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78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억지로 입을 열자면 못 할 것도 없지만, 굳이 용들의 옛이야기를 다크엘프들과 함께 들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버릇처럼 욕지거리하는 나후타야였다.
분통을 터뜨리는 나후타야를 무시하고, 이자벨라를 돌아봤다.
“잠깐 자리를 옮기자. 나후타야에게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게 많거든.”
“잠깐 옮기는 게 아니라, 아예 중부로 떠나는 거 아니에요? 남부에서 할 일은 모두 마쳤잖아요?”
이자벨라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한 가지 용무가 남아 있었다.
[서부에서 오비데우스의 마법 연구 자료를 확보했는데, 처음 보는 문자로 쓰여 있어서 해석이 안 돼. 엘프들이 깨어나면 보여 줄 생각이다.] [예? 오비데우스의 자료요? 각하한테 그런 게 있었어요?] [그래, 오비데우스를 처치한 뒤 나 혼자 화산 지대로 돌아가 싹 쓸어 왔지.]당초 계획은 오비데우스의 연구 자료를 늪의 조언자에게 보여 주고 번역을 부탁하는 것이었지만, 황당하게도 늪의 조언자의 정체는 푸른 용이었다.
지금 나후타야에게 자료 번역을 지시하면 교묘하게 내용을 왜곡하거나 악용할 우려가 있었다.
[엘프들도 모르는 문자면 어떡하려고요?] [모르겠다. 지금 당장은 엘프들 외에 도움을 청할 만한 곳이 없어.]용의 연구 자료에 쓰인 고대의 문자를 누가 해석할 수 있겠는가? 그나마 일말의 기대라도 가져 볼 수 있는 집단은 엘프뿐이었다.
[귀혈이 붉은 용을 도와서 여러 마법 실험에 참여한 것처럼, 엘프들도 푸른 용의 마법 실험을 보조해 왔지. 그러니 깨어나길 기다려 보자.] [알겠어요.]사정을 알게 된 이자벨라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입장에서도 굳이 중부로 빨리 갈 이유는 없었다.
나는 나후타야의 새장을 들고 폭포 너머로 이동했다. 시끄러운 물소리 때문에 밖으로 대화가 새어 나가지 않는 위치였다.
* * *
열사(熱沙)의 땅.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달아오른 모래와 아지랑이뿐인 곳.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신전이 우뚝 서 있었다.
대리석과 황금으로 치장한 신전은 곳곳에 수반이 비치되어 있었고, 야자수와 선인장이 초록을 더해 주었다.
노란 공작새와 푸른 원숭이, 투명한 물고기 등등 온갖 희귀한 동물이 알록달록한 자태를 뽐내고, 어디선가 감미로운 현악이 흘러나와 방문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신전에 들어서기 전부터 달큰한 향내가 코를 자극했는데, 어쩐지 코만 자극하는 게 아니라 피부 전체가 간질간질한 느낌을 주는 향이었다.
척박하기 그지없는 동방의 사막 한가운데서 비현실적인 사치를 보여 주는 이곳.
바로 동방회교(東方回敎)의 성지, 칼리파 궁전이었다.
“내 말이 맞다니까요! 남부에서 첩자를 보낸 게 틀림없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왜 칼라파 궁전으로 오는 길목에 엘프들이 죽어 있겠습니까?”
“하지만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엘프들이 아무리 허약 체질이라도, 사막 초입에서 죽어 나자빠지다니…….”
“확실히 이상하긴 합니다. 정말 첩자로 보낸 거라면 나름대로 정예를 선발했을 텐데 말이지요.”
머리에 터번을 두른 동방회교의 제사장들이 회랑에 모여 열띤 토의를 벌이고 있었다.
둥글게 모인 그들의 중앙에는 비쩍 마른 엘프 사체 십여 구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나는 이들이 첩자가 아니라 사절단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첩자라기에는 무장이 너무 빈약해요.”
“하지만 늪의 조언자가 무슨 이유로 사절단을 보낸단 말입니까? 이미 요정숲과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인데요.”
“하긴, 이쪽은 괴수들을 보냈고, 그쪽은 아크리치로 맞섰으니, 대화의 여지는 없는 셈인데…….”
제사장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도 명확한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사막의 정찰대가 엘프 사체들을 발견해 궁전으로 가져온 지 벌써 한 시간이 지났지만, 덧없는 추측만 무성할 뿐 이렇다 할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만.”
그때 회랑 가장 안쪽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모든 제사장들이 합죽이처럼 입을 다물었다.
안쪽에 준비된 상석에서 풍성한 예복을 입은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내가 직접 확인하겠다.”
사내의 얼굴은 면사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중후하고 위엄이 넘쳤다.
동방회교의 지체 높은 제사장들도 그의 말 한마디에 바짝 긴장한 모습이었다.
“소, 송구합니다, 칼리파(Calipha, 동방회교의 최고 지도자). 저희가 부족해서 수고를 끼쳐 드리게 되었습니다.”
칼리파라 불린 사내는 제사장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엘프 사체 더미로 다가가 한 손을 뻗을 뿐이었다.
그의 손에서 피어난 검은 아지랑이가 엘프 사체를 감싸고, 이미 죽어서 말라 버린 뇌에 담긴 기억이 조각조각 이어지기 시작했다.
사파에서 온 용사
칼리파
“너는 누구냐? 너는 왜 이곳에 있느냐? 누가 너를 이곳으로 보냈느냐?”
칼리파의 음성에 반응하듯, 엘프 사체 하나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바짝 마른 피부에 균열이 생기고, 굳은 턱뼈가 조금씩 움직였다.
“나, 나는…… 시리스……. 요정숲의 엘프…….”
“누가 너를 이곳으로 보냈느냐?”
“푸른 용……. 개구리의 몸에 갇힌…… 교활한 용……. 나후타야…….”
시리스의 대답에 칼라파가 이채를 띠었다. 주변의 다른 제사장들도 크게 동요했다.
“교활한 용이라니? 나후타야에게 정신을 지배당한 엘프가 어찌 저런 불손한 대답을 한단 말인가?”
“설마 엘프들이 푸른 용의 정신지배를 벗어난 건가? 대체 어떻게?”
제사장들의 호들갑에 칼리파가 한 손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모든 소란이 멈췄다.
장내가 정숙해지고, 칼리파가 시리스를 향해 질문을 이어 갔다.
“나후타야가 왜 너희를 이곳으로 보냈느냐? 너희가 동방으로 향한 목적이 무엇이냐?”
“아도나이의…… 변고를…… 알리고…… 동맹을…… 제안하기…… 위해서……. 지금…… 아도나이는…… 대가를 치르느라…… 무력화…….”
“……?!”
시리스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지금껏 아무런 표정이 없었던 칼리파도 눈을 부릅떴다. 다른 제사장들은 체통도 잊고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시리스는 그런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정보를 풀어놓았다.
“아도나이는…… 다섯 천사를…….”
시리스의 말은 답답할 만큼 느리고 툭툭 끊겼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고, 핵심적인 내용도 누락된 부분 없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아도나이가 다섯 천사의 힘을 지상에 내려보냈고,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니! 칼리파, 이 엘프가 가진 정보가 사실이라면, 우리 동방회교에는 천하에 둘도 없는 기회가 아닙니까?”
“맞습니다, 칼리파. 중부의 잡신이 드디어 힘을 잃었습니다! 이교의 광신도들을 싹 쓸어버릴 기회입니다!”
“심지어 기껏 강림한 다섯 천사의 힘을 한 사람이 몽땅 가지고 있다고 하니, 그놈만 피하면 중부를 무인지경으로 난도질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흥분했다.
진중한 칼리파도 이 엄청난 소식에는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잠시 입을 다물고 숨을 골랐다.
“요정숲에서 온 시리스여, 네가 왜 동방에 발을 디뎠는지는 알겠다. 한데, 너는 왜 나의 궁전까지 오지 못하고, 사막의 초입에서 죽음을 맞았느냐?”
“나는…… 사막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 푸른 용의 정신지배가…… 저절로 풀린 탓에…….”
시리스뿐만 아니라, 함께 온 모든 엘프에게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들이 사막을 가로지르던 도중에 테온이 요정숲을 침공해 나후타야를 생포했고, 나후타야는 테온의 협박에 의해 엘프들에게 걸었던 정신지배를 거두어들였다.
사막의 뙤약볕 아래를 지나던 시리스 일행은 그대로 쓰러져 의식을 잃었고, 열사병과 심한 탈수로 허망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도중에 푸른 용의 정신지배가 저절로 풀렸다고? 왜지?”
“나후타야에게 무슨 변고가 생긴 게 아닐까요?”
나후타야의 마법이 사라진 이유는 시리스도 몰랐다.
당연히 칼리파를 포함한 동방회교의 제사장들도 이런저런 추리만 할 뿐,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 다섯 천사의 힘을 받았다는 인간은 누구냐? 혹시 그가 요정숲 근처에 있었나?”
“그의 이름은…… 테온 크로우……. 그는 아도나이 교회의 군대를 이끌고…… 남부로 진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정군에 부상자가 많은 탓에…… 스스로 기수를 돌렸다…….”
시리스는 자기가 아는 범위 내에서 대답했다.
하지만 눈치 빠른 칼리파와 제사장들은 어렵지 않게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테온 크로우라면 흑해 너머에서 ‘용살기사’라는 끔찍한 별명으로 불리는 자가 아닙니까?”
“그놈이 또 용살의 만행을 저지른 모양이군요. 회군하는 척하다가 다시 남부로 쳐들어간 게 분명합니다.”
“시리스의 말에 따르면, 나후타야는 오비데우스의 몸을 확보해 전생을 시도하고 있었으니, 그 틈을 노려 요정숲을 침공한 것이지요.”
“맞습니다. 테온 크로우란 자는 비록 인간이지만, 다섯 천사의 힘을 가진 데다 강력한 정예군도 이끌고 있었으니, 나후타야가 전생술을 펼치는 와중에 기습했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었을 겁니다.”
“너희의 말에 일리가 있다.”
칼리파도 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늙은 제사장들은 앞다투어 의견을 내다가, 칼리파의 짧은 칭찬에 감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한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군. 그 용살기사라는 놈이 나후타야를 죽였다면 내가 최후의 용이 된 셈인데, 어째서 아무런 변화가 느껴지지 않지……?’
칼리파, 아니 오랜 시간 칼리파 행세를 해 온 아스칸다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프들의 정신지배가 저절로 풀렸다는 건 나후타야가 죽었다는 소리인데, 그의 몸이 거체로 변하거나 옛 권능이 돌아오는 등 마땅히 일어났어야 할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설마…… 나후타야가 인간들에게 생포를 당한 건가? 아무리 약해 빠진 년이지만 그게 말이 되나?’
설마 하는 생각이 앞섰지만, 천천히 따져 보니 영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하필 전생을 시전하는 와중에 강적이 쳐들어왔다면, 제대로 된 저항 한번 못 해 보고 허무하게 붙잡혔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다섯 천사의 힘을 이어받은 인간 성기사가 곁에서 감시하고 있다면 섣불리 탈출을 시도하지도 못할 것이다.
‘병신 같은 년, 차라리 인간들 손에 뒈져 버리지……. 하여간 아무짝에도 도움이 안 되는군.’
아스칸다르는 진실에 근접한 추리를 해냈지만, 속단하긴 이르다고 판단했다. 자기가 모르는 큰일이 요정숲에서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르니, 직접 심복을 보내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들어라. 전후 사정을 따져 보니, 나후타야는 용살기사의 손에 붙잡힌 것 같다. 무슨 이유인지 그놈은 나후타야를 죽이지 않고 생포한 모양이야.”
“한낱 인간이 용을 포로로 잡다니!”
“이런 막돼먹은 놈을 보았나?!”
칼리파의 말에 제사장들이 바닥을 차고 주먹을 불끈 쥐며 화를 냈다. 어째서인지 그들은 인간임에도 용의 편을 들고 있었다.
“칼리파, 당장 남부로 병력을 보내야 합니다! 푸른 용의 권위가 검은 용에 비할 수는 없다지만, 그래도 용입니다! 성스러운 존재가 중부의 이교도에게 포로로 잡혀 있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맞습니다, 칼리파! 사막의 괴수들은 물론이고, 제국의 군단을 총동원해야 마땅합니다!”
제사장들이 눈을 뒤집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전쟁을 주창했다.
하지만 아스칸다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심유한 눈으로 제사장들을 바라보며 과열된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군단을 동원하기에는 정보가 부족하다. 아도나이가 무력화된 건 정황상 사실인 것 같지만, 남부와 중부 중 어디를 공격할지 정하려면 나후타야의 동향을 확실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아스칸다르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생겼다.
나후타야와 손을 잡고 중부를 공격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고, 반대로 남부를 침공해 나후타야를 죽이고 최후의 용이 되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꽃놀이패가 손에 들어왔구나. 어느 패를 내도 이기는 상황이다.’
아스칸다르는 눈을 감고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어린 소년처럼 들뜬 마음을 심호흡으로 진정시켰다. 유리한 상황일수록 신중하게 정보를 모으고 변수를 줄여야 했다.
“우선 소수의 태양전사를 요정숲에 침투시켜 내부 상황을 파악해야겠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칼리파. 저희가 성급했습니다.”
신나게 전면전을 외치던 제사장들은 아스칸다르의 말 한마디에 손바닥 뒤집듯 입장을 바꿨다. 줏대라고는 눈 씻고 봐도 없고, 오직 칼리파의 입에서 나오는 말만 진리로 여기는 모습이었다.
“지금 남부 근처에 태양전사가 몇 명이나 있나?”
“총 서른아홉 명입니다, 칼리파. 각자 할당받은 괴수들을 이끌고 요정숲 인근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서른아홉이라……. 그중 열 명을 차출해라. 괴수 군단이 시선을 끄는 동안 은밀히 요정숲에 침투시켜 내부를 정찰해라. 그리고 정말 나후타야가 용살기사에게 포로로 잡혀 있다면…….”
얼굴을 가린 면사 뒤에서 아스칸다르의 눈이 흉험하게 빛났다. 지독한 이기심과 야망으로 뭉친 용의 눈빛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년을 죽여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칼리파.”
제사장들이 깊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제각기 흩어졌다.
대전에 혼자 남은 아스칸다르는 우두커니 서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 * *
“이제 네 이야기를 좀 들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