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75
75화
75. 후회하지 않을 자신
진천은 인적이 완전히 사라진 어둑한 길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가다가, 앉아 있어도 오가는 사람들에게 걸리적거리지 않을 골목 어귀에 자리를 잡았다.
가죽집에 넣은 식칼은 띠에 달아서 상의 안쪽 허리에 둘러 보이지 않게 하고, 한쪽이 찌그러진 솥은 동냥 그릇처럼 앞에 두었다.
그리고 따로 챙겨온 짚을 옆에 쌓아둔 다음, 한 움큼 잡아서 오른 팔목에 붙여서 비비고 꼬았다.
맨땅에서 잘 수는 없으니, 진 형님이 마당에서 하던 손작업을 떠올리며, 멍석을 만들려는 의도였다.
양손으로 해도 쉽지 않은 작업을 한 손으로 하려니,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으나, 꿋꿋하게 작업을 이어나갔다.
절반쯤 완성했을 무렵에 문득 뱃속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아침을 먹고 난 후로, 요기가 될 만한 걸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였다.
고개를 들어 저 멀리 달빛을 가리고 그림자까지 드리워 유독 어두운 구석을 바라보았다.
“혹시 먹을 만한 걸 가지고 있습니까?”
아무도 없을 듯했던 어두운 구석에서 나무 지팡이를 든 남자가 걸어 나왔는데.
“속없는 만두 반쪽이 있습니다.”
진 상궁의 무덤에서 재회했던 전 총순검 황보호한이었다.
황보호한은 가까이 다가와 진천이 무덤에 두고 간 나무 지팡이를 내밀었고.
“고맙습니다.”
이어 소매에서 딱딱하게 굳어 있는 만두 반쪽을 꺼냈다.
“드시겠습니까?”
“고맙습니다.”
만두를 받아든 진천은 물었다.
“황보 형씨는 식사하셨습니까?”
“저는 먹었으니, 신경 쓰지 마시고 드십시오.”
아무래도 이 만두의 사라진 반쪽이 오늘 황보호한의 한 끼 식사였던 모양이다.
“이것밖에 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그리고 이 반쪽은 내일의 한 끼 식사였을 테고.
만두를 먹으며, 새삼 황보호한의 마른 몸을 보았다.
이제껏 진 상궁의 무덤을 지켰고, 이후로도 따로 생업에 종사했던 걸로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먹고 살았던 걸까.
그러나 진천이 황보호한에게 진정으로 궁금한 건 이제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는지였다.
“언제부터 제가 주변에 있다는 걸 아셨습니까?”
“처음부터요.”
“진 공자님은 무공의 고수셨군요.”
여러 의미를 내포한 말이었다.
그러나 진천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고, 황보호한도 더 따지지 않았다.
진천은 다시 짚을 꼬며 물었다.
“풍찬노숙을 각오했지만, 멍석 하나는 있어야 할 거 같더군요. 그래서 만드는 중인데, 황보 형씨도 하나 만들어두시죠.”
“가르쳐 주시면 한 번 만들어보겠습니다.”
“나도 이번이 처음입니다만, 요령만 알면 크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한동안 둘은 멍석 만들기에 집중했다.
시작은 달랐으나, 진천의 속도가 느리다 보니, 비슷한 시각에 완성했다.
진천은 멍석에 앉아보고 눕기도 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잠자리 걱정은 없겠군요.”
마찬가지로 멍석에 누웠다가 일어난 황보호한은 물었다.
“거처하실 수 있는 집이 여러 곳인데, 왜 밖에서 생활하려고 하십니까?”
“내가 황보 형씨에게 묻고 싶은 말이군요. 왜 내 주변을 떠돕니까? 무덤을 지킨다는 목적은 이미 완수했잖아요.”
“무덤을 지키는 건 진 상궁과의 약속 때문이지,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그럼 무엇이 목적입니까?”
“저는 진 공자님을 보필하고 싶습니다.”
“보필이요? 나는 황보 형씨의 윗사람이 아닌데, 무슨 보필입니까. 내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모르겠군요.”
“저는 진 공자님만이 주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진천은 어리둥절했다.
“내가 어떻게 주나라를 바로 세웁니까?”
“왕이 바로 서면, 나라 역시 바로 서게 됩니다.”
“내가 왕이 되어 바로 서라는 겁니까?”
황보호한은 무릎을 꿇었다.
“삼왕자님, 부디 왕위에 오르시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소서.”
“진 공자라 불러주십시오.”
“호칭은 달리 부를 수 있어도, 제겐 삼왕자님입니다.”
“어쨌든, 호칭이라도 달리 불러주십시오.”
“예, 진 공자님.”
진천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왕이 건재하고, 왕의 후계자가 있으며, 그 후계자의 자리를 노리는 왕자들까지 있는데, 내가 왜 왕이 되어야 합니까?”
“그중 누구도 마음이 너그럽지 못하고, 슬기롭지 못하고, 덕행이 높지 못합니다.”
진천도 동의하는 부분이라 반박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수긍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내가 아니라도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은 많습니다. 좁게는 제후와 대부들이 있고, 넓게는 백가의 제자들이 그러합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혈통입니다. 이제껏 주나라를 능가했던 강력한 제후국의 수장들이 패자를 자처한 경우는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하로서 주나라 왕실을 받들고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기치 아래 일정한 선을 지켰습니다. 정통성이 없는 상태로 왕위를 노리는 건 다른 제후국의 반발만 사고, 백성들의 지지도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진천의 가장 큰 경쟁력은 지혜로움과 어진 마음이 아닌, 핏줄이라는 것이었다.
“황보 형씨, 내가 왜 성을 바꿨다고 생각합니까?”
“그건…….”
“그 핏줄인 게 싫었기 때문입니다. 내 부모는 진 상궁이고, 이제 내가 살아갈 세상은 왕실이 아니라, 이곳입니다.”
잠시 황보호한을 빤히 바라보던 진천은 단호히 말했다.
“나 진천은 강호인으로서 평천우명교의 교주이고, 하오문의 문주이며, 중원전장의 전주이면서, 천하제일의 숙수가 되고자 하는 꿈을 가진 거지입니다.”
잠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던 황보호한은 확인하듯 되물었다.
“거지요?”
“그렇습니다.”
“교주에, 문주에, 전주에, 숙수도 모자라서 거지라니요. 몸도 마음도 쓸모가 없어져 빌어먹고 사는 게 거지인데, 어찌 진 공자님이 거지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황보 형씨도 그동안 빌어먹고 살았던 거 아닙니까?”
해진 옷과 깡마른 몸, 속없는 만두 하나로 이틀을 버티는 생활까지, 그 외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었다.
실제로도 그랬기에 황보호한도 반박하지 못하는 것이고.
“나는 거지가 편하고 좋습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믿기지 않으면 옆에서 지켜보세요.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사실 황보호한은 진위를 확인하는 것보다, 진천을 설득해서 마음을 돌릴 방법을 찾기 위해서라도 곁을 지킬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황보 형씨도 내 옆에 있을 동안은 거지여야 합니다. 물론, 지금도 크게 다를 건 없어 보입니다만.”
황보호한은 그의 기분을 신경 쓰지 않는 진천의 직설적인 화법에 살짝 당황했으나, 어쨌든, 그는 진천을 보필하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정식으로 거지가 되었다.
* * *
진천이 거지가 되기로 결심하고 처음으로 맞이한 아침, 그를 가장 먼저 찾아온 건 우습게도 같은 거지였다.
“진 형제, 이게 다 무슨 꼴이오?”
앞에 쪼그려 앉은 송웅은 짐짓 안타깝다는 듯 탄성을 터뜨리며 물었다.
“보다시피 거지가 되기로 했습니다.”
“그렇구려. 이제 나처럼 빌어먹을 놈이 되었군.”
“안 웃깁니다.”
“어쨌든, 축하할 일이오. 내가 그 기념으로 진 형제의 첫술을 떠드리리다.”
송웅은 소매 속에서 굵직한 육포 2개를 꺼내 솥에 툭 던졌다.
진천이 육포를 한 번 쳐다보고 아무 말 없이 멀뚱히 쳐다만 보자 송웅이 혀를 찼다.
“진 형제, 적선을 받고도 인사 한마디 하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오. 모든 거지를 욕먹게 하는 짓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요. 감사하다고 하면 됩니까?”
“그건 하수의 인사법이오.”
“하수요?”
“적선한 사람에게 별 감흥을 주지 못해서, 그 사람에게 다시 적선 받기 글러 먹게 하는 인사말이기 때문이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황보호한이 한마디 했다.
“하수가 있다면 중수와 상수도 있겠구려?”
송웅은 황보호한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진 형제, 이 친구는 뭐요?”
“동향 사람입니다.”
진천은 황보호한에게 육포 하나를 건네주며 말을 이어갔다.
“어쩌다 보니 재회하게 되었는데, 갈 곳도 할 일도 없다 해서 한동안 같이 구걸하며 지내기로 했습니다.”
황보호한은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구체적이지 않을 뿐, 크게 틀린 말이 아니라서 반박을 못 하고 묵묵히 육포를 입에 물고 씹었다.
“그렇다면 거지 후배로군. 나는 송웅이야. 앞으로 송 선배라 부르게.”
“황보호한이오. 선배 소린 들을 생각 마시오. 당연히 공대도 안 할 거고, 반말을 들을 생각도 없소.”
황보호한이 빤히 노려보며 말하자, 송웅은 마른침을 삼키고 속삭이듯 진천에게 물었다.
“무공의 고수요?”
“송 형씨보다는 강할 겁니다.”
“그렇구만.”
송웅은 한결 공손한 태도로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황보 형, 구걸에 선후배가 어디 있겠소. 나이도 얼추 비슷해 보이는데,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고 호형호형하며 지냅시다.”
황보호한은 내키지 않았으나, 진천이 좋은 생각이라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마지못해 포권을 취했다.
“그럽시다, 송 형.”
송웅은 화제를 전환하려는 듯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어갔다.
“중수는 적선하는 이의 복을 비는 것이오. 불쌍한 자에게 귀한 돈과 양식을 나눠주신 마님, 공자, 소저, 어르신, 대모께선 복을 받으시고, 무병장수하십시오, 하는 거요. 이것이 중수인 건, 적선한 이의 기분을 좋게 하고 뿌듯하게 해서 이후로 서너 번 더 적선하도록 유도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오.”
“그럴듯하군요.”
“상수는 조상의 공덕을 칭송하는 것이오. 조상께서 공로와 덕을 쌓아, 하늘이 나리께 복을 내리시니, 그 복이 차고 넘칠 만큼 커서 저한테까지 내려온 거 같습니다, 하고 말이오. 이는 조상의 은덕이 커서 본인뿐만 아니라 대대손손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와 더불어, 거지들을 외면하면 조상께서 노하시어 있던 복도 사라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하오. 그래서 기회와 여유가 될 때마다 적선하고, 자식들에게도 그리하도록 교육하는 효과가 있으니, 어찌 상수라 하지 않을 수가 있겠소.”
송웅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던 황보호한은 내심 감탄했다. 그럴듯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그럴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구걸의 요령 전수는 다음에 또 하도록 하고, 진 형제가 거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하니, 묻지 않을 수가 없구려. 진 형제, 궁가방의 방주가 되어주시겠소?”
늘 단칼에 거절했던 진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송웅은 반사적으로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하지 않소.”
“나는 교주이고, 문주이고, 전주이며, 개인적으로 천하제일의 숙수를 꿈꾸고 있기에, 궁가방의 방주로만 전념할 수 없습니다.”
눈을 끔뻑끔뻑하던 송웅은 어깨를 으쓱였다.
“진 형제가 다재다능하고, 여기저기서 모셔가고 싶어 할 만큼 인기가 많은 걸 어쩌겠소. 일백 년도 못사는 세상, 괜한 후회 남기지 말고 이것저것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다 해보고 저세상으로 떠나시오.”
진천은 진심인지 거짓인지 알아야겠다는 듯 송웅과 눈싸움을 벌이다가 흔들림이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내가 궁가방의 방주가 되겠습니다.”
정말로 수락하자 송웅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지고, 황보호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오? 진 형제, 정말 궁가방의 방주가 되어주는 게요?”
“사내가 어찌 한 입으로 두말을 하겠습니까.”
“하하하!”
송웅은 너무 기쁜 나머지 진천의 손을 잡고 흔들더니, 누가 보건 말건 말 그대로 어린아이처럼 방방 뛰었다.
그러고는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진천에게 무릎을 꿇고 넙죽 머리를 숙이며 어투까지 존대로 바꾸어 인사를 하는데.
“방주님께 새삼 인사 올립니다.”
진천이 지팡이를 뻗어 어깨를 밀어내며 숙이지 못하게 했다.
“방주로서 첫 번째 명령입니다. 방주를 포함해 방도들 사이에 과도한 예의는 금지에요. 가볍게 머리를 숙이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물론, 위아래 구분이 없어도 문제겠지만. 말이 나왔으니, 묻겠습니다. 진 형씨는 어떤 역할을 맡겠습니까?”
“글쎄요. 방주님께서 정해주시지요.”
“나는 송 형씨가 전전대 방주의 제자, 전대 방주의 사제로서 다른 방도들의 모범이 될 장로를 맡아주었으면 합니다.”
“장로 좋지요. 언행에 유의하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또한 규범을 정하고, 옳고 그름에 관해 판단하는 역할을 맡아주면 좋을 거 같습니다. 과도한 예의는 지양한다는 등의 규범 말입니다. 그 직위의 명칭을…… 법개(法丐)라고 합시다.”
“알겠습니다. 법개로서 옳고 그름을 잘 구분해 보겠습니다.”
“또한 방도들의 형편과 어려움을 살피는 순찰(巡察)로서 활약을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싸돌아다니며 방도들을 챙기겠습니다.”
“그리고 방주가 멀리 떠나 돌아오지 않을 때, 위기에 빠져 목숨을 잃었을 때, 기타 여러 이유로 방주의 자리가 공석이 되었을 때 분란과 혼란을 피하려면 후계자가 있어야 하는데, 이를 후개(後丐)라고 합시다. 그리고 송 형씨 외에는 마땅한 사람이 없으니, 맡아주세요.”
이쯤 되자 송웅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방주님, 지금 저 멕이시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