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213
213화
황토색 먹구름이 뒤덮인 하늘은 낮과 밤을 구별하기 어려워졌다.
산은 자신의 이질적인 본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때때로 자줏빛으로 일렁이는 거대한 꽃이나 파르스름한 포자를 안개처럼 머금은 버섯 무더기 따위가 마차 주위를 스쳐 지나갔다.
어디서 번진 건지 모를 암녹색 안개가 길에 낮게 깔리기도 했다.
게임에선 부식의 연무나 부패의 안개, 독 포자, 질병 덩어리 따위의 이름으로 불리던 필드 랜덤 디버프들. 닿아서 좋을 게 없다는 설명은, 물론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말들이 마물로 변한 게 전화위복이 됐다고도 할 수 있었다.
녀석들은 암녹색 안개나 포자 따위에 노출되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걸음을 옮겼다.
“마차에 열심히 기름을 먹여 두길 잘했군요. 아니었다면 진작 삭아버렸을 거예요. 지금도 안심할 수는 없긴 합니다만.”
일행은 목에 건 델라 루의 은총을 붙잡고 신성을 쬐거나 필립의 도움을 받으며, 별 탈 없이 전진을 이어나갔다.
마차에서 내리거나 숲에 발을 들일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필립의 예상이 현실이 된 덕분이었다.
곰팡이의 숙주가 된 코볼트나 트롤. 때때로 거대 잠자리나 나방, 지네 따위가 날아다니긴 했지만 마차로 덤벼들지는 않았다.
그저 푸르스름한 포자를 흩뿌리며 날아다니거나 어슬렁댈 따름이었다.
“…여기서 야영지를 꾸리는 건 무리 같습니다. 다행히 말들이 쉴 필요도 없으니, 둘씩 나눠서 불침번을 서도록 하죠.”
필립이 제안한 건, 그렇게 한나절이 훌쩍 지나고 나서였다.
메브와 이안을 차례로 돌아본 그가 덧붙였다.
“비어 있는 한 자리는 제가 연달아서 서겠습니다.”
“아니. 내가 두 번 서겠다.”
샬롯이 마차 문을 열고 몸을 내밀며 말했다.
“난 잠깐만 눈을 붙여도 사흘은 자지 않을 수 있지. 약해 빠진 인간인 너와 달리.”
“하지만….”
“샬롯이 서게 둬.”
이안이 덧붙였다. 필립의 시선을 받은 그가 턱을 까딱였다.
“성물의 신성을 섬세하게 다루려면 집중력이 필요하니까. 루 솔라의 신성을 다루는 건 너뿐이야. 체력을 아껴 둬라.”
“여차하면 나리께서 쓰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 반지를 빼고도 이 안에서 버틸 수 있을 것 같냐?”
“…아하.”
필립이 그제야 낮게 탄식했다.
괴물 같은 저항력과 회복력을 가진 이안은 물론, 그 분야에선 타고난 종족인 샬롯. 영혼에 신성의 근원을 품은 메브와 생명수와 하나가 된 원로 요정인 테사이아는 델라 루의 은총이 부여하는 저항력만으로도 버틸 수 있겠지만.
평범한 인간인 그는 아닐 터였다. 그가 지금까지 멀쩡한 건 성물을 두 개나 가진 덕분이리라.
“알겠습니다. 그러죠.”
“안으로 들어가라. 네가 말번을 서.”
샬롯이 밖으로 나오며 덧붙였다. 필립이 순순히 자리를 바꿔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메브도 옆으로 말을 붙였다.
“내가 중간을 서겠다. 이안.”
기어코 가장 피곤한 순서를 고르시는군.
내심 피식하면서도, 이안은 선선히 몸을 일으켰다. 메브가 이 부분에선 양보하지 않을 게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왜 나한텐 아무도 안 물어봐? 나는 선택권이 없어?”
테사이아가 툭 끼어든 건 그때였다. 저마다 움직이던 일행이 움찔 멈추고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테사이아가 히죽 웃음 지었다.
“농담이야. 다들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어.”
뭘 기대한 건진 몰라도, 일행의 반응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듯 작게 한숨 쉰 메브가 마차 지붕에 누웠다.
“이따 뵙겠습니다.”
인사한 필립이 마차 문을 닫았다.
테사이아와 대화를 나누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둘 다 곧바로 눈을 붙이려는 것이리라.
전투가 없더라도, 정신적인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말에 탄 이안과 마부석의 샬롯은 말없이 전진을 이어갔다.
샬롯이 입을 연 건, 이윽고 일행 모두의 숨결이 잦아들었을 때였다.
“어딘가에서 반드시 일어날 침식이었다면, 차라리 서부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동공이 넓어진 눈으로 숲을 훑으며, 샬롯이 말을 이었다.
“여긴 남부 밀림을 떠올리게 해. 아마 이끼와 곰팡이가 자라기 좋은 환경을 만든 거겠지. 본래의 건조한 날씨에선 살아남기 힘들 테니까. 하지만 남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순식간에 전역으로 번졌을 거다.”
“…꽤 그럴듯한 소릴 하는데.”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날씨가 후텁지근해지고 공기가 눅눅해진 이유 따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침묵이 이어진 것도 잠시. 샬롯이 낮게 가르릉대는 숨소리를 냈다.
그녀를 돌아본 이안은, 놀랍게도 이 수인 전사가 향수에 젖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이 주황색 눈동자에 묻어났다.
‘이 괴상한 경치를 보면서 고향을 떠올리다니.’
도대체 남부는 어떤 곳인 거야?
헛웃음을 흘린 이안이,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하겠는데.”
“……?”
“여기서 볼일이 끝나면 라클리프로 갈 거다.”
“알고 있다. 그곳에도 타락자들이 숨어 있으니. 어쩌면 이곳과 비슷한 상태일지도 모르고.”
“그래. 네가 함께하는 건 거기까지야. 물론, 테사도.”
“……!”
샬롯이 눈을 치켜떴다.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경의 복수가 끝나지 않아도 거기까지다. 이번엔 거절은 받지 않겠어.”
“하지만-”
“라클리프는 흑해와 내해를 이어주는 중요한 거점이라지. 아무리 도시가 난장판이 되었어도, 내해를 건너 남부로 향하는 배가 하나쯤은 있을 거다.”
“…….”
미간을 찌푸린 샬롯이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이걸 어떻게 거절하고 있을지 고민하는 게 분명했다.
처음엔 그렇게 떠나고 싶어 하더니….
코로 웃은 이안이 내뱉었다.
“이미 핀드렐, 그 귀쟁이에게 이야기를 들은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네 일족에게 남은 시간은 착실히 줄어들고 있지. 그깟 마음의 짐은 나중으로 미뤄 둬.”
샬롯을 마주 보며, 이안이 건조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정신 똑바로 차려라. 귀향을 앞두고 죽고 싶진 않겠지. 쓸데없는 감상에 빠지지 말고, 살아남을 생각만 해. 광전사처럼 날뛰지도 마라.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야.”
“…알았다. 그러지.”
머쓱하게 입맛을 다신 샬롯이 시선을 돌렸다.
“네가 말을 길게 할 땐,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지는군.”
그러라고 길게 하는 거니까.
콧방귀를 뀌며 시선을 돌린 이안은, 이윽고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행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혼돈의 파편이 만들어내는 울림이 잦아들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산속으로 들어갈수록 조금씩 더 강하고 선명해졌다.
‘의식의 징표에서 혼돈력을 흡수해서 그런 건가.’
이안이 짧게 입맛을 다셨다.
가능성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애초에 드네로브의 의식은 이곳과 이어져 있지 않았던가.
그 일부를 흡수한 혼돈의 파편이, 침식의 중심부와 공명하고 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알겠으니까, 적당히 하면 안되겠냐.’
슬슬 거슬리거든?
내심 덧붙인 말에도, 파편의 울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밤새도록.
***
“저, 죄송합니다만, 나리. 일어나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마부석 쪽의 간이 창을 연 필립이 속삭였다.
의자에 구겨져 있던 이안이 번쩍 눈을 떴다.
그는 잠든 게 아니었다. 파편의 울림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자유로워지는 건 명상을 활성화할 때뿐이었다. 덕분에 그는 내내 명상에 잠겨 있었다.
마차의 각도를 가늠한 그가 곧바로 내뱉었다.
“산을 다 내려왔나?”
“예. 저 멀리 도시가 보입니다. 그리고….”
건너편, 마찬가지로 눈을 뜨는 메브와 눈빛을 교환한 이안이 더 들을 것도 없이 마차 문을 열었다.
상반신을 밖으로 내밀자, 불그스름한 하늘과 사방에 가득한 넝쿨들이 펼쳐졌다.
“…포도밭이군.”
단숨에 알아볼 수 있었던 건, 좌우 곳곳에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포도송이들이 매달려 있어서였다.
씨알이 거봉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만큼 크고, 안에서 번지는 푸르스름한 빛이 낡은 전구 불빛처럼 일렁였다.
철퍽-
멀지 않은 곳의 포도알 하나가 쩍 벌어지며 속살을 토해낸 건 그 직후였다.
신비한 푸른 빛과 달리, 과육은 전혀 신비롭게 생기지 않았다.
가래처럼 누르스름한 덩어리.
땅에는 이미 다른 과육들이 잔뜩 눌어붙어, 누런 안개를 자아내고 있었다. 게임에선 질병 덩어리가 내뿜던 색이었다.
“이것들 때문에 부른 게 아냐. 이안.”
안장에 탄 테사이아가 그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사람이 있어.”
“사람?”
“사람 같은 형태인 것들.”
한쪽 눈썹을 말아 올린 이안은, 곧 테사이아가 말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넝마 같은 로브를 뒤집어쓴, 등이 굽어진 누군가였다.
그는 진물과 고름이 흐르는 팔을 뻗어, 다 익은 포도알을 하나씩 쥐어짜 터뜨리고 있었다.
다각- 다각-
마차가 근처의 길을 지나치자, 하던 일을 멈춘 그가 마차 쪽을 돌아보았다. 깊이 눌러 쓴 두건 아래로 누런 안광이 빛났다. 놀랍게도 평온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그는 적의를 드러내거나 괴상한 행동을 하는 대신, 마차를 향해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사실 저게 더 괴상했지만.
“…저러는 게 처음이 아닙니다. 몇몇을 더 지나쳤는데, 죄다 저렇게 인사하더군요. 반갑게요.”
필립이 인상을 찌푸린 채 뇌까렸다. 지붕 위에서 샬롯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서 몸을 반으로 갈라 볼까? 그래도 저렇게 예의 바른지.”
“…아니. 됐다.”
심드렁하게 내뱉은 이안이 마차 지붕으로 올라서며 덧붙였다.
“도발에 넘어가서 저 안에 발을 들일 필요는 없지. 급하면 저놈들이 찾아올 테니까, 그냥 둬.”
그가 오만상을 찌푸린 필립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신의 손길이 닿고 있나?”
“확인해 보겠습니다.”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쥔 필립이 눈을 감았다. 이안은 비로소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완만하게 이어진 내리막 저 너머, 테센시의 전경이 보였다.
드네로브보다는 훨씬 작은 성이었다. 변방의 도시와 비슷한 규모였다. 본래는 포도주나 빚으며 수도사들과 어울려 살던 작은 도시였던 게 분명했다.
어쨌건, 지금의 모습은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성벽은 몇십 년은 버려진 것처럼 낡아 있었고, 이끼와 곰팡이가 곳곳에 덮여 있었다.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왜 보이지 않는지는, 물론 굳이 상상할 필요도 없었다.
두근-
그보다 당장 이안의 신경을 거스르는 건, 혼돈의 파편이었다.
성을 눈에 담은 순간 더 강하게 고동을 토해내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히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멋대로 굴거면 이유라도 알려 주던가. 시발아.’
반항기냐?
명치 어름에 손을 얹은 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어떠면 혼돈의 파편이 성장하며 일어나는 단순한 부작용일지도 몰랐다.
본래는 계란 보다도 작던 게, 지금은 작은 자두 정도의 크기가 되었으니까. 실제로 형태가 존재하는 건 아니겠지만, 심상을 통해 전해지는 느낌이 그랬다.
품은 혼돈력의 양만큼, 그에게 끼치는 영향력도 함께 늘어나고 있었다.
‘확실히, 정보를 줄 타락자가 필요하긴 해.’
여기 있는 놈들은 아니겠지만.
숨을 고르며, 이안은 몸에 걸친 장비들을 딱 맞게 조율하기 시작했다. 마차 내부에서도 철컥대는 소리가 번지고 있었다. 메브도 전투를 준비하는 것이리라.
그때 눈을 뜬 필립이 말했다.
“다행히 여신의 손길이 느껴집니다. 역시, 아무리 공허의 존재라도 한계는 존재하는 모양이군요.”
“물질계로 현신했으니까. 본래의 힘을 전부 가지진 못했겠지.”
“…마법사다운 말씀을 해주시네요. 간만에.”
오랜만에 아는 설정이 나왔거든.
이안이 내심 중얼대는 사이, 필립이 말을 이었다.
“두 분 나리는 적어도 수도원에 들어갈 때까지는 힘을 아끼십시오. 이안 나리는 특히 마력을요. 그 전에 싸울 일이 생긴다면, 저희 셋이 나서겠습니다.”
“우린 계속 한 묶음이네.”
손에 든 장궁을 까딱댄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의형제라도 맺어야 하나 봐.”
“수인과 귀쟁이, 인간 삼 남매라. 아주 볼만하겠군. 난쟁이와 오크까지 껴 있으면, 모든 종족을 아우르겠어.”
샬롯이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댔다.
테사이아가 눈을 빛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인데? 난쟁이야 북부에 잔뜩 있고. 오크들은, 사막에 산댔나? 들를 일이 있으면 하나 주워 봐야겠어.”
“포자를 너무 많이 마신 모양이군. 귀쟁아.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왜, 못 할 건 없잖아. 우리만 봐도 충분히-”
테사이아와 샬롯의 말다툼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포도밭에 둘러싸인 성이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회해서 가겠습니다. 굳이 저 안을 가로지르고 싶진 않네요.”
필립이 말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마차가 성벽 옆을 따라 이어진 관도로 들어섰다. 몇백 년 된 유적이라 해도 믿을 법한 성벽이 마차 측면으로 이어졌다.
성벽 너머는 그저 고요했다. 반대편 포도밭에 낀 누런 안개도 소리 없이 조금씩 더 짙어졌다.
“아예 우리 존재를 무시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긴장 늦추지 마라.”
툭 내뱉은 이안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지금 그는 주위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발작하듯 울어대는 혼돈의 파편을 다스려야 했기 때문이다.
‘설마 보스전까지 이러는 건 아니겠지.’
그냥 허공에 다 뿌려 버릴까.
혀를 찬 이안이 눈을 반개하며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 성벽을 지나친 마차가 이어진 관도로 접어들었다. 테센 수도원은 성 뒤편, 다시 시작된 완만한 오르막길 너머에 솟아 있었다.
관도 좌우로 이어진 뒤틀린 포도밭이 괴물의 손아귀처럼 보였다.
필립의 지도상으론 반나절 거리였건만, 실제로는 도보로도 십여 분이면 도착할 거리였다.
원래 저런 건지, 일대가 뒤틀리며 일어난 변화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어쨌건, 수도원은 작은 마을이라 해도 될만한 규모였다.
높고 긴 담벼락과 대문이 음산했다.
“저 역겨운 안개가 관도까지 밀려들겠는데요. 서둘러야겠습니다.”
길 좌우의 포도밭을 돌아보며 필립이 내뱉었다. 안면 가리개를 올린 채 마차 문을 연 메브가, 뒤편을 바라보았다.
“정말 그래야 할 것 같구나. 필립.”
“……?”
고개를 갸웃하며 일어선 필립이, 마차 지붕 너머로 테센 시를 돌아보았다. 그의 미간이 이내 구겨졌다.
“루 솔라 맙소사….”
포도밭에서 번진 누런 안개가 어느새 성을 뒤덮고, 그걸 넘어 관도로도 밀려들고 있었다.
퇴로가 완전히 차단 당한 형국이었다. 메브의 손길에 테사이아가 마차 옆으로 말을 붙이고, 휙 지붕으로 뛰어 올랐다.
메브가 능숙하게 안장 위에 올라탔다. 명상에 잠긴 듯한 이안을 잠시 돌아본 그녀가, 뒤를 응시하는 샬롯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뭔가 느껴지는 게 있나?”
“감각이 교란되고 있다. 여기선 나도 평범한 인간과 다름 없어.”
샬롯이 나지막이 내뱉었다. 필립이 입맛을 다셨다.
“평범한 인간은 그보다 더합니다. 귀는 먹먹하고 악취에 코는 마비됐고, 목도 깔깔하고요.”
“그럼 지금 가장 유능한 건, 아무래도 나인 것 같네.”
“…엥?”
이어진 테사이아의 의기양양한 목소리에, 필립이 눈을 끔뻑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똑바로 선 테사이아가 미소 지었다. 꾸득 꾸득, 그녀의 눈 주위로 지렁이 같은 핏줄들이 돋아났다.
“이걸 꿰뚫어 볼 수 있는 건, 원로 요정인 이 몸의 능력 밖에…?”
테사이아의 시선이 옆에서 뒤로, 그리고 반대편 옆을 지나 다시 저 앞에 솟은 수도원까지 한 바퀴를 돌았다.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뭐가 아닙니까?”
“기척이 온 사방에서 느껴지거든. 우린 지금 포위당했어. 게다가….”
“…….”
필립의 낯이 굳어지는 가운데, 테사이아가 눈을 끔뻑이며 덧붙였다.
“죄다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내 시선을 느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