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196
제1장 격론(激論)
딱!
마른하늘에 청명하게 울려 퍼진 소리.
그건 목검으로 바위를 때리거나 혹은 부지깽이로 나무를 두드릴 때 나는 소리와 비슷했다.
설사 그게 어느 쪽이든 간에 결코 사람을 칼로 베었을 때 나는 소리가 아님은 분명하다.
절규하며 장건을 부르짖던 소왕무와 대팔도, 고개를 떨어뜨렸던 원호도, 차마 말리지 못하고 안타깝게 바라보고만 있던 최고수들도, 삼황선원을 찾은 참관객들도 일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모두가 눈만 꿈벅거리면서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특히 야용비는 이번에야말로 장건이 죽을 거라고 기뻐하고 있다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휘둥그레졌다.
“저, 저……!”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오고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당황한 건 지켜보던 이들뿐 아니라, 직접 그 소리를 낸 장본인인 문사명도 마찬가지다.
“어?”
문사명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승천하는 용을 닮은 매화의 검집,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손잡이는 분명 소요매화검이었다. 손만 대면 베일 것 같은 소요매화검의 검날도 번쩍번쩍 빛나고 있다.
문사명은 아무래도 이상해서 검날로 장건의 머리를 몇 번 더 툭툭 쳤다.
따닥 딱!
무시무시하게 예리해 보이는 날인데 여전히 베일 생각은 않고 타공음 같은 맑은 소리만 울린다.
원래는 이렇게 툭툭 쳐도 두부에 박히듯 푹푹 박혀야 정상이다.
그만 쳐!
누가 뭐라고 하는데 들리지도 않는다.
문사명의 머릿속에는 도대체 이게 왜 이러지? 하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참다못한 장건이 소리쳤다.
“아프다고!”
문사명이 움찔해서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렀다.
“으이익!”
장건은 눈물을 찔끔 흘렸다. 벌써 혹이 크게 솟은 것 같았다.
이 어이없는 상황 속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다름 아닌 소왕무였다.
소왕무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응. 지금도 날카로운데 조금만 기운을 넣으면 더 심하게 날카로워져서 사고가 날까 봐 불안해. 생각났을 때 미리 날을 갈아 두려고
일전에 장건이 소요매화검의 날카로운 날을 보며 걱정스러운 투로 한 말이었다.
남을 해치지 않기 위해 한 행동이 결국엔 장건 자신의 목숨을 구하게 된 셈이다.
“푸, 푸하하하하!”
웃으면 안 되는 분위기인건 알지만 어쩔 수 없이 웃음을 터뜨리는 소왕무였다.
원호가 놀라서 소왕무를 쳐다보자 소왕무가 웃음을 겨우 참는 얼굴로 말했다.
“해번소에서의 사건, 큭, 크큭…… 기억 안 나세요?”
“해번소?”
원호는 어리둥절했다가 ‘아!’하고 탄성을 외치고 말았다.
해번소에서의 사건…….
소림사에 무인들이 잔뜩 몰려들었을 때 해번소의 병가에 무기를 맡기도록 했는데, 장건이 그 무기의 날을 죄다 갈아버려서 무인들이 봉기를 일으켰던 대사건이다.
그제야 다른 이들도 그 사건을 기억해냈다.
“헐!”
“뭐야? 그럼 저 화산파의 보검까지 날을 갈아버린 거야?”
“아니 무슨…… 겉으로 보기엔 바위도 자르게 생겼는데!”
워낙 대사건이었던지라 모르는 이가 없었다. 단지 그때의 상황을 지금에 연결시키지 못했던 것뿐이다.
사람들의 시선은 절로 윤언강을 향했다.
어떻게 보면 윤언강은 해번소 사건의 최대 수혜자라고도 할 수 있었다. 홍오를 쓰러뜨리고 천하제일인으로 등극한 게 바로 그 해번소 사건 이후다.
윤언강은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않고 가만히 서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도 제법 당혹스러웠다.
심지어 소요매화검을 건네줄 때 ‘네가 그 검을 어떻게 사용해도 좋다. 청강석도 베는 보검이다만 그게 부담스럽다면 날을 갈아 없애도 좋고…….’하고 말했던 게 바로 그 자신이었지 않은가!
윤언강의 턱 부근에 힘줄이 돋아났다. 억지로 감정을 절제하는 모습이다.
그런 윤언강의 마음도 모르고 문사명이 자신을 자꾸 돌아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 대는 것이다.
그렇다고 윤언강이 ‘허허, 그냥 검이나 들고 돌아오너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검을 되돌려 받을 때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검을 가져갔던 상대를 실력으로 쓰러뜨리거나 혹은 상대가 죽었을 경우, 그렇게 둘 중 하나다.
첫 단계가 안 되었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되는데 문사명은 자꾸 당황해서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윤언강이 갈팡질팡하는 문사명의 행동에 노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바보 같은 놈! 네가 화산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구나!”
문사명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뜩이나 금방이라도 버림받을 것 같은 기분에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던 문사명이다. 장건을 죽이지 못하면 천하제일인인 그의 스승에게 버림을 받게 된다!
문사명은 이를 깨물더니 검을 들었다.
“으아아아아!”
소요매화검의 검신에 청명한 기가 어렸다. 위기가 다 날아갔으니 집중력이 바닥까지 떨어졌을 텐데 놀랍게도 검기를 뽑아낸다.
문사명도 솔직히 쓰러져 자고 싶었다. 너무 피곤해서 눈도 겨우 뜨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불안감이 얼마나 극심한지, 도저히 쓰러져 편히 쉴 수가 없었다.
장건은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검광에 식은땀을 흘렸다. 윤언강이 쏘아내는 암경은 이 순간조차 멈추지 않고 있었다. 전신을 달군 쇠꼬챙이로 쿡쿡 쑤시는 것 같다.
남은 모든 힘을 암경에 대항하느라 움직일 기운조차 없다. 그러나 가만히 있으면 어쨌든 죽고 만다.
‘어떻게 하지?’
이제 와서 이렇게 억울하게, 말도 되지 않는 이유를 빌미로 죽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그때.
장건의 명문혈을 따스한 기운이 두드렸다.
『내 기운을 받아들여라, 어서!』
‘이 목소리는!’
장건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홍오 대사님!’
『늦기 전에 빨리!』
장건은 반가움을 표하고 싶었지만 홍오의 말대로 빨리 행동을 취해야 할 때였다.
당장에 머리 위로 검기가 깃든 문사명의 검이 떨어지는 중이다.
장건은 명문혈을 열고 홍오의 온화한 진기를 받아들였다. 홍오가 평생을 닦아 온 역근경의 진기가 장건의 혈도를 타고 돌아다니며 전신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준다.
작은 세맥(細脈)까지도 놓치지 않고 돌아다녀 찢기고 상처가 난 부분을 매만졌다. 장건은 금세 고통이 줄어들고 속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홍오의 진기 중 일부는 윤언강의 암경에 대항하고 일부는 장건의 단전으로 흘러들어 단전을 감싸고 장건이 스스로 보양(保養)할 수 있도록 원기를 북돋웠다.
격공진기!
장건의 혈색이 한층 나아졌다.
그러자 윤언강의 표정이 변했다. 장건에게 변화가 생긴 걸 눈치챈 것이다.
장건은 몸이 회복되기를 더 기다릴 틈이 없었다. 튕기듯 일어남과 동시에 온 힘을 다해 문사명을 밀어버렸다.
말이 민 것이지, 전신에 내공을 두른 채로 세밀한 근육들의 힘을 모아 밀친 것이라 상당한 힘이 실려 있었다.
이미 몸에 익을 대로 익은 나선의 경력이 자연스럽게 실리면서 발끝에서부터 무릎, 허리, 어깨를 타고 장건의 양손을 통해 문사명의 가슴에까지 나아갔다.
문사명의 무복 상의가 갈가리 찢어지고 가슴에는 뚜렷하게 손자국이 남았다.
문사명은 그대로 붕 떠서 날려졌다.
“크억!”
천근 거력에 밀린 것처럼 문사명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쿠당탕탕!
문사명은 이 장을 넘게 날아가 바닥을 구르다가 겨우 몸을 회전시켜 일어섰지만 그래도 힘을 감당 못 하고 일 장을 더 바닥에 끌리며 다시 굴렀다.
윤언강이 때맞춰 받아주지 않았더라면 문사명은 필히 몇 바퀴를 더 구르고 팔다리까지 부러져서 처참한 몰골이 되어 버렸을 터였다.
윤언강은 문사명의 등을 손으로 받으면서 이화접목의 수법을 이용해 반대쪽 손으로 문사명에게 실린 힘을 날려버렸다. 윤언강의 반대쪽 소매가 돌돌 말렸다가 팡 소리를 내며 원래대로 펴졌다.
문사명은 푹신한 깃털에 파묻힌 것처럼 부드럽게 윤언강의 손에 잡혔다.
“사, 사부님…….”
윤언강은 싸늘한 눈으로 문사명을 내려다보았다.
“못난 놈.”
그의 말년에 화산파의 수뇌부가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제자로 받아들인 게 문사명이다.
윤언강은 그가 심혈을 기울여 키워낸 화산오검보다도 문사명에게 더 많은 기대를 갖고 있었다. 무공에 대한 탁월한 재능과 나날이 일취월장하는 실력을 볼 때면 머잖은 시간에 화산오검도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랬던 문사명이, 겨우 장건이란 애송이 하나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남들 앞에서 이다지도 허둥대는 꼴을 보이고 있다.
속이 상한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 속이 상하는 건, 저 장건이란 애송이가 다름 아닌 홍오가 선택한 아이라는 것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해 있을 때조차도 기어코 일어서서 해결해 내는 장건과 조금 실패했다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 문사명은 지금조차도 사람들에게 비교의 대상이다.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이 다 보고 있는 가운데, 이제 문사명은 영원히 장건을 넘어설 수 없다고 스스로 벽을 세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스스로의 족쇄로 작용하여 평생을 괴롭히리라.
과거에 윤언강이 그러했듯이…….
윤언강은 낮은 침음성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역시나 나라밀대금침술의 영향인가?’
금침은 제거했지만 그 여파가 얼마나 남아 있을지 얼마나 오래 갈지는 모른다. 북해궁주의 말에 따르면 금침은 제거할 수 있어도 금제된 오성은 스스로 풀어내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 상태로 보면 문사명은 평생 벗어나지 못하고 재기는 꿈도 못 꾼 채 패배자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제 윤언강은 선택해야 한다.
문사명을 살릴지, 버릴지.
문사명의 어깨를 쥔 윤언강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사, 사부님?”
문사명은 윤언강에게서 풍겨오는 음산한 느낌에 겁먹은 눈으로 윤언강을 올려다보았다.
윤언강이 은연중에 살기 어린 눈으로 문사명을 보았고, 그 눈빛을 본 순간 문사명은 자기가 버려질 거라는 걸 알고 말았다.
버려진다는 사실도 끔찍한데 그의 사부는 자신을 버리고 장건을 선택한 것 같았다! 분명히 그럴 것 같다!
문사명의 귀에 예의 그 소리가 들려왔다.
‘죽여…….’
‘아, 안 돼!’
‘죽이라니까. 사부는 널 버렸어.’
‘아니야!’
‘죽여!’
문사명은 마침내 더 참지 못했다.
푸욱!
윤언강의 등으로 눈이 시리도록 창백한 검신이 검기를 품고 튀어나왔다.
“아앗!”
“저, 저런!”
이를 지켜본 이들이 외마디 비명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삼황선원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연이어 벌어진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지켜보던 이들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
아깐 장건이 보검에 맞고도 베이는 대신 혹이 나서 당황스럽게 만들더니 이번엔 천하제일인 검성 윤언강의 배를 그의 제자가 찌른 것이다.
문사명이 쥔 소요매화검은 화산파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는 보검이다. 무뎌진 날과는 상관없이 그에 깃든 검기가 검강의 위력을 낸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윤언강의 호신기와 철포삼의 반발력을 종잇장처럼 찢고 복부를 관통했다.
장건을 해치지 못한 화산파의 칼이 화산파의 존장을 해한 이율배반적인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윤언강조차 자신의 몸에 일어난 일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아래로 내려 자신의 배를 확인했다.
그러더니 시선을 들어 문사명을 똑바로 보았다.
문사명은 손을 떨고 있었지만 표정은 악에 받쳐서 지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두 눈에는 온통 증오가 가득하다.
윤언강은 그런 문사명에게서 지극히 익숙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지금껏 살아온 내내 자신 역시 그러했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남에게도 주지 않겠다!
윤언강의 담담한 표정이 서서히 변화했다.
어이없게도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흐뭇한 미소였다!
아무리 천하제일인이라 해도 검기가 어린 검이 몸을 관통했으니 적잖은 내상을 입었을 테고 고통도 심할 게 분명했다.
몸의 고통뿐인가? 자식과도 같은 제자가 자신의 배에 칼을 꽂은 정신적 충격은 다른 누구보다도 컸을 것인데!
그럼에도 오히려 웃고 있으니 오히려 공포스럽기까지 한 모습이다.
문사명은 흠칫 놀라선 검을 더 힘껏 틀어쥐었다.
하지만 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박힌 채였다.
윤언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문사명에게 말했다.
“이제야 네게 부족했던 한 가지가 채워졌구나.”
“큭!”
문사명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윤언강은 아랑곳 않고 장하다는 듯 문사명의 어깨를 두드렸다.
“설혹 이후에 심마에서 벗어나더라도 지금의 감각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된다. 젊었을 적 내가 느낀 미증유의 증오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처럼, 너 역시 지금의 증오가 앞으로의 너를 인도할 것이다.”
윤언강의 복부를 관통하고 등까지 튀어나와있던 검기가 서서히 옅어지더니 마침내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윤언강은 문사명의 손을 함께 잡더니 자신의 배에 박힌 소요매화검을 쑥 뽑았다. 새빨간 피가 왈칵 흘러내렸다.
문사명은 너무 놀라서 뒤로 주춤거리고 물러났다. 직후에 윤언강의 배에서 흘러나오던 피가 꺼멓게 눌어붙으며 아지랑이를 피우기 시작했다.
윤언강이 조용히 공력을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고요하지만 강력한 힘을 품은 공력이 윤언강의 체내에서 마구 폭발하고 있었다.
눈꼬리에 자줏빛이 맴돌며 윤언강의 눈동자가 깊어지기 시작한다.
“결정했다.”
윤언강이 읊조린 말에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그의 옷깃이 휘날렸다.
털퍼덕.
문사명은 눈만 크게 뜬 채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사부의 모습은 그야말로 지독한 위압감을 내뿜는 거인이었다.
윤언강의 살기가 찌를 듯 사방으로 쏘아졌다. 윤언강이 가슴을 펴고 우뚝 서서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껄껄껄!”
삼황선원을 뒤덮는 살기 속에 윤언강의 웃음소리가 섞였다.
‘이 사부는 너를 위해 다른 것들을 버리도록 하겠다!’
윤언강이 살기 속에 담아 외치고 있는 무언(無言)의 대화를 다른 이들은 들을 수 없었지만 문사명은 똑똑히 들었다.
문사명은 어깨를 움츠렸다.
사부 윤언강이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이다!
주변의 공기가 지독히도 무거워졌다.
참관객들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분위기를 피부로 느꼈다. 입에서 절로 신음이 새어나온다.
“으음…….”
윤언강이 처음 목표로 삼은 건 물론 두말할 필요 없이 장건이었다.
윤언강의 시선이 닿은 장건은 몸이 반으로 찌그러든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윤언강은 장건을 향해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마치 손자에게 얘기를 걸 듯 말했다.
“너는 참으로 골치 아픈 아이로구나.”
장건이 뭐라고 대답하려 했지만 바람 새는 소리만 나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꺼…… 꺽.”
상상을 초월하는 압박이었다. 맨몸으로 수백 근의 쇳덩이를 받치고 있는 것 같았다.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핏!
코피가 터져서 흘러내린다. 목의 상처에서도 멈췄던 피가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홍오의 기운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장건의 모든 혈도가 급격히 쪼그라들며 내공의 순환이 어려워졌다.
장건은 실낱같이 흐르는 한 줄기 내공을 겨우 끌어내어 안법을 썼다.
흑백 세상 속에서 윤언강만이 유일하게 빛을 낸다. 빛살은 하나하나가 유형화된 살기로 변해 장건을 향해 달려든다. 수백, 수천 개의 바늘이 되어 장건의 몸에 꽂힌다. 혈도를 파고들어 상처를 내고 내장에 구멍을 낸다.
피하고 싶지만 움직일 수 없고, 막고 싶지만 방법이 없다.
장건은 도무지 살아날 길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한편으로는 지금 이 상황이 자기가 매일 그려오던 윤언강의 모습이었기에 지극히 당연스럽게 여겨졌다.
‘맞아. 바로 이랬어.’
이어 윤언강이 매우 느린 동작으로 손을 들기 시작했다. 그가 이후에 무엇을 할지는 자명하다.
하지만 여전히 장건은 막막할 뿐이다. 가상으로 펼친 수천 번의 심상 대결에서조차 단 한 번을 버텨낸 적이 없었다.
이때 윤언강을 주시하던 원호가 소리쳤다.
“설마!”
원호는 윤언강의 한쪽 귀가 어색하게 사라져 있는 걸 그제야 본 것이다.
“그 왼쪽 귀……, 설마 당신이었습니까?”
윤언강이 눈동자만 돌려 원호를 보았다.
장건이 가사상태에 빠져 누워 있을 때 누군가 장건에게 비전에 가까운 운기행공법을 알려준 적이 있었다.
그때 서른 명의 나한승은 보지 못했으나 한 명의 나한승만이 어떤 노인을 보았는데, 상처를 입었는지 한쪽 귀가 없었다고 했다.
바로 지금의 윤언강과 같은 모습인 것이다!
윤언강은 비소를 지었다.
“풍진 그 친구의 검이 꽤 날카로웠지.”
윤언강이 낙산대불 앞에서 풍진을 비롯한 독선, 연화사태까지 우내십존 셋을 동시에 상대했을 때의 일이다. 독선 당사등은 그때의 결투로 말미암아 폐인이 되었다.
원호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얼굴로 물었다.
“왜……, 지금 죽일 거면 왜 그때 건이를 살려놓으셨습니까? 화산파의 비전심법을 알려주면서까지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최고수들도 장건이 배운 운기행공법이 누구에게서부터 나온 것인지 알게 되었다.
최고수들의 표정도 원호처럼 의아함에 물들었다.
그때 윤언강이 장건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장건은 필히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비전심법까지 알려줘서 살려놓는 바람에 가뜩이나 강한 장건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딱히 티가 안 나긴 하지만 덕분에 장건은 환골탈태…… 비슷한 것도 겪었다.
문사명이 쳐다보기도 힘들 정도로 강해지게 만든 게 윤언강 본인이면서 이제 와서 너무 강해졌으니 죽이겠다는 건 무슨 변덕스러운 심보란 말인가!
최고수들이 조금 주저하며 원호의 뜻에 동조했다.
“확실히, 방장 대사의 말이 맞네.”
“그것도 대의를 위한 일이었다 말할 셈인가?”
하지만 그에 대해 윤언강은 매우 간단히 대답했다.
“솔직히 이 정도까지 될 줄은 몰랐다고 해야지.”
최고수들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했다.
“엥?”
윤언강이 말했다.
“내가 알려준 건 자하신공의 상승경지로 가기 위해 화후를 다스리는 운기공법이라네. 내상이 조금 진정되어 금분세수식까지는 마칠 수 있는 상태를 원했지, 지금처럼 모두를 때려잡을 정도로 성장하길 원했던 건 아니라네.”
“그 말인즉슨…….”
최고수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결국 자네가 아니라 자네 제자의 손에 건이가 쓰러지기를 바랐던 거군.”
“그것을 위해 북해의 요인을 인질로 잡고 며칠이나 인근에서 기다렸고.”
“그러나 제자는 실패했지. 해서 이젠 직접 죽이려는 게야.”
“이게 검성 그대가 말한 대의인 건가?”
윤언강은 껄껄 웃었다.
“괜찮네! 자네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하더라도 저 아이가 오늘 죽는다는 건 변함이 없으니! 하나, 저 아이가 살아있다면 강호 무림이 더 이상 발전하기 어려울 거라는 건 명심해야 할 걸세!”
그런데 갑작스러운 외침이 윤언강의 말을 가로막았다.
“강호 무림의 발전이 뭐가 어쨌다는 거요?”
원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윤언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윤언강은 장건을 향했던 손을 내리고 몸을 돌렸다.
비틀거리는 몸짓으로 새파래진 입술을 딱딱 부딪치면서 고현이 윤언강을 노려보고 있었다.
윤언강이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지금…… 한 말이 혹시 내게 한 것인가?”
“그렇소.”
고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외쳤다.
“검성! 당신이 말한 대로 된다면 도대체 달라지는 게 무엇이오? 뭐가 변하고 뭐가 발전한다는 것이오?”
고현은 문사명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언성을 높였다.
“당신의 제자는 당신의 뒤를 이어 천하제일이 될 테고, 북해빙궁의 토벌전은 당연히 십대 문파를 주축으로 이루어질 거요. 그렇게 토벌전이 끝나면 중소 문파는 다시 예전처럼 거대 문파의 밑에서 종속되는 삶을 살 테고 십대 문파의 기득권은 변함없이 유지되겠지. 그럼 아무 것도 변하는 게 없는데 당신이 말하는 발전이니 뭐니는 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오.”
윤언강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고현은 몸이 극도의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는데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검성! 당신이 아무리 좋은 말로 겉을 덧씌워도 본질은 변하지 않소!”
그동안 그가 태상을 따라 고난의 길을 걸어온 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윤언강이 원하는 건 혼란이 오기 전인 예전의 세상이다.
그러면 결국 아무 것도 변하는 게 없지 않은가!
“검성, 세상을 둘러보시오! 스스로 막히지 않았다는 그 귀를 다시 열어 시대가 요청하는 세상의 소리를 들어보시오! 변혁을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당신의 귀에는 들리지 않소이까?”
고현의 절규 같은 외침에 삼황선원은 자못 숙연함이 감돌았다.
시대의 요청이란 말이 주는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러나 윤언강은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 되물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검성, 당신은 진정 사람들의 외침을 외면할 셈이시오?”
윤언강이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고 문주, 그대가 원하는 게 무엇인가.”
“변화! 기존의 잘못된 질서를 타파하는 것이 내 목표요.”
윤언강이 다시 물었다.
“그대가 말하는 잘못된 질서라는 게 뭔가.”
“기득권을 가진 소수의 권력층이 다수를 희생시켜 자신들만의 이익을 취하는 지금 세상을 말하는 거외다. 그게 잘못되지 않았다면 뭐가 잘못된 것이겠소?”
“자네 무언가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네.”
윤언강은 고현에게 제자를 가르치는 듯한 투로 말했다.
“자네가 바뀌어야 한다 역설하는 질서는 무림이 시작되고 확립된 이래로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네.”
“뭐, 뭐요?”
“생각해보게나. 무림대전이 벌어지면 누군가는 지도자가 되어 나머지를 이끌어야 하고, 율법이 통하지 않는 사건이 생기면 누군가는 대표로 판결을 내려야 하는 법일세. 스스로가 원치 않는다 해도 남들은 이미 그들이 권력을 가졌다고 말한다네.”
“하지만 권력을 가진 자가 도덕적이라면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오.”
윤언강은 웃지 않고 진지하게 답했다.
“집단을 이루는 개개인은 도덕적일지라도 집단을 대표하는 개인은 도덕보다 집단의 이익과 안정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지. 대저 권력자란, 도무지 도덕과는 어울리지가 않는 법일세.”
“궤변이오! 그건 그저…….”
윤언강이 고현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내가 묻겠네. 자국의 백성을 굶기지 않기 위해 타국을 침략하여 약탈을 일삼는 왕과 자국의 백성이 굶어 죽더라도 끊임없이 도덕을 외치는 왕이 있네. 자네라면 어느 쪽 왕을 선택하겠는가?”
고현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윤언강이 다시 물었다.
“다시 묻겠네. 자국의 백성이 굶어 죽어가고 있어 타국을 침략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면, 세상에 어떤 도덕적인 권력자가 있어 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제야 고현은 윤언강이 지금의 상황을 빗대어 한 말이라는 걸 알았다.
고현이 소리쳤다.
“검성! 귀하는 왕이 아니며 또한 우리는 남을 약탈할 필요가 없소! 거대문파가 기존의 기득권을 조금 내려놓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일들은 충분히 해결될 것이오!”
윤언강의 언성도 점차 높아졌다.
“자네는 스스로가 정의인양 열변을 토하고 있지만 결국은 누군가의 손에 쥔 걸 빼앗으려는 것이 목적일 뿐. 그것은 약자를 대변하는 것도 새로운 사상을 전파하는 것도 아니라네! 그저 누군가와 누군가가 지키느냐 빼앗느냐를 두고 벌이는 싸움일 뿐이지!”
“본말을 전도하지 마시오. 아무런 의미 없는 진흙탕 싸움이 아니잖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진 싸움인지를 결정하는 건 자네가 아닐세!”
윤언강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말했다.
“싸움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이 강호에 존재하는 단 한 가지, 절대 유일한 규칙만이 그것을 가능케 하지.”
고현은 흠칫해서 신음처럼 말을 내뱉었다.
“강자존(强者尊)…….”
강자가 모든 것을 갖는다…….
그것은 강호에 몸담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법칙이다.
“나를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 하나뿐일세. 알겠는가?”
윤언강이 반문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듯 날카로운 눈초리로 말했다.
고현은 이를 악물었다.
지금 그는 윤언강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공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검성……, 지금의 일을 잊지 않을 것이오.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소.”
윤언강이 미묘하게 찡그린 듯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불회(不回)하였으되 불회(不悔)하기로 마음을 정한지 오래라네. 자네는 어떠한가?”
그것은 돌연 벌어진 일이었다.
윤언강이 몸을 틀더니 검결지로 허공에 불(乀)자를 그렸다.
고현의 가슴에서 순식간에 피가 배어 나왔다.
“크헉!”
고현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무릎을 꿇었다. 가슴을 불로 지진 듯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다.
새빨간 피가 옷을 적시며 뚝뚝 떨어지는데 정작 옷은 멀쩡했다. 내부에서 가슴을 가르고 나온 것이다.
“고, 공명검……!”
고현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위기까지 다 상해 있어서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윤언강은 쓰러진 고현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장건이 윤언강과 시선을 마주치고는 이를 꾹 깨물었다.
윤언강이 마침내 손을 쓰려는 것이다. 그가 손을 위로 치켜드는데 주변의 공기가 일렁였다. 고현을 칠 때와는 집중도가 사뭇 다르다.
한데 그때 누군가 윤언강과 장건의 사이를 가로막고 끼어들었다.
벽력도다. 벽력도가 먼저 나서자 이어 다른 최고수들도 하나둘 벽력도의 곁에 와서 서기 시작했다.
윤언강은 빤히 최고수들을 바라보았다.
“뭐하는 짓들인가?”
윤언강의 말투는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실로 가소롭기 짝이 없다는 투였다.
산산노사가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보면 모르겠는가.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 싶어서 그러는 게지.”
“이건 아니다?”
벽력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끼어들었다.
“건이 녀석이 우리한테 한 말이 있어. 그때는 녀석이 건방지다고만 생각하고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
윤언강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래. 그게 뭔지 말해 보게.”
“사람들을 괴롭히는 마교와, 그런 마교를 없애기 위해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우리들. 그 둘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느냐고 물었네.”
육망지 고릉이 말을 덧붙였다.
“자네 말대로라면, 자국 백성을 살리기 위해 타국 백성을 죽여야 한다는 것일세.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한다는 거지. 그런 살상이 과연 정당한 일인가?”
운일도장도 말을 거들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사파와 다른 점이 무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윤가 자네는 그 명분을 자신의 제자를 위해 사적으로 이용하고 있네.”
윤언강은 성큼 한 걸음을 내딛었다.
“내가 보기에 자네들이야말로 아직도 불회(不會)하고 있네. 어리석군, 어리석어.”
불회란, 명석하게 알지 못하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윤언강의 눈빛이 변했다. 그가 허공에 가볍게 휘저은 손짓에 운일도장이 가장 먼저 피를 뿜었다.
“컥!”
운일도장은 비틀거리다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운일!”
최고수들이 놀라 외치는데 윤언강이 다시금 한 걸음을 내딛었다.
“정파와 사파의 다른 점이 무엇인지 내 알려주도록 함세.”
허공을 유유히 휘젓는 윤언강의 손길에 육망지 고릉이 가슴을 부여잡았다. 핏물이 콸콸 새어나왔다. 급히 혈도를 눌렀으나 공명검의 검기에 당한 상처라 피가 쉽게 멎지 않았다.
윤언강이 또다시 한 걸음을 걸으며 말했다.
“일체의 자아(自我)와 사물이 공(空)임을 깨닫는 공삼매(空三昧)의 영역을 지나면, 모두가 공이기에 결국 서로 간에 아무런 차별도 없다는 걸 무상삼매(無相三昧)를 통해 알게 된다네.”
윤언강의 손끝이 벽력도를 향했다.
“하앗!”
벽력도가 급히 공력을 끌어올리며 호신기와 철포삼을 최대로 이끌어냈으나, 그 역시 무의미했다.
따다당!
벽력도의 웃옷에서 불꽃이 튀었다. 벽력도는 굳어버린 듯 멈추었다. 어깨에서부터 허리까지 피가 점점이 배이다가, 어느 순간 허물어지듯 피를 주룩 쏟아냈다.
이를 지켜보던 최고수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윤언강 이놈!”
청면도객이 바닥에서 칼을 주워들고 윤언강을 향해 몸을 날렸다.
윤언강은 고개를 아주 살짝 돌려 눈길을 주었다. 뿌리치듯 내젓는 소매 깃에 청면도객의 칼이 세 동강 나고 청면도객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쓰러진 청면도객이 꿈틀거리며 피를 뿜어냈다.
“만물이 무상이고 서로 간에 다르지 않으니 구분하는 것조차 무상함일세. 무원삼매(無願三昧)의 눈으로 정과 사를 바라보면, 서로 뒤얽히고 섞여서 어느 것이 정이고 사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는 것일세.”
윤언강은 아무런 감정의 변동도 없는 억양으로 말을 내뱉으며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서랏!”
혈랑자가 몸을 내던져서라도 진로를 막을 생각으로 쇄도하며 부딪쳐 간다. 자신의 손톱을 거칠게 물어뜯어 끝을 뾰족하게 만들었다. 조금이라도 더 날카롭게 만들기 위함이다. 손톱 끝에서 푸르스름한 예기가 치솟는다. 윤언강의 전신을 할퀴었다.
하지만 예기는 윤언강의 몸에 닿기도 전에 소멸되었다. 혈랑자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부릅떠지고, 윤언강의 몸은 흐릿해지면서 어느덧 혈랑자를 통과해 있었다.
“비록 구분할 수 없는 정사는 허상일 수밖에 없으나, 인세(人世)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얕은 지혜가 있어 굳이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을 구분하게 되니.”
최고수들은 끝끝내 윤언강의 앞을 가로막으려 애썼다.
“멈춰!”
“그만두게!”
“으아악!”
온갖 고함소리와 비명이 난무하는 가운데 윤언강은 혼자서 정원을 거닐 듯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어느 순간 허상의 경계선을 임의로 구분지음으로써 한쪽이 정이 되고 정의가 되며 역사를 장악하는 주인이 된다는 걸 알게 된 것일세.”
반오가 쓰러지고, 장안대호가 이어 쓰러졌다.
자신의 앞길이 온통 피로 물들었음에도 윤언강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힘 있는 자, 살아남는 자가 구분 짓는 정사의 경계에 대체 어떤 의미가 있어 자네들이 목숨을 내던진단 말인가? 그건 그저 한여름 밤 나방이 스스로 불에 뛰어드는 비아부화(飛蛾赴火)처럼 무의미한 일일세.”
윤언강이 피 웅덩이를 밟고 지나가는데 신에는 핏물 한 방울조차 묻지 않고 있었다. 피 웅덩이 위를 지나갈 때마다 작은 파문이 일뿐이다.
“유의미한 건 결국 현세에서 내가 긋는 한 획이 세상에 미칠 영향이지, 세상 사람들이 나를 규정지을 무상의 도덕성이 아니라는 걸세.”
대부분의 참관객들도 어지간히 무공을 한다는 축에 속했지만, 감히 윤언강의 앞을 막아설 엄두도 내지 못했다. 피를 뿌리며 장건을 향해 걸어가는 윤언강은 순수한 악(惡)의 화신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가 걸어온 뒤로 신음하며 쓰러져 있는 수많은 고수들은 그가 살아온 길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복부를 베인 장안대호는 배를 끌어안고 피투성이인 바닥을 뒹굴다가 이를 갈았다.
“검성! 우릴 농락하는 거냐! 차라리 죽여다오!”
윤언강은 지독하게 손을 썼지만 직접적으로 숨통을 끊지는 않았다.
윤언강이 자비로워서는 결코 아닐 게 분명하다. 자비롭다면 이 정도로 손을 썼을 리도 없다.
윤언강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리 매정한 사람이 아니라네. 이제 자네들은 이곳을 떠나도 좋아.”
최고수들은 치명상을 입고 있는 와중에도 윤언강의 말투에 치를 떨었다.
밖에는 관부의 천라지망이 펼쳐져 있다고 했다. 사력을 다해도 이곳을 벗어나 문파로 돌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는데, 이런 몸뚱아리로는 결코 벗어날 수가 없다. 각 문파의 최고수들이 한 장소에서 떼로 몰살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판이다.
관부에서는 천라지망을 거둘 때에야 각 문파의 존장 격인 최고수들이 천라지망 안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고,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입을 닫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후엔 윤언강이 원한 대로 강호 무림에 함부로 간섭을 하지 못할 수 있다.
윤언강이 굳이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어느새 그의 앞에는 원호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원호는 분개한 나한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했다. 어차피 나한들이 합세해 봐야 윤언강의 일초지적이 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원호는 공명검이 베고 간 허벅지의 끔찍한 통증에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도 기어코 소리쳐 물었다.
“정말…… 이렇게까지 하셔야 하겠습니까? 지금 품은 원한이 본사의 홍오 사숙조 때문이었다면, 이미 이전 번의 일로 충분히 갚지 않으셨습니까!”
최고수들 중 누구도 멈추게 하지 못한 윤언강의 걸음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담담하던 표정도 지극히 싸늘해졌다.
“누가 그러던가? 원한을 갚았다고?”
원호도 이를 씹었다. 어차피 이판사판이다.
“지금 윤 선배가 가진 천하제일인의 명성은 홍오 사숙조를 쓰러뜨리고 얻은 명성입니다. 그것으로 족하지 않으셨습니까?”
윤언강이 처음으로 표정을 드러냈다. 그것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적개심이었다.
“자네는! 금제로 천치가 된 빈껍데기를 밟고 얻은 명성 따위가, 나 윤언강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윤언강의 눈에 불이 켜졌다.
“육십 년! 육십 년의 세월 동안 오로지 단 한 사람을 쓰러뜨리기 위해 정진해왔네. 하지만 그는 과거에 내가 알던 그가 아니었어! 그 끝도 없이 허탈한 마음을 방장 대사가 알겠는가!”
윤언강이 손을 들었다. 이제 그는 거칠 게 없었다.
“이젠 아무래도 좋아. 어쨌거나 내 제자에게만큼은 수십 년 동안 내가 지고 살았던 절망감만은 물려주지 않을 작정이니까 말일세.”
원호는 피를 토하며 양 팔을 활짝 벌렸다.
“건이를 해치려면 날 죽이고 지나가셔야 할 거외다!”
“그래? 그럼 자네 또한 절망을 맛보게 해줌세.”
원호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윤언강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원호의 뒤에 있던 장건은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저었다.
“방장 사백님, 소용없어요.”
장건은 이미 윤언강의 의지가 원호를 건너뛴 걸 보았다. 원호를 넘어 긴 호선을 그린 공명검의 선이 장건에게 와 닿았다.
윤언강이 말한 절망이란, 장건을 지킬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장건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곤 윤언강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불꽃이 튀던 윤언강의 눈동자는 차츰 가라앉아 거진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가 감정을 절제하면서 눈가에 짙게 어린 자색 기운은 더욱 뚜렷해져 갔다.
감정이 가라앉은 윤언강이 장건을 보며 말했다.
“아이야, 네게 큰 악감정은 없단다. 단지 네가 홍오의 제자였다는 것이 너의 운명을 정했느니라.”
이윽고, 공명검의 은선이 크게 출렁거렸다. 공간과 공간을 잇는 점들을 뛰어넘어 바로 앞을 가로막은 원호를 통과하더니 곧장 장건을 향해 날아들었다.
장건은 느낄 수 있었다.
가슴 한복판에 동그란 몽우리 같은 게 맺혔다. 몽우리는 손톱만 한 크기의 작은 기 덩어리였는데 장건이 곧바로 알 정도로 막대한 기운이 응축되어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장건의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기운을 가진 남의 기, 윤언강의 공력이었다. 통상적으로 장심(掌心)이나 혈도 일부를 통해 들어온 게 아니라 공간을 뛰어넘고 들어와 몸 안에 틀어박힌 것이다.
몽우리는 꾸물거리고 뭉치더니 순식간에 커지면서 그대로 날카로운 검기를 가진 꽃으로 피어나려 했다. 이번 검기는 아까보다도 훨씬 크다.
그 모든 것들이 스스로의 몸을 관조할 수 있는 장건의 감각에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번에야말로 장건을 확실하게 죽이겠다는 의도가 빤히 보인다.
‘아빠, 엄마.’
장건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몽우리가 피어나 내부를 수십 토막으로 잘라내는 끔찍한 상상을 하면서…….
☆ ☆ ☆
태상은 한없이 깊이 침잠(沈潛)했다.
천라지망이 완전히 갖춰지기 전에 빠져나와 장건을 도운 것 까지는 좋았으나, 이후가 문제였다.
격론을 펼치던 윤언강이 마지막에 원호에게 내비친 짧은 진심이 태상의 발을 붙들고 무저갱의 나락으로 끌어당긴 것이다.
“나 때문이라고……?”
오늘에야 처음 본 윤언강의 증오였다.
육십 년의 세월을 숨겨온 그 증오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었다니……, 자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것이라니…….
“그게…….”
태상의 머릿속에 과거의 일들이 떠올랐다. 안개처럼 흐릿해서 잘 기억할 수 없던 기억들이 하나둘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그 기억 속의 대부분에는 젊은 시절의 윤언강이 웃고 있는 모습이 있었다. 화도 내고 큰소리도 내던 모습도 초반엔 있었으나 어느 순간의 기억에서부턴 볼 수 없었다.
“그때부터였던 거냐.”
태상의 혈안이 회상에 젖었다. 아마도 윤언강이 태상의 앞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게 된 건, 역시나 자기가 화산파의 무공을 펼친 후부터였던 것 같다.
태상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건 그냥 장난이었어. 내가 누군가보다 월등하다는 우월감에 철없이 저지른 장난이었다고……. 그런데 네놈에겐 그게 그렇게도 커다란 상처가 되었던 게냐.”
참을 수 없는 수십 년의 회한이 폭풍처럼 밀려와 태상의 가슴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오더니 골이 욱신거렸다.
태상은 삼황선원의 별채 담 뒤에서 힘없이 주저앉았다. 등과 옆구리에는 부러진 화살이 박혀 있었으나 반드시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치는 후회와 자괴감……, 혼란스러운 마음이 태상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끄윽!”
태상은 머리를 붙들었다. 눈의 핏줄이 터져 피눈물을 흘리는 듯한 얼굴이었으나 정신은 전에 없이 맑았다.
‘공명검!’
아직 그에게는 할 일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