반 백마법과 유사해 보여도 각각의 클래스가 다르기 때문에 느껴지는 기운으로 위력을 판단해야 한다.
‘최소 8클래스 이상, 시작부터 화끈하군!’
바로 심안의 능력 중 하나인 ‘다중 연산 추적’을 활성화시켰다.
그러자 어렵지 않게 레크나트의 암흑 마법 경로가 특정됐다. 유도 기능은 없었다.
‘그렇다면!’
파아앗!
용수철처럼 튀어 나간 내 몸이 맹렬한 기세로 레크나트에게로 돌진했다.
시이이잉.
하지만 이미 그 시점에서 레크나트는 자신이 시전한 마법에 대한 관심을 접고, 마검을 들고 있었다.
‘전천후 올라운더구나.’
그제야 난 이해할 수 있었다.
왜 나스 대미궁 100층에서 만났던 원, 그러니까 ‘파라디소’가 나를 쏙 빼닮은 녀석이었는지.
레크나트는 검과 마법을 혼합해 만들어 낸 일종의 완전체였던 것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존재.
‘그래 봤자야!’
스파팟!
나는 시뮬라크럼으로 응전했다.
순식간에 내 몸이 두 개로 분리되며, 똑같은 표정과 눈빛으로 움직이는 분신이 만들어졌다.
“잔재주군.”
시이잉!
“크으윽!”
레크나트가 단지 검을 묵직하게 한 번 휘둘렀을 뿐인데, 폭풍과도 같은 풍압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정면에서 교란전을 노렸던 나와 분신은 감당할 수 없는 풍압에 한참을 뒤로 밀려났다.
아직 첫 번째 일격을 가하지 않은 상태. 이 기회를 가장 귀하게 쓸 타이밍을 노려야 한다.
“나는 나를 넘어선 존재다.”
“개소리 집어치워!”
이윽고 레크나트가 잔뜩 자만에 찬 소리를 뱉어 내며, 나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 왔다.
블링크였다.
나스 대륙에 ‘마검사’라고 불릴 만한 존재가 있기는 하지만, 전문성은 크게 떨어졌다.
나 역시 단검류를 다룰 줄은 알지만, 이것이 주특기가 될 정도의 실력은 아니다.
하지만 레크나트는 검과 마법의 연계가 마치 한 몸과도 같았다.
블링크로 접근한 레크나트는 너무나도 부드럽게, 검을 이용한 오러 블레이드를 즉각 연계했다.
우우우웅!
라키스, 엘라, 레나가 구현해 낼 수 있는 수준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굵직한 오러 블레이드가 펼쳐졌다.
여기서 나는 뭔가 확실한 결심의 필요성을 느꼈다.
오러 블레이드 공격을 너무 당연하게 막아 버리면, 정석 중의 정석과 같은 방어가 된다.
정말 어린아이라도 금방 생각할 수 있는 방어 형태니까.
파라디소와의 전투에서도 그랬듯이, 정공법은 확실히 한계가 존재한다.
상대보다 우월하다고 확신할 수 있다면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아무런 변수 창출이 안 된다는 것.
이미 모든 것을 통달하고 관조하고 있을 존재에게는 느낌표가 아닌 물음표를 찍어 줘야만 한다!
“하아압!”
나는 일갈과 함께 바람의 장벽을 펼치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다가.
파아앗!
과감하게 블링크를 전개했다.
블링크가 이뤄지는 짧은 공백도 레크나트에게는 곧바로 꼬리를 잡힐 수 있기에 위험했지만.
그렇기에 해 볼 만한 승부수였다.
내게는 든든한 심안이 있었고, 그래서 암흑 기의 흐름이 훤히 보였다.
덕분에 레크나트가 공간 이동 마법을 방해하려고 흩뿌려 둔 암흑 기의 파장을 지나칠 수 있었다.
‘좋아!’
레크나트의 모습이 코앞에 보였다. 하지만 녀석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잔재주는 안 통한다고 했는…… 아니?”
레크나트가 모든 수를 간파했다는 듯한 오만한 표정으로 힘껏 움켜쥔 목은.
내 것이 아닌 내 분신의 목이었다. 블링크와 연계해서 동시에 만들어 낸 분신술이 먹혀 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본신보다 분신이 먼저 나타나게 함으로써 혼란을 유발하는 노림수도 성공했다.
처억!
곧바로 아공간에서 소환한 멸살의 단검을 움켜쥐었다.
지금껏 필요할 때마다 내게 굵직한 한 방을 늘 선사해 줬었던 녀석. 아끼는 병기가 오랜 연인처럼 내 손길에 꽉 안겨 있었다.
‘반드시…… 지킬게.’
찰나의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고, 나는 속으로 되뇌듯 다짐했다.
반드시 이 세계를 구하겠다고.
그리고.
푸우우욱!
[최대 15배의 크리티컬 대미지가 적용되었습니다!] [‘첫 번째 공격’ 옵션이 적용되어 대미지가 999% 증가합니다!]“끄으아아아아!”
힘차게 레크나트의 복막을 파고든 멸살의 단검이 가공할 만한 위력의 일격을 만들어 냈다.
분명 레크나트의 외피는 단단하고 굳건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 무적은 아니었다.
게다가 내가 멸살의 단검을 찔러 넣기 전, 인챈트 파이어를 통해서 불의 속성을 부여한 것도 영향이 있었다.
단검이 비집고 들어간 상처를 불길이 만든 열기가 찢고 벌리면서, 더욱 안으로 쑤셔 넣기 용이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쥐새끼 같은……!”
퍼억!
“크으으윽!”
움켜쥔 멸살의 단검에 재차 전격 계열의 마법을 시전하려던 내 후속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
레크나트가 왼손으로 자신의 복막을 비집고 들어간 단검을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내 이동이 제한됐고, 레크나트의 발길질에 그대로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을 날았다.
알고 있다.
상대는 마왕이고, 이런 일격 하나로 절대 죽일 수는 없다는 것을.
하지만 한 가지 확신은 얻을 수 있었다.
‘결국 녀석도 신이 아니야.’
너무 당연한 대전제지만,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느끼게 되면 순간 잊게 만드는 사실이기도 했다.
나는 이번 일격으로 다시 한번 확신을 가졌고, 또 생각했다.
‘수 싸움이라면 내 주특기지.’
허의 허, 그것의 허를 찌르는.
보이지 않는 것보다, 오히려 보이는 것에 숨기는 역발상의 노림수가 잘 먹혀든다는 것을.
바로 그때.
후우웅!
파공음과 함께 이번에는 레크나트의 마검이 나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날아들었다.
오러 블레이드와 같은 검기가 아니라, 아예 마검 자체를 내게 날려 보낸 것이었다.
‘바람의 장벽!’
실드보다 더 두꺼우면서 내구성이 높은 바람의 장벽을 힘껏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이잉!
내가 그만 허를 찔리고 말았다.
분명 정면에서 확실하게 대응했다고 생각했던 위치에는 낡은 검 한 자루가 있었다.
“……!”
찰나의 순간.
만감이 교차함과 동시에 수많은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쳤다.
이제야 알았다.
지금껏 한 자루만을 사용한다고 생각했던 레크나트에게 숨겨진 검 한 자루가 더 있었음을.
무어라고 소리를 지를 새도 없이,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힘껏 비틀었다.
그리고.
푸욱.
“제길.”
기분 나쁜, 차가운 금속성의 느낌이 내 등의 어딘가를 매섭게 파고들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