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92
율리오의 전신 모공에서 금빛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구심점을 잃은 금빛 용의 영혼이었다.
영체는 이승에 머무를 수 없다. 지금껏 기발한 편법으로 지상에 남아 있었지만, 존재에 확신을 잃어버린 금빛 용은 더 이상 타인의 육신에 머무를 수 없었다.
“나는…… 나 같은 건…….”
그렇게 완전한 무(無)의 세계로 향하던 금빛 용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마트료시카와 깨진 수정구 파편을 보았다.
이름 없는 금빛 용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던 증거. 그 의지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아직 나의 이성과 지혜가 지상에 남아 있다!”
금빛 용은 생각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생각했고, 고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 벼락같은 깨달음은 금빛 용을 슬픔의 늪에서 건져 올렸다.
“나는 탄생의 순간부터 지금까지 오직 용으로 존재했다! 그때와 지금 달라진 건 육체의 유무뿐이다! 용의 육체가 필요해! 나의 격에 걸맞은 육체만 있다면, 나는 온전한 용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어!”
금빛 용은 자기가 최후의 용이 될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걸어야 할 도박이자 존재 자체를 건 마지막 승부수였다.
사파에서 온 용사
존재의 근거
‘아스칸다르의 몸을 빼앗는 거야. 육신은 존재의 근거다. 그 육체만 있다면, 나는 완전해질 수 있어!’
금빛 용이 떠올린 마지막 방법은 거체의 강탈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동방의 아스칸다르가 자기를 위한 운명의 선물처럼 느껴졌다.
‘아스칸다르는 옛 권능을 모두 되찾았을 테니, 테온 크로우도 그의 적수가 될 수는 없겠지. 크로우 백작이 죽으면 아도나이가 기껏 내려보낸 다섯 천사의 힘도 허무하게 흩어져 버릴 거야.’
아스칸다르의 육체는 그가 도착할 때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을 것이다. 지상의 그 누구도 옛 권능을 되찾은 용을 해칠 수 없을 테니까.
‘이 세계에서 아스칸다르를 상대할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다. 역설적으로, 육신이 없는 내가 지상에서 유일하게 그놈을 이길 수 있어!’
기상천외한 편법으로 이승에 남았지만, 육신이 없었던 금빛 용. 그에게는 다른 용들이 갖지 못한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자기 영혼을 쪼개고, 합치고, 변형하고, 주무르며 단련해 온 금빛 용에게 영혼 조작은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힘 싸움이라면 모를까, 영혼끼리 겨루는 영력(靈力) 대결은 상대가 그 누구라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육체와 영혼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한번 짝이 지어지면 쉽게 떼어 낼 수 없지. 하지만 내 실력이면 충분히 아스칸다르의 거체를 빼앗을 수 있을 거야. 영혼을 만(萬) 단위로 잘게 쪼개어 놈의 거체에 스며든 다음, 무의식의 영역에서 합쳐 단숨에 뇌를 차지하면 돼!’
금빛 용은 아스칸다르를 대면하기만 하면 즉시 머릿속으로 침투해 거체를 빼앗을 자신이 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아스칸다르에게 가는 도중에 아도나이에게 들키지 않는 게 관건이었다.
‘영체 상태로 지상을 돌아다녀야 하니, 꽤 위험한 도전이군.’
한순간 존재를 의심한 탓에 금빛 용의 영혼은 율리오의 몸 밖으로 대부분 흘러나와 버렸다.
율리오의 뇌는 이미 심각하게 손상됐고, 그의 몸으로 다시 들어가는 건 자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아무 인간이나 붙잡아서 다시 숨을 수도 없어. 정신이 얄팍한 인간에게 숨었다가 아도나이에게 들키면 큰일이니까. 차라리 곧장 아스칸다르에게 가야겠다.’
아도나이는 시도 때도 없이 지상을 내려다보는 놈이지만, 이 넓은 대륙 전체를 동시에 보고 있는 건 아니다.
신은 인간, 그중에서도 성직자들의 눈을 통해 지상을 엿보고 있다. 그러니 인간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만 골라서 이동하면 신의 눈길도 피할 수 있었다.
‘아스칸다르 앞에 당도할 때까지 땅 밑으로만 움직여야겠다. 깊게 내려갈 필요도 없어. 인간의 눈만 피하면 되니까.’
율리오의 몸이 푸들푸들 떨리더니, 안면에서 누런 증기 같은 것이 쑥 뽑혀 나왔다.
금빛 용이 오랜 시간 머물던 인체를 버리고, 완전한 영체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과거, 북부에서 테온의 친구가 되어 준 보브찬친과 비슷한 상태였다.
‘최대한 조심히 아스칸다르에게 가자. 시간이 걸리더라도, 가는 동안 아도나이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성공이다!’
안개 같은 영체가 허공에서 뭉치며 작은 용의 형상을 이루고, 곧장 땅 밑 얕은 곳으로 스며들었다.
지하로 스며든 금빛 망령은 느리지만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의 목적지는 동방이 아닌 남부 초입의 삼각주였다.
‘옛 권능을 되찾은 아스칸다르는 본격적으로 중부를 침공하겠지. 아도나이 교회를 해산시키고 동방회교를 전파하려 할 테니까.’
그 침공의 시작 지점은 삼각주일 것이다. 검은 용은 그곳에 동방의 대병단을 배치해 놓았으니까.
‘삼각주 인근에서 맴돌며 기회를 엿보다가, 아스칸다르가 흑해를 넘어오면 그때 접근해서 몸을 빼앗는 거다. 큭큭큭. 중간에 상황이 좀 꼬였지만, 나의 천년대계가 이루어질 날이 머지않았구나!’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반쪽짜리 용. 대륙의 그 누구도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마지막 금빛 용이 삼각주를 향했다.
* * *
-동방에 용이 부활했다!
이 충격적인 소식은 순식간에 동방 전체에 퍼졌다. 말에 발이라도 달린 듯, 아니 바람이라도 탄 듯 빠르게 알려졌다.
-검은 용의 시대가 도래했으니, 회교의 가르침을 흑해를 넘어 전 대륙에 떨치리라!
모든 동방인이 노래하고 춤추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동방회교에서 인류의 구원자로 떠받들던 검은 용이 온전한 힘을 되찾아 지상에 현신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들은 전서조를 보내 삼각주에 진을 치고 있는 상륙군에게도 이 기쁜 소식을 전했고, 동방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았다.
둥-! 둥-! 둥-! 둥-!
동방군 진영에서는 매일 잔치가 벌어졌다. 흥을 돋우는 북소리가 중부군 진영까지 들릴 정도였다.
동방군의 자신감이 얼마나 올라왔는지, 삼각주에 애써 구축한 요새를 놔두고 평원으로 달려 나가 회전(會戰)을 벌이자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다.
반면, 중부군 수뇌부는 이 달갑지 않은 상황에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동방의 이교도들이 진영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총공격해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적의 사기가 정점에 달했으니, 일단은 수세로 전환하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적의 사기가 정점이라는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동방에 검은 용이 부활했다는 첩보가 사실이면, 동방군의 사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올라갈 겁니다.”
“맞습니다. 지금 쳐야 합니다. 단, 총공격은 너무 과하고, 별동대를 보내 국지전을 유도해야 합니다. 들뜬 적을 자극해 요새 밖으로 유인한 뒤, 넓은 공간에서 싸워야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성직자들의 고성과 반박이 엇갈렸다. 그들은 평소와 달리 목에 핏대를 세우고 침을 튀겨 가며 양보 없는 설전을 벌였다. 그만큼 궁지에 몰렸다는 뜻이리라.
“넓은 곳에서 싸운다고 승산이 있겠소? 기마 돌격이 불가능한 습지에서 저들과 대규모 난전을 벌여 이길 수 있겠냐는 말이오.”
“끄응, 그건…….”
한 노기사의 말에 선제공격을 주장하던 자들이 침음성을 삼켰다.
신중론을 펼치던 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조금 더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정찰병의 보고를 들으셨겠지요? 이교도의 군세는 대부분이 고급 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탕에서 칠만 명에 달하는 보병 특화군을 상대로 선제공격이라니, 섶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꼴입니다.”
“그럼 이대로 손 놓고 있자는 말입니까? 다들 나후타야의 증언을 들으셨지 않습니까? 동방의 검은 용이 부활했다는 건, 고대의 권능을 전부 되찾았다는 뜻입니다. 즉, 검은 용이 동방을 벗어나 직접 이곳으로 쳐들어오는 것도 시간문제란 말이에요!”
중부군이 수비 진형을 유지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동방의 검은 용은 옛 거체를 되찾았다. 이 시점에 거체를 되찾았다는 건 옛 권능을 모두 찾았다는 뜻이니, 당장이라도 흑해를 건너 이곳으로 쳐들어올 수 있었다.
“이것 참 난처하군요. 단순히 대교구와 이교도 군대의 대결이라면 수세를 유지하며 겨울이 오길 기다리는 게 상책이겠지만…….”
겨울이 되면 삼각주의 진창이 단단하게 굳을 테고, 중부군이 자랑하는 기마 돌격이 제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하지만 용이 난입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용 한 마리는 전쟁의 향방을 완전히 뒤집어 놓을 수 있는 변수였다.
“게다가 옛 문헌에 따르면 검은 용은 맹독을 다루는 권능이 있다고 합니다. 그 저주받은 짐승이 공중을 날아다니며 우리 진영에 맹독 숨결을 퍼붓는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말을 꺼낸 성직자가 눈을 질끈 감고 몸서리를 쳤다.
회의장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몇 시간에 걸친 열띤 전술 토의에도 이렇다 할 결과를 도출하지 못했다.
“대교구로부터 지침을 받을 수도 없으니 원…….”
중부군이 갈팡질팡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었으니, 대주교 율리오의 건강 문제였다.
동방의 이교도들이 삼각주에 상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율리오는 집무실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그는 정신을 차린 뒤에도 하루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냈고, 그나마 깨어 있는 시간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심지어 매번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하곤 했다.
-대주교 율리오의 영혼이 망가졌다. 강건했던 그의 정신은 수십, 수백 가닥으로 잘게 쪼개져 제 기능을 잃었다.
아도나이 교회를 대표하는 인물이 정신 분열 증상을 보인다는 건 심각한 문제였다.
당장의 전쟁 지휘에 애로가 생길 뿐만 아니라, 교회와 성직자의 권위에 두고두고 흠결로 남을 대사건이었다.
다행히 아직은 일부 고위 성직자들만 알고 있는 비밀이지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 율리오가 제정신을 되찾지 못한다면 소문이 퍼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테오도르 경, 경의 결단이 필요한 때입니다. 총공격을 명해 주십시오!”
“안 됩니다! 아우레오 사제, 신중한 그대라면 기다림의 중요성을 잘 알겠지요? 부디 수세로 전환하는 데 의견을 보태 주세요.”
“성녀 은하, 은하께서 방향을 정해 주십시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결국, 장내의 시선은 상석에 앉은 세 사람에게 모였다.
중부군의 총대장 테오도르, 책임사제 아우레오, 종군 성녀 요한나.
이 세 사람의 결심에 따라 사만 명에 달하는 거대한 군세의 운명이 결정될 터였다.
“제가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요.”
두 사내가 깊은 고민에 빠져 입을 열지 못할 때, 요한나가 나섰다.
“무엇입니까, 은하?”
테오도르가 반색하며 물었다. 그는 중대한 결단을 앞두고 골치가 아팠던 터라, 성녀의 발표가 무척 반가웠다.
“은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나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우레오도 요한나의 발언에 힘을 실어 주었다.
요한나는 두 성직자에게 묵례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교회와 중부를 넘어, 모든 인간의 운명을 건 마지막 싸움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인류는 아도나이의 자식입니다. 궁지에 몰린 아이가 어머니의 품을 찾듯, 우리는 스스로 결정하기 전에 신께 가르침을 청해야 합니다.”
요한나의 말에 장내의 모든 성직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성호를 그렸다. 하지만 개중에는 현실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는 자도 있었다.
“하오나 성녀 은하, 아도나이께서는 우리 진영에 별다른 신탁을 내려 주시지 않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곳에는 대성원상도 없으니, 은하께서 그분께 먼저 말씀을 청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건 방법이 있습니다.”
요한나가 자신 있게 말했다.
“저의 모든 것을 걸고 그분과 소통하면 됩니다. 필요하다면 생명을 바쳐서라도요.”
“은, 은하……!”
자기 목숨을 바쳐 신의 음성을 지상에 전하겠다는 말. 성녀 요한나는 지금 순교(殉敎)를 입에 담고 있었다.
“성녀의 육신은 지상에서 가장 순결한 것. 저 스스로가 대성원상이 되어 그분의 음성을 전하는 통로가 되겠습니다.”
성녀가 순교를 결심하면 그 자리에 새로운 대성원상을 만들 수 있다. 성녀의 몸이 돌처럼 굳어 하나의 석상으로 변하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성녀상은 대성원상과 똑같은 효용을 갖고 있었다.
사파에서 온 용사
명료한 신탁
“은하, 그것은 너무 성급한 결정입니다.”
“맞습니다, 은하. 다른 방법이 있을 겁니다.”
테오도르와 아우레오가 동시에 그녀를 말렸다. 다른 성직자들도 일제히 그녀를 만류했다.
숭고한 희생정신에 감동하는 것과 별개로, 소녀를 희생시켜 목표를 달성한다는 건 성직자로서도, 기사로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덕적인 문제를 차치하고서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위기 상황에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성녀를 일회성으로 소모해 버릴 수는 없었다.
“아뇨, 전 괜찮습니다. 전 제가 성녀가 될 운명이란 걸 알게 된 순간부터 그분을 위해 모든 걸 내던질 결심을 했거든요. 이렇게 중차대한 위기를 타개할 단초가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기쁜 마음으로…….”
“급보! 급보! 급보!”
요한나가 의연하게 입장을 말할 때, 전령의 시끄러운 외침이 장내를 흔들었다.
수뇌부가 군사 회의를 하는 천막이지만 전령은 거침없이 문을 젖히고 들어와 고함을 질렀다.
“급보입니다! 진중 교회에 설치한 성수반에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오오! 드디어!”
“아도나이께서 가장 필요한 순간에 은혜를 주시는군요! 그분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
그야말로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다. 간절할 때 내려온 신탁에 모든 성직자들이 아도나이의 은혜를 찬미했다.
“내용을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도나이의 말씀입니다.”
전령의 말에 장내의 모든 인물이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전령과 성직자 사이의 신분 격차가 무의미했다.
한 줄짜리 짧은 신탁이었다. 언뜻 듣기에는 이 위기를 극복할 묘수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전령의 입에서 신탁의 내용이 흘러나오는 순간, 아우레오와 요한나는 몸을 떨었다.
‘이건 아도나이께서 나에게 전하시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