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36
외전 186화. 흩어진 편린 (3)
“…….”
공무외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탁자 위의 상자를 바라보았다.
호화스러운 물건이었다. 형태만 상자지, 금덩어리 그 자체였다.
도대체 누가 한 건지, 섬세하기 그지없는 문양들이 빼곡히 아로새겨져 있었다. 도저히 사람 솜씨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세공이었다.
게다가 상자 곳곳에 박힌 홍옥(紅玉)과 녹옥(綠玉)들이 색색의 아름다움을 뽐냈다. 상자 이마 부분에는 엄지손톱보다도 큰 금강석(金剛石)까지 박혀 있었다.
이 상자 하나의 가치만 해도 십만 냥을 웃돌 것이다. 그 정도 돈이면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하지 않는 이상 삼대가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다.
한참 동안 이 무서운 예술품을 바라보던 공무외는 문득 ‘그’의 말을 떠올렸다.
– 마음이 있거든 그 상자를 열어 보시게. 그 상자를 여는 순간, 자네는 우리 사람이 될 걸세.
확신에 가득 찬 그의 말.
지금 공무외의 위치로는 고개도 들기 힘든 사람이었다. 무력의 경우 아예 상대가 안 된다. 공무외 역시 내전의 마인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무를 쌓았지만, ‘그’는 신교에서도 손에 꼽히는 고수였다.
무공, 위치, 권력, 재산 등등 어떤 요소를 가져다 붙여도 이기기 힘든 상대.
아니, 이길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공무외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가 원하는 건 언제나 지금보다 높은 자리였을 뿐, 사람을 두고 승패를 나누고자 하는 이가 아니었다.
딱 한 번 그런 생각을 한 상대가 있었다.
그가 바로 도헌이었다.
“……능력의 증명이라.”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 본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자신의 꿈을 위해 그간 얼마나 끔찍하고 무도한 일을 벌였는지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던 공무외가 눈을 떴다.
감기 전에도, 감고 나서 다시 뜬 지금도 상자는 똑같은 가치로 그의 영혼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상자로 손을 뻗었다.
상자의 걸쇠를 매만지는 손가락이 미묘하게 떨렸다.
‘이걸 열면 내가 배신하게 될 거라고?’
참으로 우스웠다.
더 강한 권력, 더 높은 자리를 손에 넣기 위해 안 해 본 짓이 없지만, 나름의 줏대가 없었다면 진즉에 눈먼 칼을 맞고 죽었을 것이다.
신교에서 손에 꼽히는 거부까지는 아니어도, 공무외 역시 돈이 모자란 사람은 아니었다. 지닌 재산을 들고 출교하면 문파 하나를 세워도 될 정도로 자산이 넘치는 사람이 그였다.
‘그런 나를 돈으로 매수하려 하다니.’
보란 듯 코웃음을 치고 싶었다.
그런데 마음과는 달리 상자를 매만지는 손은 여전히 진정이 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공무외는 이내 결심했다.
딸칵.
걸쇠가 풀렸다.
그가 상자를 열었다.
번쩍!
눈이 부신 무언가가 상자 안에 가득 들어 있었다.
공무외의 눈이 몽롱해졌다.
상자 안에는 온갖 보물들이 제각기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처음 보는 보석들도 꽤 있었다. 돈으로는 아쉬울 게 없는 그조차 처음 보는 물건이라면, 그 가치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황금이 주는 마력은 대단했다.더 아쉬울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돈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또 한 번 ‘그’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 자네는 충분히 스스로를 증명했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자네를 다소 어설프게 보았어. 아등바등 형법당주 위치까지 올라왔지만 딱 거기까지라고 생각했지. 물론, 형법당주라는 직책도 대단하지만 말이야.
– …….
– 우리가 자네를 잘못 보고 있었네. 그래서 이번엔 아랫사람을 보내지 않고 내가 직접 왔지. 우리는 자네를 원하네.
– 저는…….
–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네. 하지만 생각해 보게. 자네는 정녕 백골이 내준 줄을 잡고 정상에 오를 수 있겠나? 그 줄이 밧줄이 아니라 실밥이라는 생각은 정녕 안 해 본 것인가?
– ……!”
– 백골은 권력욕이 없는 사람이라네. 그래서 자네가 그를 선택했겠지. 하지만 권력욕 없이 이상만을 꿈꾸는 자에게는 한계가 있는 법이야. 자네가 그걸 몰랐을 리 없어.
– …….
– 자네도 증명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백골 정도 되는 사람을 모시며 이 정도까지 할 수 있다, 너희가 보지 못했던 능력을 보여 주마. 맞지?
– 저는 그저…….
– 자네가 없었다면 백골도 이렇게 날뛰지는 못했을 거야. 우리는 그런 자네의 능력을 원하네. 우리와 함께한다면, 자네의 등에는 날개가 달리게 될 걸세.
공무외는 흔들리는 눈으로 상자 안에 있는 종이를 꺼냈다.
고이 접혀 있는 종이는 질이 무척이나 좋았다.
형형색색의 보석들도 엄청났지만, 공무외는 이 종이가 보석보다도 훨씬 더 가치 있게 보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펼쳤다.
“……!!”
종이는 추천서였다.
한 직책에 대한 추천서. 그리고 추천서 끝에는 ‘그’의 이름이 적혔고 인장도 찍혀 있었다.
그리고 공란이 있었다.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적으면, 형법당주보다도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갈 수 있다.
공무외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 직책은 그가 꿈에서라도 바라던 직책 중 하나였다. 아닌 말로 백골신마와 함께한다면 오르는 데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자리다.
아니, 만에 하나 백골신마가 정적들에게 축출당하게 되면 자신 역시 함께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이 추천서 공란에 이름을 적게 되면, 그때부터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막강한 권력자가 된다.
‘함정이다.’
공무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그는 어느새 붓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함정…….’
그때였다.
“당주님.”
공무외는 빠르게 종이를 접고 상자 안에 넣었다.
“무슨 일이냐.”
“광마대 부관이 찾아왔습니다. 꽤 다급한 일인 듯합니다.”
공무외의 눈이 깊어졌다.
이천상이 위기에 빠졌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형법당원들을 보내지 않았다.
공무외가 상자를 탁자 밑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들여보내라.”
“예.”
잠시 후, 황무석이 당주 집무실로 들어왔다.
공무외가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 명을 내릴 생각이었네. 이천상 건으로 온 것이 맞지?”
“……그렇습니다.”
“걱정하지 말게. 그는 광마대주는 물론 나에게도 중요한 사람이야. 절대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네.”
“…….”
“이만 가 보게.”
황무석은 가만히 공무외를 바라보았다.
공무외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찌 가지 않는가? 불만이라도 있는가?”
“이천상 그 녀석, 진정 당주님께 중요한 사람입니까?”
“뭐?”
“정말 중요한 사람이었다면 앞뒤 재지 않고 사람을 보냈겠지요. 저희 대주님처럼요.”
훅!
공무외의 몸에서 매서운 살기가 일었다.
“네놈이 날 가르치려 드는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니면? 이놈이 감히 예가 어디라고 건방을 떨어!”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순간이었다. 황무석의 태도는 그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황무석은 태연했다.
“죄송합니다. 다만, 허락하신다면 몇 마디 말씀을 전해도 괜찮겠습니까?”
화난 와중에도 황무석의 담담한 태도가 공무외를 의아하게 했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꽤 딱딱한 녀석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도헌은 자신 앞에서 한 번도 자기 사람을 욕한 적이 없으나, 들려오는 얘기로 황무석 때문에 몇 번 골머리를 앓은 적이 있다고 들었다.
그런 녀석이 갑자기 나타나 자신 앞에서 뻣뻣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공무외는 침묵으로 황무석의 발언을 허락했다.
황무석의 입이 열렸다.
“저희 대주님께서 당주님의 사람이 된 것을 압니다.”
“그런데?”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저희 대주님은 당주님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뭐?”
“과거와 달리 지금의 대주님은 공무보다 사감을 우선시하고 계십니다. 저희 말은 잘 듣지도 않으시지요.”
“…….”
“몇 번을 좋게 생각했습니다. 다 뜻이 있어서 그러시는 거다,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거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저희 대주님은 모두가 우러러볼 만한 능력을 지니시고도 사감 때문에 광마대를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계십니다.”
공무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게 와서 상관을 비난하다니, 그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모르는 것이냐?”
“압니다. 저는 지금 제 목을 내놓는 심정으로 왔습니다.”
“……!”
“저와 대원들에게 있어 광마대는 시작이자 끝입니다. 광마대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걸 수 있습니다. 어떤 위험한 임무든 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저희에게도 대가가 필요했습니다.”
“무슨 대가.”
“자부심입니다.”
“…….”
“저는 지금도 저희 대주님을 존경합니다. 앞으로도 똑같을 겁니다. 그러나 모두를 위해서, 대주님이 지금처럼 행동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너 개인의 뜻이냐? 아니면 광마대 전원의 뜻이냐?”
“저는 모두를 대변합니다.”
뻔뻔스러운 거짓말이었다.
목숨을 걸었다는 건 사실이다. 형법당주의 힘이라면 부관인 그의 목숨 따윈 바람 앞의 촛불처럼 언제든 꺼질 수 있다.
그러나 모두를 대변했다는 그의 말은 당연히 사실이 아니었다.
‘…….’
공무외는 황무석의 눈에서 광기를 읽었다.
오로지 광마대를 위해 목숨을 거는 놈이다. 신교를 향한 충성 따위는 뒷전이다. 저놈에게 광마대는 인생의 전부나 다를 바가 없다.
왜 저렇게 변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제 조직에 자부심을 지니는 이들에게서 흔히들 보이는 모습이었다.
‘질투인가.’
그렇다면 많은 것이 설명된다. 마침 짐작이 가는 이도 있다.
그 질투의 대상은…….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는 것인가?”
“대주님을 광마대에서 떠나게 해 주십시오. 지금의 대주님은 정상이 아닙니다. 대주님을 위해서라도 광마대를 위해서라도 그것이 좋습니다.”
“네가 지금 내게, 그 정도 부탁을 할 만한 위치라고 보는 것이냐? 이 얘기가 도 대주에게 들어가면 자네는 파면이야.”
“말씀드렸듯 저는 목을 걸고 왔습니다. 그리고…….”
“…….”
“당주님께서도 이천상 그놈이 위험하다는 걸 알고 계시잖습니까?”
질투가 확실했다.
공무외가 피식 웃었다.
“위험하다고 하여 휘둘러 본 적도 없는 칼을 방에 걸어 놓을 거라면 본교에서 살 생각 따위 하지 말아야지.”
“그것은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뭐?”
“제게 자부심을 주신다면, 누구보다도 날카로운 칼이 되어 드리지요.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당주님의 명령이라면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는 생각 없는 칼.”
“……!!”
“저희 대주님의 능력은 출중합니다. 백뇌각의 부각주가 대주님을 찾아와 높은 자리를 제안한 것 정도는 이미 아시겠지요?”
“…….”
“광마대를 저에게 주십시오. 광마대를 광마대답게 만들겠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당주님의 발바닥도 핥을 겁니다.”
공무외가 눈살을 찌푸렸다.
황무석은 지금 존경한다는 상관을 배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놈의 말이 신경을 건드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천상이야 원체 천한 놈이니 그렇다 쳐도, 백뇌각 부각주가 도헌을 밀마조장으로 밀어주겠다고 제안한 것은 공무외에게 큰 충격이었다.
도헌은 자신의 사람이다. 하지만 그 관계는 언제든 역전될 수 있다.
처음으로 짓밟고 승리하고 싶었던 사람이었기에 믿을 수 있었고, 그렇기에 그가 자신의 윗줄로 올라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공무외의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개가 되겠다는 말, 책임질 수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