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250
250화
“그래… 잠시, 이리 줘 보겠니?”
아르케아스가 짧은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검날을 쥔 이안이 자루를 그의 손 앞으로 내밀었다.
아무리 저 몸이라 해도, 아르케아스가 마검에 홀릴 걱정 같은 건 들지 않았다.
아르케아스가 자루를 쥐자, 검날에서 옅은 울림이 일었다가 이내 잦아들었다.
양손으로 검을 받쳐 든 아르케아스가, 거뭇한 윤기가 흐르는 검날을 눈으로 훑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와 말하자면, 나도 몹시 놀랐단다. 그가 아직도 야망을 버리지 못했음은 알고 있었지만… 기어코 결계에 균열까지 만들어 냈을 줄이야. 그건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란다.”
아르케아스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쳤다.
“하지만 그래…. 그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기는 했지. 그리고 그는, 그 시간을 견딜 인내심과 의지를 지닌 존재이고.”
다시 이안을 마주 본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늘을 거슬러 천상에 오르려던 존재잖니. 그건 용에게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란다.”
일행들은 어느새 술잔을 내려놓고 아르케아스만 바라보고 있었다.
전설로만 전해지는 이야기를 그 당사자에게 직접 들을 기회이기 때문이리라.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인 나세르조차, 대화의 맥락을 파악하려는 듯 눈을 끔뻑였다.
물론, 이안은 역천룡의 비화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역천룡을 섬기는 자들이 더 있을 것이오. 지금은 내 행적을 놓쳤겠지만, 곧 다시 알게 되겠지. 그럼 또 나를 따라올 것이오. 어쩌면… 의회에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렇겠지.”
씁쓸하게 대답한 아르케아스가 흑검을 다시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황금빛이 아른거리는 눈동자가 이안을 마주 보았다.
“다시 한번 사과하마. 내 불찰이다. 네가 나의 대행자가 아니었다면, 겪지 않았을 위협이야.”
“사과는 됐소. 중요한 건 대응이니까.”
“옳은 말이지. 하지만….”
아르케아스가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댔다.
이안은 대답을 종용하는 대신, 일어서 술병을 들었다. 그는 아르케아스의 빈 술잔을 채워 주기 시작했다. 천천히 생각해도 괜찮다는 의미였다.
“역천룡이라니… 대체…. 가만. 그럼, 그 시체가…?”
다들 말없이 술만 홀짝이는 가운데, 뒤늦게 충격에 빠진 듯한 표정이 되어 있던 나세르가 중얼댔다.
다시 자리에 앉은 이안이 그를 돌아보며 피식댔다.
“아, 그래. 너도 그놈의 시체를 봤나 보군.”
“…예. 아마 지금쯤 대교회로 옮겨졌을 겁니다. 역천룡이라니… 그 전설 속의 악룡이 아직도 살아 있단 말입니까?”
“살아 있는 정도가 아니야. 여전히 신의 흉내를 내고 있지. 자신을 섬기는 신도 몇몇을 사도라 칭하며, 힘까지 내려 주면서.”
“……!”
이안이 술잔을 들며 내뱉은 말에 나세르가 경악한 듯 입을 벌렸다.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더 말려 올라갔다.
‘저놈은 여명단이었던 주제에 아는 게 없네.’
하긴. 설사 역천룡에 대해 아는 고위 인사가 있더라도, 그 사실을 아래로 발설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래. 그는 살아 있고, 영원한 형벌을 받고 있단다. 신들께서 직접 내리신 벌이지.”
아르케아스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그렇기에,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에게 그 어떤 추가적인 위해도 가할 수가 없단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에게 따져 묻고 만류하는 것뿐이지. 물론,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을 거란다. 오히려 역효과만 낳겠지. 본래 그런 존재이니까. 내가 아직 어리던 시절부터, 이미.”
아르케아스가 가라앉은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막아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이안. 하지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오히려 널 돕는 거란다.”
씁쓸하게 미소지은 그가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나세르가 더는 뭔가 말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뭐, 귀하는 그러시겠지.”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이안이 태연하게 침묵을 깼다. 그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아니잖소?”
“……!”
아르케아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손에 든 잔에서 술이 찰랑대며 튀어 올랐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귀하께서 직접 문제를 해결해 주리란 기대는 처음부터 한 적도 없소. 그래서 알려 주실 수 있는 부분만 알려 달라고 한 거고. 그런 의미에서 여쭤볼 게 있는데….”
옅은 파장이 번지는 아르케아스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이안이 미소 지었다.
“용의 마력이 깃든 무기는 용에게도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사실이오?”
나세르는 물론 일행 모두가 홱 고개를 돌려 이안을 바라보았다. 설마하니 용에게 직접 이런 걸 물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들을 더 놀라게 한 건 이어진 아르케아스의 목소리였다.
“더 효과적인 것은 사실이지. 우리의 뼈와 가죽은 아주 단단하잖니. 동시에 마력으로 지켜지고 있기까지 하지. 너도 알다시피 용의 마력은 그 밀도가 아주 높단다. 그러니 같은 용의 마력이 그나마 더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거란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안의 물음에 대답해 주기 시작한 것이다.
아르케아스는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이안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힘을 누가 휘두르느냐가 더 중요하단다. 처음 그 말이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알고 있니? 맞춰 보렴. 너도 아는 이름이란다.”
“…카르하를 말씀하시는 거요?”
“바로 알아차리는구나. 그래. 그의 도끼에는 진언이 새겨져 있었지. 필멸자의 몸으로 태어나 불가능한 운명에 맞서는 그의 의지에 감복한 어떤 용이, 그에게 도움을 준 거란다. 그리고 그는 그 도끼로 절대적인 존재에게 큰 상처를 입혔지. 그 용이 누구인지는, 알려 줄 필요도 없겠지?”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용살자로 만들어 준 용도 바로 그놈이니까.
술로 입술을 축인 아르케아스가 덧붙였다.
“그가 용의 마력이 깃든 무기의 도움을 받은 건 틀림없는 사실이란다. 하지만 그때 그는 이미 스스로 신성을 갖출 만큼 위대한 전사였지. 그 사실은 잊힌 채, 절반의 진실만이 이어져 온 거야. 물론, 나는 그 오해를 굳이 바로잡지 않았단다.”
아르케아스의 안광이 의미심장하게 일렁였다.
“언젠가 나를 죽이려는 이들이 있잖니. 교활한 함정을 파 둔 셈이지. 그들을 내가 만들어 낸 무구로 나를 겨누고 나서야, 자신들이 헛된 꿈을 꾸고 있었음을 알게 될 테니까.”
솔직하시긴. 이안이 슬쩍 나세르를 돌아보며 웃음 지었다.
녀석은 또다시 숨 쉬는 것조차 잊은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상태였다.
물론, 이안은 순수 교도들이 정말 백금룡을 죽일 수 있으리라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었다.
그는 이미 아르케아스가 싸우는 걸 직접 본 적이 있지 않던가.
신이 직접 천벌을 내려 아르케아스를 떨어뜨리지 않는 이상, 놈들은 그에게 닿을 수조차 없으리라.
“하지만 이 이야기의 진짜 중요한 부분은, 내가 판 함정 따위가 아니야.”
아르케아스가 이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스스로 신성을 손에 넣을 만큼 위대한 전사조차, 끝내 홀로 용을 죽이지는 못했다는 사실이지. 사실 상처 입은 타후므리트가 스스로 물러나지 않았다면, 먼저 목숨을 잃는 건 카르하가 되었을 거란다.”
아, 이 얘기를 하려고 그렇게 밑밥을 까신 거군.
코로 웃음 지은 이안이 술잔을 입에 가져가는 가운데, 아르케아스가 덧붙였다.
“용의 힘은 살아온 시간에 비례한단다. 그리고 그는, 나보다도 오래 산 용이지. 비록 그 힘을 봉인당한 채 영원한 형벌을 받고 있다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와 맞선다면, 너는 죽게 될 것이다. 이안.”
오늘 만난 이래 가장 단호하고 완고한 말투였다.
이안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미 게임에서 역천룡과 싸워 보지 않았던가. 수많은 게임 오버 화면을 보여 주었던, 말 그대로 끔찍하게 강하던 괴물. 심지어 놈을 죽일 수 있었던 건 공격 패턴을 전부 외운 것으로도 모자라, 운까지 따라 준 덕분이었다. 그런데도 아슬아슬했다. 마지막 한 방이 약점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는 다시 게임 오버 화면을 보게 되었을 테니까.
현실이 된 지금은 당연히 그때보다 더 강해졌으리라. 물론 그건 이안도 마찬가지였지만, 용에 비할 수는 없을 터였다.
게다가 패턴도 아예 똑같지는 않을 테고, 재도전할 기회도 없었다.
“그러니 그를 찾아가려는 생각은 하지 말렴. 그는 네가 결코 찾을 수 없는 곳에 있단다. 그리고 나는, 그에 대한 어떠한 단서도 주지 않을 거야. 그걸 알려 주는 건, 내 손으로 널 죽이는 것과 다름없으니.”
잠시 말을 멈춘 아르케아스가 차분히 숨을 고르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맺힌 황금빛이 일렁였다.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단다, 이안. 적어도 그자에게는. 그자의 하수인들에게도, 물론.”
애석한 말이지만, 난 이미 그놈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소.
속으로만 읊조린 이안이 입을 열었다.
“어쨌든 적어도, 놈의 하수인들과 싸우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오. 죽어 줄 순 없잖소.”
“물론이지. 그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말렴. 방심도 하지 말고. 아마 네가 사도를 몇쯤 죽이고 나면, 그도 생각을 달리하게 될 거란다. 나를 괴롭히기 위해, 자신이 겨우 손에 넣은 모든 것을 걸 리는 없잖니.”
“글쎄….”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이안이 내뱉었다.
“들은 만큼 집요하다면, 그럴지도 모르겠소만.”
“그러길 바라는 듯한 말투로구나.”
이안은 어깨만 까딱였다. 이윽고 아르케아스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 또한 진귀한 광경일 터였다.
“그래… 마음대로 하렴. 네가 그자들을 거꾸로 추적해 심문한다고 해도 말리지 않으마. 하지만, 그런다 해도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을 거란다. 그들도 모를 테니까.”
“만약 내가 끝끝내 그놈이 유폐된 감옥을 알아낸다면, 어떻게 하실 거요?”
“그건 불가능….”
내뱉던 아르케아스가 순간 멈칫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이안에게로 돌아왔다.
이안이라면, 정말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 것이리라.
“그때는….”
이윽고 아르케아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내가 직접 너를 말리러 갈 수밖에. 오해는 하지 말거라. 너와 같이 싸우겠다는 뜻이 아니야. 그때는 내가 직접 너를 붙잡아 끌고 나올 거란다. 그곳에 발을 들인다면, 내게도 그럴 권리가 있어.”
볼기짝이라도 때리겠다는 듯한 말투시군.
이안의 입꼬리가 설핏 말려 올라갔다.
“다행이군….”
아르케아스의 의아한 시선을 마주 보며, 그가 덧붙였다.
“어쨌든 바로 죽게 되지는 않을 것 같아서 말이오.”
“뭐라…?”
되묻던 아르케아스의 얼굴에 헛웃음이 번졌다. 너는 정말이지, 하고 중얼대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그가 덧붙였다.
“너처럼 고집이 센 대행자를 둔 용은, 아마 내가 처음일 것 같구나.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지.”
“어쩌겠소. 귀하께서 선택하신 대행자인데.”
이안이 풀썩 웃음 지으며 말했다. 적반하장이 따로 없는 말에, 아르케아스도 결국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라크마흐와 대적하고 싶지 않은 건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 용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터였다. 이안도, 그리고 다시 지상으로 기어 올라올 날도.
어쩌면 끝내 자신을 옭아맨 봉인을 깨뜨리고 다시 세상으로 나올지도 몰랐다. 놈은 그럴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분명 다시 아르케아스와 함께 놈과 싸우게 되겠지만.
그게 용의 무덤에서 놈과 싸우는 것보다 더 쉬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는 놈도 자신의 힘을 전부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타후므리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악몽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그러니 놈이 아직 지하에 있을때 죽여야 했다.
물론,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진 후에나 가능할 일이었다. 적어도 놈의 사도를 죄다 쳐 죽인 이후가 되리라. 용의 마력이 깃든 무구를 더 손에 넣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래도 쉽진 않겠지만….’
죽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든 해 내야겠지.
쓴웃음은 지은 이안은 잔에 남은 술을 남김없이 입에 털어 넣었다.
어쨌건, 최후의 보루가 하나는 생긴 셈이었다. 아르케아스가 빈말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물론, 말리는 게 아니라 도와준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만하면 충분한 답이 되었니?”
이어진 아르케아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이 빈 잔을 내려놓았다. 옆에 앉은 샬롯이 자연스럽게 잔을 다시 채워 주는 사이, 그의 시선이 앞에 놓인 정화자의 두건 망토로 향했다.
“작은 부탁을 하나 더 드려도 되겠소?”
“안 된다고 해도 할 거잖니.”
이제 날 너무 잘 아시는데.
설핏 웃음 지으며, 이안이 말했다.
“이 망토에 새겨진 교단의 문양을 지워 주실 수 없겠소? 너무 눈에 띄어서 말이오. 귀하께서 선물하신 방패처럼.”
“뭐…?”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던 아르케아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교단의 성자에게 교단의 문양을 지워 달라고 부탁하다니…! 이런 신성 모독이 또 있을까.”
테사이아를 제외한 일행들이 가슴 철렁한 얼굴로 아르케아스를 바라보았다.
이미 이안이 아르케아스에게 강짜를 놓기 시작한 순간부터,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던 그들이었다.
물론 이안은 태연했다. 아르케아스가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을 향한 그의 관점은, 이안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그에 대한 답을 주는 건 어렵지 않지.”
이윽고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운을 뗀 아르케아스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번엔 내 질문에 먼저 답을 주지 않겠니? 언질을 주었듯, 나 역시 네게 부탁할 게 있단다.”
그래. 언제 말씀하시나 했지.
이안이 입맛을 다시며 읊조렸다.
“벌써 겁이 나는데….”
“안심하렴. 이번에는 아마,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닐 테니까.”
“말씀해 보시오.”
“이곳을 떠나 어디로 갈지, 결정된 바가 있니?”
“자세한 건 상의를 해 봐야 확실해지겠지만….”
슬며시 필립을 일별한 이안이 덧붙였다.
“중앙으로 가게 되지 않을까 싶소. 아마도.”
“그래…? 잘 됐구나. 역시, 아무래도 우리는 운명의 끈으로 엮여있는 모양이야.”
반색하며 술잔을 내려놓은 아르케아스가, 의자를 밟고 일어섰다. 작달막한 전신이 무릎까지 드러났다. 이안을 똑바로 마주 본 그가 미소지었다.
“그럼 이 아이도 함께 데려가 주렴, 이안. 제도까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