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90
테온은 말없이 아스칸다르를 향해 쇄도했다. 그의 검극은 무시무시한 예기를 품었고, 머리 위에는 오색륜이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퍼퍼퍼퍼퍼퍽!
기습적으로 펼친 추명도가 아스칸다르의 심장을 노렸다. 검은 용이 만들어 낸 수십 겹의 보호막은 화살 맞은 종잇장처럼 우수수 뚫렸다.
스르륵-.
아스칸다르의 몸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테온의 추명도가 허공을 가르고, 아스칸다르는 반대쪽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암혈의 뱀파이어들이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기술이군. 다른 물체와 위치를 바꾸는…….”
테온의 발밑에는 두 동강 난 허수아비가 지푸라기를 흘리고 있었다.
암혈의 뱀파이어들은 피의 공명으로 동족과 위치를 바꾸곤 했는데, 아스칸다르는 무생물과 위치를 바꾸는 것도 가능한 모양이었다.
‘이미 마법적 준비를 해 둔 물건이 있어야만 위치를 바꿀 수 있겠지. 흐음, 그런 제약이 있어도 대단한 재주로군.’
테온은 이 한 수로 검은 용의 마법 수준을 대강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평소에도 위치 교환 마법을 준비해 둘 만큼 안전에 신경 쓰는 검은 용의 성향도 엿볼 수 있었다.
“어떠냐, 아스칸다르? 나의 첫인사가 마음에 드나?”
테온이 싱긋 웃으며 인사했다. 허의 허의 허를 찌르는 등장이었다.
사파에서 온 용사
쉬운 싸움
흑해를 건너고 사막을 횡단해 드디어 검은 용을 마주했다.
나는 아스칸다르의 외모를 천천히 살폈다.
그의 복장은 전반적으로 포달랍궁의 라마(喇嘛)와 비슷했는데, 세세한 장식이나 소재에서 차이가 있었다.
‘엄청나게 화려한 의복이군. 짐승 주제에 면사까지 쓰다니, 자기가 옥황상제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풍성한 비단옷에 온갖 장식 천을 두르고, 대가리에는 사각 관모를 올려 면사까지 드리웠다.
안력을 돋우어 보니, 반투명한 흑색 면사 너머로 어렴풋이 도마뱀 같은 대가리가 보였다.
‘어라? 이 자식, 인간으로 둔갑하지 않았네?’
아스칸다르는 옷만 사람처럼 입었을 뿐, 용인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펑퍼짐한 소매 끝으로 도마뱀 같은 손이 보였고, 옷자락 아래로 길게 늘어진 꼬리도 보였다.
“동방인들은 검은 용을 신으로 섬긴다던데, 그래서 용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게냐? 그 모습이 네게 권위를 더해 주니까?”
“…….”
아스칸다르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마른침을 삼키며 나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긴장했나? 용이란 족속은 하나같이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들이었는데, 이놈은 다른 용들과 좀 다르네…….’
아스칸다르는 나의 난입에 크게 당황한 상태였다. 면사 너머로 그의 떨리는 눈동자가 보이는 듯했다.
‘이놈의 무력은 확실히 키르케네스나 나후타야보다 강한 것 같군. 하지만 오비데우스보다는 약해 보여.’
첫 기습에서 짧게 손을 섞어 보니, 아스칸다르는 삼초지적 정도로 느껴졌다.
아스칸다르가 약해서라기보다는 내가 너무 강해져 버린 탓이었다.
‘이놈이 내가 모르는 비장의 재주를 숨겨 두었다고 가정해도…… 십초지적 정도?’
어떤 변수가 있어도 아스칸다르는 내 무공을 열 초식 이상 받아 낼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나는 첫 기습에서 아스칸다르를 죽일 수도 있었다. 지금 이놈이 살아 있는 건 내가 추명도의 위력을 조절했기 때문이다.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추명도라는 필살의 절초를 펼치며 난입하긴 했지만,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아스칸다르를 생포하는 것이니까.
“너는 내 상대가 못 된다. 너도 둔한 놈은 아닌 것 같으니, 나와 똑같이 느꼈겠지?”
나는 완전히 여유를 찾았다. 운철묵검을 가볍게 잡고 빙글빙글 돌리며 항복을 권했다.
“순순히 오라를 받아라, 아스칸다르. 저항해 봤자 아까운 팔다리만 잘린다.”
항복이란 말을 들어서일까? 아스칸다르의 기세가 험악해졌다. 다른 용보다 경계심이 강하긴 해도, 용 특유의 자존심은 똑같았다.
“용살기사 테온 크로우…… 맞나?”
“그래, 맞다. 이 몸이 바로 테온 크로우 백작 각하시다.”
내 대답에 아스칸다르는 주먹을 떨더니, 얼굴을 가린 면사를 벗고 예복을 거칠게 찢었다.
‘호오, 한판 붙어 볼 생각인가? 큭큭, 나도 항복을 권하긴 했지만, 용이 순순히 굴복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이미 용을 세 마리나 만나 보았고, 그들의 성향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인간의 투항 권유를 곱게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용이 아닐 것이다.
쫘악, 쫙!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한 옷이 갈가리 찢기고, 시커먼 용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껄껄, 갓 구워 낸 리자드맨 같구나.”
“하찮은 모욕으로 내 마음을 흔들어 볼 셈이라면 관둬라. 헛수고다.”
“모욕이라니? 솔직하게 이야기한 것뿐인데…….”
“…….”
옷을 벗은 아스칸다르의 외모는 예상한 그대로였다.
전체적인 특징은 리자드맨과 비슷하고, 물고기 같은 비늘이 온몸을 덮고 있었다.
“다시 한번 권하마. 항복해라, 아스칸다르. 나는 굳이 너를 죽일 마음이 없어. 이건 진심이다.”
“항복이라……. 용살기사여, 미천한 인간의 몸으로 다섯 천사의 힘을 내려받으니 세상에 두려울 게 없더냐? 너의 교만이 하늘 꼭대기에 올라가 있구나.”
“나는 천사의 힘을 얻기 전에도 용을 두 마리나 잡아 죽인 사람이다. 그런 게 없어도 넌 내 상대가 못 돼.”
아스칸다르는 대답이 없었다. 마음속으로 신중하게 할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성질대로 지껄이던 키르케네스나 오비데우스와 달리, 그는 감정을 절제하고 있었다.
‘확실히 이놈은 다른 용들과 다르군. 나를 얕보지 않고 있어. 섣불리 마법을 난사하며 싸움을 걸지도 않고…….’
어쩌면 오색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다섯 천사의 힘은 제아무리 용이라도 가벼이 볼 수 없는 것이니까.
그때, 아스칸다르가 곁눈질로 창밖을 빠르게 훑었다.
“큭큭, 말을 고르면서 시간을 끄는 이유가 그거였나? 바깥에 있던 수하들을 기다리는 거라면 관둬라. 그런 잔챙이들을 불러 봤자 내 칼을 막진 못할 테니.”
아스칸다르가 허튼짓을 못 하게 지켜보고 있지만, 워낙 마법에 능통한 놈이니 내 감각을 피해 부하들을 부를지도 모른다.
나는 아스칸다르에게 항복 의사가 없다고 판단하고, 품에서 용기의 리본을 꺼냈다.
‘이 기회에 성물의 성능을 시험해야겠군.’
용기의 리본은 강력한 몬스터를 생포하는 데 안성맞춤인 도구였다.
아스칸다르 정도면 대륙에 남은 몬스터 중 단연 최강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번 기회에 미리 리본의 한계를 시험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용기의 리본이 용을 제압할 수 있다면, 사실상 현존하는 모든 몬스터를 제압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반면, 아스칸다르의 눈동자에는 호기심이 스쳤다. 내가 품에서 무기가 아닌 웬 비단 끈을 꺼내자, 용도를 짐작하지 못한 것이다.
“이게 뭔지 모르나?”
“……비단 끈이 아닌가?”
“호오, 모르네? 정확한 용도는 몰라도, 성물이란 것쯤은 보자마자 눈치챌 줄 알았는데.”
“서, 성물?!”
아스칸다르가 즉시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내가 뚫어 놓은 천장의 구멍으로 도망치려는 모습이었다.
용기의 리본이 뭔지는 몰라도, 끈 모양의 성물이라면 그 용도를 대강 짐작할 수 있을 터. 그는 즉시 도주를 택했다.
“하하, 용이란 놈들은 하나같이 도망에 능하구나. 하긴, 도마뱀이란 동물이 원래 그렇지.”
이형환위를 펼쳐 아스칸다르의 앞길을 막고, 그를 향해 용기의 리본을 던졌다.
허공섭물의 원리로 던져 낸 리본이 아스칸다르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에잇!”
아스칸다르가 날아오는 리본을 향해 손날을 휘둘렀다.
검은 마력이 진득하게 흐르는 당수가 용기의 리본을 내리치고, 그 순간 리본에서 굉음이 터졌다.
우르르르릉-!
용기의 리본은 사방으로 벼락을 내뿜고 우레를 터뜨리더니, 끝도 없이 그 크기를 키워 나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이게 뭐야!”
눈 깜빡할 사이에 수십 장 길이로 늘어난 용기의 리본이 아스칸다르를 칭칭 휘감았다.
아스칸다르가 리본을 끊으려 발악했지만, 그럴수록 리본은 더 두껍고 질긴 동아줄로 변했다.
“이거 당장 풀지 못해! 아악!”
몸을 휘감은 용기의 리본이 본격적으로 조여들기 시작하자, 아스칸다르의 입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터졌다.
검은 용의 눈에 맹렬한 분노가 타오르고, 온몸의 근육이 부풀었다.
“이, 이까짓 거……!”
뿌득, 뿌드득!
‘오, 설마 끊어 버리나?’
아스칸다르가 작정하고 힘을 쓰자, 용기의 리본에서 위태로운 파열음이 들렸다.
나는 그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했다. 지금 아스칸다르를 공격하면 손쉽게 팔다리를 잘라 버릴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용기의 리본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용기의 리본과 검은 용, 둘 중에 누가 더 센가 보자.’
나는 혹시 모를 수하들의 난입이나 아스칸다르의 기습적인 정신계 마법만 경계하며 용과 성물의 힘 싸움을 지켜보았다.
* * *
테온이 칼리파 궁전에 난입하던 그 시각, 대주교 율리오는 집무실에 홀로 앉아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찻주전자 옆에는 짧은 리본이 놓여 있었는데, 테온에게 준 용기의 리본과 똑같이 생긴 리본이었다.
‘지루하군. 이렇게 막연히 기다려야 한다니…….’
율리오의 눈에 불만이 가득했다.
그의 눈은 파충류 같은 세로 동공에 진득한 금빛이었다. 내면 깊은 곳에 숨어 있던 금빛 용이 의식의 표면까지 올라온 것이다.
‘아직 멀었나? 테온 크로우는 하루 이틀 만에 칼리파 궁전에 도착할 것처럼 말했으니, 지금쯤 아스칸다르와 마주하고 있을 텐데…….’
그때, 율리오가 기다리던 일이 일어났다. 탁자 위에 놓인 리본이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도착했구나! 자, 테온! 어서 리본을 사용해라! 내가 일부러 검은 용을 생포할 때 써먹기 좋은 성물로 골라 주었잖아!’
율리오는 두 주먹을 꼭 쥐고 양다리를 떨어 가며 흥분했다.
그가 테온에게 준 용기의 리본은 사실 두 개가 한 쌍으로 구성된 성물이었다.
하나의 리본이 작동하면 나머지 리본도 색이 변하는 특성이 있었고, 율리오는 일부러 하나를 빼돌려 자기가 가지고 있었다.
‘변했다!’
율리오가 가진 용기의 리본이 검게 변했다. 테온이 가지고 간 리본이 무언가 삿된 존재를 포박했다는 뜻이었다.
테온 정도의 실력자가 시시껄렁한 몬스터에게 용기의 리본을 사용했을 리는 없고, 지금 그는 분명 검은 용과 마주하고 있을 터다.
“큭큭, 잡혔구나, 아스칸다르! 넌 이제 죽은 목숨이다!”
금빛 용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키르케네스와 오비데우스가 죽었고, 나후타야는 언제든 죽일 수 있다.
그리고 지금, 가장 먼 곳에 있던 아스칸다르도 용살기사에게 제압당했다.
“중부에 숨어 산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도무지 부활의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런 천운이 찾아올 줄이야!”
율리오의 웃음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용살기사 테온 크로우의 등장은 금빛 용도 예상하지 못한 행운이었다.
테온은 용 사냥이 필생의 사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온 대륙의 용을 사냥했고, 드디어 마지막 용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으흐흐흐……. 용살기사의 실력에 용기의 리본까지 있다면 아스칸다르를 포획하는 건 식은 스튜 먹기겠기.”
나후타야와 아스칸다르만 죽이면 금빛 용이 최후의 용이 된다.
육신도 없고, 영혼조차 수백 조각으로 쪼개어 간신히 지상에 남은 반쪽짜리 용. 그가 비참한 은둔의 세월을 끝내고 아름다운 거체와 옛 권능을 되찾을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후우, 후우, 이것 참 기다리기 힘들군.”
한껏 들뜬 금빛 용이 다리를 달달 떨었다. 양손은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바쁘게 돌아다녔다.
너무 오래 기다렸던 순간이다. 금빛 용은 벌써 최후의 용이 된 것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