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88
“허, 마력이 넘치니까 그런 짓도 가능하군.”
“마력은 별로 쓰지도 않아요. 고정된 장소에 설치하는 마법이니까요. 단지 범위가 넓은 것뿐이에요.”
이자벨라는 과거 나후타야가 하던 것처럼 요정숲 전체를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그녀가 아크리치의 마법에 더해서 나후타야의 지식도 상당 부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앗, 각하!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이자벨라와 해후를 나누는데, 폭포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크엘프 야키치였다.
“각하께서 오시는 줄 알았다면 미리 영접을 준비했을 텐데요. 지금이라도 장로들을 불러오겠습니다.”
“되었다. 내가 없는 동안 별일은 없었느냐?”
“별일이 있었습니다. 엘프들이 깨어났거든요. 그들이 각하께 꼭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야키치는 그렇게 말하고 숲으로 뛰어 들어갔다. 영접은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크엘프와 엘프 들을 불러왔다.
“각하! 돌아오셨군요!”
다크엘프의 대장로 나가타가 허둥지둥 달려왔다. 늙은 다크엘프의 뒤로 현숙한 여성 엘프가 따라왔다.
그녀의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고, 서두르는 움직임에도 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요정숲을 공격할 때 못 본 얼굴이군.’
내가 이런 생각을 할 때, 여자 엘프가 자기를 소개했다.
그녀의 이름은 아리엔. 엘프의 당대 대장로였다.
“저는 전투 당시 실험실에서 나후타야를 깨우고 있었습니다. 나후타야가 각하에게 사로잡힌 뒤 그대로 정신을 잃었지요.”
아리엔은 나후타야가 부재중일 때 요정숲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녀는 내게 다가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엘프가 굳이 인간식 인사법까지 사용해서 감사를 표하다니, 그녀의 고마움이 어느 정도인지 알 만했다.
“일족 전체를 대표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각하께서는 수백 년간 어둠에 잠겨 있던 저희 엘프들을 구원하셨고, 필생의 원수인 나후타야를 손수 제압해 봉인하셨지요.”
고개를 든 아리엔. 엘프답게 그녀의 말투나 행동은 기계처럼 딱딱했지만, 그 안에 담긴 감동과 감사는 절절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지극히 모범적인 답변을 하고 잠시 분위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렸다.
이내 아리엔의 감정이 가라앉고, 나는 엘프들에게 부탁하려던 용건을 꺼냈다.
“내가 서부에서 오비데우스를 처단하고 얻은 연구 자료가 있는데 말이야…….”
“아, 그건 제가 미리 이야기해 놓았어요. 벌써 번역에 착수했고요.”
이자벨라가 끼어들어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들어 보니, 예상대로 엘프들은 연구 자료에 쓰인 문자를 알고 있었다.
“그 문자는 고대의 룬어입니다. 저희도 학술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능수능란하게 사용하지는 못해요. 각하께서 보유하신 자료의 양이 방대하니, 전부 번역하려면 짧아도 일 년 이상 걸릴 겁니다.”
“그 정도는 충분히 기다릴 수 있다. 번역에 오류가 없도록 속도보다는 정확성에 중점을 두고 진행해라.”
아리엔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보이고 물러갔다.
오비데우스의 마법 연구 자료를 번역하기 시작했다니, 새삼 중원으로 돌아갈 날이 머지않았다는 게 실감 났다.
‘지금 돌아가면 패도련주에게 한 방 먹여 줄 수 있을까?’
당시 강호에 떠돌던 말에 따르면, 패도련주의 무공은 현경을 넘어 생사경에 이르렀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강호에서 그 정도 거물이 되면 호사가들이 신처럼 떠받들기 마련이니, 다소 과장된 면이 있다고 봐야 했다.
그래서 나는 패도련주의 무공을 높게 쳐줘도 현경의 끝자락에 다다른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다.
‘반대로, 아무리 낮게 잡아도 최소 현경이다. 내가 화경에 머무를 때도 패도련주의 경지를 짐작하지 못했으니까.’
무공이란 신비한 구석이 있어서, 경지가 높아지면 타인의 성취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된다.
나는 중원에서 몇 번이나 패도련주를 마주했고, 마지막까지 그의 성취를 읽어 내지 못했다. 그러니 패도련주의 무공은 최소한 현경의 초입 이상이란 말이다.
‘막상 중원으로 돌아가도 놈에게 무공으로 밀리면 곤란한데…….’
패도련주는 책략에서 나보다 몇 수는 앞선다. 휘하에 둔 세력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그에게 복수하려면 최소한 동급, 가능하면 그 이상의 무공을 보유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것조차 확신할 수 없는 상태였다.
‘에라, 모르겠다. 당장 중원으로 갈 것도 아니니 천천히 생각하자. 어쩌면 중원으로 가기 전에 현경의 벽마저 허물어 버릴지도 모르지.’
이전 같으면 맹랑한 생각으로 여기고 웃어넘겼겠지만, 지금은 진지하게 가능성을 점치고 있었다.
나는 이 세계에서 믿기 어려운 속도로 성장했고, 무공을 다시 연마한 지 삼 년이 되기 전에 현경에 도달했다.
그러니 꿈의 경지이자 반선의 경지라 불리는 생사경에 도달하는 것도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사파에서 온 용사
배 없이 바다를 건너는 법
“각하, 당분간 남부에서 계속 지내실 거예요? 내가 각하한테 부탁할 게 좀 있는데.”
“아니, 난 곧장 동방으로 갈 생각이다.”
“예? 갑자기 동방은 왜요?”
이자벨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당장 내가 동방으로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번에 나후타야를 중부에 데려다 놓으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대교구가 강력한 봉인 시설을 보유하고 있더군. 이참에 아스칸다르도 생포해서 함께 가두어 버릴 셈이다.”
“흐음, 아스칸다르가 신격에 도달할 여지를 없애기 위해서 먼저 치겠다는 뜻인가요? 전 대륙을 통틀어 각하만 가능한 계획이네요.”
이자벨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는 마치 동방으로 가는 게 남의 일인 양 지껄이고 있었다.
“그러니 어서 준비해. 오늘 중으로 출발할 거야.”
“저도 가요?”
“당연하지. 아스칸다르를 제압하는 건 나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놈이 수하들을 몇 명이나 거느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 아니냐? 은신처에 복잡한 마법 결계 따위를 깔아 두었을지도 모르고. 그러니 네가 따라와서 도와야 한다.”
이자벨라를 대동하면 오합지졸 하수인 따위는 몇 명이 덤벼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가진 광역 마법은 다수를 상대할 때 최고의 효율을 자랑하니까.
또한, 어지간한 마법 결계도 이자벨라가 가진 지식 앞에서는 무용지물일 것이다.
“전 못 가요.”
“……못 간다고?”
너무 예상 밖의 대답이라 나도 모르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요즘 이자벨라가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간이고 쓸개고 몽땅 꺼내 줄 것 같은데 동방 원정에 동행을 거절하다니, 의외였다.
“오해하지 말아요. 각하랑 함께 가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니니까.”
“그러면 왜 안 간다는 거야?”
“며칠 전부터 동방의 괴수 군단이 공세를 강화했거든요. 요정숲 동쪽 경계를 어찌나 들쑤셔 대는지, 내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직접 가서 마법을 퍼부어야 하는 지경이라고요.”
그녀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소규모 공방만 벌이며 요정숲을 견제하던 동방 괴수들이 갑자기 적극적인 공세로 전환한 이유를 알 만했다.
“곧 벌어질 삼각주 쟁탈전에 엘프들이 끼어들지 못하게 할 셈이로군.”
상륙군 입장에서는 당연한 조치다. 내가 아스칸다르였어도 똑같은 병법을 쓸 것이다.
“작정하고 최대 화력으로 괴수들을 쓸어버린 다음 동방으로 함께 갈 순 없나?”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알아요? 아무리 나라도 마나가 무한한 건 아니라고요. 게다가 동방의 괴수들을 이끄는 태양전사와 제사장의 숫자도 상당해요.”
이자벨라가 전력을 다하면 동방의 괴수 군단에 큰 피해를 줄 수는 있겠지만, 그녀 역시 많은 힘을 소모하게 될 것이다.
지친 와중에 태양전사들과 동방 제사장들의 협공을 받으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난 각하가 돌아오면 나 대신 그놈들 좀 막아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어요. 엘프들이 고대 룬어를 번역하는 게 재미있어 보여서 당분간 요정숲 방어는 각하에게 맡기고 번역 과정이나 구경할 생각이었는데…….”
한데 이런 사정을 몰랐던 내가 돌아오자마자 대뜸 동방으로 가자고 했으니, 이자벨라의 당혹스러운 반응도 이해할 만했다.
“별수 없지. 동방에는 나 혼자 가는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으니, 담담히 상황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이자벨라가 동행하지 않을 때 생기는 중대한 문제를 깨달았다.
“이런 빌어먹을, 생각해 보니 네가 없으면 칼리파 궁전까지 뛰어서 가야 하잖아?!”
원래 계획은 이자벨라의 도움을 받아 공간이동으로 빠르게 침투하는 거였는데, 그녀가 요정숲에 발이 묶이면 나 혼자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개 발에 땀 나듯 뛰어서 사막을 가로질러야 하는 데다, 경로상에서 마주칠 동방의 전사들도 일일이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그보다 당장 바다를 건널 방법부터 생각하셔야 하는 게 아닐까요?”
“바다는 조르가드를 부르면 쉽게 건너갈 수 있…… 아!”
이 대목에서 나는 내 이마를 탁! 치며 한탄을 내뱉고 말았다.
제법 긴 시간 동안 요정숲에서 지낸 탓에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조르가드는 북해에 있지!”
아무리 현경의 경지에 오른 고수라도 남부에서 북해까지 혜광심어를 보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엘프와 다크엘프 들만 사는 요정숲에 목재로 만든 선박이 있을 리도 만무했다.
사막을 횡단해 아스칸다르를 치는 건 고사하고, 당장 흑해를 건너갈 방법도 없는 것이다.
‘망했다…….’
율리오와 요한나는 물론이고, 아우레오한테도 검은 용을 생포해 오겠노라 큰소리를 뻥뻥 쳐 놓았는데, 실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때 나와 이자벨라의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던 아리엔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저, 각하. 각하께서 흑해를 건너갈 방법이 한 가지 있긴 있습니다만…….”
“오, 설마 선박을 준비해 둔 것이냐?”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선박보다 더 좋은 탈것이 있지요. 흑해는 물론이고 사막도 건너뛰어 곧장 칼리파 궁전까지 갈 수 있으니까요.”
바다와 사막을 건너뛸 수 있는 탈것. 사방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밀림과 강줄기뿐인 남부의 요정숲에 그런 유용한 물건이 있었단 말인가?
내 의문에 아리엔은 기발한 답을 내놓았다.
“와이번을 타고 가는 겁니다.”
“와이번?”
와이번(Wyvern).
달리 창공용왕(蒼空龍王)이라 불리는 이 괴수는 대륙의 3대 용왕종 중 하나였다.
뱀처럼 생긴 조르가드나 도마뱀처럼 생긴 드레이크와 달리, 진정한 용의 모습을 빼다 박은 용왕종이 바로 와이번이었다.
“각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와이번은 실제 용처럼 날개가 있고, 비행도 가능합니다. 창공용왕이라 불리는 이유가 있지요.”
“와이번의 비행 능력이 바다를 건너갈 정도인가? 듣자 하니 흑해에는 중간에 쉬어 갈 섬도 없다던데?”
내 우려에 아리엔은 희미하게 웃었다. 참으로 사소한 걱정을 한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와이번이라면 흑해뿐만 아니라 사막을 넘어 칼리파 궁전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날아갈 수 있습니다.”
와이번의 생태는 바다에 사는 조르가드나 용암지대에 사는 드레이크에 비해 꽤 자세히 알려져 있었다.
이는 와이번이 압도적인 비행 능력을 바탕으로 대륙을 자유롭게 누비기 때문이었다.
와이번의 장거리 비행 능력이 어찌나 탁월한지, 남부에서 사냥한 먹잇감을 북부의 얼음 아래에 보관한다는 낭설이 퍼져 있을 정도였다.
“남부는 물론이고 중부에서도 종종 와이번이 비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요. 하지만 지금까지 누구도 와이번을 타고 다니지는 못했습니다. 용왕종은 가축처럼 길들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각하라면…….”
아리엔이 말끝을 흐리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는 용왕종을 길들일 수 있다. 그들은 다른 몬스터와 달라서 나의 곁에 머무는 아도나이의 힘을 알아볼 것이다.”
“역시 그랬군요.”
내가 용왕종을 길들일 수 있는 이유는 순전히 체내의 용마주 때문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늘 이런 식으로 둘러대곤 했다.
이번에 나에게서 용마주를 물려받은 이자벨라만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고, 그녀는 지금 뚱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각하가 가지고 있던 용의 마력은 나한테 전부 줘 버렸잖아요. 혹시 와이번을 길들이는 데 나를 데려갈 생각은 아니죠? 난 분명히 말했어요. 당분간 자리를 비울 수 없다고.] [걱정하지 마라. 그깟 날도마뱀 따위를 길들이는 데 무슨 도움이 필요하겠느냐?] [……?]이자벨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텔레파시를 거두었다.
나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오색륜 중 백륜과 홍륜에 용마력이 가득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백륜은 사실상 백룡주가 발전된 형태고, 홍륜도 화룡주 이상의 힘을 품고 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쉽게 용왕종을 길들일 수 있을 거야.’
“아리엔, 와이번의 서식지를 알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