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onma Wants to Live Quietly RAW novel - Chapter (147)
채미령은 이 보고를 전해 듣고 굉장한 위기감을 느꼈다.
어쩌면 벽태산이 자신의 아들인 벽제혁을 밀어내고 차기 상단주 자리에 앉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벽태수를 먼저 만났지만, 벽태수는 단호히 그게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어찌 곧이곧대로 믿겠는가.
채미령은 일단 벽태산을 만나보기로 했다.
그녀가 벽태산의 전각이 있는 후원에 발을 들인 순간, 정원에서 열심히 나무를 심고 있는 세 사람이 보였다.
흑일, 흑이, 흑삼이었다.
채미령은 그들을 보고 흠칫 놀라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인상이 어찌나 험악한지 하마터면 심장이 내려앉을 뻔했다.
사실 흑일, 흑이, 흑삼이 인상이 그렇게까지 더러운 건 아니었다.
아니, 더러운 건 맞지만, 누군가 보고서 심장이 멎을 정도로 놀랄 만한 얼굴은 아니었다.
채미령이 그런 느낌을 받은 건 그들의 무공이 원숙한 경지에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내뿜고 있는 기세와 존재감 때문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벽천일이 의아하면서도 약간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채미령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얼른 들어가죠.”
채미령이 다시 전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각에 막 도착했을 때, 안에서 누군가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굉장히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평소라면 채미령이 인상을 쓰며 호통부터 내질렀을 것이다.
감히 금벽장에서 일하면서 자신의 얼굴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그리고 감히 자신의 길을 막아서느냐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상대의 미모와 분위기, 그리고 은연중 흘러나오는 기세에 압도당한 것이다.
“우리 도련님을 뵈러 왔어요.”
채미령은 최대한 부드러운 말투를 쓰려고 애썼다.
왠지 앞에 있는 여인이 보통이 아닌 것 같아서였다. 그녀는 찬찬히 살피며 여인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애썼다.
‘기품이 보통이 아닌데? 이 정도면 어디 이름 있는 가문의 여식이거나······.’
채미령의 생각이 더 이어지기 전에 그녀의 앞에 있는 여인, 단영이 환하게 웃었다.
마치 주변이 일시적으로 밝아지는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아, 마님이셨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공자님께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단영은 그렇게 말하고 살짝 고개를 숙인 뒤 안으로 들어갔다.
채미령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입술을 짓씹었다.
아무리 미리 기별을 하고 오지 않았다지만, 어찌 이따위로 대접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심정을 눈치챘는지 옆에 있던 벽천일이 분통을 터트렸다.
“안에 있으면 바로 안내할 것이지, 이런 식으로 무시하다니, 절대 참아선 안 될 듯합니다. 둘째 공자께 한 번 말씀해 보시지요.”
이 일을 빌미로 꼬투리를 하나 잡아 두라는 뜻이었다.
채미령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지금 여기에 온 목적은 벽태산을 만나 의중을 확인하고 그에게 도움을 받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뭐든 이쪽의 패가 될 만하다면 아무리 작은 거라도 모아두어야 한다. 그것은 결국 큰 힘이 될 것이다.
잠시 후, 단영이 다시 나타났다.
“공자님께서 두 분을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채미령은 원래 차갑고 냉혹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했다. 한데 단영을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이 싹 사라져 버렸다.
‘뭐 저런 여자가 다 있지? 듣기로 연하린도 같이 있다고 하던데······ 호색한이 된 건가?’
문득 벽태산이 기루에 매일 들락거린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리고 당시 벽태산에게 붙었던 별호도 함께 떠올랐다.
‘야왕이라고 했었지?’
그 별호가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벽태산의 방으로 가는 도중에 다섯 명의 여인과 차례차례 마주쳤는데, 다들 단영 못지않은 미인이었으니까.
게다가 하나하나 어찌나 분위기가 색다른지 참 잘도 저런 여자들을 골고루 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들을 보면서 채미령은 한 번도 기녀 출신의 시비들일 거라는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이미 그에 대해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쪽입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단영이 문까지 공손히 열어주자, 채미령과 벽천일이 안으로 들어갔다.
벽태산은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채미령과 벽천일은 그 자리에 서서 긴장한 눈으로 벽태산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원래 여기에 오면 무슨 말을 할지 산더미처럼 준비했다.
한데 지금 이 순간, 그것들이 몽땅 증발해 버렸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대체 자신들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마비되다시피 했다.
벽태산이 천천히 돌아섰다.
채미령과 벽천일은 벽태산의 눈을 바라본 순간, 마치 불길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너희들이 있었지.”
벽태산은 그렇게 말하며 채미령과 벽천일을 한 번씩 쳐다봤다.
두 사람은 입을 꾹 다문 채 꼼짝도 못하고 서서 온몸을 덜덜 떨기만 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직접 찾아오다니.”
벽태산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채미령과 벽천일은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벽태산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봐야만 했다.
이내 두 사람의 정수리에 벽태산이 손을 올렸다.
“죽이지는 않으마. 감사히 여기도록.”
두 사람의 혼백이 동시에 쑥 뽑혔다.
* * *
벽제혁은 가진 모든 힘을 쏟아내며 달렸다. 그의 표정은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정원을 가로지르고 문을 몇 개나 지나쳐 그가 도착한 곳은 채미령의 거처였다.
“어머니!”
벽제혁이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채미령이 무릎을 감싸 안은 채 몸을 한껏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런 채미령을 보는 벽제혁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어머니······.”
벽태산을 만나러 간다기에 절대 안 된다고 말하려고 달려왔다. 한데 이미 늦은 모양이다.
채미령이 고개를 들어 벽제혁을 바라보더니 눈에 생기가 살짝 돌았다.
“와, 왔느냐.”
“무슨······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채미령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그런데 너무나 무섭구나.”
벽제혁은 입을 다물고 채미령을 가만히 바라봤다.
어쩌면 벽태산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엿본 것인지도 모른다. 본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하지만.
“거기가 어디라고 혼자서 가신 겁니까.”
“호, 혼자 가지 않았다.”
벽제혁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저 말을 듣고 나니 벽천일이 떠오른 것이다.
“앞으로 그분과 어울리지 마십시오. 어머니께 득 될 게 전혀 없습니다.”
“그러고 싶어도 이제 그럴 수 없다.”
“그게 무슨······ 설마 죽은 겁니까!”
벽제혁이 경악한 눈으로 외쳤다.
하지만 채미령은 고개를 저었다.
“부, 부끄러워서 두문불출할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똥을 지렸는데,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느냐.”
채미령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래도 자신은 똥을 싸지는 않았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른다. 당분간은 절대 밖에 나돌아 다니지 않을 것이다.
“너도 이만 물러가거라. 난······ 괜찮으니. 당분간 날 찾지 마라. 아무도 여기 들이지 말고.”
벽제혁은 그런 채미령을 한동안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돌아섰다.
그의 눈에 지금까지보다 더 짙은 두려움이 맺혔다.
* * *
채미령이 두려움에 틀어박히고, 벽천일이 대중 앞에서 똥을 싸지르고 있을 때, 벽태산은 자신의 방에서 묘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그런 벽태산 앞에 화옥이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다.
“혹시······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화옥은 그렇게 물으면서도 참으로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벽태산이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감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벽태산은 화옥을 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그저 채미령과 벽천일의 혼백을 뽑아서 태웠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벽태산은 화옥을 쳐다보며 말했다.
“손봐줄 놈이 생겼다.”
끝
벽태산이 채미령의 혼백을 태울 때, 몇 가지 사념을 읽었는데, 그 중 하나가 좀 흥미로웠다.
채미령의 혼백에 굉장히 지저분하면서도 특이한 영력이 묻어 있었다.
그래서 당시 채미령의 사념을 좀 더 집중해서 살펴봤다.
채미령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놈이 몇 있는데, 그 중 한 놈에게서 묻어난 영력이었다.
혼백에 타인의 영력이 묻어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것도 지저분한 영력인 걸 보면 정상적으로 쌓은 영력이 아니었다.
채미령에게 묻은 영력은 자연스럽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놈이 의도적으로 채미령에게 영력을 붙여놓은 것이다.
벽태산이 채미령의 혼백을 뽑아 살살 구울 때, 그 영력도 모조리 타 버렸다.
그래서 좀 더 깊이 있는 분석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런 걸 좋은 의도로 붙여 놓았을 리 없었다.
아마 채미령을 어떤 식으로든 이용하려고 그 짓을 해 놓은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걸 시작으로 금벽상단과 좀 더 깊은 관계가 되어 상단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지저분한 영력을 붙여 놓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영력이 붙는다고 당장 그놈의 노예가 되어 시키는 대로 하는 꼭두각시가 되는 건 아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 비슷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적어도 그놈이 붙인 영력에는 그런 의도가 분명히 있었다.
벽태산은 그 영력을 붙인 놈의 생김새를 가만히 떠올렸다.
“일단 키는 나랑 비슷하다. 얼굴은······ 평범하고. 회색 장포를 입었구나.”
벽태산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화옥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아무리 하오문이라도 고작 저 정도 정보만으로 사람을 찾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좀 더 핵심적인 특징이 필요했다.
“오른쪽 눈썹 옆에 제법 큰 점이 하나 있다.”
화옥의 눈이 빛났다. 이런 정보가 도움이 된다.
“그런 특징이 또 없습니까? 점도 좋지만 흉터도 괜찮습니다.”
“흉터라······.”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놈에게 흉터 같은 건 없었다.
“눈이 좀 찢어진 편이군. 그리고······.”
벽태산은 그놈의 모습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차근차근 훑었다.
사념을 통해 들어온 기억이기에 제법 선명하게 머릿속에 형태가 남아 있었다.
“손목에 붉은 아대를 차고 있다. 꼭 피에 절여놓은 것 같구나.”
벽태산은 거기까지 말하고 화옥을 쳐다봤다.
“그게 끝이다. 더는 없구나.”
화옥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이 정도면 그래도 수월하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하오문에 지시 사항을 전달하겠습니다.”
“비슷해 보이는 놈들은 다 찾아서 나한테 위치만 말해라. 내가 직접 확인하면 바로 알 수 있으니까.”
일단 얼굴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으니 직접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좀 조용해지나 싶었더니 할 일이 늘어서 바빠지는구나.”
이놈도 찾아야 하고, 검벽채와 옥벽문에도 찾아가야 한다.
그리고 새로 찾아낸 비천단 방문까지 하면 정말 몸이 세 개는 있어야 할 듯했다.
벽태산이 생각하기에 그 중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건, 채미령에게 오물 같은 영력을 묻힌 그놈을 찾는 것이었다.
감이 그랬다.
그놈을 내버려 두고 무한을 떠나면 재미없을 것 같았다.
원래 뒤가 깨끗해야 안심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법 아닌가.
채미령과 벽천일을 정리한 것도 작지만 그런 의미였고 말이다.
벽태산은 화옥이 물러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이렇게 머리가 복잡할 때는 역시 수련이 최고였다.
몸이 찢어질 정도로 힘껏 날뛰다보면 어느새 머릿속에 얽힌 모든 복잡한 것이 싹 날아가 버리리라.
벽태산은 수련할 생각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빨리했다.
* * *
“기분이 안 좋아.”
새하얀 장포를 걸친 사내가 중얼거렸다.
그의 뒤를 조용히 따라가던 흑의 여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가 내 심장을 쥐고 조금씩 힘을 주는 것 같은 기분이다.”
감이 안 좋다는 말을 길게 늘이면 딱 저럴 것이다.
하지만 흑의 여인은 늘 있던 일인지라 눈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사내가 물었다.
“하오문에 대한 조사는 잘 진행 중이지?”
“예. 본단과 하오문주,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조사까지 마무리 되었습니다. 현재 무한에서 그들이 어떤 식으로 활동하는지에 대한 조사를 진행 중입니다.”
“굉장히 의심스러운 놈들이니 철저히 조사해. 그놈들 주변에 별다른 건 없고?”
“일단 금벽상단과 밀접한 관계입니다. 특히 금벽상단의 둘째 공자인 벽태산과 그러합니다.”
“벽태산이라······ 그놈도 의심스러운 놈 중 하나지. 하여튼 혁련비광 그놈은 누가 뱀 같은 놈 아니랄까봐 필요한 정보를 너무 꽁꽁 숨겼어.”
아무리 혁련비광이 정보를 숨겼어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러니 무한에 와서 굳이 금벽상단을 슬쩍 건드려 놓은 것 아니겠는가.
물론 그건 금월상단이 금벽상단에 하는 작업에 편승해서 뭔가를 얻기 위한 목적도 있긴 했지만.
“조사를 진행할수록 벽태산의 힘이 상당하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오문이 벽태산 아래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 이 부분은 아직 확실히는 않습니다. 그런 정황이 몇 가지 있을 뿐입니다.”
사내의 눈이 번득였다.
“정황이라는 건 진실로 가는 길목 같은 거지. 일단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조사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흑의 여인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사내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보고를 이어갔다.
“그리고 하오문의 활동을 조사하는 중에 좀 묘한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묘한 부분?”
“하오문에서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합니다.”
“그거야 원래 그놈들이 자주 하는 일 아닌가? 한데 뭐가 묘하다는 거지?”
“이 부분도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만······ 그들이 찾는 사람이 아무래도 경백준 같습니다.”
“경백준?”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경백준은 사내의 휘하에 있는 자로, 이번에 금벽상단 쪽에 작업을 할 때 써먹은 수하였다.
당연히 사내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자였고, 실력도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