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90
제 90화
34장. 위기를 기회로 – 2화
그날 밤.
자레드는 사나레 지구에 임시로 만든 간이 거처로 엘라를 불렀다.
엘라는 현재 사나레 지구의 치안을 중점적으로 맡고 있는 아그레시오 친위대의 훈련 교관이자, 유사시에 라키스를 대신할 지휘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엘라는 자레드의 가신은 아니고, 고용된 용병에 가깝기는 했다.
그래서 자레드에 대한 엘라의 충성심은 줄곧 80대를 오르내리면서, 완벽한 비즈니스 파트너의 관계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응접실에서 자레드와 마주한 엘라는 특유의 뇌쇄적인 눈빛을 그에게 보내며 말문을 열었다.
“야밤에 단둘의 자리라니, 이거 기분이 묘한걸요? 아, 그것보다 성배를 발견한 것. 정말 축하드려요. 이토록 기쁜 일이 어디 있을까 싶어요!”
“하긴, 엘라 님은 감회가 새롭겠군요. 그 누구보다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계신 분이니까요.”
“맞아요. 제게 있어 라디우스 님은 인생의 시작이자 끝이죠. 제가 암흑 교단을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와인 한 잔?”
“거절하지 않겠어요! 좀처럼 얼굴 뵙기 힘든 공작님과의 독대, 그것도 좋은 술과 함께라면 더더욱 거부할 수 없죠.”
엘라가 예를 갖춰 자레드로부터 와인을 받았다.
이제는 공작의 작위인 자레드이기에, 예전처럼 같은 자작으로서 때때로 격의 없이 지내던 일은 말 그대로 옛날 일이 됐다.
자레드는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가장 먼저 궁금했던 부분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클로이와의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제 곧 9월이죠?”
“사흘 뒤.”
자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3일 후면, 나스 대륙력 1415년 9월 1일이 된다.
일 년을 삼등분했을 때, 마지막 시기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공식 계약은 그때 만료가 돼요. 그리고 이미 상호 합의하에 얘기는 끝났어요. 계약 종료. 서로 갈 길 가는 거죠.”
“원하는 대로 따라 마셔도 됩니다. 나, 신경 쓸 것 없어요.”
자레드가 눈짓으로 앞에 있는 와인 병을 가리키자, 엘라가 냉큼 병을 가져와서는 잔에 와인을 가득 따랐다.
그리고 단숨에 한 잔을 비우더니,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좋은 제자였어요. 하나를 가르치면 최소한 셋 이상은 알아듣는 것 같았거든요. 사실 욕심이 났어요. 그레이 엘프 제자가 워낙 특별하기도 한데다가 실력도 욕심이 날 만큼 괜찮았으니까.”
“하지만 왜?”
“한계를 느낀 거죠. 좋은 스승은 제자가 어느 시점에 자신을 뛰어넘게 되었는지를 완벽하게 인지해요. 못난 스승이 보통 그것을 부정하려 하고, 제자의 위에 군림하려고 하죠.”
“옳은 말입니다.”
엘라의 말은 즉, 클로이가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뜻이었다.
“클로이는 이미 제가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을 뛰어넘었어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있어요. 저보다 더 좋은 스승이 클로이에게 나타났다는 거죠.”
“낯부끄러운 질문이지만, 그 스승이 혹시 접니까?”
“맞아요. 클로이가 공작님께 별도로 개인 강습을 받기 시작한 이후로 실력이 급상승했어요. 수직 상승이었죠. 그간 1년을 넘게 가르친 제 시간이 부끄러울 정도로 클로이의 성장은 눈부셨어요.”
“엘라, 당신은 클로이에게 일어난 변화를 체감하고 있었군요.”
“제가 분명 돈을 우선하는 것은 맞지만, 세상의 모든 사고방식을 돈에 맞추는 것은 아니에요. 돈이 우선이기 이전에 저는 무인(武人)이니까. 그에 합당한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있죠.”
“음…….”
“그때, 결심했어요. 클로이를 보내 줄 때가 됐구나. 나보다 더 좋은 스승이 있다면, 새로이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게 보내 주는 것도 좋은 가르침이라 생각했어요.”
“마음이 뭉클하네요. 제자를 아끼는 마음도 느껴지고요.”
“어쨌든 결론은 그거예요. 클로이는 이제 자유라는 거. 선택은 그 아이가 하겠죠. 이미 제 손은 떠난 아이예요.”
엘라가 연거푸 와인 두 잔을 비웠다. 괜찮은 척하면서도, 좋은 제자를 보내야 한다는 아쉬움이 가슴 한구석을 후벼 파는 탓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 냉정하고 이성적이며, 정리가 빠른 사람이었다.
이내 아쉬움마저 털어 버리고, 덤덤히 말을 이어 갔다.
“그 아이에게 영지로의 정착을 권유하든, 무엇을 말하든…… 제 눈치를 보실 필요는 없어요.”
“그렇군요. 클로이에 대한 얘기는 더 이상 하지 않겠습니다. 과거가 되어 버릴 이야기에 마음 쓸 필요는 없겠지요.”
“맞아요. 공작님의 그런 쿨한 부분이 마음에 든다니까. 과거는 과거로서 기억 속 저편에 묻는 것이 최고죠.”
쪼르르르.
이내 와인 병을 비운 엘라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자, 자레드가 더 고급스러운 와인을 내왔다.
그리고 적당히 음미하기 좋도록 잔에 와인을 채워 넣은 뒤,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오늘 엘라 님을 부른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은밀하게 진행할 일이 있어섭니다.”
“다른 가신들도 아니고 저와?”
“곧 움브라 교단의 공격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정확한 규모까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9할 이상의 확률로 반드시 있을 거라 봅니다.”
자레드의 말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클루제는 그런 놈이다.
누군가에게 축복과 축제, 기쁨과 행복의 시간이 될 시점을 정확히 노리고 판을 깬다. 그리고 그 시점을 죽음과 절망, 슬픔과 좌절의 시간으로 바꿔 버리는 것이다.
현재 자레드는 주변국에 공식 사절단을 보내 사나레 지구가 성지로 바뀐 것을 자축하고 있었다.
라디우스 교를 국교로 삼고 있는 국가들의 축하도 줄줄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
이 상황에 대한 얘기가 클루제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리 없었다.
“음. 예전에 암흑 교단과 직접 부대끼며 싸워 본 적이 있는 제 지식과 경험을 원하는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분명 성지의 첫 번째 위기가 되겠지만, 이것을 기회로 삼아서 암흑 교단의 추종자들을 유인해 쓸어버리려 합니다.”
“클루제. 클루제에 대해서 아시나요?”
“아주 잘 압니다. 움브라 교단의 부교주. 백발에 붉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의문의 남자.”
“……도대체 어떻게?”
엘라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클루제는 움브라 교단 내부 깊숙한 곳까지 정보를 캐고 들어가야만 알 수 있는 존재였다.
그나마 엘라가 클루제에 대해서 알게 된 것도, 그의 수하 중 하나를 잡아다가 죽기 전까지 고문을 하면서 정보를 캐낸 덕분이었다.
한데 자레드는 어디서 정보가 뚝 떨어진 것처럼 클루제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레드가 능청스럽게 답했다.
“암흑 교단에 어렸을 때부터 관심이 많아서요.”
“이게 호기심이 있었다는 대답으로 해결될 부분이 아니잖아요?”
“중요한 건, 알고 있다는 거죠. 그것은 대화를 하기가 훨씬 수월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과정이 중요할까요?”
웃으며 되묻는 자레드의 모습에서 엘라는 그 특유의 자신감을 느꼈다.
예전에 마하트 3세의 무덤을 공략할 때도, 그는 지금처럼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자레드의 말대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가 중요하지.
“좋아요.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죠?”
“움브라 교단에서 가장 군침을 흘릴 만한 타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교단의 세에 비해 운영비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알고 있어요. 숨겨둔 차명의 자산이 적발되거나 동결 당하니까 유사시에 융통할 현물이 부족하죠.”
“금화나 귀금속. 이 정도면 피할 수 없는 유혹이겠군요.”
“규모가 클수록 참고 싶어도 참을 수 없는 미끼가 되겠죠.”
“엘라 님이 그 미끼들과 함께 클루제와 그 무리를 유인해 줬으면 합니다. 늘 그랬듯, 착수금은 넉넉하게 드리죠.”
자레드가 탁자 위에 제법 큰 가죽 주머니 하나를 올려놓은 뒤, 텔레키네시스 마법을 이용해 그것을 엘라에게로 쭉 밀어 보냈다.
이윽고 주머니를 받아 든 엘라가 무게 확인 겸 살짝 들어 올리자.
쩔렁!
아주 묵직한 금화의 느낌이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귀를 간질였다.
자레드가 제시한 금액에 불만은 없었고, 명분도 충분히 공감했다.
엘라가 유일하게 ‘돈’에 구애받지 않는 신념 중 하나가 암흑 교단에 대한 반감이었다.
다만……. 역사대로라면 시간이 흐른 뒤에 엘라의 신념은 변한다.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치고 싸워도 암흑 교단의 세가 커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확신이 들자, 그 이후로는 돈만 주면 암흑 교단에도 협력하는 변절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암흑 교단의 이름만 들어도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열혈가임은 틀림없었다.
“공작님, 오늘 밤은 한가하신가요?”
“응?”
갑자기 튀어나온 엘라의 물음에 자레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워낙 노골적인 표현을 자주 써 왔던 엘라인지라 내용상 떠오르는 것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라가 웃으며, 자레드의 오해를 가볍게 박살 내 주었다.
“전술 논의를 하고 싶어요. 이왕 유인해서 일망타진할 거라면! 그물을 넓게, 그리고 촘촘하게 짜야죠. 잔챙이 하나라도 살아나간다면, 두고두고 분할 테니까.”
까드득.
분노를 삼키며 이를 가는 엘라의 모습에는 자레드가 가진 생각, 그 이상의 반감이 느껴졌다.
발전적인 토론과 세밀한 전략 수립은 길면 길수록 유익하며 즐겁다고 하지 않았던가?
‘발데스가 그랬었지.’
흡사 명언과도 같았던 발데스의 말을 떠올리며, 자레드가 응접실 문을 향해 텔레키네시스 마법으로 손짓을 보냈다.
그러자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응접실의 문이 닫혔다.
“오늘 밤은 무척 뜨겁고 찐한 밤이 되겠군요.”
“그러게요. 우리의 대화에 와인이 부족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좋습니다. 이야기해 봅시다.”
그렇게 두 사람만의 긴 이야기가 시작됐다.
* * *
이틀 후.
사나레 지구로 향하는 수송 행렬이 크리비아 영지의 북서부에서 출발했다.
일반적으로 영지군이 호위를 하는 기존의 수송과 달리, 이번에는 아그레시오 친위대가 동원됐다.
이유인즉, 수송할 물자들의 목록이 화려했으며, 그 가치가 상당히 높았기 때문이다.
마스터 포션.
전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격리 구역에 추가로 촘촘하게 설치할 클린 마법진 마정석.
영양 상태가 나쁜 난민들의 빠른 회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식량, 특히 쌀과 구황작물의 수송.
여기에 대신전 건립에 필요한 금화와 제단 제작에 반드시 쓰여야 하는 순금까지.
워낙에 값비싼 것들이 많아서 아그레시오 친위대가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책임자는 엘라였다.
‘아직도 얼얼하네.’
엘라가 아직 불편한 가슴 언저리를 연신 어루만졌다.
자레드와 있었던 모의 대련에서 입은 타박상 때문이었다.
전투에는 전혀 지장이 없지만, 애먼(?) 곳에 멍이 든 탓에 기분이 썩 개운치가 않았다.
이틀 전.
엘라는 자레드와 전략 전술 회의를 마친 뒤, 자레드에게 대련을 제안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만약에 이번 작전에서 클루제가 모습을 드러낼 경우, 과연 자레드가 클루제를 상대할 수 있을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완전히 자레드를 얕보고 있었어. 지금 그의 실력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