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390
제 389화
122장. 작은 고추의 매운맛 – 2화
그래서 나는 당초 기가노스 공략을 서두르자던 계획을 수정하고 방향을 급선회했다.
성장 포인트 파밍을 위한 주변 정리에 들어간 것이다.
‘바카지에나 행성의 모든 거대 생명체들은 모두 인육에 미치고 탐닉하는 존재들이었다.’
‘아웃브레이크 이후에 인류의 절반이 사라지게 된 이유는 첫째도 그들, 둘째도 그들 때문이었다.’
명분은 충분했다.
우리는 그렇게 행성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니며 거대한 적들을 상대했다.
모두가 일괄적으로 성장 포인트 1을 주는 건 아니었다.
10 또는 100을 주기도 했기에 보상도 쏠쏠했고, 그 포인트는 고스란히 우리의 화력이 됐다.
특히 내 경우에는 지혜 스탯에만 무려 1000에 가까운 포인트를 투자하는 기염을 토했다.
껄끄러운 준보스급의 녀석들을 위주로 사냥했더니 포인트 파밍이 폭발적이 된 것이다.
그 포인트는 전부 지혜 스탯을 늘리는 데 썼고,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마법의 화력이 됐다.
가뜩이나 센 마법의 화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당사자인 나 자신도 두려워질 정도였다.
어쨌든 우리는 기가노스와 멀지 않은 구역에 있는 모든 적들을 궤멸에 가깝게 학살했고.
이 행성에 오기 전과 비교해 모두 최소 50% 이상의 화력 상승을 경험했다.
체감이 더딘 아슈르도 기동력과 관통력이 35% 이상은 증가한 것 같다고 말했으니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그렇게 풍족한 포인트 ‘파티’를 마친 뒤, 우리는 처음부터 노려 왔던 기가노스를 잡기 위해 다시 북진했다.
꽤 많은 동족이 죽어 나갔지만…… 북쪽에 거대하게 자리 잡은 기가노스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기가노스의 관심은 처음부터 지구에만 쏠려 있었다. 그는 지구의 모든 것을 갖고 싶어 했다.’
원작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침공을 1년 앞둔 지금, 숨고르기를 위한 ‘겨울잠’에 빠져 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봤다.
“누군가의 죽음이 누군가의 삶에는 엄청난 양분이 된다. 씁쓸하지만 당연한 자연의 논리이기도 하지.”
한편 기가노스에게 향하는 동안, 베르하드는 초토화된 지상을 내려다보며 감상에 잠긴 듯 말했다.
“약육강식의 단순한 논리죠. 그리고 지구를 노리는 저들의 마음이 딱 강자(强者)의 마음이었을 겁니다.”
나는 덤덤하게 말했다.
강약의 위치만 역전되었을 뿐이지 본질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나와 동료들이 먼저 공격을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내가 지구로 오지 않았더라면.
바카지에나 행성의 거대 괴물들은 1년 후에 살아 있는 재앙이 되어 지구에 도래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구의 인간들은 철저하게 약자의 입장을 경험하며 참혹하게 죽어갔겠지.
그저 포지션만 바뀌었을 뿐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나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닌 이상.
강함과 약함.
우월함과 열등함.
풍족함과 모자람은 항상 어디에든 존재한다.
그리고 그 힘의 논리가 이 행성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우리가 공격을 했기에 ‘죄 없는’ 이 행성의 생명체가 죽게 되었다는 생각 말이다.
물러 터진 생각이다.
오늘 우리가 인정을 베푼다고 해서, 미래의 그들이 온정으로 돌려주지는 않을 테니까.
“네 말이 맞다. 세상에 중간은 존재하지 않지. 선과 악의 중간에 걸친 존재도 없듯이 말이다.”
“언제든 부담스러우시면…….”
“그럴 일 없다. 하루하루 나이가 들다 보니 괜한 생각이 들어 한마디 지껄였을 뿐이다.”
“베르하드 님.”
“교단의 힘을 빌려서 우리 나스 대륙을 혼란스럽게 만들려고 했던 마왕. 차원의 혼란을 틈타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했던 동방 대륙의 족속들.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맞서야 할 적들. 모두 공통점이 하나 있다.”
“…….”
나는 침묵했다.
대답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모두가 생각하는 정답을 베르하드가 말해 줄 것이라고 믿어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멀쩡했을 균형의 추를 먼저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이지만, 가장 큰 문제이기도 하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억지로 동조하지도 않았다.
“늘 그랬듯이 위험하고 어렵고 힘든 일은 제가 맡겠습니다. 다들 너무 무리할 필요 없어요. 먼지 뒤집어쓰고 뒹구는 게 일상이라 저는 전혀 거리낌이 없습니다.”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다들 말하지 않아도 안다.
내가 어지간해선 궂은일을 도맡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후우.”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긴장하지 않았는데.
막상 코앞으로 다가온 기가노스의 거대한 몸을 보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사람은 상상한 것을 훌쩍 뛰어넘는 극심한 충격과 마주했을 때, 역설적으로 생각이 없어진다고 한다.
영화에서도 종종 보는 장면.
대재앙을 직접 마주하는 순간에는 도망칠 생각조차 잊고,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이 움직임을 딱 멈춰 버리는 것 말이다.
바로 그때.
고고고고고.
방금까지 미동조차 없던 기가노스의 거대한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지축이 흔들리고 천지가 요동치는 것처럼 주변에 거센 광풍을 만들어 냈다.
“꺄아아악!”
“크읏!”
그 바람에 타트라 넥스를 조작하며 날아가던 일행이 휘말렸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데큐플 트랜센던스 퍼펙트 실드!’
그래서 실드로 대응했다.
실드는 방어 마법으로도 쓰이지만 이런 바람을 막아 내는 장벽의 역할로도 쓰이기 때문이다.
손쉽게 쓸 수 있는 바람의 장벽 스킬이 있긴 했지만, 전면만 방어가 가능한 탓에 쓰지 않았다.
우우우웅…….
거센 바람은 실드에 막혀 빠르게 잦아들었다.
거인의 재채기가 소인에게는 태풍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파팟. 팟. 팟.
무심결에 동쪽으로 시선을 잠시 돌렸던 나는 멀리서 번쩍이는 수많은 불꽃을 보았다.
카스트로의 흔적일 것이다.
아마도 차원 간의 연결과 관련된 장치를 교란시키고 있거나 그 에너지를 차단하고 있는 것일 터.
“모두 집중해요.”
나는 주의를 환기했다.
한 번 광풍에 휘말려 정신을 쏙 빼앗긴 상태이기 때문에 이럴 때가 가장 위험했다.
많은 정보를 숙지하고 왔지만 당황한 나머지 그 정보들을 잊거나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말이 씨가 됐는지 수상한 움직임의 전조가 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프슷. 프스슷.
그것은 하늘 높이 우뚝 솟아 있는 양옆의 거대한 나무들이 아주 살짝, 미세하게 흔들린 것이었다.
‘벨푸리스 나무는 기가노스를 수호하는 식물이자, 사람으로 따지면 말초 혈관의 끝과도 같다.
그들은 기가노스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도 있었는데, 본체를 보호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완벽한 수호자였다.’
다만 박도혁이 벨푸리스 나무에 대한 정확한 묘사를 적어 놓지 않은 것이 변수이긴 했다.
이미지도 평범한 나무처럼 생각한 탓에 다른 나무와 비교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벨푸리스 나무는 침입자에게 공격을 퍼붓기 전에 반드시 한 번 미세 조정의 시간을 갖는다.
그것이 벨푸리스 나무가 공격을 한다는 유일한 전조다.
마치 추운 날에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 몸을 부르르 떠는 사람처럼, 아주 잠깐 떨림을 보인다.’
팟!
나는 곧바로 오른손을 들어 올린 뒤, 검지와 중지를 붙여 수신호를 보냈다.
사전에 약속된 시그널이었다.
‘트랜센던스 파이어볼!’
신호를 보내자마자 가장 가까운 벨푸리스 나무의 줄기에 파이어볼을 전개했다.
그러자 화염 정령의 힘까지 더해져 뜨거운 열기를 머금은 화염구가 굉음을 내며 날아갔다.
슈르르르륵!
화염을 뒤집어쓴 벨푸리스 나무의 줄기가 마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며 구멍이 뻥 뚫렸다.
워낙 큰 나무인 탓에 간에 기별이나 갈까 싶을 정도로 형편없이 작은 상처이기는 했지만.
우리 아홉이 타트라 넥스를 착용한 채로 쇄도해 가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전부 타넥스 출력은?”
“이상 없습니다!”
“75% 이상!”
혹시나 싶어 재차 체크한 타트라 넥스의 연료 상태는 모두 양호했다.
지속적으로 연료의 역할을 해 줄 마정석을 산더미처럼 준비해 왔으니 마정석이 모자랄 일은 없을 것이다.
“모두 내가 뚫고 가는 길만 따라서 천천히 오도록!”
나는 지나치게 내게 가까이 붙은 헤이즈를 향해 손바닥을 강하게 내밀며 내 곁에서 떨어지라는 의사표시를 했다.
줄기를 타고 올라가는 이 루트는 가장 빨리 기가노스의 본체 중심부로 향하는 루트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변수가 등장할지 알 수 없어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었다.
기가노스는 바보가 아니다.
체외에서는 그것대로 침입자에 대응하는 방법이 있고.
체내로 침투한 불청객에 대해서도 당연히 이에 대응하기 위한 체계가 잡혀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기가노스의 ‘몸’ 안에 들어와 있는 세균 혹은 바이러스와 같은 처지다.
기가노스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면역 체계를 발휘해서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이 거인들의 세계에 들어온 소인이 감당해야 할 특별한 운명이기도 하다.
“폐하, 제가 보조할게요.”
“괜찮아. 모든 것은 계획대로.”
내 부담을 덜어 주고 싶어 하는 헤이즈에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전투다.
게임에서 공략법을 모두 안다고 해서 죽지 않는 것은 아니잖은가? 결코 방심해선 안 된다.
* * *
한편, 같은 시각.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기가노스는 당황했다.
11개월 이상 남아 있던 자신의 동면이 강제로 해제된 것은 체내로 들어온 ‘이물질’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갈피를 못 잡고 들어온 바카지에나 행성의 다른 생명체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이물질’은 매우 악의적인 의도로 자신의 말초 신경 끝에서부터 중심부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이동 속도를 아득하게 뛰어넘어 그 자체로 살의(殺意)를 뿜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3할이 넘는 동족이 사라졌다.’
이윽고 기가노스는 초월적인 감지 능력을 가진 사념체를 통해 상당수의 동족이 죽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가 본능적으로 확인한 것은 행성 북부에 위치한 차원 결계였다. 혹시 외부 행성의 소행인가 싶어서였다.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하군. 그렇다면…… 내부 소행인가? 아니, 그러기엔 기운이 이질적이다.’
기가노스는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 ‘이물질’들이 외부에서 유입되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귀찮은 놈들.’
기가노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간에 침입했다는 ‘결과’가 있으니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할 참이었다.
‘죽여 주마. 하찮은 미물 따위가 어찌 감히 위대한 나를 도모할 수 있겠는가.’
기가노스는 자신이 있었다.
그것은 수백 년이 넘는 시간을 바카지에나 행성의 제왕으로 군림해 왔던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다.
꾸득. 꾸드드득. 꾸득.
체내에서 변화가 일어나며 다수의 체액들이 아래로 급격히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면역 체계.
모든 생명체가 스스로 몸을 지키기 위해서 발동시킬 수 있는, 신이 내린 축복의 방어기제였다.
이 거대한 몸속에서.
자레드 일행은 면역 체계에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바이러스와도 같은 존재였다.
적어도 기가노스에게는 그랬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사멸(死滅)시킬 수 있는 존재.
그런 기가노스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훌쩍 선두로 나선 자레드는 맹렬한 속도로 기가노스의 몸속에서 전력 질주를 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