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40
40화
40. 나를 알아준 사람
허현은 크게 4구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행정적으로 집행되어 경계선을 그은 것이 아니라, 사적으로 이러저러한 세력 판도에 따른 구분이 공고해진 경우였다.
진재문의 집은 그중 서허구에 위치했고, 진서정을 납치한 건 서허전장의 짓이었다.
더 정확히는 서허전장 전주 구태길의 명령이었다.
사람들은 구태길을 구 탐고(貪賈)라 불렀는데, 탐고라 함은 이익만을 탐하는 상인을 말하는 폄칭이었다.
그런데 구태길은 구 탐고라 불리는 걸 전혀 꺼리지 않았다. 오히려 상인이 이익을 탐하는 게 무슨 잘못이냐며, 자처하여 구 탐고라 소개하곤 했다.
구 탐고가 진서정을 데려간 것은 땅 때문이었다.
본래 진재문은 부모와 함께 낙읍에서 살았으나, 스물이 되기 전에 부친의 뜻을 따라 부친의 고향인 허현으로 이주하였다.
허현 인근에는 개간되지 않은 땅이 많았고, 가치가 낮아서, 진재문의 부모는 기존 낙읍의 집을 팔고 생긴 돈과 진 상궁이 주기적으로 보내는 돈까지 합해서 여기저기에 꽤 넓은 땅을 확보할 수 있었다.
진재문의 부모는 열심히 땅을 개간하고 논과 밭을 일구어냈다.
착하고 성실했던 진재문 역시 부모를 도와 기반을 다지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부친이 이름 모를 병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남편을 잃은 충격으로 모친이 몸져누우면서 가세는 차분히 기울게 되었다.
진재문이 모친의 병시중을 드느라 농사일을 할 수가 없으니, 힘들게 일군 땅을 헐값에 하나씩 넘기면서 약값을 충당하고, 세 식구의 생계까지 감당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몇 년 뒤에 모친이 작고한 후로는 더 심각해졌다.
주위 사람들의 꼬임에 빠져 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하거나, 동업이란 명목하에 자칭 친구들과 이러저러한 가게를 시작했다가 망하거나, 빌린 돈을 갚지 못해 얼마 없던 자산까지 서허전장에 넘어갔는데도 적지 않은 빚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진재문이 거리로 나앉지 않은 건, 현재 사는 집을 애초부터 진 상궁의 명의로 사둔 덕이었다.
그리고 진 상궁의 명의로 사두었기에 서허전장에 빼앗기지 않은 땅이 하나 더 있는데, 최근까지, 아니 지금도 여러 가지 이유로 쓸모가 없다는 평가를 받는 허현의 서쪽 땅이었다.
그런데 서허전장이 왜인지 모르게 그 땅에 과도한 집착을 보이며 탐내고 있었으니, 진재문이 실질적으로 땅의 주인이 아니고, 땅의 문서가 누구에게 있는지도 모르다 보니, 온갖 수작질에도 소용이 없어, 진서정을 납치하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 * *
서허전장은 주위에 넓은 공터를 두고, 높은 담을 치고, 내부도 공간을 넉넉하게 담아서 좌우로 넓게 빠진 2층 건물이다.
1층은 전장의 점원들이 업무를 보는 일터고, 2층은 전장의 주인 구태길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구태길이 허현의 경관을 한눈에 보기 위해 2층 지붕 위로 5층 높이의 누각을 설치했다.
4개의 기둥을 세워,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구조라, 망루에 가까웠으나, 구태길이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이름까지 붙일 정도로 애착을 가졌다.
구태길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우공이산에 올랐는데, 주위 사람들에겐 넓게 보고 큰마음을 먹기 위해서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허현의 왕이 된 듯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게 좋아서일 뿐이었다.
그래서 자기 외에는 우공이산에 오르는 것도 금지했다. 아랫것들이 감히 주인의 마음을 품게 하는 건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니까.
물론, 지금은 진재문과 그 무리가 접근하는 걸 미리 파악하고자 하는 의도로 올라와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오는군.”
서허구의 대로를 벗어나 어지러운 골목길을 따라 우르르 몰려오는 진재문과 그 무리가 보였다.
“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가볼까.”
구태길은 싱글벙글 웃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 * *
서허전장의 문 앞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활짝 열렸다.
문을 열어준 문사 차림의 남자 2명이 급하게 마당을 가로질러 돌아간 곳에는 2층 전각이 있었다. 그 앞에는 합류한 2명까지 합쳐, 문사 차림의 남자 여섯 명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제갈신기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느낌이 싸한데. 방미두점(防微杜漸)이란 말이 있어. 작은 것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거지.”
남궁쾌 등은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쳐다봤다.
“이해가 안 되나 보군. 더 쉬운 예를 들자면, 바늘구멍만큼 작은 건 아무런 주의도 끌지 못하지만, 때로는 바늘구멍도 위협적일 수 있다는 거야.”
“자꾸 뭐라는 거야?”
“평소에도 못 들어주겠는데, 오늘은 특히나 심하군.”
제갈신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들 무식해서야. 그러니까 내 말뜻은 저것들이 함정을 파놓은 거 같으니, 조심하자는 말이야.”
방 누님이 한 마디 툭 던졌다.
“겁나면 빠져.”
그러고는 탁 형님과 함께 앞서 들어갔다.
“그래, 넌 빠져라.”
“겁쟁이는 빠지는 게 순리지.”
남궁쾌와 당무독도 한마디하고 아우들과 함께 지나갔다.
제갈신기는 오늘 읽은 왕후비론의 이론을 실전에 적용하여 말한 것이라, 당무독 등의 비난이 억울했다.
“야씨, 겁나긴 누가 겁나!”
제갈신기는 아우들을 돌아보았다.
“내가 겁난다고 했냐?”
“안 했습니다, 형님.”
“나 안 겁나거든?”
“안 겁나 보입니다, 형님.”
“내 얼굴에 겁난다고 쓰였어?”
“안 쓰였습니다, 형님.”
그러나 아우들의 대답을 듣고도 억울함이 풀리질 않았다.
뭔가 아우들의 표정과 음성에서 진심이 느껴지질 않고, 기분을 맞춰줄 요량으로 형식상 대답하는 거 같아서다.
진천이 진재문과 함께 옆으로 지나치며 말했다.
“제갈 형씨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큰 틈새는 작은 틈새와 같으니, 작은 틈새는 결국 큰 틈새로 커질 수밖에 없기에, 지금이 딱 그러한 상황이라고 봅니다. 아주 정확히 집어주었어요. 앞으로도 기대 하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호응에 제갈신기는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를 낳아준 건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진 공자로구나.’
그리고.
‘자고이래로 사내대장부는 자기를 알아주는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했다지.’
물론, 자신은 진천의 수하가 아니고, 이곳에서 죽을 마음도 없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는 해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협조한다는 마음이었다면, 이제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돕는다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각오가 섰다.
“가자.”
아우들은 갑자기 제갈신기의 표정과 음성이 달리 느껴져 의아했으나.
“예, 형님.”
늘 그러했듯 힘차게 대답하며 전장 안으로 따라 들어섰다.
* * *
구태길은 우르르 몰려와 마주 선 무리를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슬쩍 움직여 진천의 옆에 서 있는 진재문을 노려보고, 검지로 가리킨 다음 좌우로 흔들었다.
“진 형제, 이거 참 실망이군. 이렇게 우르르 몰려오다니, 무슨 의도인가?”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던 진재문은 버럭 소리쳤다.
“우리 정이를 내놓으시오!”
“왜 화를 내는지 영문을 모르겠군. 나는 이미 몇 번이나 진 형제에게 경고했네. 계속 빚을 갚지 않으면, 자네 딸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고. 그래도 끝까지 좋은 말로 협상 좀 하자고 손님들을 데려오라 했던 건데, 이건 뭐 누가 봐도 나를 협박할 작정으로 몰려온 모양새가 아닌가.”
방 누님이 반걸음 움직여 진재문을 향한 구태길의 시선을 막았다.
“이봐, 싸우긴 누가 싸워. 남의 집 귀한 딸을 납치해간 사람이 누구인데, 그딴 소리를 하냐고. 우린 대화를 하려고 온 거니까, 얼른 정이나 데리고 나와. 일단 안전한지부터 확인해야겠으니까.”
방 누님을 빤히 쳐다본 구태길은 물었다.
“낭자가 진 형제가 말하던 그 땅을 받을 사람인가?”
남은 빚을 탕감해 줄 테니까, 땅을 넘기라고 협박받을 때마다 진재문은 늘 같은 말을 했다.
‘내 땅도 아닌데 어찌 넘긴단 말이오. 이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조만간 땅을 받을 사람이 찾아올 거라고 했소.’
‘이름이 뭔데?’
‘이름은 듣지 못했소. 어쨌든, 땅문서도 그 사람에게 있다고 했단 말이오.’
사실 구태길도 처음엔 진재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땅의 전 주인을 통해 알아본 결과 정말로 땅의 명의는 집과 마찬가지로 진정희의 명의로 넘겨진 게 아닌가.
그런데 주기적으로 진재문을 찾아가 괴롭히고 돌아오곤 했던 수금원이 범상치 않은 자들이 진재문의 집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게다가 숫자도 많고, 한 사람만 빼고는 무림인으로 보였으며, 특히 거구의 남자는 꽤 강해 보였다고.
구태길은 그들 중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기대하고 고대하던 사람이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주도적으로 나선 방 누님이 그 사람이라 판단하는 거고.
하지만 방 누님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봐, 정이의 안전부터 확인하기 전에는 어떤 말도 들을 생각하지 마.”
문제는 구태길도 호락호락하지 않기는 방 누님에 못지않다는 것.
“낭자, 나는 바보가 아니야. 데리고 나왔더니, 애만 데리고 빠지면 누가 책임질 건가. 내 말인즉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세상 사는 이치라는 거지. 물론, 나부터 주진 않을 거니, 기대도 말게. 그러니까 진 형제의 딸을 만나고 싶으면 땅문서부터 내놓게.”
그런데 구태길은 이상한 행동과 분위기를 감지했다.
방 누님을 비롯한 모두가 진재문에게 시선을 돌리는 게 아닌가.
마치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것처럼.
‘왜 저 어리바리 진재문에게…….’
구태길은 진재문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진천을 보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모두가 진재문 쪽을 보는데, 진천만이 딴 곳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재문은 그런 진천을 힐끔거렸고.
‘왜 다들 저 어린 병신 놈의 눈치를 보는 거지? 아, 저 여자가 아니라, 저 애송이가 땅을 받을 사람이었나 보구나.’
신분이 높거나, 돈이 많은 가문 출신인 걸까?
하지만 겉모습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아서 의아했다.
‘그런데 저 새끼는 왜 땅만 쳐다보고 있는 거야.’
알 수 없었다.
사실 중요하지도 않았다.
진천이 땅을 받고, 땅문서를 가진 장본인인 걸 확인만 하면 다 해결이니까.
“이봐, 소형제. 소형제가 진 형제 이모 명의의 땅을 물려받을 사람인가?”
* * *
진천이 몇 번을 물어도 반응이 없자, 구태길의 미간이 내 천(川)자를 그렸다.
“내 말 안 들리는가! 소형제가 땅을 받을 사람이냐고 묻지 않는가!”
진천은 고개를 들고, 잔뜩 열받아 있는 구태길을 쳐다봤다.
그가 전장 마당에 들어선 후로 내내 다른 쪽에 관심을 쏟은 건 분명하나, 구태길의 말을 다 들었고, 그 의미도 다 파악했다.
‘진 상궁은 내가 반드시 찾아올 거라는 걸 믿었기에 진 형님에게 그런 말을 했을 테지.’
진 형님은 지켜낼 능력이 없고, 진서정은 지켜내기엔 너무 어리고, 그러한 이유가 아니라도 진 상궁이라면 자기에게 재산을 남겼으리라 확신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주려고 했을 겁니다.”
다만, 땅문서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왜 가지고 있다고 했을까, 의아스럽기는 했다.
“그러나 땅문서는 내게 없습니다.”
구태길은 땅을 받을 사람이라고 하자 기쁜 듯이 웃더니, 땅문서가 없다고 하자 바로 정색했다.
“어허. 어린 친구가 뻔한 거짓말로 어른을 속이다니. 혹시 뒤에 패거리가 저리 많으니까, 뭐든 우기면 된다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미리 경고하지만, 난 저런 자들 따위에 겁을 먹고, 머리를 숙이는 사람이 아니야.”
“…….”
“이래서 요즘 어린 친구들이 문제인 게야. 세상이 다 자기 생각대로만 돌아가는 줄 알거든.”
구태길은 훈계인지 모를 소리를 늘어놓더니.
“준비해!”
하고 소리쳤다.
곧 문사 차림의 남자들이 뒤로 물러나 벽에 바짝 붙었다.
이어 건물 뒤편에서 수금원들을 포함, 흉악한 병장기를 든 무복 차림의 남자 오십여 명이 우르르 뛰어나와 구태길의 앞을 담장처럼 막아섰다.
표정, 태도, 행색을 보면 모두가 본래 서허전장 소속의 한 무리인 게 아니라,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듯했다.
그런데 문사 차림의 남자들은 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있을까.
겁에 질린 표정으로 구태길의 눈치를 살피는 걸 보면, 사전에 무슨 일이 생겨도 끝까지 지켜보라는 구태길의 명령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수십 명의 무사가 시야를 가득 채웠으나, 가장 마지막으로 느긋하게 걸어 나오는 남자 한 명이 더 이목을 끌었다.
‘어쩌면 방 누님보다 강할지도…….’
차분한 움직임, 오래된 상처로 가득한 얼굴, 맹수의 그것처럼 거친 시선, 은은히 발산되는 무거운 기세에서 나 고수요, 하는 분위기가 풀풀 풍겼다.
그러나 진천은 남자에게도 큰 관심이 없었으니, 저들과 싸울 일이 없다고 생각해서다.
진천은 기세등등한 표정의 구태길에게 말했다.
“땅을 당신에게 넘기겠습니다.”
아무리 넓은 땅이라도 진서정보다 중요하진 않으니까.
구태길은 진천이 겉으로는 무표정해도 내심 겁을 먹었고, 자신의 의도대로 흘러간다고 생각해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진천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다만, 그곳에는 내게 매우 중요한 사람의 무덤이 있습니다.”
진 형님에게 듣기로 진 상궁의 거듭된 당부가 있어 그 땅에 무덤을 조성했다고 한다.
그녀의 땅이니 당연한 조치기도 했고.
“무덤이 자리한 땅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당신에게 넘기겠습니다. 물론 진 형님의 빚을 탕감하는 것과는 별개로 얼마라도 땅값을 줘야 합니다.”
자신을 위해서 돈을 받으려는 게 아니라, 진 형님에게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땅문서는 없습니다. 하지만 공증인을 세우고, 진 형님과 내가 당신에게 넘긴다는 증거를 남긴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리고 문서 역시 찾아내는 즉시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진천은 이런 상황에서도 구태길과 대화로 풀 수 있다고 기대했다.
힘을 앞세워 강제로 땅을 점거할 수 있었을 텐데, 땅문서를 고집하는 것도 구태길이 기본적으로 상식선을 지키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당신이 원하는 바를 얻었으니, 이제 정이를 보내주십시오.”
그런데…….
“크크크, 너한테 무슨 선택권이라도 있는 줄 아느냐? 그 땅은 네가 나한테 주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갖는 것이야.”
갑자기 구태길의 인상과 언행 등이 싹 바뀌어, 경박하고 차갑고 야비한 본색이 드러났다.
사실 구태길이 수금원들을 시켜 진서정을 납치하게 해서 진천 등을 전장으로 오게 한 건 협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땅 주인을 찾아내고, 나머지는 죽여 없앨 목적이었다.
구태길이 땅문서를 고집하는 것도 상식적인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강제로 점거하려다가 실패했고, 반드시 땅문서가 있어야만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어떻게 하든 후환은 남기지 않는다.’
구태길이 살아온 방식이 그랬고, 그랬기에 약육강식의 치열함 속에서 이제까지 살아남은 거라고 믿었다.
구태길은 진천을 비웃었다.
“땅값? 자기 땅에 돈을 내는 사람도 있느냐?”
그는 진천의 짐작을 넘어설 만큼 뻔뻔하다는 걸 증명하려는 것만 같았다.
“하하하, 세상 물정도 모르는 애송이 새끼야, 이 어르신의 말씀을 알아듣겠냐?”
진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나 계속 오감을 간지럽히는 소음 때문에 구태길의 말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이렇게만 이야기했다.
“그래도 일을 키우지 말아요.”
진천은 무사들에게도 말했다.
“당신들도 물러나도록 해요.”
무사들은 비웃었다.
일부 무사들은 훈계랍시고 이런 말들도 했다.
“쯧쯧쯔, 애송아, 낭인은 이유를 묻지 않는다. 돈만 받으면 그만이거든.”
“크크, 흑도는 한 번 나아가면 뒤를 보지 않아. 사내대장부는 직진이랄까.”
진천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당신들 후회하게 될 겁니다.”
구태길은 코웃음을 쳤다.
“후회? 이 새끼가 말귀를 못 알아들었구나. 그래, 지금은 뒤도 든든하니 감이 잘 안 온다 이거지? 하지만 피부도 지져지고, 손톱 발톱도 뽑혀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구태길은 당당히 고문하겠다고 선언하더니.
“저 녀석만 남기고 다 죽여!”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쿵-
구태길의 외침은 진천이 한 걸음 나서며 공력을 끌어올리고, 땅바닥을 묵직하게 밟으며 만들어낸 진각에 간단히 묻혔다.
우르르르-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이 울리더니, 흙더미가 좌우로 갈라지고, 그 아래로 지하구조물의 천장을 형성하고 있던 나무와 돌이 함께 치솟아 좌우로 흩뿌려졌다.
파괴력도 놀랍지만, 엄청난 위력을 세밀하게 조절하고 통제하는 기교는 더 대단했다.
그런데 천장이 날아가며 드러난 지하구조물 안에는 팔다리가 꽁꽁 묶인 10세 내외의 남녀 아이들 수십 명이 울고 있었다.
다행인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진서정은 보이지 않았다.
“뭐, 뭐야!”
진영을 가리지 않고 모두 놀라며 당황하고,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진천은 머리 한쪽이 지끈거리는 두통을 참아내면서 구태길에게 말했다.
“구 전주, 내 정중히 묻겠습니다. 저들이 왜 저런 모습으로 갇힌 겁니까? 목숨을 지킨다는 각오로 한 번 설명해 보시죠.”
구태길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진천이 무공을 익혔고, 대단한 무위의 고수라는 걸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그는 느긋하게 나타난 남자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전혀 두려울 게 없다는 듯 빙긋이 웃고 있었다.
그제야 안도하며, 이전의 자신감을 회복한 구태길은 빈정대듯 말했다.
“내가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