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69
요한나의 눈이 뒤집혔다.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목소리를 높이더니, 이내 출혈을 견디지 못하고 또 한 번 의식을 잃은 것이다.
“앗, 은하!”
“신성력을 집중해라! 은하를 소생시켜!”
성직자들은 사색이 되어 신성력을 집중했다. 그들은 테온과 이자벨라의 싸움에 끼어들 여유가 없었다.
반면, 아우레오는 무언가 결심한 듯 테온을 향해 달렸다.
“저는 성녀 은하의 말씀을 테온에게 전하고 오겠습니다!”
“아우레오 사제! 위험합니다!”
몇몇 성기사들이 말렸지만, 아우레오는 이미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다.
테온과 아크리치가 싸우는 곳에서는 불규칙한 마력 파동과 지옥삭풍이 쏟아져 나왔다.
마력 파동은 사람의 뇌를 곤죽으로 만들기에 충분했고, 지옥삭풍은 스치는 모든 것을 베어 버렸다.
짙은 먼지구름 탓에 눈으로 보고 피할 수도 없었다.
‘내가 옳은 선택을 한다면, 아도나이께서 지켜 주실 거야. 내가 여기서 죽는다면, 그것 또한 그분의 큰 뜻이야!’
아우레오는 의심하지 않았다. 출정 직전, 아도나이가 신탁으로 일러 주지 않았던가?
아우레오는 언제나 믿음 안에 있었다.
그는 자기 판단보다 신의 가르침을 믿었고, 흉포한 마력 폭풍 속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테온! 빈자리에 채워야 합니다! 깨진 그릇은 버리고, 새 그릇에 담아야 해요!”
입으로는 피를 토하듯 요한나의 전언을 외치면서.
* * *
용마주는 순식간에 이자벨라에게 넘어갔다.
오비데우스의 분신은 붉은 용이 영역 밖에서 마법을 쓰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걸작이다.
용마력에 딱 어울리는 육신을 만나자, 화룡주는 물론이고 백룡주도 기다렸다는 듯 냉큼 넘어가서 녹아 버렸다.
“아아……!”
이자벨라가 나직한 신음을 뱉었다. 지금껏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녀였지만, 내면에 무언가 변화가 생긴 듯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추명도에 맞은 그녀의 몸이 빠르게 재생하고 있었다. 상처가 눈에 보이는 속도로 아물었고, 불규칙하게 날뛰던 기운도 잠잠해졌다.
“끅……!”
상처가 거의 보이지 않게 될 때쯤, 이자벨라는 눈을 뒤집고 정신을 잃었다.
‘죽은 게 아니야. 기절한 거다. 이자벨라는 살았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정신을 좀먹던 지옥마력은 거의 다 빠져나왔다. 그 힘의 공백은 용마력이 채웠다. 외상도 다 나았고, 혈색도 아까보다 훨씬 좋았다.
‘이제는 내 차례다.’
지금부터는 이자벨라가 아니라, 나한테 집중해야 한다.
나는 일단 흡성대법을 멈추고, 체내에 밀려든 지옥마력부터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지옥마력을 단전에 담아 둘 수가 없어……!’
이자벨라의 암흑섬광은 내 단전을 관통했다.
구멍 난 단전으로는 이자벨라의 막대한 지옥마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쿠콰콰콰-!
성난 파도가 제방을 부수듯, 체내로 밀려든 지옥마력이 단전을 벗어나 기경팔맥을 휩쓸었다.
지옥마력이 지나간 경혈은 갈가리 찢겼고, 벼락같은 고통이 온몸을 강타했다.
날뛰는 지옥마력을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고삐 풀린 힘은 악마가 되어 나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채워야……! 담아야……!”
정신을 잃기 직전, 아우레오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언제나처럼 호들갑 떠는 목소리다.
생사의 기로에서, 그 앳된 목소리가 반가워 피식 웃어 버렸다.
“테온! 빈자리에 채워야 합니다! 깨진 그릇은 버리고, 새 그릇에 담아야 해요!”
아우레오의 목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 안에 담긴 내용도 점점 선명하게 들렸다.
‘빈자리에 채우라고? 깨진 그릇은 버리고, 새 그릇에……?’
아우레오는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지금 내 몸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옥심귀일진기는 단전이 깨지며 흩어졌고, 근원진기도 거의 다 써 버렸다. 용마주는 이자벨라에게 줘 버렸다.
내 몸은 빈자리다. 지옥마력은 내 몸에 채워야 한다.
‘하지만 단전이 없는데.’
단전은 이미 깨졌다. 깨진 그릇이다. 지금 당장 고칠 방법 따위는 없다. 깨진 그릇은 버려야 한다. 지옥마력은 새 그릇에 담아야 한다.
‘단전을 버려? 단전을 버리면 내공을 어디에 담지? 정제되지 않은 지옥마력을 전신 세맥에 흩어 놓으면 혈도를 전부 찢어 버릴 텐데.’
통제 불능의 힘을 세맥에 흩어 놓는 건 오답이다.
내공은 물과 같다. 물은 그릇에 담아야지, 바닥에 쏟아 놓으면 내 것이 아니다.
새 그릇, 새 단전이 필요하다.
‘아!’
뇌리를 스치는 깨달음.
키르케네스의 마력은 자기 멋대로 명치 부근에 자리 잡았었다.
뒤늦게 들어온 오비데우스의 마력은 그 자리를 빼앗기 위해 쉼 없이 싸움을 걸곤 했다.
‘용의 마력이 머무르던 그 자리!’
그 자리가 새 그릇이다. 체내에 대자연의 기운을 담아 둘 수 있는 두 번째 단전이다.
-사부님, 옥심귀일공이 정말 절학이 맞습니까? 성취도 더디고, 위력도 약한데요.
-아직은 그렇겠지. 옥심귀일공은 내공이 흘러넘쳐 옥청(太淸)에 닿아야 그나마 쓸 만해진다.
-옥청이 뭔데요?
-태청(太淸)을 넘어서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어린 시절, 사부에게 푸념하던 때가 떠오른다.
태청을 넘어서면 옥청을 깨닫는다는 말. 그때는 그저 선문답처럼 느껴졌던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사부가 했던 말의 진의를 알 것 같았다.
‘태청은 하(下)단전이다.’
그럼 하단전을 넘어서야 깨닫는 건 무엇인가?
명치 부근에서 새로 찾은 그릇. 바로 중(中)단전이다.
쿠콰콰콰콰콰-!
새 그릇이 열리고, 갈 곳을 찾은 지옥마력이 중단전으로 몰려들었다.
옥청을 중심으로 경혈이 새롭게 배열되었다. 경혈의 위치가 바뀌니, 당연히 근골과 피육도 새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우득, 우드득!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두 번째 환골탈태가 시작된 것이다.
옥청은 놀라운 속도로 지옥마력을 정제했고, 체내에 새로운 기운이 차올랐다.
맨 처음은 회복된 기운은 근원진기였다. 고갈됐던 생명의 근원은 금빛 고리가 되어 머리 위로 둥실 떠올랐다.
“저길 봐! 저 먼지구름 속에!”
“헤, 헤일로(Halo, 천사의 고리)다!”
성직자들의 외침이 어렴풋이 들렸다. 그 와중에도 내 몸은 환골탈태를 계속했고, 체내의 기운도 계속 커졌다.
두 번째로 회복한 기운은 옥심귀일진기였다. 지옥마력을 온전히 흡수한 중단전이 맑고 깨끗한 도가진기를 뽑아냈고, 이는 푸른 고리가 되어 머리 위로 떠올랐다.
“헤일로가 두 개나?!”
“천사가 둘이나 강림한 건가?!”
세 번째는 놀랍게도 키르케네스의 마력이었다.
나의 육신은 오랫동안 품었던 백룡주의 힘을 기억했고, 중단전을 통해 똑같은 기운을 만들어 냈다.
차가운 백룡의 기운은 백색 고리가 되어 머리 위로 떠올랐다.
“세 번째!”
“신, 신탁이야! 다섯 천사가 온다는 신탁이 지금 이루어지는 거야!”
성직자들의 목소리가 조금 더 선명하게 들렸다. 어느새 육신은 환골탈태를 마치고 치유의 단계에 들어섰다. 변화의 끝이 보이는 것이다.
우웅-.
구멍 난 하단전이 복구되었다. 옥청의 힘이 태청을 소생시켰다.
그 와중에 중단전에서는 오비데우스의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화룡주가 품었던 뜨거운 마력. 그것은 붉은 고리가 되어 머리 위로 떠올랐다.
네 번째 고리가 떠오를 때쯤 곳곳에서 무릎을 꿇는 소리가 들렸다.
사제와 성기사 들이 마력 폭풍 바깥에서 경배하는 소리였다.
‘마지막은…….’
마지막은 의외의 기운이었다.
옥청은 태청과 달리 담을 수 있는 기운에 제한이 없었다.
‘지옥마력이다.’
중단전은 기껏 정제한 내공의 일부를 다시 지옥마력으로 되돌렸다.
자의든 타의든 지옥마력도 체내에 한번 품었던 기운이니, 이제는 손에 쥔 칼이나 마찬가지였다.
쿠쿠쿠쿠-.
지옥마력은 거칠었다. 사방으로 날뛰는 야생마처럼 지치지 않는 파괴력을 가진 기운이었다.
하지만 그 망나니 같은 기운도 옥청의 공능 앞에서는 순한 양으로 변했다.
얌전히 다듬어진 지옥마력이 검은 고리가 되어 머리 위로 떠올랐다.
황(黃), 청(靑), 백(白), 홍(紅), 흑(黑).
다섯 빛깔의 고리들이 머리 위에서 천천히 회전했다.
현경(泫境)의 상징, 오기조원(五氣朝元)이었다.
사파에서 온 용사
현경
번쩍!
눈을 뜨자 전장의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력 폭풍도, 다크엘프들의 물안개도, 짙은 먼지구름도 내 시야를 방해하지 못했다.
제일 먼저 보인 건 아우레오였다. 그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역시, 다섯 천사는, 테온……!”
더듬더듬 말하던 아우레오가 픽 쓰러졌다. 그의 오른팔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다가 지옥삭풍에 맞은 걸까? 어깨의 절단면이 거칠고, 탁한 피가 줄줄 흘렀다.
‘미련한 놈…….’
약해 빠진 녀석이 나를 돕겠다고 이 아수라장을 헤집고 온 것인가.
내 곁으로 오기 위해 폭풍 속으로 걸음을 디뎠을 아우레오를 생각하니,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우레오를 바르게 눕히고, 혈도를 점해 출혈을 막았다.
‘이대로 방치하면 심장까지 썩어 들어가겠군.’
지옥마력의 작용인지, 상처 부위의 피부가 마른 과자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손끝에 생명의 기운을 담아 아우레오에게 흘려 보냈다. 근원진기를 머금은 금빛 고리가 가늘게 진동했다.
‘팔을 다시 자라게 할 순 없지만, 상처를 아물게 할 수는 있다.’
아우레오의 상처가 황륜(黃輪)의 기운을 듬뿍 빨아들이고, 꾸물꾸물 아물기 시작했다.
치유 술법 따위는 배운 적이 없지만, 현경에 이르니 이 정도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흐으.”
아우레오가 편안하게 숨을 내뱉었다. 상처 치유를 마치자 혈색도 한결 좋아졌다. 피를 많이 흘렸고 심력도 소모한 탓에 의식을 잃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한숨 푹 자고 나면 깨어날 거야.’
아우레오는 늦어도 하루 이틀이면 정신을 차릴 것이다.
그다음 눈에 들어온 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자벨라였다.
그녀는 모로 누워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는데, 숨소리가 고르고 편안했다.
‘로브는 완전히 가루가 되어 버렸군.’
이자벨라는 알몸이었다. 그녀의 몸 곳곳을 살피며 외상을 확인했다.
추명도로 꿰뚫었던 자리는 벌써 새살이 돋아 있었다. 우윳빛의 뽀얀 젖가슴에는 흉터조차 없었다.
펄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