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8
제 7 장 검성의 사과 깎기
굉목은 팔대호원을 지나 방장실 앞에 섰다.
“방장 사형, 굉목입니다.”
방장실 안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오! 굉목 사제가 왔군. 들어오게.”
굉목은 방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방장실은 단출했다. 한쪽에 낡은 서탁(書卓)이 놓여 있고 족자 한 폭이 벽에 걸려 있는 것이 다였다.
“어서 오게.”
인자한 주름살 아래 희고 굵은 눈썹을 가진 방장 굉운이 굉목을 맞았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어울리게 소탈한 외모를 가진 방장 굉운의 모습은 검소한 방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굉목은 굉운을 찾아온 목적을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방장 굉운의 뒤로 손님이 있었던 것이다.
청수한 인상의 노인 한 명과 이목구비가 뚜렷한 잘생긴 얼굴의 청년 한 명이었다. 노인이나 청년이나 범상치 않은 기도를 풍기고 있었다.
굉운이 굉목과 그들을 인사시켰다.
“이쪽은 제 사제인 굉목입니다.”
노인은 굉목의 이름을 듣자 고개를 살짝 끄덕거렸다.
“이름은 진작에 들었네만 실제로 보긴 처음일세.”
“그러셨군요.”
굉운이 노인과 청년을 가리키며 굉목에게 말했다.
“화산에서 오신 분들이네. 검성이라 하면 사제도 알겠지.”
굉목은 놀란 눈빛으로 노인을 보았다.
검성(劍聖)!
현 무림에서 검성이라 불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화산파의 윤언강이다. 검에 있어서는 극에 다다랐다고 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강호행을 하던 30여 년간 수많은 도전을 받았지만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어 가히 현 무림의 최강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히고 있다.
더구나 윤언강은 검성이라는 명호에 집착하지 않고 예순이 되기 전, 화산으로 돌아와 후배들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화산의 절정 고수 다섯, 화산오검(華山五劍)이 모두 그의 손에서 키워졌다.
당금 화산의 위세가 강호를 위진(威震)하는 것도 모두 윤언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산속에 파묻혀 지내는 굉목이라 할지라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이였다.
그런 윤언강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방장 대사께서 과분한 허명으로 나를 부끄럽게 만드시는구려.”
굉운은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고 대답했다.
“검성께서 스스로를 검성이 아니라 하시면, 강호의 군웅들이 어리둥절해할 것입니다. 검성이 소림사에 와서 실종되었으니 찾아내라고 저를 닦달할지도 모릅니다.”
“허허. 누가 감히 소림의 활불(活佛)을 찾아와 닦달을 하겠소이까.”
윤언강은 곧 자신의 옆에 있는 청년을 소개했다.
“아, 이 녀석은 내가 말년에 얻은 제자 녀석으로 문사명이라 한다오. 이 녀석 뭘 하느냐? 어서 인사 드리거라.”
청년 문사명이 굉목을 보고 포권했다.
“문사명이라 합니다.”
굉목이 반장으로 답하며 그를 보았다.
윤언강의 배분이 굉목이나 굉운보다 한 대가 높으니 이제 갓 20대인 문사명은 굉목이나 굉운과 같은 배분으로 인정된다. 화산의 장문인과 같은 배분이다.
문사명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범의 눈썹과 용의 눈을 가졌다. 한눈에 보기에도 검성 윤언강이 화산의 배분을 무시하고 제자로 받아들일 만한 인재다. 앞으로 몇 년 내에 강호에 신성(新星)으로 떠오를 만한 재질이 느껴진다.
왜였을까?
굉목은 문사명의 모습에 장건이 겹쳐 보였다.
“굉목이라 하네.”
괜히 심기가 불편해진 굉목은 평소보다도 더 무뚝뚝하게 인사했다. 가뜩이나 장건의 문제로 답답한데 시답잖은 인사나 나누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굉목의 말투 때문에 분위기가 딱딱해질 것 같자 굉운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해하게나. 사제는 산중에서 오랜 시간 수행을 하고 있어서 사람을 상대하는 데 익숙지가 않다네.”
“저는 괜찮습니다.”
문사명은 걱정 말라며 웃음으로 화답했다.
윤언강이 먼저 나섰다.
“그럼, 우리는 이만 가봐야겠소이다.”
굉운이 말을 받았다.
“귀한 손님을 모셔놓고 금세 축객하는 것 같아 빈승의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허허. 인사만 드리고 내려갈 생각이었소이다. 방장 대사께서는 마음에 두지 마시구려.”
굉운은 동자승을 불러 윤언강과 문사명을 안내토록 했다. 둘은 곧 인사를 하고 방장실을 나섰다.
굉운이 ‘허’ 하고 웃으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화산에 화산오검에 이어 또다시 홍복(洪福)이 내렸구나. 어디서 저런 인재를 들였을꼬. 우리 소림에도 저만한 아이가 하나 있으면 좋겠거늘. 불제자인 나도 탐이 날 지경이니…….”
굉운이 슬쩍 굉목을 쳐다보았다. 마치 제자를 들이지 않은 굉목을 타박하기라도 하는 투의 얼굴이었다.
굉목이 그의 얼굴을 외면하며 물었다.
“방장 사형께서 제게 무슨 볼일이십니까?”
굉운이 빙그레 웃었다. 보기 좋은 주름살이 입가에 흘렀다.
“보통은 화산의 검성이 무슨 일로 제자를 데리고 찾아 왔느냐, 아니면 그동안 잘 지냈느냐 하는 얘기부터 하질 않는가? 역시 사제답군 그래.”
굉목은 불만 있는 사람처럼 인상을 쓰고 대답했다.
“검성이 오든 황제가 오든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게다가 방장 사형의 얼굴을 보니 신수(身手)가 훤하신데 뭐하러 안부를 묻겠습니까?”
“허허, 내 신수가 훤해 보이는가? 그러고 보니 속세에서 자유롭다던 절간에서조차 실로 자유로운 건 사제였구먼.”
몇 년 동안 굉운을 괴롭혀오던 소림의 재정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굉운의 표정은 밝을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소림에 무슨 일이 나든 신경도 쓰지 않는 굉목은 재정이 해결되거나 말거나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굉운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굉운이 말을 한 후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굉목은 굉운의 미소에 ‘끙’ 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강호에서는 저 웃음을 두고 굉운을 활불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굉목이 마지못해 물었다.
“검성께서 왜 소림을 찾으신 것입니까?”
“홍오 사숙을 찾아오셨다가 돌아가시는 길이네. 예전부터 친분이 있으셨으니 제자라도 인사시키려 오신 것일 테지.”
“사부님을?”
굉목은 홍오의 이야기가 나오자 인상을 썼다. 굉운이 웃으면서 말했다.
“여전히 자주 찾아뵙지는 않는 모양이군.”
굉목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와 사부의 관계는 좋지 못했다.
굉운이 화제를 돌렸다.
“아이는 데려오지 않았나?”
“잠시 공양간에 두었습니다. 대체 그 아이에게는 무슨 볼일이십니까?”
“아, 별 얘기는 아닐세. 자네도 나이가 적지 않으니 슬슬 제자를 들여야 하지 않을까 해서 말이네. 7년이나 함께 있었던 아이라면 정도 들었을 만하고.”
굉목은 인상을 썼다.
“방장 사형. 저는 평생 제자를 들이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이제껏 내버려두시더니 갑자기 무슨 제자 타령입니까!”
“그럼 사제는 무책임하게 아이를 내칠 셈인가?”
굉목은 무슨 뜻이냐는 듯 굉운을 쳐다보았다. 굉운은 활불다운 미소를 지으며 굉목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설마……, 건이가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인가? 어떻게…….’
굉목은 숨이 탁 막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승려다.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다. 굉운이 먼저 선수를 치긴 했지만 어차피 부딪쳐야 할 일이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굉운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7년이나 지났네. 무공 한 수 배웠다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하나, 그것이 자네의 쌍절인 것이 문제라네.”
굉목은 침중한 안색으로 말했다.
“무공은 익혔으나 제가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래봐야 출처는 자네일 테지. 책임은 사제가 져야 한다는 뜻이야.”
“그 아이는 독자라 출가할 수 없는 몸입니다.”
“속가로 받아들일 걸세.”
“하지만 속가를 받아들이는 시기는 이미 지나지 않았습니까.”
“아이의 집에 연락을 보냈는데 답이 조금 늦었다네. 아이의 부모는 이미 허락했다네.”
굉목의 눈이 일그러졌다.
“벌써 건이의 집에 기별을 했단 말입니까?”
“그렇다네.”
“누구 마음대로 말입니까!”
“사제는 모르겠지만 소림은 지난 몇 년간 속가제자를 평소보다 더 많이 받아왔다네. 자질이 부족한 아이도 받아왔는데 하물며 자질이 있는 아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지 않은가.”
굉목은 장건의 부친이 유명한 상인이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구걸을 할 정도로 소림이 퇴락(頹落)하였습니까?”
“굳이 그렇게 말한다면 부인하지는 않음세. 하나 장건이란 아이에 한해서는 다르네. 부친의 희사보다도 사제와 아이 때문이라 답하겠네.”
“제가 원하는 건 저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차라리 참회동에서 여생을 면벽하며 보내겠습니다.”
“그럴 수야 없지. 소림의 무공을 멋대로 배운 아이, 그리고 그것을 방관한 사제. 둘 다 죄인이 아닌가. 세상에 죄인을 가만히 내버려두는 문파도 있다던가? 사제야 그렇다 치더라도 아이는? 아이는 어쩔 텐가. 정녕 사제는 소림이 죄 없는 아이에게 빌려준 것을 다시 되받기를 원하는가?”
“…….”
굉운이 딱 잘라 말했다.
“소림이 준 것을 소림이 거둘 각오가 되어 있을 때에는, 그 반대의 경우도 각오해야 하는 법일세.”
굉목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방장 사형!”
“소림이 잘못했다면 소림이 바로잡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니겠는가. 소림은 경우가 없는 무뢰배들의 집단이 아닐세.”
굉운의 뜻은 명확하다.
“정말……, 제가 끝까지 거부한다면 아이를 단근절맥의 참형에 처하실 생각입니까?”
“그렇다네. 그리고 방금 말한 대로 사제는 여생을 참회동에서 면벽을 하며 보내야 할 걸세.”
굉목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잘못되는 건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장건이 잘못되는 것은 참기가 어려웠다.
굉목은 한참이나 말을 않다가 물었다.
“어떻게 아이의 일을 아신 겁니까.”
굉운은 웃기만 했다. 승려가 웃으면서 아이를 단근절맥의 형에 처할 리는 없다. 굉목이 어쩔 수 없이 따르리라는 걸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굉목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겨우 진정시키며 다시 물었다.
“제게 원하시는 게 뭡니까?”
“제자를 들이기가 정 싫다면 약간의 대안도 있네. 이것이 나로서는, 소림으로써는 최선의 방책일세.”
“말씀해 보시지요.”
“소림사에 와서 10년을 있었는데 어설프게 소림의 무공 흉내를 내는 건 볼 수 없다네. 가르치려면 제대로 가르쳐야지. 하지만 사제가 싫다하니 다른 분께 부탁할 생각이네.”
굉목은 그 말에 갑자기 불안감을 느꼈다.
“누구에게 말씀이십니까?”
“자네의 스승이신 홍오 사숙께 장건이란 아이를 하루 두 시진씩 맡겨 무공을 배우게 할 생각이네.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면 그때 다른 속가제자들의 수련에 합류하도록 하면 되겠지.”
굉목은 말문이 탁 막혔다. 뒷얘기는 들리지도 않았다. ‘홍오’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그의 정신은 어디론가 날아간 것 같았다.
“설마 했더니……!”
굉목의 얼굴은 수행을 하는 승려답지 않게 잔뜩 찌푸려졌다.
☆ ☆ ☆
검성 윤언강과 문사명은 동자승의 안내를 받아 소림사를 벗어나는 산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둘을 보는 소림사의 중들은 저마다 반장을 하며 조용한 걸음으로 지나쳐갔다. 윤언강과 문사명은 가벼운 목례로 응답했다. 어딜 보나 정숙한 보통의 사찰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문사명이 웃으면서 윤언강에게 말했다.
“이렇게 보면 소림사도 커다란 절에 불과할 뿐인 것 같습니다.”
윤언강은 웃지 않았다.
“네가 말하는 ‘그 커다란 절에 불과할 뿐인 소림사’를 우리 화산은 단 한 번도 앞지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강호에서는 우리 화산이 당대 최고라 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최고에는 소림이 빠져 있다. 소림이 반석이라면 나머지 8파1방은 반석 위에 세워진 기둥이다. 기둥은 바뀔지언정 반석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반석을 두고 기둥만 비교한다. 기둥끼리 비교해 1등이 된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겠느냐. 그게 바로 허울 좋은 당대 최고란 것이다.”
“하지만 제자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의 소림에는 그리 뛰어난 인재도 없질 않습니까.”
“네가 무얼 말하는지 알겠다. 나는 그게 더 걱정이다.”
“예?”
윤언강이 문사명을 빤히 바라보았다.
“너의 재능으로 보아 너는 머지않아 독보천하(獨步天下)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벽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소림이라는 벽을.”
윤언강은 뒷짐을 지고 자리에 섰다.
“하나도 놓치지 말고 소림의 구석구석까지 보아두거라. 언젠가 네가 반드시 넘어야 할 벽이다.”
문사명은 깊이 읍을 했다.
“제자, 반드시 그 벽을 넘어 보이겠습니다. 절대로 사부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윤언강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나의 기대일 뿐 아니라 화산의 오랜 숙원이기도 하다. 네가 그것을 알았으니 되었다. 널 소림으로 데려온 보람이 있어.”
윤언강은 흐뭇했다. 그간 수많은 제자들을 키워왔지만 이토록 마음에 들었던 제자가 있었던가.
더구나 이번 소림행의 이유 중에는 과거 강호행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벗, 홍오를 만나기 위함도 있었다. 아니, 사실은 그가 목적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터였다.
제자를 들일 수 없는 홍오의 그 부러워하던 눈빛이라니!
새로 얻은 제자에게 강호 구경도 시킬 겸 홍오에게 자랑도 할 겸, 겸사겸사 먼 거리까지 온 보람이 있었다.
‘홍오 이놈, 지금쯤 팔짝팔짝 뛰면서 분을 못 참고 있겠군. 끌끌끌.’
윤언강은 기분 좋은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자, 가자꾸나.”
그런데 순간, 윤언강의 눈빛이 변했다. 윤언강은 걸음을 멈췄다.
그가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윤언강의 눈자위에 자줏빛의 기운이 슬그머니 맴돌았다. 자하신공(紫霞神功)을 일으켜 안력을 돋운 것이다.
“사부님?”
윤언강이 발길을 돌렸다.
“저곳으로 한 번 가보자꾸나.”
윤언강의 한 쪽 입가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문사명은 그 미소의 의미를 안다.
무언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을 때의 표정이었다.
☆ ☆ ☆
장건은 천천히 손을 놀렸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이 나무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사과 껍질이 얇게 깎이고 있었다. 동그랗게 말리며 아래로 떨어지는 선홍색의 탐스러운 껍질이 부분 부분 투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함께 사과를 깎던 동자승은 벌려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사, 사과를 그렇게 얇게 깎는 사람은 처음 봐요. 큰스님도 그렇게는 못하시는데…….”
장건은 완전히 몰두해 있어 동자승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사과의 결과 나무칼의 끝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다. 장건의 손 아래로 떨어지는 사과 껍질의 너비는 고작 손가락 한마디에 불과했다.
장건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데 사과만 손 안에서 뱅그르르 돌았다. 그 모습이 묘기를 부리는 것 같아서 동자승은 신기한 눈으로 장건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동자승이 또다시 감탄했다.
“우와아! 한 번도 안 끊어졌어요!”
동자승이 사과 껍질을 들어올렸다. 사과 껍질은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길게 이어져 있었다. 게다가 양끝이 거의 울퉁불퉁하지 않아서 네모난 밧줄 같았다.
하지만 장건은 깎은 사과를 돌려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잘 안 되네요.”
아무래도 조금의 과육조차 남김없이 껍질만 깎아내는 건 무리인 것 같았다. 짐승 가죽을 벗겨내듯 껍질만 깐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장건이 깐 사과의 표면에는 어쩔 수 없이 칼로 깎아낸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장건은 실망한 것이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훨씬 나은걸요?”
동자승이 보기에는 잘 깎은 사과였다. 좀 느려서 그렇지 그다지 손색이 없는 모양이었다.
장건은 다시 사과를 손에 들고 어떻게 하면 잘 깎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원래 모양처럼 동글동글하게 깎는 건 불가능할까요?”
“에이, 칼로 깎으면 아무래도 자국이 남겠죠.”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방해가 되지 않으면 옆에서 좀 지켜보아도 되겠느냐?”
“어?”
장건이 쪼그려 앉은 채로 위를 올려다보니 인자한 표정의 노인 한 명이 장건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장건보다 네댓 살 정도 나이가 많아 보이는 청년이 함께 있었다.
검성 윤언강과 문사명이다.
장건은 뒷머리를 긁으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겨우 사과를 깎는 것뿐인데요.”
“가만히 보고 있을 테니 하던 일을 계속하거라.”
윤언강의 웃음을 보며 장건은 이상한 노인이라 생각했다.
‘사과 깎는 걸 구경하는 게 재밌나?’
장건은 사과를 손에 쥐고 나무칼로 다시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투명하리만치 얇은 사과 껍질이 도르르 말리며 장건의 손 밑으로 흘러내렸다.
처음엔 문사명도 겨우 사과를 깎는 걸 구경하려고 윤언강이 발걸음을 돌렸나 싶어 의아했다.
그런데 장건이 사과를 깎는 모습을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어?’ 하고 작은 탄성을 냈다.
“사부님!”
“쉿.”
문사명의 외침에 윤언강이 입가에 손가락을 올렸다. 문사명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당황스러웠다. 이게 무슨 일인지 윤언강에게 묻고 싶었다.
‘이 꼬마는 뭐지?’
장건은 그저 사과를 깎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흔하디흔한 일이다.
그럼에도 그 모습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뭐라고 해야 할까.
‘답답하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답답하게 만드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윤언강이 대답해 주고 있지 않으니, 도대체 그 답답함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문사명은 스스로 찾아야 했다.
필생의 역작을 만드는 장인처럼 ‘얇게 껍질을 까야 한다!’는 일념 하에 몰두한 장건을 문사명 역시 온 신경을 집중해 지켜보았다.
보고 있으면 있을수록 문사명은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되어 갔다. 말 그대로 답답해 죽을 지경이다.
‘끙.’
손바닥에 땀이 나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보아도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점차 마음이 조급해지고 호흡이 거칠어지며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혔다.
윤언강은 그런 문사명을 보면서 ‘쯧’ 하고 혀를 찼다.
문사명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왜 자신이 이 아이의 기운을 눈치챘는지, 이 아이의 어디에 자신이 불편해하고 있는지.
‘아무리 봐도 열 대여섯이나 되었을까 한데, 이런 어린 나이에 마음에 제대로 된 검을 세우다니. 놀랄 노자로군.’
정작 장건 본인은 모르지만 나무칼의 끝에는 옅은 기가 서려 있었다. 자하신공을 돋우고 보지 않으면 그것이 유형화된 기, 즉 검기(劍氣)인지 확인할 수도 없을 지경이다. 사실 검기라고 보기엔 좀 초라하다.
그러나 느낌만은 확실했다.
검기라는 것은 검과 내공이 하나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유형화되어 나타난다. 그렇게 한곳에 기를 응축시키면 주변 기 흐름이 살짝 변하게 된다.
그래서 윤언강이 장건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검 한 자루에 의지해 외길을 걸어온 윤언강이나 되니 느낄 수 있지, 다른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를 테지만 말이다.
‘소림에서 누가 검을 세우나 했더니만, 이런 아이일 줄이야. 게다가 그렇게 검을 세워 사과를 깎고 있어? 허허!’
검기를 발출하는 경지, 그것을 ‘마음에 검을 세운다’고 한다. 윤언강이 마음에 검을 세운 것은 그의 나이 10대 후반이었다. 화산의 적전제자(嫡傳弟子)로 어렸을 때부터 백년에 한 번 나올 기재니, 천재니 하는 소리를 들어왔던 그다.
그런데 쇠로 만든 검도 아닌 나무칼에 검을 세우는 아이를 보게 되다니. 그것도 시기로 따져도 자신보다 훨씬 앞서 있질 않은가.
‘이래서 소림이 두려운 것이다.’
윤언강은 어쩐지 씁쓸했다.
‘삭발을 하지 않았으니 정식 제자도 아닌 듯한데…….’
윤언강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소림의 제자더냐?”
장건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윤언강의 눈이 반짝였다. 소림의 제자가 아니라는 건 속가도 아니라는 뜻이 아닌가!
“그럼…….”
“사정이 있어서 잠깐 의탁하고 있어요.”
“호오, 그래?”
윤언강의 눈에 화색이 돌았다.
‘아직 소림에서 이 아이의 가치를 모르는구나!’
오해일지도 모르지만 윤언강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이 아이를 잡을 수 있는 작은 기회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말년에 제자로 삼은 문사명은 누구라도 탐을 낼 만한 무골이었다. 성정 또한 올발라 윤언강은 물론이고 화산에서도 크게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배분을 무시하고 제자로 삼았다.
이제와 다른 아이를 또 제자로 삼으면 문사명은 심적으로 힘들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윤언강은 고개를 저었다.
‘인재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아닌가.’
윤언강과 문사명이 서로 다른 생각에 골몰한 사이, 장건은 사과 하나를 다 까고 다른 사과를 집어 들었다.
윤언강이 손을 내밀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심심하구나. 내게 사과를 한 개 주어 보겠느냐?”
문사명이 윤언강을 놀란 눈으로 보았다. 직접 아이에게 가르침을 주려는 것이다.
‘사부님이 왜…….’
그러나 장건은 아무 생각 없이 사과를 내밀었다.
“예. 여기요.”
장건은 나무칼도 내밀었지만, 윤언강은 나무칼은 받지 않고 맨손으로 사과를 받아 들었다.
“사과는 과일이지 생사대적이 아니니라. 사과를 깎을 때에는 사과를 깎는 칼을 써야 하는 법이다.”
스윽.
윤언강이 손으로 사과를 문지르는가 싶더니 껍질이 까지기 시작했다.
장건과 동자승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윤언강은 맨손이었다. 손에 나무칼도 들지 않았는데 칼로 깎는 것처럼 사과 껍질을 벗기고 있었던 것이다.
사각사각.
맨손으로 사과 껍질을 깎는데 칼로 깎는 것과 똑같은 소리가 났다.
“우와아.”
마치 묘기를 보는 것 같았다.
사과 껍질은 얇고 길게 이어지며 윤언강의 손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굵기와 크기도 일정했고 도중에 끊어지지도 않았다.
‘어떻게 맨손으로 사과를 깎을 수 있지?’
이미 윤언강은 손에 검이 있으나 없으나 아무 상관이 없는 경지에 있다.
하지만 그런 이유를 모르는 장건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윤언강이 물었다.
“너는 무슨 마음으로 사과를 깎았느냐?”
“예? 저는 그냥 얇게 껍질을 까려고…….”
“얇게? 허허허.”
정말인지 알 수 없지만, 일념(一念)으로 집중하였다면 절로 검을 세운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각사각.
윤언강은 느릿할 정도로 천천히 껍질을 까며 손자에게 옛날이야기라도 하듯 편안하게 말했다.
“사과는 그저 사과일 뿐이니 자연스럽게 깎으면 그뿐이란다. 그래야 제대로 된 검을 쓰는 것이지.”
말 그대로 윤언강의 사과 깎는 모습은 자연스러웠다. 사실 그 누가 사과를 깎는다 해도 처음 칼을 손에 쥔 사람이 아니라면 그러할 것이다.
사각사각.
그러나 문사명은 그 순간, 장건과 윤언강의 차이를 깨달았다.
“아!”
윤언강이 사과 깎는 모습에 비해 장건의 동작은 지나칠 정도로 경직되어 있었다.
심하게 말하자면, 사과를 깎고 있는데 움직이는 것은 나무칼뿐이다. 사람은 미동도 않는데 칼과 사과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도 사과를 쥔 손끝과 나무칼을 쥔 손목만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런 반동도 없고 힘이 어떻게 실리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확실히 껍질은 잘 깎였다. 제대로 힘이 실리고 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내공을 이용한다 해도 그렇지. 아예 몸이 미동도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문사명은 답답했던 이유를 확실히 알았다. 이유는 알았지만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는 여전히 모른다.
‘만약 비무를 할 때도 저런 상태에서 날 공격해 온다면?’
문사명은 머릿속으로 눈앞의 아이와 자신이 비무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쭉 돋았다.
하다못해 검을 힘차게 찌르려면 어깨를 뒤로 빼는 동작이 필요한데, 저 아이에게는 그럴 필요조차 없어 보인다. 아무런 준비 자세도 없이 검을 날릴 것이다.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날아올 검을 생각하니 등골이 쭈삣하다.
‘지금의 나로서는 절대 못 막는다.’
문사명은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그것이 마음이 답답해진 이유다.
문사명은 장건을 유심히 보았다. 아무리 봐도 특이한 것을 찾을 수 없는 평범한 아이였다. 승복을 입고 있는데 삭발을 하지 않은 걸 보면 정식으로 입적한 소림의 제자도 아니었다.
툭.
그 사이, 마침내 윤언강의 사과 깎기는 끝났다. 한 줄로 이어진 사과 껍질이 말린 채로 바닥에 떨어졌다.
“자, 보거라.”
윤언강이 사과를 내밀었다.
“와아.”
장건과 동자승은 감탄을 내뱉었다.
윤언강이 깎아놓은 사과는 깎은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원래 모습처럼 둥근 모양 그대로였다. 껍질만 사라졌을 뿐이다.
마치 사과가 아니라 옥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표면이 매끄럽게 광택이 났다. 사과에 설당(雪糖)을 녹여 곱게 입힌 빙당호로(氷糖葫蘆)만큼이나 반짝반짝 윤기가 흐른다.
장건은 윤언강이 깐 사과의 껍질을 들었다. 투명한 면사처럼 과육이 하나도 붙어 있지 않았다. 껍질을 깎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벗긴 듯했다. 심지어 껍질 뒤로 투명하게 사물이 비치기까지 한다.
“우와아.”
장건은 윤언강이 깎은 사과를 들고 감탄했다.
윤언강이 장건을 보며 물었다.
“네가 해볼 테냐?”
“예? 저는 맨손으로 사과를 까는 건 할 줄 모르는 걸요.”
“네겐 맨손보다 더 나은 칼이 있질 않으냐.”
장건은 조금 떨리는 손으로 사과를 들었다. 윤언강이 깎은 것처럼 해보고 싶었다.
“움……, 그럼 한 번.”
장건은 윤언강이 사과 깎던 동작을 되새기며 사과 껍질을 깎으려 했다.
한데 놀랍게도 그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 어라?’
한 번 본 채공승들의 채 써는 모습도 기억해낼 수 있던 장건이다. 그런데 윤언강의 모습만큼은 좀처럼 떠올릴 수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평범했다. 그냥 말 그대로 평범해서 특별하게 기억해낼 부분이 없었다.
이상하게 불편한 부분이라던가 하는 것도 없었다. 그랬다면 바로 느꼈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동자승이 사과를 깎던 모습도 마찬가지로 기억나지 않는다. 동자승의 모습에서 불쾌감이나 불편함도 느낄 수가 없었다.
평범했기 때문이다.
‘이상하네.’
늘 마음을 먹으면 저절로 움직이던 실타래도 지금은 아랫배에서 꿈쩍을 할 생각을 않는다.
평소에는 실타래가 가는 대로 흐름을 따라 움직이면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실타래가 어디로 움직여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한다. 갈팡질팡하면서 장건의 몸 안에서 허둥대고 있다.
‘에이 씨! 왜 안 되지?’
하다못해 그냥 깎으면 되는데도 팔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깝다.
그냥 대충 손 나가는 대로 깎으면 껍질이 두껍게 되어 과육이 떨어져 나갈 것을 생각하니 아깝다. 그게 쓸데없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아까워서 차마 손이 나가질 않는다.
장건은 자기도 모르는 새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서 떨어지고 등허리가 축축해 온다. 계속 윤언강의 사과 깎는 모습을 떠올리려다보니 저절로 그렇게 되고 있었다.
실타래는 몸 안을 돌아다닐 생각을 않고 배 아래쪽에서만 퉁퉁 튀어 다닌다. 마치 기분이 나빠진 아이가 볼을 쀼루퉁하게 내밀고 어미 손을 피해 달아나듯, 그렇게 투정을 부리고 있다.
“후아아!”
장건은 크게 숨을 내뱉으면서 손을 놓았다. 그제야 기분이 확 풀렸다. 실타래도 조금씩 안정이 되었다.
장건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어휴, 이 땀 봐.”
그의 전신은 온통 땀투성이였다.
“시주님!”
동자승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장건은 부끄러운 얼굴로 뒷머리를 긁었다.
“사과 하나 깎는 게 참 힘드네요. 할아버지처럼 깎는 법은 좀 더 연습해 봐야겠어요.”
그 말에 가만히 장건을 지켜보고 있던 윤언강이 크게 웃었다.
이 아이는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모양이다.
“나도 그 사과를 깎는 데 30년이 걸렸느니라.”
윤언강의 말은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장건이나 동자승은 알아챌 수 없었다. 알아들은 사람은 유일하게 문사명뿐이다.
그때 동자승 한 명이 경내에서 다가왔다. 동자승은 공양간 앞의 네 명에게 공손히 합장을 하고 말했다.
“장건 시주님, 방장 대사께서 찾으십니다.”
“아! 네.”
장건은 벌떡 일어나서 윤언강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전 이만 가봐야겠네요. 노사님께서 방장 대사님과 함께 계신가 봐요.”
윤언강이 급히 말했다.
“그래. 다음에 혹시 기회가 닿으면 화산으로 놀러오도록 해라.”
“화산이요?”
“우리는 화산파의 사람이란다. 화산에 와서 윤언강을 만나러 왔다고 하면 된다.”
“네, 혹시 가게 되면 그때는 꼭 사과를 제대로 깎는 걸 보여드릴게요.”
“기대하고 있으마.”
윤언강은 미소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당장이라도 아이를 제자로 삼고 싶지만, 일단은 소림에 있는 아이다. 이렇게 여지를 남겨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어서 가시지요.”
“예.”
장건은 자신을 데리러 온 동자승과 함께 공양간을 떠났다.
그리고 곧 공양간 안에서 큰 호통소리와 함께 굉료가 나타났다.
“야, 이놈아! 사과 몇 개 깎는데 왜 이리 오래 걸려?”
장건과 사과를 깎던 동자승이 찔끔하며 일어섰다.
굉료는 거의 뛰쳐나오듯 공양간 안에서 나오더니 윤언강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얼레? 검성 어르신 아니십니까?”
윤언강과 문사명이 며칠 머무르는 동안 직접 공양을 올린 적이 있기에 굉료는 금세 그를 알아보았다.
“허허. 흥미가 동해서 잠시 들렸다네.”
“흥미요?”
“아까 그 아이가 흥미를 끌었다네.”
“아아, 장건이를 말씀하시는군요.”
“장건. 장건이라.”
윤언강은 몇 번 장건의 이름을 되뇌다가 곧 굉료와 작별을 고했다.
“덕분에 재미난 구경을 했다네. 실례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군.”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윤언강이 갑자기 어딘가를 한 번 힐끗 보았다. 느닷없는 목소리가 그의 머리를 울렸다.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하는 전음입밀(傳音入密)이다.
『이놈아! 왜 남의 떡을 넘봐!』
윤언강이 얼굴을 찌푸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설마……, 자네가 말한 게 그 아이였나?』
대답이 왔다.
『설마는 무슨. 그 아이가 맞으니까 자넨 신경 쓸 것 없어.』
『소림의 제자가 아니라던데?』
『어허, 신경 쓸 것 없다니까. 소림의 제자가 아니래도 네가 소림에서 이러면 안 되지.』
『끙.』
윤언강은 살짝 탄식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문사명이 무슨 일인가 하고 그의 얼굴을 보고 있다.
“사부님?”
“아무 일도 아니다. 이만 가자꾸나.”
“네, 사부님.”
굉료가 반장을 하며 인사했다.
“아미타불. 살펴 가십시오.”
“그럼 다음에 또 보세나.”
윤언강과 문사명이 인사를 하고 떠나자 굉료는 윤언강이 깐 사과를 집어 들었다.
윤기가 반드르르 흐르는 맛있어 보이는 사과다.
무엇보다도 칼로 깎은 흔적이 전혀 없으며 사과의 원래 모양이 그대로 남아 있어 놀랍다.
“거 참. 장건이란 아이도 대단하지만, 역시나 검성은 검성이구나. 괜히 사람들이 검성이라 부르는 게 아니군.”
굉료는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바람이 휙 하고 불어오는 것을 느꼈다.
“헉!”
늙수그레한 얼굴에 흰 눈썹이 귀까지 걸쳐져 있는 노승이 눈앞에 있었다.
홍오였다.
“왜 사람을 보고 놀라? 놀라길.”
“휴우. 인기척을 내셔야지요. 갑자기 나타나고 그러십니까. 그러다 애 떨어집니다.”
“남자가 애를 가졌다니, 중이 애를 가진 것보다 더 이상하구만.”
“그런 뜻이 아닌 걸 아시면서 그러십니다.”
홍오가 웃자, 굉료도 껄껄 웃었다. 괴짜로 알려진 홍오지만 굉료가 워낙 털털한지라 은근히 죽이 맞았다.
한참 웃다가 홍오가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그건 그렇고, 그 사과 좀 내놓게나.”
“예?”
굉료가 화들짝 놀라며 사과를 감추었다. 홍오의 손이 번개처럼 잔상을 그리며 굉료의 손을 따라갔다.
“안 됩니다!”
굉료는 다른 손으로 홍오를 막으며 사과를 빼앗기지 않으려 애썼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사문의 존장이 사과 하나 먹겠다는데, 그게 그리 아까워?”
“이건 그냥 사과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더 맛있어 보여서 먹겠다는 거지.”
홍오와 굉료의 손이 순식간에 몇 번을 오갔다. 홍오의 손은 느릿하게 움직였다가 갑자기 빠르게 움직이며 완급을 조절하는데 비해, 굉료는 숨이 가쁠 정도로 바삐 움직였다.
타타타탓.
동자승은 눈을 멀뚱히 뜨고 있는데도 뭐가 오가는지 보지 못하고 있었다. 바람 소리만 휙휙 나고, 뭔가 부딪치는 소리가 날 뿐이다.
“이 사과는 두어 달 동안 두고 공양간 아이들에게 보여줘야 한단 말입니다!”
“아무리 검성 놈이 신경 좀 썼대도 두어 달이나 있으면 맛이 떨어지지. 그러니까 지금 먹어야 한대도?”
“안 된다니까요!”
굉료가 한손을 들고 검지와 중지를 세우더니 갑자기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했다.
정말로 검을 든 것처럼 손끝에서 날카로운 예기가 흘렀다.
쉭!
홍오가 살짝 손을 거두었다. 굉료의 검결지가 지나간 자리에 소름 돋는 파공성이 일었다.
“어이쿠, 소림에서 검결지(劍訣指)로 사문의 존장을 죽이려는 못된 제자가 있었구나! 잘하면 소림에서 검성의 후계자 하나 나오겠다?”
“무슨 그런 불경한 말씀을 하십니까. 절에서 살생이 말이나 됩니까? 제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그저 칼 쓰는 법밖에 없는지라 그럴 뿐입니다.”
굉료는 말을 하면서 연신 손가락을 움직였다.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일었다.
“그래도 검성의 후계자가 아니란 말은 안 한다?”
“소림에서 검성이 나오면 안 된다는 법 있습니까?”
“사문의 존장이 검성이 깐 사과를 먹으면 안 된다는 법은 있냐?”
홍오가 ‘킁’ 하고 코웃음을 치며 손을 뻗었다.
“그러니까 그게……. 헛!”
손을 뻗을 때는 조법이었는데 뻗고 나서는 권법이었다. 그 연결이 말도 안 되게 자연스러웠다.
“이, 이런!”
굉료는 갑자기 어마어마한 벽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홍오의 권이 현란하게 쏟아졌다. 묵직한 기세가 소림의 권인가 싶더니 어느 샌가 부드러운 무당의 장이 되어 내가 장력을 뿜고 있다. 자세는 어딘가 다른가도 싶었지만 굉료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하나 그 흐름은 분명 무당의 장법이었다.
“어헛!”
서로 다른 무공이 이렇듯 부드럽게 연결될 수 있다는 건가?
홍오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손을 섞은 적은 없었다.
‘설마 이 정도까지라니!’
주먹을 피할 정도의 거리만 두었더니 갑자기 장력이 쏟아졌다. 굉료는 아예 옆으로 몸을 뒤틀며 공세를 벗어났다. 완전히 벗어났다 싶었는데 홍오가 또다시 눈앞에 있었다.
몸이 상대의 거리를 용납하지 않고 자신의 거리를 지키는 개방의 취팔선보(醉八仙步)다.
취팔선보를 밟는 홍오의 신형이 마구 흔들리며 압박을 해왔다.
그런데 취팔선보에서 튀어나오는 건 곤륜파의 낙안권(落雁拳)이다. 주먹이 땅에서 위로 치솟는가 싶더니 어느새 하늘에서 뚝뚝 떨어진다.
개방이나 곤륜의 제자가 본다면 기겁을 할 노릇이다. 내공 운용이 전혀 다른 두 가지 무공을 원래 같은 줄기의 무공인 양 자유로이 쓰고 있으니.
굉료의 눈이 어지러워졌다. 작고 초라해 보이는 외견과 달리 홍오의 무공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굉료는 나한보(羅漢步)를 밟으며 겨우 낙안권에서 벗어났다.
“저, 정말 이러시깁니까!”
“싫으면 사과를 내놓던지.”
“소림의 제자를 사문의 어른이 어찌 곤륜의 무공으로 핍박한단 말씀이십니까!”
“그럼 넌 화산의 검이 사문의 어른보다 소중하더냐?”
말을 하는 사이 살짝 호흡이 끊겼다. 그 틈을 타고 홍오가 주먹을 쭉 뻗었다.
보는 순간 온몸이 오싹해졌다.
일견 가벼워 보이는 주먹이었음에도 굉료는 대경실색하며 검결지를 여러 번 허공에 그었다.
쩍쩍.
하나의 권경(拳勁)을 갈라내는가 싶었더니 바로 그 뒤에 또 다른 권경이 들이닥친다.
‘공동파의 복마권(伏魔拳)!’
굉료의 검결지에서 발출되는 기운은 홍오가 뻗은 가벼운 주먹을 이겨내지 못하고 가닥가닥 부서져 나갔다. 주먹의 기운이 눈에 보이지 않음에도 굉료는 진땀이 흘렀다. 엄청난 압박에 어깨가 묵직해지고 다리가 굳는다.
한 꺼풀 벗기면 또 한 꺼풀의 권경이 나타나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못 막는다!’
굉료는 할 수 없이 사과를 홍오에게 던지며 뒤로 몇 차례나 거푸 몸을 틀며 물러났다.
팡! 파앙!
굉료가 몸을 틀고 있는 도중에도 그의 승복 여기저기가 무언가에 맞은 듯 펄럭거린다.
“치사하게! 사과 하나 때문에, 너무하십니다!”
홍오가 씨익 웃으며 권을 거두고 사과를 받아들었다. 그러자 굉료를 짓누르던 압박감이 씻은 듯 사라졌다. 그러나 권을 거두고 나서도 굉료의 전신을 세찬 바람이 한 번 훑고 지나갔다.
‘사과를 안 드렸으면 몇 달 누워서 못 일어날 뻔했군.’
굉료는 몸을 살짝 떨었다.
홍오가 사과를 들고 말했다.
“잘 먹으마. 이런 건 오래 두면 안 돼. 오르지도 못할 나무를 보면 괜히 주화입마에 걸린단 말이지.”
홍오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금세 어딘가로 가 버렸다. 나타났을 때처럼 표홀한 바람같이 사라진 것이다.
굉료가 쳇 하고 혀를 찼다.
“하여튼 괴짜시라니까.”
괴짜도 괴짜지만, 무공 실력도 놀랍다. 왜 젊은 시절에 소림 최고의 기재니, 천재니 하는 소리를 들었는지 알 만하다.
굉료는 식은땀을 닦으며 몸을 돌렸다.
동자승이 눈만 말똥말똥 뜨고 굉료를 쳐다보고 있었다.
딱!
굉료가 동자승의 새파란 머리를 주먹으로 때렸다.
“아야!”
“이놈아. 뭐하고 있어? 넌 남은 사과나 빨리 깎아.”
“네…….”
동자승은 머리가 아파 눈물을 그렁거리면서 사과를 들었다.
☆ ☆ ☆
침묵 속에서 걷던 윤언강이 입을 열었다.
“사명아.”
“예, 사부님.”
“재미있었지 않으냐?”
“솔직히…… 두려웠습니다.”
문사명은 기운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자신보다 어린아이를 상대로, 그것도 명색이 화산파의 후기지수인 자신이 겁을 먹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 아이가 저를 상대로 손에 검을 들었다면……, 제자는 막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허허허.”
윤언강이 웃으면서 말했다.
“분하냐?”
문사명은 입술을 깨물었다.
“분합니다!”
“분할 것 없다. 오히려 네게는 좋은 약이 되었다고 생각하거라. 타고난 자질은 네가 더 뛰어나다. 무엇보다 네게는 내가 있질 않으냐.”
문사명은 부끄러운 듯 머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윤언강은 다시금 의욕을 불태우는 자신의 제자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늘의 일이 문사명에게는 더욱 자극이 될 것이다. 언젠가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문사명을 두고도 장건이란 아이를 욕심 부렸던 것이 부끄럽다.
‘홍오야. 나는 참으로 좋은 제자를 두었다. 너는 젊은 날 내게 벽을 보여주었지만, 지금 나처럼 내 제자는 언젠가 그 벽을 뒤엎어 버릴 것이다.’
윤언강은 속으로 웃었다. 할 수 있다면 크게 소리쳐서 웃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소림의 산문 안이었다.
그가 마음 놓고 웃는 것은 소림이라는 벽을 완전히 넘는 날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홍오와의 내기에서 이긴 직후가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