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21
021화
사방이 일순간 대낮처럼 밝아졌다.
숨이 턱 막히는 열기와 함께, 이안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콰르르르-
끝없이 뿜어져 나가던 불길이 이윽고 잦아들었다.
이안이 비틀대며 얼굴을 감쌌다.
“아오 내 눈, 시발….”
양손으로 압력을 버티느라 눈을 가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력 소모로 인한 두통과 배신감이 뒤를 이었다.
정보창의 불친절한 문구에 또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기 때문이다.
정수 내부의 마력으로 마법을 증폭시키는 건 줄 알았더니.
착용자의 마력을 빨아들여 증폭시키는 방식이었을 줄이야.
‘게임에선 안 이랬던 것… 아.’
이안은 그제야 게임에서도 정수만 단독으로 사용한 적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날강도나 다름없는 사제들 덕분에, 정화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 때쯤엔 이미 유물과 마법 무구를 잔뜩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마석이나 정수가 없으면 제 성능을 내지 못하는 것들도 있어서, 정수를 굳이 단독으로 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럼 그것들이 정수의 컨트롤러 역할까지 한단 건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측이었다.
게임의 설정이 억지스럽게라도 나름의 이유를 가지게 된 경우를, 이미 여러 번 경험하지 않았던가.
정수 내부에 중첩된 마력처럼.
자연스럽게 정수를 다시 손에 쥔 이안의 미간이 또다시 좁아졌다.
정수 내부의 마력 밀도가 현저히 낮아져 있었다.
‘템에 장착하면 50번은 쓸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개 아깝네.
정수를 아공간에 되돌린 그가 고개를 들었다.
시력이 어느 정도 되돌아왔다.
눈을 깜빡이며 초점을 맞춘 것도 잠시.
“허….”
뒤틀린 고대수의 상태를 확인한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놈은 거의 통구이가 되어 있었다.
화염이 관통한 아가리와 가지들은 달궈진 숯덩이처럼 변했고.
화르르-
주위의 가지들은 제대로 꿈틀대지도 못하고 타들어 가는 중이었다.
아나콘다를 방불케 하는 뿌리들만 땅을 헤집으며 고통을 호소했다.
“…등유 괜히 챙겨왔네.”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음 냅다 마법부터 갈겨 볼걸.
허탈하게 읊조리며, 이안은 아공간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이제 저 불쌍한 마물의 고통을 덜어 줄 차례였다.
***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미구엘이 읊조렸다.
말들이 불안하게 투레질하고, 주위로 썰리고 불탄 숙주 몇 마리가 널브러져 움찔대고 있었지만.
그는 숲 저 너머의 밤하늘만 멍하니 응시할 따름이었다.
한 시간쯤 전.
콰아아-
굉음과 함께 웬 불기둥이 밤하늘을 밝히며 솟구쳤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부터는 그저 희미한 빛무리만 일렁이고 있었지만.
“분명히 형씨 작품인데.”
그는 여전히 시선을 떼지 못했다.
“기름으로 뭔 짓을 해야….”
읊조리던 미구엘이 굳어졌다.
저벅대는 발소리가 희미하게 귀를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졸라게도 머네, 진짜….”
지친 목소리. 숨까지 참고 있던 미구엘이 비로소 내뱉었다.
“이안…? 댁이시오?”
풀숲을 헤치고 이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미구엘이 허물어지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 간 떨어질 뻔했잖소! 그보다, 저기서 대체 뭘 하신 거…?”
횃불을 비춘 미구엘이 다시금 말을 멈췄다.
이안이 잿더미에서 뒹굴다 온 것 같은 몰골이었기 때문이다.
“그… 괜찮소?”
“괜찮겠냐?”
가뜩이나 찜찜해 죽겠는데, 시발.
미간을 구기며 대꾸한 이안은, 뒤틀린 고대수의 최후를 떠올렸다.
놈의 약점에 칼을 꽂은 순간.
원념 가득한 비명과 함께 마력 폭발이 일었다.
크게 위험하진 않았지만, 놈이 통구이 상태였다는 게 문제였다.
충격으로 숯덩이가 된 부분들이 떨어지면서, 사방이 연막탄을 터뜨린 것처럼 개판이 돼 버린 것이다.
뒈질 거면 좀 곱게 뒈질 것이지.
혀를 찬 이안이 멈춰 섰다.
“물.”
“……?”
“물 내놓으라고.”
미구엘이 잽싸게 움직였다.
그가 내민 수통을 받아 한 모금을 마신 이안은, 나머지로 대충 얼굴과 장갑을 씻으며 덧붙였다.
“자리 계속 지키고 있어. 뭔가 나타나면 태우든 썰든 알아서 하고.”
“알겠….”
미구엘은 이안이 자신을 그냥 지나치자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그, 그게 끝이오? 더 하실 말씀 같은 건 없으시고?”
“없어. 닥치란 것 빼고는.”
“…….”
이안은 필립에게 다가갔다.
횃불을 든 필립은, 이안이 나타난 순간부터 똥 마려운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안은 그의 발치에 주저앉은 메브를 내려다보며 멈춰 섰다.
땅에 박은 검에 몸을 기댄 그녀는 간헐적으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
“그게… 나리께서 이리되신 건 저도 처음 봤습니다. 지병이 있으신 것도 아니고요.”
필립이 메브를 내려다보았다.
“필시 뭔가에 중독되신 거겠지요. 흑마법은 아닐 테니.”
“흠.”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답지 않게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메브는 티르 엔의 사도니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신성력에는 기본적으로 부정한 것을 태우는 힘이 있었다.
어지간한 흑마법이나 저주는 범접조차 할 수 없을 터.
하지만, 전투의 여운이 남아 아직 날카로운 이안의 감각은 전혀 다른 느낌을 전해 주고 있었다.
묘한 이질감과 불쾌함.
오염된 마력인가?
이안이 다시금 메브의 전신을 자세히 훑어보려는 찰나.
“그냥 제게 맡겨 주십시오, 나리.”
필립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횃불을 땅에 세운 그가 품에서 단검을 뽑아 들며 덧붙였다.
“이거면 금방 편해지실 겁니다.”
이안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걸로 뭘 어쩌게?”
“모르십니까? 상처를 내서 오염된 피를 빼내는 겁니다. 오염된 피가 스스로 극복하실 수 있을 만큼만 남을 때까지, 충분히요.”
“…….”
이게 또 뭔 미친 소리야…?
이안의 표정을 오해했는지 필립이 말을 이었다.
“물론 피를 한 번에 너무 많이 잃으면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피는 매번 소모되고 다시 만들어지는 거잖습니까. 믿어 주십시오. 전 이미 국경에서 이 시술을 여러 번 해 봤습니다.”
“하….”
이안은 결국 이마를 감싸 쥐었다.
이 암흑시대의 의료 지식이란 게 얼마나 야만스러운지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온갖 마법과 신비, 신성까지 실존하는 세상인 만큼, 의학 지식의 발전이 더딘 게 당연하겠지만.
막상 역사책에서나 볼 법한 개소리를 듣게 되자 밀린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넣어 둬라. 경이 돌아가시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달리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이안이 대답하려던 그때.
“이안…?”
메브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번졌다.
“왔구나… 기다렸다….”
간신히 덧붙인 그녀가, 기대고 있던 검 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이안의 시선이 검을 쥐는 그녀의 왼손으로 향했다.
덜덜 떨리는 팔. 그리고 긁힌 흔적이 올올이 남은 팔목 보호대.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사이, 필립이 허둥대며 말했다.
“아, 아직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나리. 나리께선 지금-”
“아니, 아니다. 이제 괜찮다. 이만하면 충분히… 우웩….”
갓 태어난 사슴처럼 바들대던 그녀가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나, 나리!”
필립이 철렁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메브가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쉬시오.”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누른 건 이안이었다.
“마물은 이미 다 처리했으니.”
“그런가… 또 네 도움을…….”
메브의 몸에 힘이 탁 풀렸다.
기울어지는 그녀의 몸을 받아들며, 이안이 필립을 돌아보았다.
“경의 왼팔 보호대를 벗겨라.”
“예…? 아, 예!”
필립이 허둥지둥 움직였다.
넋이 나간 중에도 익숙한 손길.
곧 메브의 왼팔이 드러났다.
“맙소사… 루 솔라여.”
“역시. 그때의 상처군.”
뱀이 칭칭 감은 듯한 흔적.
고름이 가득 차 부은 데다, 주위가 검게 물들어 있기까지 했다.
툭툭 불거진 핏줄들이 불길하게 꿈틀댔다.
“나리께서 언제 이렇게 되신 건지… 알고 계신 겁니까?”
“둘라한에게 입은 부상이다.”
혀를 찬 이안이 덧붙였다.
“갑옷과 신성력이 막아 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군.”
사실, 이 숲이 검은 벽의 광기에 물든 것만큼이나 의아한 일이었다. 둘라한 따위의 원한이 아무리 깊게 남았다 한들, 신성력을 이길 만큼 강할 리는 없었으니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메브의 신성력으론 이 저주를 정화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이안의 뇌리로 문득, 간단한 해답이 스쳐 지나갔다.
‘이거, 그냥 내가 루 솔라에게 기도하면 해결되는 거 아닌가?’
빛의 신의 신성이라면 어떤 저주라도 정화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내키지는 않는 선택이었다.
그에게 러브콜까지 보냈던 만큼 큰 힘을 내려주긴 하겠지만.
그러고도 부름을 거절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천벌이 내리리라.
“쯧….”
이윽고 혀를 찬 이안이, 양손을 가슴 앞에 깍지 껴 모아 쥔 순간.
꿈틀-
오른손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멈칫하는 이안의 뇌리로 원초적인 속삭임이 이어졌다.
유일 등급의 반지, 늪지의 원한.
이안의 사역마이기도 한 놈이, 불현듯 사념을 보내온 것이다.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네가 삼킬 수 있다고?’
정보창에 그런 내용은 없었는데.
…하긴. 그게 전부는 아니지.
이안은 이윽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정보창이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거기다 애초에 늪지의 원한은 둘라한의 본체나 다름없던 놈.
놈의 저주를 거둬들일 수 있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할 수 있는데 왜 가만히 있었냐?’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명령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안의 몸에 신성이 깃드는 것은 달갑지 않았으니, 그전에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나만 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군.
뜻밖의 공통점에 실소하며, 이안은 장갑을 벗었다.
“경의 팔을 꽉 잡아라, 필립.”
“알겠습니다… 만. 뭘 하시려고요?”
“치료.”
“어떻게요?”
이안은 대답 대신 오른손을 메브의 팔 위로 내밀었다.
스륵-
중지의 반지가 살아 움직였다.
필립의 눈이 커졌다.
“그, 그게 뭡니까? 그냥 반지가 아니라고요?”
“둘라한이 남긴 원념이다. 지금은 내게 복속된 사역마고.”
필립의 미간이 천천히 구겨졌다.
“마물이란… 말씀이십니까?”
“왜. 문제 있냐?”
“왜 없겠습니까! 타락한 자들이나 마물을 가까이하는 법입니다! 하물며 종으로 부리시다니요!”
뭐라는 거야.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그만이지.
코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저 편협한 시각이야말로 이 세계의 보편적인 통념이었다.
이 암흑시대 인간들의 기준에선 이안의 실리적인 사고방식이 오히려 불경스러운 것이다.
“그걸 나리께 사용하신다면 분명, 여신께서도 진노하실 겁니다.”
듣고 있던 이안이 툭 내뱉었다.
“사도가 죽도록 두는 것보다 더?”
“예…? 어, 그건, 글쎄요….”
필립이 말문이 막힌 듯 더듬댔다.
이안이 덧붙였다.
“네 눈엔 내가 타락한 것 같냐?”
“그래 보이진… 않습니다만.”
“그럼 아가리 닥치고 팔이나 잡아. 한마디만 더 하면 내 진노가 뭔지부터 알게 해 줄 테니까.”
“…….”
입술을 떨던 필립이 마지못한 표정으로 메브의 팔을 움켜쥐었다.
검은 실뱀이 기다렸다는 듯 메브의 팔 위로 떨어졌다.
고름 위를 기어간 놈이 상처 한복판을 콱 깨물었다.
검은 핏물이 뭉근하게 번졌다.
번진 피가 선이 되어 흘러내릴 때쯤, 필립의 눈이 커졌다.
“벼, 변화가 있습니다, 나리!”
검은 자국이 가장자리부터 눈에 띄게 희미해진 것이다.
쉬익- 몇 분 지나지 않아, 늪지의 원한이 만족스러운 숨소리와 함께 아가리를 뗐다.
비늘의 윤기가 더해졌을 뿐 겉모습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메브의 팔을 덮었던 검은 자국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물론 뱀이 기어간 듯한 흔적과 고름이 가득 찬 환부는 여전했지만.
‘일단 고비는 넘긴 것 같군.’
적어도 육감을 자극하던 불길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이 마물이 나리를 치료할 수 있었던 거군요.”
그렇다니까, 새꺄.
콧방귀를 뀐 이안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샤아-!
늪지의 원한이 송곳니를 드러낸 건 그때였다.
필립이 화들짝 뒤로 몸을 젖혔다.
“왜, 왜 이러는 겁니까?!”
“글쎄.”
이안은 태연하게 원한의 아가리 앞으로 계속 손을 가져갔다.
놈과 이안의 시선이 교차했다.
이안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또 해 봐, 어디.’
대치는 짧았다.
이안의 손끝이 닿은 순간 놈의 아가리가 스르륵 닫힌 것이다.
그대로 손가락을 타고 기어 올라간 놈이, 반지의 형태로 돌아갔다.
필립이 꺼림칙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 정말 괜찮은 겁니까…?”
“길들인다고 본성까지 사라지진 않는 법이지.”
아무리 닥치라고 해도 떠들어 대는 네놈처럼.
“단검이나 내놔. 가방에서 붕대랑 술도 꺼내 오고.”
“술은 어째서…. …예, 나리.”
이안의 눈빛에 입을 다문 필립이 단검을 건네며 일어섰다.
이안은 단검 날을 횃불에 지졌다.
어떤 의미론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가져왔습니다, 나리!”
필립이 붕대와 술병을 들고 돌아왔다.
이안은 술병의 마개부터 열었다.
코끝을 찌르는 독한 냄새.
다행히 맥주보단 럼에 가까웠다.
이안은 술로 손을 씻었다.
‘이게 정말 영화에서처럼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안 하는 것보단 낫겠지.
“경의 팔을 꽉 잡아라, 필립.”
환부 끝에 단검 날을 가져다 댄 이안이 속삭였다.
“좀 아플 거요.”
검을 쭉 그은 건 거의 동시였다.
끈적한 피와 고름이 번져 나왔다.
곧바로 단검을 내려놓은 이안은, 양손으로 환부를 힘껏 쥐어짰다.
“……!”
메브의 몸이 발작적으로 꿈틀댔다.
하지만 이안, 그리고 자신이 아픈 것처럼 오만상을 찌푸린 필립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이윽고 이안이 술병을 들었다.
피와 고름이 흥건한 팔뚝 위로 술이 쏟아졌다.
메브의 허리가 활처럼 휘어졌다.
“흐윽…!”
쫙 편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이안은 묵묵히 남은 피고름을 전부 닦고 환부를 천으로 싸맸다.
응급처치 스킬 덕분에 모든 과정이 제법 그럴싸했다.
이안이 손을 놓자 메브의 몸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저, 정말 치료가 맞습니까? 제 눈엔 오히려 나리를 해치시려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죽이려던 건 내가 아니라 너고.
코웃음 친 이안이 메브를 내려다보았다.
“정신이 드시오?”
안면 가리개 너머로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