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139
139화
“이 천벌 받을 것들….”
이안은 탄식하는 필립의 뒤로 다가섰다. 역겨운 악취가 번졌다.
“비켜 봐.”
“안 보시는 게 좋으실 것 같습니다만….”
“자꾸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그제야 방패를 내린 필립이 옆으로 물러났다. 이안은 비로소 어둑어둑한 장내를 눈에 담았다.
코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악취. 배설물과 피가 뒤섞인 점액질이 흥건하고, 그 위로 온갖 뼈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 뒤론 썩어가는 시체 토막들이 쌓여 있었는데, 인간과 짐승이 마구 뒤섞인 채였다. 필립은 아마, 이걸 보고 탄식한 것이리라.
그리고 그 너머에 크고 작은 붉은 안광들이 번뜩였다. 이안은 그 경계심 가득한 시선을 담담하게 훑어보았다.
“…….”
가장 먼저 보인 건 덩치가 커다란 혼혈 고블린 몇 마리였다. 놈들은 벽에 바싹 붙은 채로 고기 조각이 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배가 부자연스럽게 크게 부풀어 있기까지 했다. 놈들의 주위로는 밖에서 본 것보다도 작은, 말 그대로 갓 태어난 듯한 새끼들이 우글우글 달라붙어 있었다.
일종의 부화장인 거군.
생각하던 이안은, 문득 배가 부른 고블린들을 다시 눈에 담았다.
공허의 마력이 느껴져서였다.
마력 탐지로 확인한 건 이놈들이 풍기는 마력이었던 모양.
그러고 보니 성별을 구별할만한 특징도 전혀 없고, 오히려 덩치가 아주 크고 근육질이기까지 했다.
그건 이안이 상대했던 부족장들의 특징과도 정확하게 일치했다.
당연히 전부 수컷일 줄 알았건만.
‘설마, 족장도…?’
눈앞의 광경만큼이나 역겨운 가정이었다. 이안이 혀를 찰 찰나, 필립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찾으시는 게 있습니까, 나리?”
“아니. 없는 것 같군.”
“그럼, 이제 처리하겠습니다.”
“아까 그 신성력, 더 쓸 수 있냐?”
이안이 몸을 돌리며 물었다. 다가오는 메브와 샬롯이 보였다. 필립의 대답이 이어졌다.
“보셨군요. 성물에 깃든 은총입니다만. 아쉽게도 앞으로 며칠은 제대로 사용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럼 너도 그냥 따라와라.”
“예…?”
이안이 걸음을 옮기며 덧붙이자, 필립이 눈을 치켜떴다.
“나리. 설마, 제가 못 미더우십니까?”
죽을 수도 있다니까 그러네.
이안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샬롯에게 눈짓을 보냈다. 성큼성큼 다가오며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이안을 지나쳤다.
이윽고 부화장 내부를 잠시 응시한 샬롯이 필립을 돌아보았다.
“널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새끼를 지키는 어미들은 평소보다 더 강한 법이지. 내게 맡겨라.”
“…예.”
별수 없다는 듯 대답한 필립이 몸을 돌렸다. 샬롯은 이미 피범벅인 전투 도끼를 한구석에 내려놓고, 양손에 송곳니 검과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녀를 돌아본 이안이 덧붙였다.
“변이할 수도 있는 놈들이다. 알아 둬.”
고개를 끄덕인 샬롯이 단검을 고쳐 쥐며 장내로 성큼 들어섰다. 그녀가 필립이 열었던 대문을 다시 천천히 닫았다. 번뜩이는 주황색 눈이 문틈 사이로 사라졌다.
걸음을 옮기는 이안의 뒤로, 고블린들의 비명과 터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뭘 보았기에 표정이 그런 것이냐?”
소란스러운 부화장을 일별한 메브가 물었다. 이안이 내뱉었다.
“암컷 고블린들과 새끼들이었소. 그리고 시체들.”
“아하.”
“평생 꿈에 나올 것 같은 광경이었습니다. 시체들은 칼로 토막 낸 게 아니었어요. 손으로 찢은 겁니다. 게다가 그 덩치 큰 놈들의 배는 또 어찌나 부풀어 있던지….”
뒤따르던 필립이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메브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변이되었어도 기본적인 특성까진 변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예전, 도감에서 읽은 그대로야.”
“…도감이요?”
“한 번쯤 읽어 보라 했었거늘. 끝내 펴 보지도 않은 모양이구나. 거기에 적힌 바에 따르면, 고블린들은 암컷이 더 크고 강하다더구나. 그래야 출산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일 거라더군. 임신 기간도 짧고, 한 번에 다섯에서 열 마리까지도 새끼를 낳는다고 했다. 암컷 중에서 가장 크고 강한 놈이 우두머리가 되고.”
“시발….”
“음? 못 들었다. 뭐라고 하였느냐, 이안?”
“아무것도 아니오.”
이안은 고개를 털며 걸음을 옮겼다.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걸음은 곧 오두막 앞에서 멈췄다. 안에서 흐릿한 마력이 번지고 있었다.
“여긴 아닐 것 같은데….”
그가 읊조리는 사이, 필립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좀 전에 본 광경 탓인지, 마음의 준비를 하듯 심호흡한 그가 문을 박찼다.
“윽… 역시….”
이어진 악취에 혀를 찬 것도 잠시. 다시 한 번 인상을 찌푸린 필립이 안으로 들어섰다.
뒤따라 들어선 이안도 설핏 미간을 좁혔다. 역시나 이번에도 제단은 없었다. 대신 더 끔찍한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썩은 짚단이 깔린 장내 곳곳에, 알몸으로 묶인 남자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팔이나 다리가 하나씩 없거나, 둘 다 없는 채였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있고, 눈가로 자줏빛이 아른거리는 혈관이 꿈틀댔다. 오염된 마력에 젖은 채로 짐승처럼 방치된 것이다.
“이건… 설마….”
산전수전을 다 겪은 성기사와 종자에게도 욕지기가 치미는 광경이었다. 파리해진 안색으로 중얼댄 필립이 이안과 메브를 돌아보았다.
“제가 생각하는 그게, 맞습니까?”
“…그런 것 같구나. 이상하다 여기긴 하였다. 아무리 변이되었다지만 마법을 부리고 말까지 하는 고블린은, 말이 되지 않지. 하지만 인간의 피가 섞인 거였다면….”
“믿을 수가 없군요. 마물이 어떻게 인간과… 이런….”
“마경이라 가능한 거겠지. 여긴 밖과는 다른 법칙으로 돌아가니까. 어쩌면 이 안에선, 모든 게 접붙을 수 있는 건지도.”
이안이 덤덤하게 덧붙였다.
“그럼 그 암컷들이… 제기랄… 루 솔라여….”
필립이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도 이안의 뇌리로는 원치 않는 역겨운 가정들이 스치고 있었다. 왜 남자들만 있는 건지 따위에 대한. 굳이 입 밖으로 낼 필요는 없는 생각들이었다.
“으… 으으…!”
남자들이 꿈틀대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얼굴의 자주색 핏줄이 선명해지고, 그들은 울부짖거나 울어댔다. 오염된 마력의 영향으로 아예 미쳐 버린 모양이었다. 이들에겐 차라리 그게 축복이리라.
“…이들에겐 제가 안식을 주겠습니다. 두 분은 가십시오.”
기도를 끝낸 필립이 내뱉었다. 검을 으스러지듯 움켜쥔 채였다. 비장한 뒷모습에, 이안은 더 덧붙이는 말 없이 몸을 돌렸다.
조용히 그의 곁으로 따라붙은 메브가, 건물에서 완전히 벗어나고서야 입을 열었다.
“변방의 미래가 걱정되는구나. 전쟁이 끝날 때쯤엔 저주와 광기로 가득한 흉지로 뒤덮일지도 몰라. 그땐 그 누구도 승자가 되지 못하겠지.”
이미 그렇게 된 것 같소만.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어깨만 으쓱였다. 그녀의 진심에 굳이 재를 뿌릴 필요는 없었다.
“제국에 발을 들이면, 교단의 대교회에 서신을 보내야겠다. 그간 내가 보고 겪은 것들을 소상히 알려야겠어.”
“…….”
이안이 돌아보자, 메브가 재빨리 덧붙였다.
“염려 말거라. 교단에 네 이름이 알려지는 일은 없게 할 테니.”
“그래서 본 게 아니오.”
어차피 교단은 이미 내 이름을 알고 있고.
“그럼?”
“교단은 망령 군단이 북부를 침공한 순간에도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소.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야, 조사단을 파견했을 뿐이지.”
이어진 덤덤한 말에, 안면 가리개 너머에서 옅은 숨소리가 번졌다. 메브가 미소 지을 때 번지는 숨결이었다.
“내가 실망할 것을 염려한 것이로구나. 걱정 말거라. 나도 그리 큰 기대는 없으니. 하지만 성기사의 서신이라면, 적어도 변방의 위협을 인지하고는 있게 되겠지.”
“…뭐, 그러시다면야.”
이안이 어깨를 까딱인 그때였다.
“키아아….”
몇 마리의 혼혈 고블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개와 멧돼지가 섞인 듯한 짐승들도 놈들의 곁에서 짖어 댔다. 다들 눈에 자주색 마력이 이글대는 채였다.
제대로 찾아 온 것 같은데.
생각하며, 이안은 놈들 너머의 목조 주택을 바라보았다.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심상치 않은 불길함이 전해졌다.
“이놈들은 내가 상대하겠다. 너는 마경의 핵을 찾는 데에만 집중하거라.”
내뱉은 메브가 몸을 날렸다.
키아악, 혼혈 고블린과 마수들도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놈들은 검광이 번뜩일 때마다 체액을 흩뿌리며 나가 떨어졌다. 그게 끝은 아니었다. 널브러진 것들이 꿈틀대며 변이하기 시작한 것이다.
걸음을 옮기며 이안이 덧붙였다.
“같이 싸우는 게 좋을 것 같소만.”
“혼자서도 충분해. 필립과 샬롯도 곧 합류할 테고.”
변이 중인 동족을 보호하듯 달려드는 고블린을 베어 넘긴 메브가, 가까워진 문을 가리켰다.
“들어가거라. 어서.”
다들 날 못 지켜 줘서 안달이군.
생각하며, 이안은 선선히 문으로 다가갔다. 메브가 저것들에게 당할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안에서 하려는 걸 생각하면, 그녀가 보지 않는 편이 더 좋기도 했다.
탁.
안으로 들어선 이안이 문을 닫았다. 문 너머로 괴성과 고함이 이어졌지만, 그는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장내를 훑었다.
엉망으로 어질러진 가재도구들. 쩍쩍 갈라진 판석. 그리고 바닥 한구석에, 지하로 통하는 비밀 문이 활짝 열린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타락자라도 숨어 살았던 건가….”
읊조리며 계단을 내려간 이안은, 제대로 찾아 왔음을 확신했다.
화륵, 그의 손에서 날아간 불꽃이 벽면의 횃불을 태웠다.
불빛이 지하 공간을 비췄다.
꽤 넓은 지하실. 혼자 파서 만들 수 있을 만한 크기가 아니었다. 돌을 쌓아 마감한 벽면 앞, 먼지가 뽀얗게 앉은 책상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안은 마구잡이로 방치된 책들을 훑어보며, 낮게 코웃음 쳤다.
“…흑마법사였네.”
그는 펼친 채로 놓여 있는 책을 아공간에 대충 던져 넣으며 몸을 돌렸다. 저 너머에서 은은한 자주색 빛이 번지고 있었다.
걸음을 옮긴 이안은, 곧 그 실체를 눈에 담았다.
지하실의 가장 깊은 곳. 인간의 것으로 보이는 뼈들이 차곡차곡 쌓여 제단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건, 다 삭은 로브를 걸친 백골이었다.
그런데도 허물어지긴커녕, 뼈만 남은 양손을 경배하듯 위로 치켜든 채였다. 손 한복판에는 두개골이 얹어져 있었다. 이 백골의 머리가 분명했다. 어깨 위가 텅 비어 있었으니까.
두개골의 이마 한복판에 커다랗게 새겨진 문자가, 자줏빛을 머금고 일렁였다.
이안도 읽을 수 없는 문자였다.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시야가 붉게 일렁이고, 끔찍한 환영이 뇌리를 스쳤다. 귓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속삭임이 번졌다.
물론, 이안의 정신을 오염시킬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흑마법사와 추종자들인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며, 이안은 제단 앞에 멈춰 섰다. 이대로 두개골을 부숴 버리면 퀘스트는 끝이리라.
하지만 이안은 운철 단검을 검집에 회수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자에 손을 얹으면, 타락자 전용 이벤트가 시작되리란 걸.
퀘스트가 뜨지 않는 건, 그가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일 테고.
‘괜찮을까.’
잠시 망설인 건, 남은 능력치 포인트가 너무 적어서였다. 그의 정신을 붕괴시킬 만한 존재와 조우하게 된다면, 꽤 아슬아슬할 터였다. 하지만 감당할 만한 리스크였다.
혼돈의 파편은 마력량이 부족한 그에겐 더없이 중요한 자원이었다. 게다가 아직 알 수 없는 퀘스트의 보상으로 추가적인 능력치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결정적으로, 레벨 업이 코앞이었다.
“후.”
결론 내린 이안은, 숨을 내쉬며 손을 뻗었다. 자주색 빛이 점점 짙어지고, 환영과 속삭임도 선명해졌다.
이윽고 손끝에 두개골이 닿은 순간.
푸확-!
자줏빛 섬광이 시야를 뒤덮더니, 세상이 뒤집혔다. 순식간에 모든 감각이 흐려졌다.
몇 번을 겪어도 적응이 안 되네.
내심 읊조린 그때, 시야가 다시 밝아졌다.
자주색 빛이 아른거리는 공허.
과거에 본 것과 비슷한, 하지만 훨씬 더 깊은 심연이었다.
그리고 저 너머에, 거대한 무언가가 떠있었다.
그건 비현실적으로 거대한 꽃봉오리 같아 보였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봉오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안은 그제야, 그것이 수많은 손이나 손과 비슷한 촉수들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새카맣고 일렁이는 몸통 한복판에서, 무수히 많은 자주색 빛이 피어올랐다.
그 하나하나가 전부 안광이라는 걸 깨달은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이런, 시발….’
내적 탄식이 절로 이어졌다. 저게 뭐건, 그를 인식한 게 틀림 없었기 때문이다.
안광이 밝아졌다. 이해할 수 없는 속삭임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저 존재의 의념일 터였다. 동시에 본능적인 공포가 치밀었다.
이안은 이성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이런 환영이 길게 이어질 리 없었다. 잠깐만 견디면 다시 현실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하지만 쉽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개미를 짓누르듯. 밀려드는 의념은 그의 의식을 으깨버리려 했다.
아래에서 보랏빛이 일렁인 건, 그의 이성이 거의 날아가기 직전이었다.
시야를 덮던 자줏빛이 사라지고, 대신 어둠이 찾아 왔다. 속삭임이 잦아들고 고요가 찾아 왔다.
시야가 다시 넓어졌다.
이안은 비로소, 저 아래에서 일렁이는 보랏빛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솟구친, 전부 인식할 수도 없는 거대한 무언가도.
시야가 어두워진 건 그 존재가 그의 앞을 가로막아서였다.
이건 또 뭔데…?
그 존재를 인식하려 애쓴 그때, 모든 게 점이 되어 멀어졌다.
뒤집힐 때 만큼이나 한순간에, 모든 감각이 되돌아왔다.
“헉… 허억….”
이안은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았다. 퍼석, 두개골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제단이 와르르 무너졌다. 뼈 더미 한복판에서도, 그는 그저 숨만 몰아쉬었다. 아직도 방금 본 환영과 영혼을 짓누르던 속삭임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건 대체 뭐였지…?’
퀘스트 완료 창이 연달아 이어졌다.
예상대로 하나가 아니었다.
뒤틀린 혼돈의 제단. 그리고 공허의 주시자들. 물론 이건, 받은 적 없는 퀘스트였다.
‘주시자들? 뭐, 날 지켜보기라도 한단 거야?’
어쨌든 소득은 있었다. 퀘스트 보상으로 경험치와 함께 정신력이 또 하나 오른 것이다. 레벨이 오른 건 덤이었다. 현실이 된 이후로 두 번째 레벨 업이었다.
“이안…! 괜찮은 것이냐?!”
생각 정리를 끝내기도 전에, 다급한 탄식과 함께 억센 손길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메브였다.
안면 가리개 너머의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눈을 부릅뜨고 있을 게 분명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지?
생각하는 사이, 그의 얼굴을 확인한 메브가 다시 한 번 탄식했다.
“괜찮지 않구나. 눈을 깜빡이지 말거라. 피가 흐르고 있으니.”
“…….”
이안은 그제야 눈코입에서 전부 피가 흐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건 메브의 반응이었다.
“무모했다. 자칫하다간 죽을 수도 있었어.”
“다, 보신 거요?”
“네가 핵을 움켜쥐고 있던 것 말이냐? 그래. 보았지. 번쩍이던 공허의 마력이 사라지던 것까지 전부.”
그런데도 이렇게 태연하다고…?
이안의 시선에 메브가 되물었다.
“왜 그렇게 보느냐?”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셔서 말이오.”
안면 가리개 너머로 낮은 웃음이 번졌다.
“뭔가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 애초에 의문을 가질 거라면….”
어깨를 더 단단하게 부축한 메브가, 그를 돌아보았다.
“널 무슨 색의 마법사라고 불러야 하는지부터 궁금해했겠지.”
“…….”
비로소 이안의 입가에 옅은 헛웃음이 번졌다. 그래, 이상한 게 너무 많아서 오히려 그러려니 한다 이거지.
메브가 그의 몸을 잡아 끌었다.
“일단 나가자꾸나. 핵은 파괴되었고, 밖에 필립과 샬롯도 기다리고 있다.”
“다들 합류했소?”
“그래. 그러니 내가 내려온 것이지.”
“그럼, 필립을 부릅시다.”
“필립은, 왜?”
“여긴 흑마법사의 연구실이오. 쓸만한 게 있나 뒤져 봐야 하지 않겠소?”
잠시 어이없다는 듯 이안을 돌아본 메브가, 이윽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래. 내려오라 하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