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culus of Joseon RAW novel - Chapter 132
132화 목과 용맹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더는 군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조선군과 대치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조선군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병력 배치를 다시 했다.
구로다 나가마사의 일본 3군은 상주에 있는 정기룡의 군사를 흐트러뜨리려고 성주성을 내줬다. 모리 요시나리와 시마즈 요시히로의 일본 4군은 일본 3군과 함께 성주 남쪽과 고령 동쪽에 진을 치고 대기하며 언제든 출격할 준비를 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일본 5군은 군위로 올라가 대규모 접전이 시작되면, 그대로 상주를 치고 들어가 보은을 넘어 청주까지 들어갈 준비를 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일본 6군은 함안 동쪽에 배치되어 의령과 합천까지 진입할 계획을 세웠다.
모리 데루모토의 일본 7군과 우키다 히데이에의 일본 8군은 계속 대구에 머물며 예비대 역할을 하기로 했다.
‘히데요시 이 새끼는 뭐하는 새끼야, 대체! 이 지랄로 흘러가면 그놈이 보낸다던 두 놈에게 막타를 내주는 꼴인데. 짜증나네, 진짜.’
쿠리야마 토시야스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다. 기껏 판을 다 깔아놨더니, 난데없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끼어들어 엉뚱한 놈들을 보냈다. 일이 점점 걸쭉하게 꼬여가려는지 좋지 않은 소식은 또 들려왔다.
지난 전투의 패배로 일본에 있는 구로다 요시타카(黒田孝高)의 입장이 난처해졌다는 소식이 그것이다. 구로다 가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뢰를 완전히 잃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막대한 손실을 입은 구로다 가문이 더는 필요 없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이제라도 조선으로 넘어가버려?’
오늘도 쿠리야마 토시야스의 마음은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대로 조선으로 넘어가 일본군의 정보를 모조리 내어주면 뭐 한 자리라도 받지 않을까. 조선은 양반이 다 해먹던 시대니까, 양반을 내려준다는 조건으로 넘어가면 괜찮지 않을까. 그러면 평생 기생이나 끼고 놀면서 살아도 되지 않을까.
받아줄지 안 받아줄지도 모르는 판국에 쿠리야마 토시야스는 여전히 김칫국만 들이마시고 있다.
‘아니야…….’
쿠리야마 토시야스는 이내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지금에서야 조선으로 넘어간다 하더라도, 일본인에 대한 조선의 처우가 썩 좋을 것 같진 않았다. 조선으로 넘어가 차별받으며 평생을 쩔쩔매며 사느니, 아무 여자나 붙잡고 희롱하고 겁탈하는 지금이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최광호라 생각되는 정기룡과 한군데 뭉쳐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더러워졌다. 무심한 것 같지만 그 눈빛 속에 감춰진 조롱과 경멸을 떠올릴 때면, 없던 분노도 차올랐다.
“관백께서 정기룡을 처치할 자들을 따로 보내주신다니……, 그럼 ‘안심하고’ 다른 자들부터 제거할 계획을 잡아봅시다. 제거해야 할 자들은 제가 명단에 적어놓은 그대로요. 우선순위는 남해안에 있는 이순신과 광주에 있는 권율이란 자요. 권율이 광주에 있다는 사실은 이번 청주성에 들어가 얻어낸 ‘정보’요.”
쿠리야마 토시야스는 아주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정보’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다소 탁하고 걸걸한 그의 음색은 좌중을 압도하였다. 동시에 좌중의 모든 시선을 단번에 자신에게로 집중시켰다.
쿠리야마 토시야스의 머릿속에는 어떻게든 이 분위기를 주도해나가고픈 생각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속한 구로다 가문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망조가 든 가문에 더 이상 머무를 이유 따위는 없었다. 언제든 ‘이적’해 빌붙을 곳을 찾아야 했다. 쿠리야마 토시야스는 이럴 때일수록 몸값을 상승시키려면 끊임없이 존재감을 드러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권율? 그자는 어떤 자요?”
일본 6군 총대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의 말투 속에는 ‘널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느냐?’는 속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만 같았다.
“그자는 이전부터 전쟁발발을 눈치채고 지금껏 준비를 많이 해온 자요. 준비를 단단히 해온 만큼, 우리에게는 더없이 버거운 상대이외다. 더 크기 전에 싹을 잘라버려야지 않겠소?”
그 말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물론 시마즈 요시히로도 목대울이 꿀렁거릴 정도로 크게 웃었다.
“그대는 조선 놈이 겁나시오? 한번 붙어보지도 않고 어찌 그 자를 두려워한단 말이오? 아……, 조선 놈들에게 당했지. 그래서 두려운 게로군.”
시마즈 요시히로가 때를 노렸다는 듯이 야유를 했다.
쿠리야마 토시야스는 얼굴을 붉힐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늘어놓을 변명과 이유가 딱히 떠오르지 않기도 했지만. 지속적으로 비하하고 조롱하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때가 오면 반드시 저것들을 날려버린다. 반드시…….”
쓸데없이 자존감만 높은 쿠리야마 토시야스. 그는 지금의 분위기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묘하게 분위기가 흘러가자 일본 4군 총대장 모리 요시나리와 일본 7군 총대장 모리 데루모토가 좌중을 진정시켰다. 그때, 지금껏 조용히 앉아 있던 일본 5군 총대장 후쿠시마 마시노리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헌데…… 궁금한 것이 있소.”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무겁고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자 일순간 좌중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도대체 조선의 이런저런 실상을 가로(家老, 쿠리야마 토시야스를 지칭)가 어찌 그리 잘 알고 있는 것이오?”
“……?”
“누가 뛰어나고 누가 대단한지 어찌 알고 있소? 마치 미리 조사해서 알고 있던 것 같잖소. 거참 신기하고 신기할 노릇이구려.”
“그건…….”
“일전에 거두었다던 조선 장수가 그럽디까? 누굴 두려워하고 누굴 조심해야 할지? 이미 죽여 버린 자의 말을 그토록 철저하게 신뢰할 요량이라면, 뭣 하러 베었소? 계속 데리고 있으면서 더욱 많은 정보를 빼내오지. 안 그렇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게요?”
“마치 우리 대군이 놈들에게 애먹기라도 할 것이라 장담하잖소! 가로는 우리 모두를 조롱하고 싶었던 게요? 아니면 조선놈들에게 밟히길 기도라도 하는 게요?”
순간 쿠리야마 토시야스는 아차 싶었다. 지난 전투에서의 지독한 패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불신은 점차 순차적으로 번져갔다.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같은 편이면서도 ‘적군’인, 지금 이 자리의 모든 승냥이 떼에게 구로다 가문을 포함해 쿠리야마 토시야스 자신도 무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동안 너무도 가볍게 처신했다. ‘어설프게’ 알고 있던 역사 사실을 가지고 ‘어설프게’ 나댄 것이 화근이었다. 쿠리야마 토시야스는 후회하고 또 후회하는 중이다.
이미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 어린 상관 구로다 나가마사는 그저 고개만 떨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전 세계든 현생이든. 쿠리야마 토시야스의 절반도 살아보지 못한 어린 상관 놈이 새삼 달라보였다. 그저 앞장서 칼춤이나 출 줄 알았는데.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상황 이해나 흐름 파악, 대처가 빠르지 않은가.
‘어떻게든 이일 이놈을 구워삶아야겠어.’
이제 돌파구는 오직 이일과의 협상을 성공시키고 정기룡, 아니 최광호의 목을 따는 일밖에 없다고 쿠리야마 토시야스는 생각했다.
‘슬슬 입질이 올 때가 됐는데…….’
반은 확신하고 있었지만, 반은 불안했다. 만약 이일이 미끼를 물지 않을 경우 더더욱 그의 입지가 곤란해진다. 쿠리야마 토시야스는 최대한 말을 아끼면서도, 모순되게도 좌중의 각 군 총대장에게 이런저런 말로 얼버무려가며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이렇게 기분이 꿀꿀한 날은 역시 술이나 퍼마시는 것이 최고다.
잡아들인 조선 기생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그런데 이 기생년들이 처음에는 술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뭔 애국심이야, 이것들아! 몸이나 파는 저급한 인생 주제에, 엉? 쳐맞아야 자기 수준이 어디인지 알지, 엉?”
쿠리야마 토시야스는 연일 조선 기생들을 두드려 패서 억지로 술을 따르도록 만들었다. 기생으로 부족하면 민가를 습격해 아무 여자나 잡아오면 그만이었다. 기생이든, 납치한 아녀자든. 건드리고 나면 반 이상은 다음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쿠리야마 토시야스는 개의치 않았다. 또 잡아들이면 그만이니까.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이 순간에도 쿠리야마 토시야스의 머릿속은 쓸데없는 생각과 상상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순간 전령 하나가 들어와 보고했다.
“청주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저쪽 지휘관이 가로님을 다시 보자고 한답니다.”
그럼 그렇지. 쿠리야마 토시야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이일이 자신이 던진 미끼를 덥석 물어버린 것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에 쿠리야마 토시야스의 얼굴은 평화로워졌다.
그런데 전령은 또 다른 소식을 전했다. 그것도 묘하디 묘한 소식을 말이다.
“가토 기요마사 군의 막하에 있던 장수 하나가 군사를 이끌고 탈영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조선으로 귀순할 생각인 것으로 보입니다.”
***
“정기룡의 목을 뒤에서 치게.”
“네?”
이일이 은밀하게 한명련을 불러서 말했다. 그 말에 놀란 한명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나으리.”
한명련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이일의 눈치만 살폈다.
“전하께서도 그리 명하셨잖은가?”
“그런……. 하오나 나으리…….”
한명련은 뒷말을 목구멍으로 도로 집어넣었다. 선조의 명은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선조는 한명련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명을 함구하라고 했다.
“이유가 무엇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순간 이일은 움찔했다. 그는 이 정도 냄새를 풍겨줬으면 반드시 선조가 그 냄새를 맡고 행동하리라 예상했다. 자연스럽게 정기룡의 목을 치라고 명했으리라 생각했건만. 선조가 보낸 한명련은 이일에게 이유를 묻고 있다. 그렇다면 선조는 한명련에게 다른 명을 내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 정기룡은 역모를 준비 중일세. 난리를 틈타 일어날 생각인 게지. ―
― 그리 알고 계셨다면 정확히 보고하셨어야지, 왜 상주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있다고만 하셨는지요? ―
이일은 말을 아꼈다.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천민 놈이 눈을 부라리며 저렇게 하나하나 따질 것만 같아서다.
“명을 따르지 않는 자일세.”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해서일까. 엉겁결에 이일의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은 엉뚱했다. 그러자 한명련은 고개를 숙이고 무슨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더니 한참만에야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제게 이일 장군님께서 꼭 그리 말할 것이라 하셨지요. 또한 장군께서 그리 물으실 경우, 전하를 대신하여 이렇게 물으라 하셨습니다.”
“……?”
“장군께서 원하는 것은 정기룡의 목입니까, 아니면 정기룡의 용맹입니까?”
어느새 한명련은 눈을 번뜩이며 그렇게 물었다. 한명련의 물음에 이일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손끝에서 시작된 미세한 경련은 천천히 밀려올라와 몸 곳곳에 전해졌다. 경련은 이내 소름으로 바뀌었고, 도돌도돌한 소름이 몸 구석구석 빳빳하게 느껴졌다.
‘이 자식이 아까 쩔쩔매던 이유가……. 전하께서 예상한 물음이 내 입에서 튀어나와서인가? 이거…… 낭패로군…….’
이일은 조선 임금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새삼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