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9
쉽게 입을 열 수 있으리라 예상했는데, 한 식경(약 30분)이 넘도록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다.
“테온, 아직인가요?”
안정을 되찾은 아우레오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때까지도 마녀의 제자 중 입을 연 사람은 없었다.
“이거 좀 이상한데? 이년들은 비밀을 감추는 게 아니라, 아예 말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아.”
제자들은 스승과 달리 강한 의지로 심문을 견디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겁에 질렸고, 고통을 참지 못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결정적인 말을 하려고 하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입을 다물어 버렸다.
“금제(禁制)가 걸려 있나 보군요.”
“금제?”
“특정 행동을 하면 발동하는 주문입니다. 비밀을 말하려고 하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거나, 동료를 배신하면 심장이 멈춘다거나 하는…….”
“신기한 기술이네.”
중원에도 고독(蠱毒)이나 섭혼술(攝魂術) 등 사람을 조종하는 사술이 있었지만, 저렇게 구체적인 조건을 걸 수는 없었다.
“마녀가 자기 제자들에게 금제를 걸어 놓은 것인가?”
“아뇨. 금제는 다른 마법사의 짓으로 보여요. 마녀에게도 똑같은 금제가 걸려 있거든요.”
아우레오는 확신하며 말했다. 아까는 흥분해서 알아채지 못했지만, 기절한 마녀를 천천히 살펴보니 마녀에게서 이질적인 미신의 기운이 느껴진 것이다.
‘처음부터 자세히 살폈으면 채찍질은 안 해도 됐던 거네.’
문득 바닥에 널브러진 마녀가 불쌍해 보였다.
“저년도 명색이 마법사잖아? 마법을 익힌 사람에게 그런 복잡한 금제를 거는 게 가능해?”
“저 마녀보다 훨씬 강력한 마법사라면 가능하겠지요.”
아우레오의 표정이 심각했다. 마녀의 배후에 있는 더 강한 마법사의 존재를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더 강한 마법사……?”
“테온, 왜 침을 흘리시죠?”
“스읍.”
나도 모르게 흐른 군침을 재빨리 들이켰다.
더 강한 마법사라면 내공도 더 많이 품고 있을 터.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이다.
‘십 년 내공을 얻었으니, 더 강한 마법사도 충분히 상대할 자신이 있다. 게다가 이번 싸움을 통해 마법사와 싸울 때 주의해야 할 점도 알았고.’
한시라도 빨리 마녀의 배후를 밝히고 다른 마법사를 사냥하고 싶었다. 하지만 금제 탓에 마녀의 입을 열 수 없으니 찾아낼 방법이 요원했다.
“금제를 풀 방법은 없나?”
“방법은 있습니다. 교회의 이단심문관에게 데리고 가면 돼요. 그들은 이런 분야의 전문가거든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그 이단심문관이란 놈들은 어디에 있지?”
“그게 문제입니다. 이단심문관은 각 교구의 본청에만 상주하거든요. 큰 도시에 가야 만날 수 있는 셈이지요.”
“그럼 저것들을 북부까지 끌고 가자고? 그건 무리야.”
지금 우리는 중부와 북부 사이의 미개척 지대를 가로지르고 있었고, 도시가 있는 북부까지는 한 달이 넘게 걸어야 하는 먼 길이었다.
“우린 고작 네 명이다. 열 명이 넘는 포로를 데리고 그렇게 먼 길을 갈 순 없어.”
아우레오는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방향을 바꿔서 인근의 도시에 먼저 방문해야겠어요. 순례가 다소 지체되겠지만, 마녀들을 교회에 인도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됩니다.”
“인근의 도시? 이 주변에 도시가 있어?”
일행은 벌써 며칠째 숲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그동안 도시는커녕 마을도 보지 못했다. 오랜만에 찾은 마을도 마녀가 사는 가짜 마을이었고.
나와 토마스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에릭은 알겠다는 듯 손바닥을 탁! 쳤다.
“오르샤바! 오르샤바로 갈 생각이시군요?”
“맞아요. 에릭은 오르샤바를 알고 있나 보군요.”
“하하! 제가 소싯적에 용병 생활하면서 가 본 도시거든요. 캬, 오르샤바라니. 옛날 생각이 나는군요. 그때 제가 무슨 일이 있었냐면…….”
“늙다리 옛이야기는 나중에 듣고.”
내 핀잔에 에릭이 침울하게 뒤로 물러섰다.
“그 오르샤바라는 곳은 여기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데?”
아우레오는 잠시 생각하더니 손가락 열 개를 전부 펴 보였다.
“걸어서 열흘 거리입니다. 우리끼리는 닷새면 갈 수 있지만, 포박한 마녀들을 인솔하려면 시간이 두 배는 걸리겠지요.”
“생각보다 가깝지 않네.”
“그래도 북부에 비하면 지척인걸요.”
아우레오의 말이 옳다.
북부까지는 한 달 거리가 남았는데, 지금처럼 많은 포로를 데리고 다니면 몇 달이 걸릴지 모른다.
걸음이 지체되는 것은 물론이고, 마녀들에게 먹일 물과 식량을 조달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오르샤바는 번성한 도시입니다. 교회에 훌륭한 성직자가 많이 계실 테니, 분명 금제를 풀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저년의 뒷배에 있는 마법사를 추적할 수 있다는 말이지?”
“해 봐야 알겠지요. 아니, 해내야 합니다. 그것이 사제의 숙명이니까요!”
아우레오는 난데없이 결의를 다지며 투지를 불태웠다. 눈깔에 옅은 광기까지 번들거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보기에 좋지 않았다.
“알겠으니까 좀 진정해. 나도 도와줄게.”
“테온이 도와주겠다고요? 배후의 마법사를 찾으면 그의 처단을 도와주겠다는 말인가요?”
“그래. 넌 이번처럼 놈의 마법만 막아 줘. 특히 환술을 철저하게 막아 줘야 한다. 그것만 해 주면 죽이는 건 내가 할게.”
“테온은 역시 빛을 품은 전사입니다!”
아우레오는 감격하며 박수를 쳤다. 에릭과 토마스도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대가도 없는 싸움에, 심지어 마법사 처단 같은 위험한 싸움에 자진해서 나서는 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물론 내 속내는 따로 있었지만…….
‘아우레오를 통해 마법사의 위치만 얻어도 목표를 달성하는 셈인데, 녀석이 함께 싸워 준다면 더할 나위 없지.’
이번 싸움에서 큰 낭패를 겪었지만, 배운 점도 많았다. 특히, 아우레오가 사용하는 신성력이 마법을 상대할 때 큰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았다.
‘다양한 마법에 대응할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웬만하면 아우레오와 함께 싸워야겠어. 생소한 사술을 상대로 혼자 싸우는 건 위험해.’
마법 파훼라는 새로운 단기 목표가 생겼다.
마법이란 것이 지금은 한없이 강하고 신비롭게 느껴지지만, 그 어떤 지존절학도 파훼법은 있기 마련이다.
‘기공이라고 예외는 아니지. 아우레오와 교회를 통해 많은 자료를 얻고, 실전 경험을 쌓다 보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터.’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아우레오가 손뼉을 치며 주의를 환기했다.
“자, 그럼 오르샤바로 가 볼까요? 마침 동이 트고 있으니, 지체 없이 출발하지요.”
“알겠습니다, 사제님.”
에릭과 토마스는 마녀들을 굴비처럼 엮었다. 양손을 묶고, 눈과 입까지 가려 놓은 상태였다.
“거북이걸음으로 가게 생겼군.”
“어쩔 수 없어요. 이들이 호송 중에 마법을 쓰며 저항하면 위험하니까요. 이대로 출발하겠습니다.”
여정이 다시 시작되었다. 마을을 벗어난 우리는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틀 정도 걷다 보면 숲을 벗어나 마차가 다니는 길이 나올 겁니다. 그 길을 따라 여드레를 더 가면 오르샤바에 도착해요.”
“넌 지도 한 장 없이 용케도 길을 찾네.”
“제겐 아도나이의 빛이 함께하니까요.”
아우레오는 웃으며 대답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상당히 신기한 재주였다.
무림인도 방향감이나 거리감이 뛰어나지만, 아우레오의 길 찾기는 그런 수준을 한참 넘어서 있었다.
‘꼭 걸어 다니는 지도 같아. 그것도 우리 위치가 실시간으로 표시되는 지도.’
아우레오는 길을 헤매는 법이 없었다. 목적지로 향하는 직선거리를 정확하게 가늠하고, 깊은 숲속에서도 그나마 사람이 다니기 편한 오솔길을 자연스럽게 찾아냈다.
지금까지 일행이 숲을 가로지르면서도 길을 잃지 않고 북부로 향할 수 있었던 것은 아우레오의 능력 덕분이었다.
사제의 고유한 능력 같은데, 저런 재주가 있으니 이런 대책 없는 순례를 떠나는 것인가 보다.
‘그나저나 더 강한 마법사라……. 빨리 만나고 싶군, 스읍.’
생각만 해도 군침이 흘렀다.
* * *
별 탈 없이 이틀이 지나고, 일행은 아우레오의 예상대로 숲을 벗어났다.
마찻길에 진입하자 노을이 드리웠고, 용병들은 능숙하게 야영을 준비했다.
그때 저 멀리서 어렴풋이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지평선 너머에서 일단의 무리가 접근하고 있다. 수가 제법 많은데?”
“테온의 말이 맞습니다, 사제님. 서른 명 정도로 보이는데요. 절반 정도는 갑옷을 입었네요.”
토마스도 사냥꾼 출신답게 눈이 밝았다. 그는 재빨리 나무 위로 올라가 접근하는 자들의 행색을 살폈다.
“갑옷요? 철갑옷을 말하는 건가요?”
“철갑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번듯해 보이는 가죽 갑옷입니다.”
“깃발은요?”
“깃발은 보이지 않습니다.”
“용병단인가 보군요.”
아우레오는 쉽게 정체를 짐작했다. 도적이 번듯한 갑옷을 입지는 않을 테고, 귀족의 행렬이면 깃발을 들었을 터.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사제님. 어쩌면 마녀 호송에 도움을 받을지도 모르겠네요.”
토마스가 등신같이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반면, 에릭은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쳤다.
“도움을 받기는 어려울 거야. 용병단은 어디까지나 돈에 충성하는 자들이지.”
“하지만 마녀를 압송하는 건 누구나 도울 만한 일이잖아?”
“그건 우리 같은 시골뜨기의 생각이지. 도시의 용병단은 우리와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다.”
토마스는 놀란 듯 어벙한 표정으로 아우레오를 쳐다봤다.
아우레오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릭의 말이 맞아요. 저도 그런 도움은 기대하지 않습니다. 서른 명이나 되는 용병을 고용할 돈도 없고요.”
“쩝, 그렇군요. 전 이렇게 명예로운 일에는 용병도 호의로 나설 줄 알았어요.”
“모든 전사가 테온과 같을 순 없겠지요.”
“갑자기 내 얘기가 왜 나와?”
아우레오는 애정이 듬뿍 담긴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테온은 정의를 위해서라면 대가 없이도 싸우니까요.”
“나 그런 사람 아니니까 눈깔 좀 치워 줄래?”
“그럴까요?”
아우레오는 부담스러운 시선을 거두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정체불명의 무리는 목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이 왔다.
“안녕하신가! 힘세고 강한 아침!”
선두에 선 사내가 호방한 인사를 건넸다. 그는 키가 아주 작고 근육이 우람해서 걸어 다니는 차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