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322
322화
“키르르륵-!”
거미의 등판에 달린 아가리에서 고막을 긁는 듯한 소리가 번졌다.
자세를 바짝 낮춘 채 홑눈들로 이안을 노려본 것도 잠시.
“키- 야아아아악-!”
아까 트롤의 포효에 섞여 있던 고주파가 터져 나왔다. 이안의 돌진을 순간 늦추고, 혈관을 흐르는 마력을 뒤엉키게 하는 바로 그 비명.
거의 동시에 이어진 섬뜩한 예감에, 이안이 방패를 땅에 내리찍으며 급정거했다.
쒸악- 쩌엉!
머리 위에서 채찍처럼 떨어져 내린 촉수가 바로 앞의 땅을 찍었다. 거미의 꼬리였다. 비명으로 움직임을 둔화시키고 꼬리로 공격하는 게, 놈의 기본적인 사냥 방식이리라.
되돌아가려는 듯 꼬리의 갑피 표면이 꿈틀댈 찰나.
콰직-
샛노란 궤적이 그 한복판을 훑고 지나갔다. 튕겨 오르듯 일어선 이안이 그대로 광검을 휘두른 것이다.
꼬리가 막 땅에서 뽑혀 나온 끝부분은 남겨둔 채 되돌아갔다.
남겨진 꼬리가 체액을 흩뿌리며 꿈틀댔다. 끝에 돋은 몇 개의 관절 돌기들이 움찔거렸다. 사냥감의 머리를 후려치고 저걸로 움켜쥐는 것이리라.
한복판에 구멍이 뻥 뚫려 있었는데, 점액질이 덮인 뾰족한 가시가 혀처럼 날름댔다.
‘무슨 에일리언인가….’
사냥감의 뇌에 박아넣는 게 분명했다. 신경을 장악하는 방법일 터였다. 이안의 미간이 절로 설핏 일그러지는 사이.
“키에에- 에엑-!”
숙주 거미가 발작하듯 나뒹굴었다. 끝이 잘린 꼬리가 퍼덕대면서 사방으로 체액을 흩뿌렸다. 놈의 비명은 여전히 마력을 엉키게 하는 파장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는 문제였다.
타탓-
이번 전투에 더 이상의 마법은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이안은 나뒹구는 놈을 향해 내달렸다. 홑눈들이 번뜩인 순간, 거미가 끝이 잘려나간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육감 덕에 이미 예견하고 있던 이안은 기다렸다는 듯 땅을 박찼다.
쒸아악-
꼬리가 그의 발아래를 휩쓸고 지나쳤다. 이안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로 아래까지 가까워진 숙주 거미를 내려다보았다. 놈의 아가리가 한층 또렷해졌다.
아가리 좌우에 더듬이처럼 안쪽으로 돋아난 작은 다리. 아가리 내부는 돌기 같은 작은 이빨들이 역방향으로 자라 꿈틀대고 있었다.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상상을 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구조였다.
동시에 아가리 주위에 박힌 몇 개의 홑눈에서 선연한 시선이 느껴졌다. 놈의 두려움도.
문득, 내면의 혼돈의 파편이 꿈틀댔다.
‘몸속에 혼돈의 정수라도 품은 건가.’
그래서 마경 밖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거고?
내심 생각하며 백금 방벽을 거둬들인 이안이, 광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놈의 아가리가 좌우로 쩍 벌어진 건 거의 동시였다.
더듬이 같은 다리와 아가리 속의 수많은 이빨이 꿈틀댔다.
“캬- 아아아-!”
고막뿐 아니라 전신을 얇게 저미는 듯한 비명이 이어졌다.
하지만 진언 회로에 담긴 용의 마력을 흩어 버릴 수는 없었다.
놈의 아가리 속으로 비스듬하게 떨어져 내리면서, 이안은 양손으로 움켜쥔 진은 강철 장검을 힘껏 내리쳤다.
콰과과과-
샛노란 검날이 앞에 걸리는 모든 것을 갈랐다. 역방향으로 돋아난 이빨과 이빨이 돋아난 아가리. 그 너머의 살점과 내장. 속살까지.
손에 걸리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았지만, 이안은 계속해서 검을 내뻗었다.
마지막 순간엔 거의 점액질로 뒤덮인 동굴 속을 지나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시발….’
숙주 거미의 몸을 안에서부터 가르며 뚫고 나온 이안이, 바닥을 구르면서 착지했다.
땅에 닿은 망토 표면이 질척댔다.
한쪽 무릎을 꿇으며 멈춰선 이안은, 그대로 백금 방벽을 다시 펼쳐 뒤통수를 가렸다.
전신을 착 감싼 그림자 망토 표면에서 끈적한 점액이 흘러내리는 가운데.
촤아아아아-
뒤에서 내장과 체액이 뒤섞인 것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아가리 윗부분부터 머리와 몸통이 쩍 갈라진 거미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하….”
이안은 속으로 다시 한번 욕설을 토해내며 벌떡 일어섰다. 백금 방벽을 거둬들인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거대한 곰만한 덩치의, 몸 반쪽이 쩍 벌어진 괴물의 모습이 시야에 가득 담겼다.
이안의 시선은 내장과 체액이 흘러나오는 잘린 단면을 훑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혼돈력이 한층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혼돈의 파편이 군침을 흘리듯 낮은 울음을 토해냈다.
‘…차라리 부담스럽게 많았으면, 그냥 안 먹었을 텐데.’
내심 혀를 차면서도, 이안은 시체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백금의 발톱을 비활성화한 건 거의 동시였다.
파슷-
광검의 샛노란 빛이 단숨에 증발하듯 흩어지면서, 그 안에 품고 있던 새하얀 검신이 드러났다.
검면에 새겨진 진언 회로가 희미해졌다. 회로에 남은 마력은 총량의 절반 정도였다. 그리 오래 싸우지도 않았건만. 확실히 소모 값이 많았다.
‘냄새 진짜….’
검을 검집에 되돌리며, 이안은 내장과 체액이 흘러내리는 단면을 눈에 담았다.
필드 네임드가 혼돈의 정수를 품고 다니다니. 게임에선 중반 이후, 타락자가 마경이나 흉지의 정예 마물을 사냥해야 하는 이유가 되었을 터였다.
이제는 이 세계가 한때 게임이었던 건지, 게임이 이 세계와 닮았던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이안은 가장 혼돈력이 선명한 내장 속으로 오른손을 밀어 넣었다. 장갑 위로 역겨운 감촉이 번진 것도 잠시.
솨아아….
체내 어딘가에서 번진 은은한 자줏빛이 그의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혼돈의 파편이 기다렸다는 듯 그 한 줌의 혼돈력을 빨아들였다.
“……!”
이안의 눈이 순간 커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눈앞으로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종종 보랏빛 번개가 번쩍이는 잿빛 하늘. 색을 잃은 것처럼 칙칙한 들판과 숲. 그 속을 기어 다니는 보라색과 자주색 안광들. 역겨운 숨결.
시야가 땅속으로 꺼지듯 떨어지고, 어둠이 뒤덮였다. 그 어둠보다도 더 새카만 무언가가 아른거렸다. 손가락 같아 보이기도 했다.
뱀 같은 비늘이 표면에 덮여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어둠 너머에서 수많은 보랏빛 안광이 피어올랐다. 모든 게 한 놈의 눈이었다.
모든 감각이 갑작스럽게 되돌아왔다.
“후우… 후우….”
이안은 체액으로 질척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물론 그는 새삼스럽게 혼란에 빠지지도, 공포에 질리지도 않았다.
‘변방은 그런 상태란 말이지….’
그저 담담하게 생각하며 다시 일어섰을 뿐이었다. 어쩌면 정신력이 더 높아진 덕분인지도 몰랐다.
그의 후두부 아래부터 이마까지 이어진 흑관은 여전히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파사사삭, 하는 소리가 문득 귀를 파고들었다. 이안은 여전히 불길에 휩싸여 있는 야영지를 돌아보았다.
한 마리의 거미 코볼트가 쏜살같이 빠져나와 도망치고 있었다.
끝났구만.
심드렁한 실소를 흘린 이안이, 시체를 등진 채 걸음을 내디뎠다.
***
“하아… 하아….”
철퇴를 움켜쥔 루시아가 숨을 골랐다. 여전히 주황빛이 아른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는, 어둠 너머로 멀어지는 마물의 뒤를 쫓고 있었다.
눈동자에 스친 갈등은 짧았다.
그녀가 이를 악물며 걸음을 내디디려는 찰나.
“따라갈 필요 없어.”
이어진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멈칫한 루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일렁이는 불길을 등진 이안이, 난장판이 된 야영지를 가로질러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걸친 망토는 처음과 달리 축 늘어져 나풀대지 않았다.
“어차피 혼자서는 며칠 못 살아남을 거다. 여긴 마경이 아니니까.”
그게 망토에 끈적한 체액에 뒤덮여있어서라는 걸, 루시아는 이안이 바로 앞까지 다가오고서야 깨달았다.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다 멈칫한 이안이, 장갑에 묻은 체액을 툭툭 털며 내뱉었다.
“잘 싸우던데. 다친 데는 없고?”
“네. 몇 대 얻어맞고 물리기도 했지만, 다 갑옷 위여서 멍만 조금 들고 말 거예요.”
루시아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슬쩍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솔직히 말해, 지금 그녀보다 이안의 몰골이 더 지저분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젖은 망토를 벗어버리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불 좀 꺼 봐. 설마, 불을 지르기만 하고 끌 수는 없는 건 아니겠지.”
“아…! 설마요. 그럴 리가요.”
화들짝 대답한 루시아가 눈을 감으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내면에 타오르던 전투의 흥분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녀의 철퇴에 맺힌 불꽃과 주위의 불길이 호응하듯 잦아들었다.
“그래서, 다 끝난 거요? 응?”
저만치에서 미구엘이 내뱉었다. 망토를 대충 털어 바닥에 내려놓은 이안이, 말들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그래. 적어도 오늘 밤은.”
“허이구, 시부럴….”
그제야 도끼를 툭 떨어뜨린 그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야영지 곳곳에 숯덩이가 되어 널브러진 시체들을 훑으며, 미구엘이 탄식했다.
“간만에 뒈지는 줄 알았네. 변방에서 넘어온 마물들은 끔찍하다더니. 빈말이 아니었소.”
“새삼스럽게…. 가서 모닥불이나 다시 피워라.”
“숨만 좀 고르겠소. 댁들과 달리 난 평범한 인간이란 말이오.”
강철 의수도 평범하진 않은데.
속으로만 대답하며, 이안은 말 두 마리 앞으로 다가갔다. 겁에 질려있을 뿐, 둘 다 무사했다.
성화와 루시아. 미구엘, 마지막으로 닐라까지 분투해준 덕분이리라.
푸르르….
미구엘의 뒤편에서 콧김을 뿜으며 서 있던 닐라가, 이안이 다가가자 꼬리를 흔들며 돌아보았다.
숨결이 여전히 조금 거칠고, 마갑에 박힌 마석에도 은은한 빛이 일렁이는 채였다.
괜찮냐고 묻는 듯한 시선에 옅은 헛웃음을 흘린 이안이 녀석의 목덜미를 토닥이는 사이.
“거미가 본체였어요. 검은 벽의 광기가 예상할 수 없는 변이를 만들어낸 거예요.”
숯덩이가 된 시체들을 밖으로 차서 밀어내며 루시아가 말했다.
주섬주섬 일어선 미구엘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다리가 본체였다고…?”
“네. 사냥감을 숙주처럼 부리는 것 같아요. 아마도, 꼬리로요.”
“이런 시부럴…. 어쩐지 난도질을 하면 꼬리를 가지고 염병을 떨더라니. 잘못하면 죽는 것보다 더 개 같아질 뻔했네. 어디 찔린 거 아니냐, 루시? 괜찮은 거 맞어?”
“완전요. 미구엘이야 말로 어디 찔린 데 없죠?”
주섬주섬 나뭇가지를 주워 한곳에 모으면서, 미구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뻔은 했는데. 그때마다 너랑 저 녀석이 도와줘서 살았다.”
“닐라.”
바닥에 덮어둔 그림자 망토를 다시 집어든 이안이 덧붙였다.
“저 녀석 이름은 닐라다.”
“명마는 이름도 예쁘군. 아무튼, 저 녀석이 내 목숨을 두 번은 구했소. 루시는 세 번 정도.”
한 손으로 불을 잘도 피우면서 미구엘이 너스레를 떨었다.
망토를 탈탈 털며, 이안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타오르는 여신께서 은총을 내려 주진 않으시나 보군.”
“다른 사제들은 사도가 아니라도 종종 기적을 부리는데 말이오. 나는 아직 한 번도 없소. 뭐, 나는 딱히 열정이랄 게 없는 인간이잖소. 광기도 물론이고.”
미구엘의 말투나 표정에선 풀죽은 기색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하긴. 그는 자신이 정식 사제가 된 것만으로도 출세했다 여길 터였다.
‘저 녀석은 오히려 루 솔라랑 잘 맞을 것 같은데….’
속으로만 읊조리며, 이안은 망토의 표면을 훑어보았다. 체액이 어느 정도 털려 나가 다시 매끈해진 상태였다. 가장자리 곳곳에 구멍이 조금 뚫리긴 했지만,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그때 몇 개 더 챙길 걸,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뒤를 이었다.
망토 덕분에 몸에는 거의 오물이 튀지 않은 것이다. 장갑과 장화는 별수 없었지만.
“이런 시부럴… 속만 또 허해지겠네.”
박살 난 술병을 어둠 너머로 휙 던져버린 미구엘이, 이내 모닥불 옆에 앉는 이안을 돌아보았다.
“형씨는 확실히, 못 보던 사이에 더 대단해지신 것 같수. 아까 보니까 뭔 황금빛이 붕붕 날아다니던데. 그게 다 형씨인 거 아니오.”
아공간에서 비상식량과 술, 천 따위가 담긴 짐가방을 꺼내 놓은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맞아.”
“대체 뭐였소? 마법 같진 않던데. 못 본 사이에, 계시라도 받으셨나…?”
“저도 궁금해요. 이안 님은 마법사시잖아요. 계시를 받으셨을 리는 없는데….”
다시 추스른 모포를 들고 돌아온 루시아가 덧붙였다. 녀석이 건네준 모포는 끝부분이 조금 타들어 가 있었다.
…말 안 해주면 계속 귀찮아지겠는데.
둘의 반짝이는 눈빛을 번갈아 눈에 담은 이안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성물도 가지고는 있지만, 아까 그건 용의 무구였다.”
“요, 용의 무구우?”
미구엘의 눈이 더 커졌다. 루시아의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입맛을 다신 이안이 모닥불 위로 왼손을 뻗었다. 곧 그의 장갑 사이로 황금빛이 번지더니, 손등 위에 황금빛 육각형이 피어올랐다.
진언 회로의 마력이 조금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백금 방벽도 백금의 발톱도, 시전하는 순간의 마력 소모량이 상당한 편이었다.
“와… 이런 시부럴… 이거, 그냥 손에서 나온 거요? 왼손이 있다는 것도 부러운데, 손에서 방패가 튀어나온다고?”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방패라는 건 확실해요.”
미구엘과 루시아가 연신 탄성을 터뜨렸다. 둘 다 두려움과 피로가 싹 날아간 얼굴들이었다.
백금의 발톱을 보여주면 기절하겠군. 내심 실소를 흘린 이안이, 이내 백금 방벽을 거둬들였다.
그가 눅진눅진한 장갑을 벗으며 덧붙였다.
“가방 열면 이것저것 있으니까, 다들 정비 잘 끝내고 자라. 북부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거지꼴로 다니고 싶지 않으면.”
“알겠수.”
미구엘이 냉큼 일어섰다. 가방을 뒤적이던 그가 이내 읊조렸다.
“그런데… 전에 마신 거랑 비슷한 술은 없소? 향이 자꾸 코끝에 아른거려서 말이오.”
“큰일 났군. 그걸 다시 먹을 일은 평생 없을 텐데.”
“끙….”
일행은 다음 날 오후쯤, 늦지 않게 북부로 접어들었다. 그 이후로는 밤중에 때때로 망자들과 마주치곤 했지만, 미구엘은 단 한 마디도 불평하지 않았다.
***
낡은 성벽이 저 먼 동쪽 산기슭까지 이어졌다. 곳곳에 횃불을 밝힌 성벽의 모습은, 이안이 기억하던 닝글로슬의 장벽 그대로였다.
물론 다른 점도 있었다. 성벽 위에 쇠뇌를 들고 서 있던 경비병들이 보이지 않았다.
반쯤 열린 성문 좌우에 선 창 든 경비병 둘이 보초의 전부였다.
도시에 남은 병사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게 분명했다.
“…일찍 일찍들 다니시오.”
다가오는 일행들을 눈에 담은 경비병 하나가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자정이 지나면 아무리 소리쳐도 문을 열어 주진 않을 거니까.”
일행들을 용병으로 오해한 게 분명했다. 이안은 굳이 그 오해를 바로잡지 않고,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신경 쓰겠소.”
“…….”
경비병은 더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행이 성문을 통과하는 동안에도 더 이상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 동네는 확실히, 용병 대우가 다른 곳이랑은 다른 것 같네.”
이안이 도시로 향하며 읊조렸다.
용살자의 전사들이 제대로 자리를 잡은 게 분명했다. 사실상 안주인 행세라도 하고 있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미구엘이 나지막이 콧방귀를 뀌었다.
“군기가 다 빠진 거지. 하긴. 용병들이 귀찮은 일을 도맡아 해 주는데, 나 같아도 안 건드리긴 하겠수.”
곳곳에 횃불을 밝힌, 북부 특유의 칙칙하고 건조해 보이는 도시의 전경이 펼쳐졌다.
해가 졌는데도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은 제법 많았고, 저 너머에선 모루를 두드리는 소리가 희미한 불빛과 함께 번졌다.
쇠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확실히 여긴, 망자 군단의 공격 때 별 피해가 없었나 보군.”
“주력은 트라벨가 쪽으로 갔잖수. 이 근방에도 망자들이 오긴 했지만 별 피해 없었다더군. 형씨 덕분에 미리 대비를 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아니었소?”
“내가…?”
고개를 갸웃하던 이안은, 이내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지나가듯이 북쪽 장벽의 수비를 신경 쓰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걸 귀담아들었을 줄이야. 루카스의 부관 격이던 관문 대장의 얼굴이 절로 뇌리를 스쳤다.
“어쨌든, 뭐. 먹고살 만해 보이니 다행이군.”
“북부의 도시들은 거의 다 이럴 거요. 사실상 전시 상태니까. 대공 전하께서 돈을 팍팍 풀고 계신 거지. 그보다, 본거지로 어떻게 찾아가실 거요?”
미구엘이 말의 속도를 늦추며 물었다. 마구간 쪽으로 자연스럽게 말 머리를 돌리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뭘 새삼스럽게. 제일 북적대는 여관으로 가면 거기가 본거지겠지.”
“…하긴. 용병들 하는 짓이야 뻔하지.”
“먼저 갈 테니까, 말 잘 보관해 두고 따라와라.”
이안을 따라 루시아도 냉큼 말에서 내리는 가운데, 미구엘에게 다가간 이안이 덧붙였다.
“다 가장 좋은 사료 먹이고, 이 녀석은 묶어 두지 말라고 해.”
“알겠소. 길잡이 겸 마부라니. 정말 옛날 생각나는군.”
고삐를 받은 미구엘이 웃음 지었다. 그가 말 셋을 이끌고 휘적휘적 멀어지는 사이,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너도 저 녀석과 같이 오든가.”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그렇지.”
“그럼 같이 갈게요.”
두건 아래로 씩 미소 지은 루시아가, 걸음을 옮기며 자연스럽게 각반의 이음매부터 조이기 시작했다.
동행하는 내내 느꼈지만, 이 녀석도 싸움을 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기사 가문의 핏줄이란 걸 속일 수 없는 걸지도. 어쩌면 이것 역시 타오르는 여신의 영향일지도 몰랐다.
‘어쨌건 방심하진 않으니까, 뭐.’
두건 망토를 눌러쓴 채 루시아와 나란히 도시를 가로지른 이안은, 어렵지 않게 사람들이 모여 서 있는 여관을 찾아냈다.
과거 샬롯, 테사이아와 함께 머물렀던 바로 그 여관이었다.
“……?”
“신입인가…?”
이안과 루시아가 다가가자, 문 근처에 기대서서 떠들어 대던 이들이 힐끔댔다. 이안도 태연하게 그들을 눈에 담았다.
용병답게 통일성 없이 제멋대로이긴 했지만, 어쨌건 다들 꽤나 제대로 무장하고 있었다.
오히려 과시하듯, 어울리지 않는 비싼 장비를 착용한 놈도 있었다.
‘주머니가 아주 뚱뚱하단 거지. 이 새끼들….’
장부를 한번 털어 봐야겠네.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여관 문을 열었다.
왁자지껄한 장내의 소란이 전신을 울렸다.
보는 이에 따라 활기가 넘친다고도 표현할 만한 광경이었다. 물론, 이안의 눈에는 수십 명의 인간말종 주정뱅이들일 뿐이었지만.
“못 보던 얼굴인데.”
몇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누군가가 이안의 앞을 가로막았다.
물론 용병이었다. 다분히 위협적인,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긴 외부인은 받지 않는 가게요.”
이놈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물론, 무장은 제대로 하고 있었다. 허리춤의 검조차 무게추에 고급스러운 은장식이 되어있을 정도였다.
의뢰인들을 신나게 털어먹고 살았다는 증거들이었다.
이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럼 난 상관없겠네. 외부인이 아니니까.”
“아, 그래. 가입하러 오셨나? 아니면, 의뢰?”
용병이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를 바라보던 이안의 한쪽 입꼬리도 슬며시 올라갔다.
“둘 다 아니야. 단장을 만나러 왔다.”
“단장…?”
용병의 미간이 설핏 굳어졌다.
“단장과 아는 사이시오?”
“그런 셈이지. 아직도 트루드라면.”
“그분이오. 여전히.”
“잘 됐군.”
이안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럼 가서 트루드에게 전해.”
두건을 뒤로 젖혀 얼굴을 드러내며, 그가 덧붙였다.
“이안 호프가 만나러 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