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417
417화
널브러진 기사의 하반신이 발작하듯 꿈틀댔다.
푸화악-!
망치 아래에서 보랏빛 마력이 터져 나온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물풍선이 터지듯 번진 보랏빛이 삽시에 이안의 전신을 감쌌다.
“……!”
동시에 이안의 눈이 커졌다.
그의 정수가 혼돈력을 흡수하는 찰나의 순간, 시야가 반전되며 환영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고오오오….
불길한 색들이 꿈틀대며 끝없이 펼쳐진 공허.
그 한복판에 보라색 눈동자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체 형상을 인식할 수도 없는, 이글대는 수많은 안광.
-아주 인기가 많은 걸, 친구.
낮은 웃음과 함께 요그의 속삭임이 뇌리를 간지럽혔다.
동시에 누군가에게 붙잡혀 치솟듯, 그의 의식이 단숨에 현실로 급부상했다.
모든 감각이 단숨에 되돌아왔다.
-감사 인사는 받은 걸로 하지….
퀘스트 완료 창이 또렷해지는 가운데, 요그의 나른한 속삭임이 뒤를 이었다.
아직 빛무리가 다 흩어지지 않은 걸 보니, 그가 환영에 빠진 건 아주 찰나에 불과했던 게 분명했다.
-그럼 나는… 잠시….
그 사이에 힘을 다 소진해 버린 것처럼 힘없이 읊조리던 요그의 속삭임이 잦아들었다.
녀석이 아니었다면, 아마 조금 더 오래 환영에 빠져 있었을 터였다.
‘고생했다, 새끼.’
선회하는 흑마의 발소리를 들으며 완료 창을 닫은 이안이, 굽히고 있던 허리를 폈다.
전투 망치를 들어 올리는 그의 눈동자에는, 다시 새파란 마력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한복판에 보랏빛까지 머금은 채였다.
“저런… 미친…”
“대장이… 당했다고…?”
아직 죽여야 할 놈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적들의 얼빠진 탄식이 귓가를 스치는 가운데, 이안의 시선이 돌아갔다.
터덜터덜 되돌아오던 흑마가 그의 눈빛을 읽은 것처럼 다시 속도를 높였다.
‘정말 내 권속이 된 것 같은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전투 망치를 장대 삼아 땅에 찍으며 훌쩍 솟구쳤다. 허공에서 몸을 돌린 그가, 고개를 숙인 채 그 아래로 지나치는 흑마의 안장에 묘기 부리듯 올라탔다.
크르릉…!
그의 허벅지가 등을 조이자, 흑마가 콧김을 뿜으며 단숨에 속도를 높였다. 전투 망치를 비스듬하게 어깨에 걸친 이안이, 비로소 다시 마적들을 눈에 담았다.
“……!”
그의 눈이 새파랗게 일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듯, 몇몇 마적이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놈들이 뭔가 판단을 내리는 것보다, 이안이 완성된 주문을 펼치는 게 더 빨랐다.
슈확-!
이안이 왼팔을 땅으로 떨치듯 휘두르자, 푸른 마력이 그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터져 나왔다.
쩌저저저적-!
뒤이어 눈 결정 같은 형태의 얼음들이 줄지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표면에 크고 작은 날카로운 얼음 가시가 성게처럼 잔뜩 돋아난 얼음 결정이었다.
가시 결정이 커다란 원을 그리듯 좌우로 끝없이 뻗어 나갔다.
“저게 뭔, 시발…?”
“저 미친 놈이 이쪽으로 온다…!”
하지만 몇몇을 제외한 그 누구도, 방금 이안이 펼친 마법을 신경 쓰지 못했다.
주문을 펼침과 동시에 다시 백금 방벽을 소환한 이안이, 그들을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손으로 치켜든 전투 망치를 머리 위에서 천천히 빙글빙글 돌리는 채였다.
“떨어뜨려! 떨어뜨리면 돼!”
“쏴! 말을 노려!”
소리치는 마적들의 얼굴에서 여유가 완전히 사라졌다.
저 전투 망치에 얻어맞은 대장이 어떻게 됐는지를 똑똑히 지켜보았기 때문일 터였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면서, 허둥지둥 저마다의 시위에 화살을 걸치기 시작했다.
쉬쉬쉭-!
가장 빠르게 장전을 끝낸 놈들이 화살을 발사했을 때, 이안은 이미 다음 주문을 완성한 뒤였다.
푸확-!
흑마의 주위로 한순간 터져 나온 돌개바람이, 빛살같이 날아드는 화살들을 일제히 빨아들이며 솟구쳤다.
채앵-
다소 늦게 발사된 화살들은 흩어지는 돌풍 사이로 날아들었지만, 백금 방벽에 가로막혀 튕겨 나가거나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한 발이 흑마의 앞 허벅다리쯤에 박힌 게 전부였다. 물론, 녀석의 돌진을 멈출 수는 없었다.
후욱- 후욱-!
흑마는 오히려 화가 난 듯 성난 들소 같은 콧김을 뿜어내면서, 전력을 다해 바로 앞에 보이는 반인반수를 향해 질주했다.
이안의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던 전투 망치가, 한순간에 가속하듯 속도를 높이며 뻗어 나갔다.
쒸아악- 꽈직-!
이안이 곁을 스쳐 지나간 순간, 마적 하나의 상반신이 활을 쥔 팔뚝과 함께 뒤로 접히듯 구겨졌다.
그것만으로도 받은 충격을 모두 흩어내지 못한 듯, 전마의 그것을 닮은 앞다리가 위로 붕 떠오르기까지 했다.
쿠웅….
놈이 흐물흐물해진 상반신을 덜렁대며 옆으로 허물어졌다.
하지만 이안은 이미 놈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흑마가 속도를 줄이며 선회하는 사이, 전투 망치를 양손으로 고쳐 쥐었을 뿐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마적들의 전의를 완전히 없애 버리기엔 그거면 충분했다.
“시발…! 다들 튀어!”
“일단 흩어져서-”
어지럽게 내뱉으며 저마다 돌아서던 마적들이 멈칫했다.
“언제부터…?”
“이런… 시발….”
그제야 비로소 자신들이 날카로운 얼음 결정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거대한 원을 그리며 돋아난 얼음 가시들은 하나하나가 아주 컸고, 또 심상치 않은 한기를 머금고 반짝이고 있었다.
혼돈력으로 증폭한 결과라는 것까진, 마적들이 알 도리가 없었다.
확실한 건 단숨에 뛰어넘지 못한다면, 좋지 않은 결과가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사실 뿐이었다.
“결정 감옥이라는 거다. 다가가면 폭발하지.”
마적들의 귓가로 고저 없는 목소리가 파고든 건 그때였다.
크지 않았음에도, 마력이 실려 선명하게 번지는 소리였다.
눈을 치켜뜬 몇몇 마적이 홱 고개를 돌리는 가운데.
“아무도 못 튄단 얘기야.”
이안이 덤덤하게 덧붙였다.
그가 곧바로 이 주문을 준비한 이유는 간단했다.
우두머리가 목표인 이유는, 놈만 죽이면 나머지들이 도망치게 된다는 의미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바로는 아니라도, 몇몇이 더 죽고 나면 그렇게 됐을 터였다.
게임이었다면 모를까. 현실이 된 지금은 그런 후환을 남겨둘 수 없었다.
‘게임에선 내가 튈 때나 가끔 쓰던 스킬이지만….’
그것도 4챕터에서 반대로 쓰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속으로만 덧붙이며, 이안은 양손으로 움켜쥐고 있던 전투 망치를 다시 한번 힘차게 휘둘렀다.
쒸- 에에에엑-!
어느새 가까워진 또 다른 마적의 상반신을 향해서.
콰직-! 콰장창창-!
상반신이 옆으로 꺾이듯 구부러진 반인반수가, 그대로 튕겨 나가듯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미 놈을 지나친 흑마가 다시 한번 속도를 줄이며 방향을 트는 사이.
“제, 제기랄…!”
“죽여…! 죽고 싶지 않으면 죽여야 돼…!”
발작하듯 각궁을 내팽개친 마적들이, 각자의 하체에 고정되어 있던 창을 집어 들며 앞다퉈 달려나갔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래서 더 발악하듯 날뛰었다.
전투 망치를 고쳐 쥔 이안의 입꼬리가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그렇게들 나와야지.”
어느새 그의 눈동자에는 다시 잿빛 마력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
마물들의 포효와 비명은 더 이상 번지지 않았다.
금속이 맞부딪치는. 그리고 살점이 찢겨 나가거나 터져 나가는 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은 건 수많은 토막 나고 짓이겨진 시체들과 그것들이 만들어 낸 악취.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소음뿐이었다.
“후우….”
안장에 가만히 앉아 숨을 고르던 발텐이, 이윽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손에 쥔 장창을 한 차례 크게 휘둘러, 창날과 대에 묻어 있던 체액과 살점들을 털어내는 채였다.
솨아아….
안면 가리개 너머, 검푸르게 일렁이던 안광은 어느새 다시 본래의 노란색으로 되돌아온 상태였다.
어둠을 머금고 있던 갑옷도 마찬가지였다. 칙칙하게 빛바랜 본모습으로 돌아와, 그 아래 뒤덮인 마물들의 체액과 살점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였다.
철컥.
검은 장창을 안장 옆의 고리에 되돌린 그가, 훌쩍 말 아래로 뛰어내렸다. 철퍽, 땅에 진득하게 뒤덮여 있던 체액과 내장 조각들이 강철 장화에 밟혀 튀어 올랐다.
아마도 마지막에 죽인 놈의 잔해이리라.
으적… 으드득….
그의 마수 전마는 내장을 쏟아내며 죽은 마물의 터진 옆구리에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더운 콧김을 연신 뿜어내는 와중에도 턱을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피 같은 땀이 송진처럼 맺힌 녀석의 목덜미를 한 차례 쓸어내린 발텐이 몸을 돌렸다.
“…….”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 그의 눈앞에 가득 펼쳐졌다.
길게 이어진 찢기고 토막 난 시체들. 지금 그의 몸에서 번지는 것과 비슷한 악취. 본래도 거무스름하던 땅은, 마물들의 체액을 잔뜩 머금고 번들대고 있었다.
전마들은 그의 전마가 그렇듯 곳곳의 시체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고, 늑대들은 그 주위를 분주하게 오가며 전리품을 챙기고 사상자들을 수습했다.
“대장님.”
그 한복판을 거슬러 걸음을 옮기는 발텐의 곁으로, 늑대 하나가 다가왔다. 철 가면의 한쪽 눈구멍에 상처처럼 가로로 긴 구멍이 더해진 자였다. 본래는 십인장이라 불리던, 우두머리 늑대.
그 역시 발텐과 마찬가지로 전신에 검붉은 체액과 살점들이 눌어붙어 있었다.
“우리 쪽의 피해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발텐이 물었다. 그의 시선은 저 뒤편, 시신과 부상자들을 수습해 이동하는 이들을 훑고 있었다.
“사망이 다섯. 부상이 아홉입니다. 그중에 중상이 넷으로, 생사를 확신할 수 없습니다.”
“열넷이라….”
발텐의 목소리에 흐릿한 저주파가 묻어났다.
“전사자들의 장비를 수습하고, 시신은 땅을 파서 잘 매장하도록 하게.”
“예. 대장.”
“부상자들은 전부 짐 마차에 태우고 치료와 회복에 전념하게 하고. 차단막을 치는 것도 잊지 말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십인장이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와 거리가 벌어지고 나서야, 발텐은 낮은 침음을 흘렸다.
세 배가 넘는 마물들을 전멸시킨 결과로는 경미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휘하 늑대들의 숫자만을 놓고 보면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마물들을 끌고 온 마적들은 진작 내빼지 않았던가.
솔 브린에 도착하기 전에 같은 짓을 한 번 더 당한다면, 그때는 지금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으리라.
게다가 경상자들이라 해도 다시 전투에 합류시킬 수는 없었다.
물론 저들은 용맹하게 싸우겠지만, 그 뒤에는 상처가 도져 결국 죽게 되거나 광기에 잡아먹힐 터였다.
“……?”
걸음을 옮기던 발텐의 안광이 문득 가늘어진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지금쯤이면 보여야 할 이들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후방에서 안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건만.
“발텐 경.”
이어진 목소리는, 뜻밖에도 짐 마차 위에서 들려왔다.
나란히 선 마차들 중 가장 가장자리의 마차에서 루시아가 일어서 있었다.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철 가면을 여전히 잘 눌러쓴 채였다.
가면을 눌러쓴 디아나는 바닥에 걸터앉은 듯, 어깨와 머리만 위로 비죽 모습을 드러낸 채였다.
요정 특유의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이 발텐에게로 향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주 인상적인 전투였어요.”
이어진 루시아의 말에, 발텐이 걸음을 멈추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와 늑대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았으련만. 그를 내려다보는 루시아의 눈빛은 평소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내심 놀라면서도, 발텐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어쨌든 어둠에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는 건 좋은 징조였다. 앞으로 기다리고 있을 일들 역시 기꺼이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니까.
하긴. 광기는 루 엔테르의 이명이기도 하지 않던가. 이제는 그 의미가 변질되었지만, 어쨌든 광기와 가장 가까운 사도라 할 수 있을 터였다.
“덕분에요.”
고개를 끄덕인 루시아가 덧붙였다.
“제 도움이 필요한 곳을 말씀해 주세요. 기꺼이 돕겠습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필요한 순간이 된다면 기꺼이 청하도록 하지요. 그런데….”
주위를 한 번 더 눈에 담은 발텐이 말을 이었다.
“성자 대행께선 어디 계십니까?”
“성자 대행께선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계십니다.”
“책임… 이라니요…?”
발텐의 물음에, 오히려 루시아가 조금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후방을 지켜달라 부탁하신 건, 경이잖아요?”
“……?”
발텐이 멈칫할 찰나.
“식인 도적놈들이 후방을 노렸습니다.”
듣고 있던 디아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발텐이 비로소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라…?”
“이 전투는, 일종의 이중 함정이었던 겁니다. 그 간교한 말박이 새끼들이 파 놓은.”
“그래서, 성자 대행께서 홀로 그것들을 상대하러 가셨다는…?”
되물은 발텐의 고개가 마차 뒤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눈에 비친 건 그들이 만들어 낸 시체의 길. 그리고 흙먼지처럼 희뿌연 안개를 머금은 어둠뿐이었다.
발텐조차도 저 어둠 너머를 꿰뚫어 볼 수는 없었다. 마물들의 체액이 증발하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당장 성자 대행을 찾으러 가야겠습니다.”
비로소 내뱉은 발텐이 무리의 선두를 돌아보았다. 그가 전마를 부르려는 손을 치켜드는 사이, 루시아가 내뱉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