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d Academy 1st Hit Instructor RAW novel - chapter 221
심판을 불러 반칙패를 얻어내는 플레이. 저지 킬(judge kill)의 개념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네…네…맞습니다…. 이우주가…네… 또 그 새ㄲ…아니, 그 사람입니다.”
잔뜩 침울해진 표정으로 벡이 개발자들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벡의 손에는 사람 몸통만한 두께의 룰북이 쉴 새 없이 넘어가고 있다.
“야. 심판이란 게 룰북도 머릿속에 없냐?”
“이걸 어떻게 다 머릿속에 집어넣어요. 심판도 사람이라고요.”
“게임을 제대로 하려면 당연히 룰북은 머릿속에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들어있어야지. 심판이 룰북을 다 못 외울 거면 룰북을 간소화하는게 맞는 거 아니냐?”
“원래 룰북은 책자 한 권 분량이었어요. 어떤 자식 덕분에 플레이 제정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이 꼬라지가 된 거지.”
저저 변명하는 것 좀 봐. 누구는 새 버전 룰북 나올 때마다 달라진 부분까지 새롭게 외우느라 고생한다고. 게임 개발자나 되는 양반이 룰북도 머릿속에 넣을 노력을 하지 않다니.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하는 바람에….]잔뜩 우울해하는 벡이 안쓰러웠는지 정화자가 연신 고개를 숙였다.
“정화자 네 실수가 문제가 아니야. 너는 그냥 길 지나다니다 벼락에 맞은 것 뿐이니까.”
정화자의 모든 눈알에 눈물이 고였다.
백 개쯤 되는 눈이 침울해지는 건 어떻게 보건 그다지 보기 좋은 꼴이 아니군.
벡은 어떻게든 저지먼트 킬을 판정하지 않으려 30분째 방법을 찾아보고 있었다. 중도적인 입장이어야 하는 심판 입장에서는 실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심판으로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은 분명히 나뉜다.
“정화자는 룰상 절대로 확인해서는 안 되는 카드를 확인해버렸어. 이런 중대한 위반은 어떻게 판단해도 실격패 처리 말고는 답이 없다고.”
“입 좀 다물어요.”
“그냥 생각하는 게 길어지길래. 도와주려고 하는 거야.”
“형이 이 세계에서 나가주는 게 도와 주는 거라고요.”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게임의 치명적인 오류를 나만큼이나 많이 찾아준 듀얼리스트가 이 세상에 어디 있다는 말인가.
내가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거나 말거나 벡은 통화를 이어 나갔다.
“네…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참 이어지던 통화가 드디어 끝났다. 표정을 보아하니 더 묻지 않아도 되겠군.
하지만 판정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
“그래서. 결과는?”
“…판정하겠습니다. 「천지개변」으로 덱이 뒤집힌 상황에서 「예지몽」을 사용한 상황. 이 상황에서 상대 플레이어였던 정화자는 덱 가장 위의 카드를 확인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그런데 정화자는 자신의 덱 가장 위에 있는 카드를 확인했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게임 진행에서 이루어지는 중대한 플레이 침해 행위입니다. 중대한 플레이 침해 행위에 대한 패널티는 반칙패를 선언하는 것으로 명확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벡은 입에 벌레라도 한가득 들어있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즉 정화자의 반칙패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튀어나오는 승리 메시지.
나는 뿌듯하게 내 앞에 튀어나오는 승리 메시지를 확인했다.
언제 봐도 승리 메시지는 기분이 좋단 말이지. 늘 짜릿해. 늘 새로워.
“전익현! 이런 방법이 있는데 왜 「심장」은 이렇게 안 이겼어?”
“심장은 눈이 없잖아. 카드를 봤는지 안 봤는지 내가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아!”
“게다가 결정적으로 심판이 없었지.”
저지먼트 킬은 심판이 있어야만 승리를 얻어낼 수 있는 까다로운 승리 방법이다.
세상에는 룰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룰 따위는 무시하고 게임을 이기는 것에 영혼을 팔아넘기는 쓰레기들이 세상에는 넘쳐난다.
“나는 심판이 없는 동네 매장에서 저지먼트 킬을 요청했다 린치를 당한 적이 있어.”
“시레나는 전익현이 린치 당할만 했다고 생각해.”
“그 고통 속에서 나는 깨달았지.”
“뭘 깨달아?”
“저지먼트 킬을 쓰기 위해서는 심판이 필요하단 걸.”
“…….”
그때 당시의 깨달음이 없었다면 심장전에서도 저지먼트 킬을 노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 당시의 린치가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할까.
“전익현. 사람 아니야.”
“깨달음의 방향이 잘못된 것 같은데요.”
“결국 이겼으니 깨달음의 방향은 잘 맞는 거지.”
“…아무튼 이번에는 승리 선언을 해 드리지만 지금의 승리 조건은 이번 듀얼에만 적용되는 승리입니다. 실시간부로 룰이 수정될 거에요.”
벡이 룰북의 마지막 장을 펼쳐보였다. 룰북의 마지막 장은 실시간으로 황금색으로 글자가 적혀나가고 있었다.
[특별 제정 11942-가 : 「천지개변」관련 특별 제정] [「천지개변」이 발동한 상태에서 덱의 카드를 확인하는 효과가 발동할 때 플레이어들은 「천지개변」의 발동과 무관하게 덱의 카드를 확인할 수 있다.]“그러니 이제는 천지개변을 통한 저지먼트 킬이 불가능하게 됐다는 거죠.”
“상관없어. 그런 게 없어도 나는 무적이니까.”
“이런 짓 안하고도 무적이면 도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거에요… 제발 제대로 소울 커맨더스를 즐겨달라고요… 저희 회사가 형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요?”
소울 사가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거야 하늘을 덮고도 남는다. 하지만 내가 소울 사에 대한 악의로 이런 허점들을 찾아내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악의로 이런 짓을 벌인다면 그냥 사이코패스겠지.”
“그러면요.”
“내가 이런 콤보를 찾아내는 건 다른 이유 없어. 그냥 재밌으니까 하는 거야.”
“…그게 훨씬 더 사이코패스같은데요.”
악담하고는.
처음 내 담당이 됐을 때는 참 착한 아이였는데. 어쩌다 벡의 성격이 이렇게 더러워졌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그저 전임자인 서윤하의 성격을 따라가는 게 아닐지 조심스레 추측해 볼 뿐.
“그래도 저지먼트 킬을 내는 방법이 거의 없어서 다행이에요. 나올 때마다 특수 제정 작업을 해야 된다는 건 귀찮지만.”
“…….”
“형. 왜 말을 안 해요?”
“아. 다른 생각하고 있었어.”
“설마 다른 저지먼트 킬 방법들을 숨겨놓은 건 아니죠?”
나는 벡에게 대답 대신 잇몸이 보일 정도로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를 신뢰하지 않고는 못 베길 정도로 순수한 미소를.
벡은 내 웃음을 믿는 눈치였다. 역시 말보다는 행동이 사람의 신뢰를 사기에 좋다.
“…더러워서 퇴사를 하던지 해야지.”
퇴사를 생각하다니 직장에서 괴롭히는 상사라도 있는 모양이군. 카드 게임 개발자란 것도 나름대로 고충이 많은 직업인 모양이다.
“아. 그러고 보니 보상을 잊어버릴 뻔 했네.”
승리에 취해 내 ‘저지먼트 킬 No. 144’를 쓴 계기를 잊어버릴 뻔했군.
“그래서. 이 섬의 보상 카드는 뭐지?”
[이 섬의 보상 카드는 직접 카드를 제작할 수 있는 오리지널 카드입니다.]“오리지널 카드라고?”
제작 가능 카드라는 말에 벌써부터 입에 침이 고인다. 얼마만에 받은 제작 가능 카드이던가. 세계대회 우승을 해야 주는 오리지널 제작 카드를 이렇게 받을 수 있다니.
[보상 카드가 제공됩니다.]+
【소중한 것】
【당신의 소중한 기억이 새겨져 있는 카드입니다.】
【어떠한 종류의 듀얼에서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
나는 카드를 바라봤다. 마나 코스트도, 효과도, 심지어는 일러스트도 없었다.
그저 있는 것이라고는 카드명과 카드 설명뿐.
나는 해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벡을 바라봤다.
“이게 뭐냐.”
“바라는 그림이나 사진을 일러스트란에 넣을 수 있는 카드에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카드죠.”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잖아. 이걸 도대체 어디 쓰냐고.
뭔가 삐까번쩍하길래 대단한 카드라도 주는 줄 알았는데. 혹시 뭔가 더 숨겨져 있는 게 아니라 카드를 이리저리 만져 봤지만 그냥 평범한 카드다.
내가 카드를 받아들고 멍하니 있자 시레나가 내 옆에 다가와 붙었다.
“시레나! 전익현이랑 사진 찍어서 넣을래!”
“안 돼.”
“왜!”
“왜긴 왜야. 혹시 특이한 곳을 찍는다거나 하면 비밀이 밝혀지는 카드일수도 있으니까 그렇지.”
“그럴 리가 없잖아.”
혹시 모르는 거잖아. 나는 「소중한 것」카드를 품 안에 집어넣었다. 아무래도 특수한 카드이니만큼 뭔가 활용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정 안 되면 어떤 종류의 덱에도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을 활용해서 남의 덱에 집어넣고 반칙패를 노린다거나….
“또 악랄한 짓 생각하고 있네요. 좀 제대로 즐길 순 없어요?”
“난 언제나 제대로 즐기고 있어.”
“이우주 형.”
“왜.”
“슬슬 어떻게 해야 될 지를 골라야 돼요.”
“뭘.”
“형이 여기 온 진짜 이유. 템포를 뒤로 늦추는 건 가능하지만 영원히 템포를 늦출 순 없어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벡의 말대로다. 내 안에서 자라나 있던. 그리고 계속해서 자라나고 있던 생각들과 감정들. 그리고 죄책감.
나는 손에 들려 있는 「소중한 것」카드를 바라봤다. 타이밍 좋게 난파한 배. 가라앉지 않고 도달한 섬. 몇 달은 먹을 충분한 식량까지.
이런 작위적인 상황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바보겠지.
개발진들의 「소중한 것」카드는 나에게 주는 헌사인 동시에 선물이리라.
“이 카드는 누가 만든 거냐?”
“제가 만든 거에요. 다들 합심해서 섬 제작은 도와줬지만요.”
“하여간 오지랖 넓은 개발자들이라니까.”
“개발자인 동시에 형의 광팬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면 알아차리기 어렵게라도 하던가. 그래도 원숭이들 퇴치해야 도전할 수 있는 트랩은 꽤 괜찮았지만.”
“원숭이들… 뭐요?”
이만한 정성이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마음이 움직인다. 나는 살생부에 있는 143명의 개발자들 가운데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한 명은 살려 주기로 결정을 내렸다.
조금 늦었지만 솔직하게 고백하겠다.
내가 이 세계에 온 것은 부스터팩 발매 주기가 빠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이 세계에 돌아온 것은 이곳에 내 소중한 사람들이 잔뜩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자면 당장 내 옆에 있는 시레나라거나.
“전익현! 멋진 얼굴이야! 듀얼 안할 때는 처음 보는 얼굴!”
…나는 내 안에서 비중이 조금 작아진 시레나의 볼을 쭈욱 잡아당겼다.
“그래서. 누구한테 고백할지는 생각해 봤어요?”
“아니.”
“아직도 결정 안 했다고요? 그럼 어떡해요?”
어떡하긴. 이곳은 「소커아」세계관이다. 이 곳에서 문제의 답을 찾는 과정은 단 하나뿐이다.
“듀얼로 결정해야지.”
##외전#6 : 듀얼(1)
이 세상은 더 이상 듀얼이 중요하지 않은 세계다. 더 이상 「듀얼혼」은 세상에 없으니까. 남연철은 종종 이 사실을 잊어먹고는 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여전히 세상은 전쟁이 만연해 있었으며, 세상의 절반은 굶주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것이 변화하진 않았네.”
“그러게.”
“갑자기 세상이 격변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지만.”
남연철의 말에 흑일삭과 새벽녘이 대답했다.
고르디우스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재편되었지만 여전히 고르디우스의 몇몇 멤버들은 여전히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친분과 별개로 할 일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기도 했다. 예를 들어서 고르디우스가 정식으로 산하에 넣은 모바일 소울 커맨더스의 합법화 절차라던가.
“이제 미국의 46개 주에서 「모소커」가 합법으로 인정됐어.”
“로비했던 메타비트 덱이 제대로 먹혀들었던 모양이군.”
입법 절차에서의 듀얼이 보통 수가 많은 쪽이 승리하게 되는 것은 상식이다. 본래라면 압도적으로 반대표가 많은 모소커 합법화같은 의제가 통과되는 일은 거의 없다는 뜻. 하지만 이 상식을 뒤집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듀얼이다.
남연철이 만든 덱 레시피 로비가 제대로 먹혀든 덕에, 모바일 소울 커맨더스가 합법화가 퍼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대한민국 정도인가.”
이런 꼼수가 먹히는 것은 듀얼이 아직까지 강해지지 않은 다른 나라들 뿐이다. 대한민국에는 강한 듀얼리스트들이 발에 치이게 많다. 그러니 덱 레시피를 보내 준다고 해도 제대로 굴릴 수 있는 국회의원이 없으면 모소커의 합법화는 불가능하다.
그 부분은 천천히 공략을 하면 될 터.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풀려 나가고 있었다. 더 이상 듀얼은 일부의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