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38
038화
오른델 내성.
이안은 칙칙한 복도를 걸었다.
내성에 발을 들인 그는, 가장 먼저 후작과 대공자의 침실을 뒤졌다.
아무도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
다들 그를 티르 엔의 성기사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를 신경 쓰지 못할 만큼 바빠서이기도 했다.
데클란은 간이로나마 후작 작위와 영지의 통치권을 승계받는 절차를 진행해야 했고.
용병들은 후작과 대공자의 심복들을 분류하고, 타락자를 가려내 처리하고 있었다.
사실상의 숙청 작업.
쿠데타가 성공했으니 당연히 이어져야 할 과정이었다.
“피비린내가 여기까지 나는 것 같군요.”
뒤따라 걷던 필립이 말했다.
이안이 태연하게 말했다.
“곧 구린내에 덮일지도 모르는데, 그것보단 낫지.”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지하는 내일 뒤지면 안 되겠습니까? 오늘은 전투도 있었고, 후작과 대공자의 방을 수색한 거로 충분할 것 같은데요. 물증이 제 발로 도망가진 않을 것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지. 성에 도적들이 득시글한데.”
“…아.”
용병들을 떠올린 필립이 짧게 탄식했다.
지하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에 발을 들이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오늘은 다들 얄팍한 정의감이나 사명감에 취해 있지만, 내일만 돼도 다를 거다. 물증이 엄한 놈들의 손에 들어가면, 우리만 귀찮아져.”
“하긴. 뭐가 숨겨져 있을진 몰라도, 남김없이 챙겨가야 합니다. 솔직히, 저도 믿기 힘들거든요.”
벽면의 촛불들이 필립의 얼굴에 흐릿한 음영을 만들어 냈다.
“공작 각하가 타락자라니…. 아마 물증 없이는 아무도 믿지 않을 겁니다.”
“평판이 좋은 작자인 모양이지.”
“그 이상이죠. 폐하를 대신해 직접 영지를 오가며 칙명을 전하거나, 영주들의 요청을 처리해 주는 분이시니까요. 저도 국경 지대에서 두어 번 얼굴을 뵌 적이 있습니다. 현명하고 자비로운 분이셨죠. 전쟁도 반대하신다고 들었는데….”
필립의 눈빛이 우울하게 일렁였다.
“그분이 타락자들의 수장이라니.”
“그러니까 더더욱 주위를 완벽하게 속인 거겠지. 그런 의미에서….”
계단이 끝났다.
이안은 음습하게 펼쳐진 지하실을 눈에 담았다.
“그자를 그대로 두면, 언젠가 왕국을 통째로 말아먹을 거다.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만, 네놈한테는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그럼 잡생각 그만하고 움직여. 분명 후작이 쓰던 비밀 공간이 있을 거다. 여기가 아니면 수로까지 갈 거니까, 하나도 놓치지 마.”
“예.”
벽면의 촛대 하나를 뽑아 든 필립이 앞서나갔다.
이안은 차분히 그 뒤를 따랐다.
제대로 왔다는 직감이 들었다.
대피소와 수로로 이어지는 이 지하실은, 밀실을 숨겨 놓기 딱 좋은 구조였으니까.
마력 탐지로 구석구석을 훑은 것도 잠시.
“호오.”
이안이 구석진 벽면의 반파된 조각상 앞에 멈춰 섰다.
주위를 훑던 그가, 벽면의 벽돌 하나를 꾹 밀어 넣었다.
드드드득-
조각상이 옆으로 밀려나면서 숨겨진 통로가 드러났다.
계단 쪽에서 보면 조각상의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을, 낮은 통로였다.
“결국, 또 나리께서 찾으셨군요.”
달려온 필립이 입맛을 다셨다.
통로를 응시한 것도 잠시. 그가 몸을 숙여 앞장섰다.
“이젠 이런 게 놀랍지도 않네요.”
짧은 통로를 지나고 나타난 광경에, 그가 중얼댔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밀실.
촛불을 비추자 벽면과 천장에 새겨진 검붉은 기호들이 드러났다.
신의 눈을 피하려 새긴 문양들이 분명했다.
여기 들어선 순간, 단죄의 검이 잠시 덜그럭거리다 침묵했으니까.
방의 구석. 책과 두루마리, 제식용 단검과 접시 따위가 놓인 책상을 대충 훑어본 이안이, 이윽고 밀실 중앙의 제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슴 높이 정도 되는 팔각형 제단.
그 위에는 내부에 자주색의 마력이 가득한 커다란 구슬이 놓여 있었다.
“증거가 될 만한 건 싹 다 챙겨라. 확인은 가면서 해도 되니까.”
아공간에서 봉인함을 꺼낸 이안이 말했다.
테사이아를 붙잡았던 봉인함을, 그는 보관 상자로 쓰고 있었다.
후작과 메이슨의 머리도 이 안에 있었다.
“예.”
이안이 허공에서 상자를 꺼낸 것에 놀란 기색도 없이, 필립이 책상으로 다가갔다.
이미 이안이 무슨 묘기를 보여 주건 마법이려니 생각하게 된 그였다.
“흐음.”
제단 앞에 선 이안이 침음했다.
이런 구슬에 얽힌 마지막 기억이 워낙 강렬한 탓에, 전처럼 손부터 나가지는 않았다.
‘확실히… 혼돈의 조각은 아니네. 정수도 아니고.’
이안 본인도 그때와는 달랐다.
그는 이제 혼돈력을 어느 정도 별개의 느낌으로 구별할 수 있었다.
혼돈의 파편을 품으면서 생긴 변화였다.
구슬 내부의 오염된 마력에 담긴 혼돈력은 아주 희미했다.
‘그럼 어디… 한번 볼까?’
이안이 손을 뻗었다.
구슬 내부의 마력이 그의 손길에 감응하듯 일렁였다.
그의 손이 표면에 닿은 순간, 자주색 마력이 역류하듯 그의 팔을 타고 밀려들었다.
이안은 당황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의도했기 때문이다.
한 줌의 혼돈력을 손아귀에 머금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모든 일의 배후인 공작과 연결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환영이 눈앞에 펼쳐졌다.
공허인 것 같았지만, 전에 봤던 것과는 다른 광경이었다.
자주색과 선홍색이 뒤덮여 일렁이는 공간.
‘공허의 다른 지역…? 아니면, 공허가 하나가 아닌 건가? 하긴. 블랙홀이 하나만 있는 건 아니니까.’
공허가 거대한 블랙홀의 내부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때 문득,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초월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인간의 형태와 비슷한, 아주 흐릿한 실루엣.
그것을 보았음에도 아무런 위압감이나 전율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안은 이것이, 지금 이 공허를 엿보고 있는 또 다른 타락자의 의식이리라 짐작했다.
어쩌면 공작일지도.
-귀하는 누구십니까?
이어진 사념은 뜻밖에도, 전혀 적대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어떤 분의 사도이시기에, 예고도 없이 심연에 발을 들이셨는지요. 혹여, 혼돈의 사도이십니까?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끈질기게 이어지는 사념에, 이안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나이도 성별도 알 수 없는 타락자의 사념이 움찔했다.
-언짢으셨다면… 용서를….
-왜 나를 사도라고 생각했지?
이게 되네.
자신의 사념이 전해지는 것에 내심 놀라면서, 이안이 물었다.
잠시 멈칫한 타락자의 의식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야… 당연히….
치직, 주파수가 어긋난 라디오처럼 환영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공허의 혼돈과… 하게… 융합한…….
잡음이 섞이던 사념이 사라졌다.
이안의 눈동자를 덮었던 자주색 마력이 한순간에 증발했다.
“…….”
이안이 눈을 깜빡였다.
구슬 내부에 가득하던 마력이, 어느새 텅 비어 있었다.
아, 그래. 소모품이었단 거지.
뒤에서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방금 그건 또… 뭐였습니까?”
“내가 묻고 싶은데. 어때 보였지?”
“구슬에서 나온 마력이 나리를 감싸고 일렁였습니다. 나리한테 조금씩 스며들더니 사라졌고요.”
“아, 그래?”
스며들었다라.
곱씹던 이안이 눈썹을 꿈틀댔다.
그의 심상에 자리한 혼돈의 파편이 조금,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느끼기 어려울 만큼 미세하게 커졌기 때문이었다.
그의 입가에 헛웃음이 스쳤다.
아무래도, 게임에선 타락해야 얻을 수 있던 특수 능력을 갖게 된 것 같았으니까.
혼돈력의 총량을 이런 식으로도 늘릴 수 있다니.
타락자들을 찾아내 쳐 죽여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어난 셈이었다.
“…나리, 괜찮으십니까? 설마, 오염된 마력에 홀리신 건 아니겠죠?”
“네가 아직 살아 있는 걸 보면 그렇진 않은 것 같은데. 물건이나 챙겨라. 볼 건 다 본 것 같으니까.”
태연하게 내뱉은 이안의 시선이, 문득 텅 빈 구슬에 머물렀다.
‘혼돈의 사도라….’
따지고 보면, 아예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몰랐다.
***
다음 날 아침.
“정말 그거면 충분하겠어?”
데클란이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깨끗하게 씻고 단정한 옷을 걸쳤을 뿐인데도, 그에게선 귀족적인 품위가 묻어 나왔다.
“충분하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빈말이 아니었다.
새 장갑과 부츠. 얇은 사슬을 덧댄 견갑과 정체 모를 가죽으로 만든 밴드까지 몸에 걸친 참이었으니까.
하나같이 정보 확인이 가능한 고급품들이었다.
뒤따르는 필립도 새로운 방어구를 여럿 걸친 상태였다.
통일성 대신 실용성을 선택한.
전형적인 용병의 무장이었다.
“그렇다면야. 여기. 섭섭지 않게 넣었어. 마음 같아선 더 주고 싶지만. 알다시피 이젠, 영지의 재정도 생각해야 하는 몸이라서 말이야.”
어깨를 으쓱인 데클란이 돈주머니를 건넸다.
“…이것도 충분하군.”
말과 달리 꽤 묵직한 주머니였다.
미소 지은 이안이 주머니를 품에 넣었다.
내성 밖으로 나온 그들은 마구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데클란이 문득 내뱉었다.
“정말 아침 식사만 하고 떠난다니, 아쉽군.”
“의뢰를 끝내야 하니 어쩔 수 없소. 어차피 귀하도 이제부터 해야 할 게 많으시잖소.”
“그야 그렇지만.”
데클란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새 마구간지기에게 손짓을 보낸 데클란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이안. …이렇게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겠지?”
“상관없소. 버차드 후작.”
멈춰 서며 이안이 답했다.
순간 굳어졌던 데클란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그렇게 불리니 어색하군. 아무튼… 자네가 말했듯, 난 이제부터 해야 할 게 아주 많아. 생각할 것도 많지. 내 입장도, 위치도, 모든 게 달라졌으니까.”
“그래서,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거요?”
“의뢰가 끝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겠어? 평생 눌러살라고는 하지 않겠어. 다만, 내가 이 모든 일에 능숙해질 때까지만이라도 함께해 주면 좋겠는데. 유능하고 믿을 수 있는 오른팔이 필요해서 말이야.”
이안이 피식 웃었다.
평소처럼 건조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듯한 미소.
“말 잘 통하는 오른팔이 필요하신 거겠지.”
“당연히 그도 그렇고.”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부탁은 들어줄 수 없겠소. 난 한곳에 정착할 수 없는 몸이오.”
“그래… 너라면 그렇게 말할 것 같았지.”
데클란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워서 한 말이었어. 이렇게까지 내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으니까.”
“아마 비슷한 부분이 있어서 그럴 거요. 나도 귀하처럼, 주위를 속이는 게 익숙하거든.”
태연한 말투였지만, 데클란을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다.
그의 시선에 이안이 피식댔다.
“용병들도 백성들도, 사실 전혀 좋아하지 않으시잖소.”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아니, 어떻게 알았지?”
“글쎄…. 그냥 알겠던데.”
“그래. 네 눈썰미가 좋은 거군. 그렇다면 다행이야. 난 또 내 연기가 엉망인 줄 알았네. 그건 문제거든. 앞으로도 계속해야 하는데.”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데클란의 모습에, 이번엔 이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연기력을 걱정하신 거라니.”
“이미 들킨 건 어쩔 수 없으니까. 틀린 말도 아니고. 사실, 지금도 걱정하고 있거든. 반란이 성공했으니, 이제부턴 용병 놈들이 내 속을 썩일 테니까.”
당연한 걱정이었다.
이안 덕분에 기회를 얻었지만.
사실 그가 나타나면서 데클란의 본래 계획은 엉망이 됐으니까.
본래라면 용병들과 함께 전장을 구르면서, 그들에 대한 지배력을 확실히 다질 생각이었다.
통제되지 않는 녀석들은 제거하고, 남은 놈들은 잘 길들여서.
그 과정이 사라졌으니, 데클란은 저 못 배우고 제멋대로인 용병들에게 목줄을 채울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들개들이 걱정이면, 들개들과 대신 싸울 사냥개를 들이면 되잖소.”
이안이 툭 내뱉었다.
데클란의 눈이 번뜩였다.
“사냥개?”
“본래 주인에게 버림받은, 죽음만 기다리는 놈들이 있잖소.”
“…아!”
데클란이 짧은 탄성을 흘렸다.
숙청에서 살아남은 지휘관과 관료들을 뜻하는 말임을 곧바로 깨달은 것이다.
“새 주인이 직접 다시 목줄을 채워 주면, 감격하지 않겠소? 주인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들개들과 힘 싸움도 하고.”
“난 상황에 따라 양쪽의 목줄을 잘 흔들어 주기만 하면 되겠군. …역시, 넌 굉장해.”
데클란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자가 곁에 있다면, 지금보다 더 원대한 꿈을 꿀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이미 거절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면, 그나마 남은 일말의 가능성도 사라질 것 같았으니까.
그때 마구간지기가 말을 이끌고 나왔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말.
데클란이 시선을 돌렸다.
“저기 자네 말이 오는군.”
“…저건 내 말이 아닌 것 같은데.”
“너희들이 타고 온 말은 너무 야위어서 말이야. 어울리는 놈으로 골라 놨지. 형님의 애마였어.”
“사양하진 않겠소만….”
“뇌물이기도 해. 폐하께 잘 말씀드려 달라고. 새로운 영주는 왕국에 대한 충성심이 아주 깊다고 말이야.”
“어렵지 않소. 나는 그 말이 사실이건 아니건 상관없으니.”
“거참. 네 앞에선 거짓말을 할 수가 없군.”
“뭐, 타락하지만 않으신다면야. 언젠가 유혹이 들 때, 나를 다시 만나게 될 수도 있다는 것만 기억하시오.”
그땐 아마도, 친구나 조력자로 만나게 되지는 않으리라.
데클란이 웃음 지었다.
“거참 무서운 말이군. 명심하지. 자네를 적으로 만나는 건, 상상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언젠가 또 뵙겠습니다, 후작 각하.”
그때, 꾸벅 인사한 필립이 말을 받으러 달려갔다.
이안도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필립의 인도 아래, 능숙하게 말에 오르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데클란이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도 되나?”
“이런 근사한 뇌물까지 주셨는데. 얼마든지.”
“왕국에 이런 음모들이 도사리고 있는데도, 폐하께선 전쟁을 벌이실 것 같나?”
“무슨 예언자 취급이시군.”
고삐를 쥔 이안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아마도 일어날 거요.”
“……!”
“그리고 그 후엔 어쩌면, 그보다 더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지. 워낙 모든 게 개판인 세상이잖소.”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말머리를 돌렸다.
“잘해 보시오. 이제 이 동네는 귀하가 하기에 달렸으니까.”
이안이 말을 몰았다.
한 번 더 몸을 숙인 필립이 말의 고삐를 잡으러 달려갔다.
마구간 반대편. 성의 후문으로, 용병과 그의 종자가 멀어졌다.
아무런 미련도 없는 듯,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은 채로.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데클란이, 문득 시선을 돌렸다.
패튼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떠났습니까?”
“그래. 떠났네, 패튼 경.”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데클란이 말했다.
호칭이 낯간지러운 듯 웃은 패튼이 덧붙였다.
“가시죠. 성벽 앞에 주민들이 모두 모여 있습니다. 도련님, 아니, 영주님의 연설을 기다리면서.”
“성벽 위에는?”
“용병 놈들… 아니, 우리 백인대와 살려 둔 관료와 지휘관들이 전부 모여 있습니다.”
“좋아. 바로 가지.”
“이대로요? 옷을 갈아입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괜찮아. 이게 더 자연스러워 보이니까.”
데클란이 그대로 몸을 돌렸다.
‘양손의 목줄이라… 그럴싸한 명분을 준비해야겠군. 시작부터 미움받고 싶진 않으니까.’
조언을 곱씹으며 걸음을 옮기던 그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이안과 필립의 모습은, 이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