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138
138화
족장의 전신에서 자줏빛 파장이 폭발하듯 터져 나온 건 거의 동시였다.
카가가가각-
하지만 푸른 신성력이 만들어 낸 궤적은, 그 파장조차 갈라 버렸다. 이안은 멈추지 않고 끝까지 팔을 휘둘렀다. 궤적이 족장의 목을 휩쓸고 지나간 순간, 신성력에 갈려 나간 마력이 그대로 폭발했다.
콰과과광-
거기에 휩쓸리는 것까진 피할 수 없었다. 땅에 처박힌 이안이 튕겨 나가며 바닥을 굴렀다. 아직도 타오르듯 일렁이는 신성력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어지러운 곡선을 그렸다.
촤아악, 온몸이 저린 와중에도 어떻게든 자세를 다잡은 이안이 착지했다. 아물었던 얼굴의 상처가 다시 터졌다. 몸에 걸친 방어구들도 곳곳이 찌그러지고 부서졌다. 왼팔이 덜렁댔다. 부러진 게 아니라 어깨가 빠진 거였다. 어쩌면 부러지기까지 한 건지도 몰랐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무식한 새끼 같으니….’
그렇다 해도 족장의 상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놈의 목은 톱으로 난도질해 자른 것처럼 엉망진창으로 잘려나가 있었다. 머리를 잃은 몸이 통나무처럼 뒤로 넘어갔다.
그사이 단죄의 검을 아공간에 넣은 이안이 왼팔을 움켜쥐며 일어났다. 뿌득, 빠진 팔이 제자리를 찾았다. 눈앞이 아찔해지는 느낌이었지만, 고통에 머뭇댈 시간은 없었다.
족장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잘린 머리의 단면에서 끈적한 살점이 촉수처럼 번져 나오고 있었다. 잘린 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펑-
이안은 걸음을 옮기며 머리로 화염구를 발사했다. 하지만 살점이 조금 지글댈 뿐이었다. 재생하려는 움직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런 몸을 가지고도 고통을 감내하고 싸울 생각을 하지 않다니….’
떨어진 머리 앞으로 다가선 이안이, 놈의 세 번째 눈에 박힌 운철 단검을 단숨에 뽑아 들었다. 눈알에 맺힌 피가 부글대면서, 단검 날을 벌써 반 이상 밀어낸 상태였다.
족장의 몸을 돌아본 이안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마력 탐지.
‘여기군.’
그의 시선이 놈의 오른쪽 가슴에 멈춰 선 그때였다.
“……!”
반 이상 썰려 나간 목덜미의 촉수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남은 눈알들이 일제히 마력을 방사했다. 시야가 뒤엉키고 감각이 교란됐다. 어지러운 환영. 마력을 끌어올려 저주를 떨치던 이안이 불현듯 몸을 옆으로 틀었다. 육감이 경고를 보냈기 때문이다.
콰직!
몸을 스치는 파공음과 함께, 방금까지 그가 서 있던 땅에 기다란 뼈 칼날이 박혔다. 족장의 어깨에 돋아난, 뼈로 만들어진 다관절 칼날이 발작적으로 휘둘러진 것이다.
한 번이 끝이 아니었다.
촉수들이 쉬지 않고 마력을 방사하고, 뼈 칼날이 이안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육체를 지키기 위한 본능적인 방어 기제인 모양이었다.
‘머리가 없으니까 오히려 더 수법이 다양해지네.’
하지만 이안에게 타격을 입힐 정도의 공격은 아니었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피한 이안이 삽시에 족장의 몸 앞으로 다가들었다.
손날 방향으로 쥔 운철 단검에 혼돈력이 맺히고, 그대로 족장의 오른쪽 가슴팍으로 떨어졌다.
족장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꿈틀대던 촉수들이 순간 뻣뻣해졌다.
그때 이미 이안의 눈동자에는 잿빛 마력이 몰아치는 중이었다. 동공 한복판에 보랏빛이 더해진 다음 순간.
퍼억-!
족장의 가슴팍이 통째로 터져 나갔다. 뼈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다. 온몸에 그 잔해를 뒤집어쓰면서도, 이안은 그 사이로 드러난 새카만 심장을 바라보았다. 자주색 마력을 가득 머금고 이 순간에도 뛰고 있었다. 지렁이처럼 뻗어 나온 살들이 삽시에 그 위를 덮었다.
이안은 망설이지 않고 다시 단검을 내리찍었다.
콰득-
운철 단검이 심장을 꿰뚫었다. 이안은 혼돈력을 밀어 넣었다. 한 줌이면 충분했다.
심장의 자줏빛이 짙어지고, 다음 순간 번쩍이며 퍽 터져 나갔다. 물리적인 타격은 거의 없었다. 타르처럼 끈적한 파편이 얼굴을 비롯한 온몸에 튀었을 뿐.
족장의 남은 몸이 축 늘어졌다.
머리와 이어 붙었던 살점이 툭 끊어졌다. 섬뜩한 귀곡성이 이어졌다. 쩍, 허공에 균열이 일었다. 그 너머로 자줏빛이 아른댔다.
‘그래, 왜 안 나타나나 했다.’
새카만 영혼이 그 너머로 빨려 들어갔다. 이안의 시야 한복판으로 퀘스트 완료 창이 이어졌다.
“하….”
그는 비로소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퀘스트 보상은 능력치 포인트 하나였다. 보스전치고는 짠 편이었지만 불만은 없었다. 이건 연계 퀘스트고, 아직 제단 퀘스트가 남아 있었으니까. 게다가 경험치도 상당히 많이 줬다. 이대로면 곧 또 한 번 레벨이 오를 터였다.
피로와 고통이 물감이 번지듯 느껴지기 시작했다. 온몸이 너덜너덜한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이안은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족장이 자신의 힘과 능력을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상태였다면,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전투가 됐을 테니까.
게다가 어쨌건, 게임에선 클리어하지 못했던 퀘스트를 하나 더 해결한 셈이기도 했다.
그때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물론, 이로 인해 일어날 변화는 그다지 크지 않을 터였다. 변방이 마경 천지가 되리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으니까.
‘변종 코볼트나 뒤틀린 트롤들이 더 번성하거나… 새로운 놈들이 튀어 나오겠지.“
혼혈 고블린의 빈자리를 채울 것들은 차고 넘칠 터였다. 적어도 이것들보단 덜 끔찍하고 역겨운 놈들이길 바랄 뿐이었다.
“끼- 아아아악-!”
“끼아아아악-!”
뇌를 긁어내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온 건 그때였다. 다소 느슨해졌던 긴장이 다시 팽팽하게 되살아났다.
고개를 돌린 이안의 미간이 구겨졌다. 혼혈 고블린들이 자주색 안광을 발광하고 있었다. 그 너머, 악착같이 전투를 이어 나가는 일행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쉴 때가 아니지.”
운철 단검을 고쳐 쥔 이안이 일어섰다.
***
잔당 정리는 빠르게 끝났다. 이안이 합류한 덕도 있었지만, 혼혈 고블린들이 적아의 구분 없이 날뛰어댄 덕분도 있었다.
자욱한 안개 위로 베이고 찔리고 토막 난 시체들이 가득했다.
“하아… 하아….”
그 한구석에서, 일행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숨을 골랐다. 다들 녹초가 되어 있었다.
“괜찮은 것이냐, 이안? 부상이 심각해 보이는데. 이리 와 보거라.”
이윽고 메브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전신 판금 갑옷은 여전히 검붉었다. 신성력이 아니라 전부 혼혈 고블린의 체액이었다. 일행 중에선 그나마 가장 깔끔한 상태라 할 수 있었다.
필립과 샬롯은 흙먼지와 살점까지 뒤집어썼고, 이안은 말할 것도 없이 엉망진창이었으니까.
“보실 필요 없소. 괜찮으니까.”
“엄청난 전투였다.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걱정하시는 건 알겠소만. 정말 괜찮소.”
“…그래. 알았다.”
이안이 덧붙이자, 메브가 머쓱하게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아직도 안면 가리개를 올리지 않은 터라, 표정까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안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몸을 돌렸다. 정말 버틸 만했다. 물론 두통과 무기력증이 느껴지긴 했지만, 어쨌건 육체의 상처는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얼굴의 상처에는 벌써 딱지가 앉았다.
높아진 체력 수치보단 최고 레벨까지 올린 태초의 생명력 스킬 덕분일 터였다.
게임에서도 생명력이 낮아질수록 회복력과 회복 속도가 높아지던 스킬이었으니까.
현실이 된 지금은 심한 부상일수록 빠르게 회복되는 식으로 변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안이 말들이 묶인 나무 쪽으로 향하자, 필립이 화들짝 일어섰다.
“그, 나리. 죄송합니다. 말을 다 지키진 못했습니다.”
“그건 딱 봐도 알아.”
이안이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멈춰 섰다. 필립이나 샬롯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아까 같은 전투를 치르고도 살아남은 말이 있는 게 오히려 용했다.
‘그냥 두고 왔으면… 그래도 다 죽었겠지.’
이안은 말들의 상태를 눈에 담았다. 북부에서 함께 온 두 마리는 겁에 잔뜩 질리고 탈진했을 뿐, 어쨌든 생명에는 이상이 없어 보였다. 다른 두 마리 중 하나는 이미 숨이 끊어졌다. 나머지 한 마리는 의식 없이 숨만 헐떡였다. 이놈이 살아남을지는 솔직히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당장 탈 순 없겠네.”
“바로 또 어딜 가시려고요?”
“당연하지. 주위를 봐라.”
굽혔던 허리를 펴면서, 이안이 덧붙였다.
“아직 마경은 그대로야.”
“아.”
필립이 그제야 탄식했다. 여전히 주위는 어두웠고, 안개도 자욱했다. 이안이 나무 앞에 기대앉은 샬롯에게로 다가갔다.
“움직일 수 있겠나?”
“문제없다.”
샬롯이 도끼를 쥔 채 일어섰다. 그녀의 주황색 눈동자가, 엉망이 된 이안의 전신을 훑었다.
“꼴이 말이 아니군. 안에 남은 놈들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괜찮겠느냐?”
“네 꼴도 만만치 않아. 걱정 마라.”
“그래도 너보단 나은 것 같군. 남은 놈들은 내가 앞장서서 처리하겠다.”
이안의 대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한 샬롯이, 비탈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메브가 그 옆으로 따라붙었다.
“나도 돕겠다. 아직 여력이 있어.”
굳이들 그러겠다면야…. 낮게 피식댄 이안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기, 잠시만요, 나리? 말, 말들은 어쩌고 그렇게들 가십니까?”
“근처에 남은 놈은 없어. 정 걱정되면 네가 지키든가.”
이안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필립이 후다닥 달려왔다.
“그럴 수는 없죠. 저 안이 어떤 꼴인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습니다.”
일행은 곧 비탈길로 접어들었다. 고깃덩어리처럼 변한 족장의 시체가 가까워졌다. 놈의 살점은 벌써 썩고 있었다.
“마경은 정말이지, 다양한 방식으로 끔찍하군요. 고블린조차 이런 괴물로 만들다니.”
시체를 지나치며 필립이 읊조렸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다. 우리가 운이 더럽게 없어서 하나뿐인 마경에 발을 들이게 된 건 아닐 것 같으니까.”
필립은 물론, 앞서 걷던 메브도 순간 움찔댔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마경이 여럿일 거란 말씀이십니까?”
“가능성은 충분하단 얘기야. 말했듯이 지금은 전쟁 중이니까.”
“…하지만 관도를 따라 이동하는 동안엔, 마경에 들어선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요.”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필립. 검은 벽의 광기는 인적이 드물고 외진 곳에 먼저 고이게 마련이니까.”
덧붙인 건 메브였다.
“광기에 물든 땅이 늘어난다면, 언젠간 관도도 안전하지 않아지겠지.”
필립의 낯도 그제야 굳어졌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전쟁을 멈춰야 합니다. 죽음과 광기가 더는 범람하지 않게요.”
“땅을 손에 넣거나 잃은 왕들이 그 말을 들을까? 이미 막대한 병력과 지출을 감수한 영주들은?”
“…….”
이안의 심드렁한 말에, 필립이 입맛을 다시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들에게 마경이 생겨나고 있다 말한들, 신경조차 쓰지 않으리라.
오히려 적들을 마경에 밀어 넣으려 들지도 몰랐다. 그 후에 일어날 결과 따윈 생각지도 않으리라. 제국의 교단에 도움을 청하면 되리란 식의 맘 편한 결론을 내리겠지.
“…제국에 이 사실을 알리는 건요? 교단은 어떻습니까?”
“제국이 변방에 관심이 있었다면, 전쟁을 용인하지도 않았겠지.”
말한 건 뜻밖에도 샬롯이었다. 그녀가 필립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제국이 변방을 도울 리 없어. 아무런 이득도 없으니까. 황제나 제후들을 움직이려면 그만한 대가가 필요하단 거다. 그게 제국의 방식이지.”
“하지만… 결국은 제국에도 위협이…. 하긴. 그건 그때 가서 대응해도 될 문제죠. 제국이니까….”
필립이 가라앉은 눈으로 중얼대는 가운데, 일행은 부락에 들어섰다.
본래도 폐허였거나 작은 산중 마을이었던 듯, 울타리조차 제대로 둘러 있지 않았다. 곳곳에 크고 작은 낡은 건물들이 불쑥불쑥 솟아있을 뿐. 그 사이로 흐르는 안개가 음산했다.
타타탓, 거친 숨소리와 발소리들이 가까워진 건 그 직후였다.
“……!”
전투 자세를 취하던 샬롯의 미간이 순간 구겨졌다. 개와 멧돼지가 뒤섞인 듯한 커다란 짐승 몇 마리와 함께, 본래 고블린 정도의 신장을 가진 작은 녀석들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끼들도 잔뜩이었군.”
역겹다는 듯 중얼댄 샬롯이 몸을 날렸다. 메브가 그 뒤를 따랐다.
둘은 달려오는 모든 것들을 일말의 자비도 없이 전부 베어 넘겼다.
이안은 태연하게 그 가장자리를 지나쳐, 저만치의 문 닫힌 건물로 향했다. 그는 부락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마력 탐지를 사용하고 있었다. 몇몇 건물에서 오염된 마력이 느껴졌고, 저기도 그중 하나였다.
본래는 마구간이나 창고로 쓰였을 법한 건물.
뒤따르던 필립이 중얼댔다.
“여긴 정상적인 게 하나도 없군요. 저 짐승은 또 뭐고. 무슨 일이 생겨서, 가뜩이나 징그러운 고블린들이 저렇게까지 역겨운 몰골이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속 모르는 게 좋을 거다.”
“예…?”
이안이 걸음을 늦추며, 앞의 문을 턱짓했다.
“물러나 있어라. 문을 열 거니까.”
“제가 열겠습니다, 나리.”
“네가?”
“이런 사소한 일들을 처리하는 게 종자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자신만만하게 내뱉은 필립이 냉큼 앞서갔다.
괜찮나, 저거.
이안이 입맛을 다시는 사이, 방패와 검을 고쳐 쥐며 자세를 다잡은 필립이 닫힌 나무 대문을 박찼다.
문이 벌컥 열리고, 거친 숨결과 푸드덕대는 소리가 이어졌다.
방패를 치켜든 채 어둠 너머를 노려본 것도 잠시.
“제기랄, 루 솔라여….”
필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