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enders score goals well RAW novel - Chapter 8
더비가 있는 날은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구
“뭐. 뭔 덩치가 저렇게 커?”
“저게 15살짜리가 맞아?”
19세 선수들은 나영웅을 직접 마주치고는 그의 덩치에 압도되었다.
키도 컸지만 코어근육이 발달되어 몸의 두께도 상당했다.
“아까. 동양인의 피지컬 한계가 어쩌구 하지 않았냐?”
“…저렇게 큰 동양인도 있구나. 장난 아니네.”
나영웅을 비웃던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
아카데미에서 훈련을 시작한 지도 한 달이 지났다.
나에게는 꿈 같은 시간이었다.
이렇게 마음 편하게 축구를 할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혼자 훈련하며 고독했던 시간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동료들은 나의 실력을 보고 자연스럽게 나를 리더로 따랐다.
나는 코치와 동료들과 축구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며 훈련을 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판타지가 매일 현실로 재생되었다.
한국에서 축구 할 때는 “왜?”라고 물으면 바로 코치의 주먹이 날아왔다.
반대로 여기서는 “왜?”라고 묻지 않으면 코치에게 혼이 났다.
한국에서는 코치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로봇 같은 선수가 칭찬을 받았는데 여기서는 스스로 생각하며 움직이는 선수가 칭찬을 받았다.
우리는 주 5일 훈련을 하고 주말에 유소년 리그 경기를 했는데 경기가 끝나면 월요일에 모여서 주말 경기 영상을 틀어놓고 자신이 플레이한 의도를 코치와 동료 앞에서 설명해야 했다.
이런 시스템에서 실력이 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성장촉진제를 맞은 나무처럼 쑥쑥 커나갔다.
“영웅아. 이번 주는 니가 볼 보이 당번이야.”
이런 와중에 나는 웨스트햄 1군 홈경기에 볼 보이로 일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우리 1군의 경기를 보는 거라 기대되었다.
그런데.
경기 당일.
나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사건이 벌어졌다.
“웨스트햄! 웨스트햄!”
“가즈아~~! 해머스!”
짝- 짝- 짝- 짝-
웨스트햄의 홈경기가 벌어지는 토요일.
아침부터 동네가 들썩들썩했다.
집 밖으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박수와 노랫소리, 성난 외침이 끊이지 않았다.
“또 시작이군. 축구 정신병자 놈들…”
엠마 할머니는 홍차를 마시며 인상을 썼다.
클래식이 흘러나오는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할머니는 축구를 싫어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축구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인간들을 싫어했다.
“영웅아. 오늘 불린 그라운드에 간다며?”
“예. 볼 보이를 하게 됐어요.”
“조심하거라. 상대 팀 훌리건 놈들도 조심해야 하지만 웨스트햄 훌리건 놈들도 조심해야 해. 넌 동양인이라 미친놈들의 타겟이 될 수 있어. 오늘은 런던의 쓰레기들이 전부 모이는 날이니까. 조심해야 해.”
“명심할게요. 할머니.”
어제부터 주변에서 “조심하라.”는 말을 10번도 넘게 들었다.
웨스트햄은 성적은 형편없지만 리그에서 가장 열성적인 서포터즈를 거느린 팀으로 유명했다.
좋게 말하면 열성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위험한 깡패 놈들을 잔뜩 거느린 악명 높은 팀이었다.
오늘 상대는 하필이면 토트넘.
같은 런던을 연고지로 하는 라이벌팀의 더비 경기라 양 팀 훌리건들의 충돌이 예상되었다.
“다녀오겠습니다. 할머니.”
“조심해. 영웅아.”
“알겠다니까요~”
나는 거의 전쟁에 참전하는 신병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니 정말 공기가 이상했다.
이 동네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분위기였다.
사방에 붉은 벽돌이 깔린 낡은 거리가 오늘따라 음산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웨스트햄! 웨스트햄! 북런던의 유대인 놈들을 잡아 죽이자!”
동네 펍에서 살벌한 구호가 들려왔다.
북런던에 있는 토트넘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유대인들의 팀]이라고 불렸다.
“다들 미쳤구나.”
동네 전체가 흑마법에 걸린 듯했다.
경기 시작하려면 2시간이나 남았는데 이미 펍에서 만취된 인간들이 맥주병을 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빡빡머리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전형적인 영국 깡패 놈들이었다.
겨우겨우 그 지역을 벗어나서 마침내 웨스트햄의 홈구장 [불린 그라운드]에 도착했는데.
“맙소사…”
축구장 앞에 전쟁터가 펼쳐져 있었다.
토트넘 훌리건과 웨스트햄 훌리건 수백 명이 경기장 앞에서 집단 난투극을 벌이고 있었다.
벽돌이 날아다니고 쇠파이프와 곤봉이 번쩍였다.
여기에 방패를 든 전경들과 기마경찰이 출동해서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나는 그곳을 피해서 겨우 입구를 찾아 들어갔다.
앞에서는 피가 튀는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는데 불린 그라운드는 레고처럼 앙증맞은 성 모양으로 만들어져서 무척 귀여웠다.
“여긴. 뭔가…이상해.”
나도 모르게 심장이 뛰고 흥분되었다.
뜨겁게 달궈진 피가 빠르게 혈관을 통과하고 있었다.
“이게 [더비]구나.”
과거에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웨스트햄의 역사와 문화는 알고 있었다.
악명 높은 훌리건들도.
하지만 이 팀에 소속되어 직접 겪는 느낌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건 전쟁이었고 나는 한쪽 팀에 소속된 소년병이었다.
한국인들에게 축구는 스포츠지만 이 동네 사람들에게 축구는 종교였다.
“영웅아! 빨리 이쪽으로 와!”
입구를 통과하자 폴 형이 나를 애타게 불렀다.
폴도 밖에서 벌어지는 난투극에 잔뜩 흥분해 있었다.
폴은 내가 입은 웨스트햄 유니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앞으로 유니폼은 경기장 와서 갈아입어. 오다가 상대 팀 훌리건들한테 걸리면 공격당할 수 있어. 더비가 있는 날은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구. 조심해.”
또 조심.
나는 사무실로 들어가서 볼 보이에 대한 업무 교육을 간단하게 받았다.
구단 사무실은 사령본부였다.
끊임없이 전화가 걸려왔고 직원들은 쉴 사이 없이 뛰어다녔다.
경찰서, 공무원, 타 구단, 단장, 감독, 경비 업체, 언론…
연락할 곳이 너무 많았다.
이런 난장판에도 경기장으로 팬들이 들어와서 자리를 채웠다.
경기 시작 30분 전.
나는 볼 보이의 임무를 수행하러 경기장으로 내려갔다.
선수들이 지나가는 긴 통로를 걸어가자 불린 그라운드의 초록빛 잔디가 보였다.
출구로 나갈수록 그 초록빛은 점점 커졌다.
그리고 마침내 출구를 통과해서 밖으로 나오자 온통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와아아아…”
세례를 받은 기분이었다.
나는 피치 앞에 서서 와인레드 빛으로 물든 3만 5천 석의 객석을 둘러보았다.
굳이 역사와 전통을 떠들 필요가 없었다.
여기 서 있으면 저절로 느껴졌다.
바로 여기서 바비 무어 같은 전설의 선수들이 공을 차며 뛰어다녔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그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여운을 느끼며 볼 보이를 위해 사이드에 자리를 잡았다.
선수들이 뛰는 피치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다.
“반드시 3년 안에 1군에 올라가서 여기 이 피치의 잔디를 밟을 거야.”
왜 구단에서 유소년 선수들에게 볼 보이를 맡기는지 이해했다.
이 이상의 동기부여는 없었다.
어느새 3만 5천 석이 팬들로 가득 찼다.
그 자체로도 장관이었는데 여기서 깜짝 놀랄 이벤트가 벌어졌다.
“어라. 저건…”
흥겨운 전주가 흘러나오며 경기장 어딘가에서 비눗방울이 쏟아져 나왔다.
엄청난 양의 비눗방울이 하늘로 퍼져나갔다.
그러자 웨스트햄 팬들이 다 같이 노래를 불렀다.
“나는 영원히 비눗방울을 불 거야~ 예쁜 방울들이 높이 날아가 하늘에 닿겠지~ 그리곤 내 꿈처럼 사라져버렸다네~ 행운은 어디에나 숨어있기에 나는 언제나 찾아다니지~ 나는 영원히 비눗방울을 불 거야~ 예쁜 비눗방울을 하늘로 날릴 거야~ 유나이티드! 유나이티드!!”
짝! 짝! 짝!
장관이었다.
할아버지부터 어린아이까지 모든 웨스트햄 팬들이 함께 이 노래를 부르고는 박수를 쳤다.
수많은 비눗방울이 그들의 머리 위로 날아다녔다.
“어이가 없는 팀이군.”
밖에서는 여전히 훌리건들이 난투극을 벌이고 있는데 안에서는 비눗방울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 사랑하게 될 지도…”
폭력성과 낭만이 공존하는 이 팀이 마음에 들었다.
100년 넘게 한 번도 리그 우승을 해보지 못한 불운마저도 감미롭게 느껴졌다.
그런데.
예상 못 한 문제가 또 생겼다.
킥오프 시간이 지났는데도 경기가 진행되지 않았다.
심판이 뭔가를 확인하더니 안내방송이 나왔다.
“지금 토트넘 구단 버스가 경기장으로 들어오지 못해 킥오프 시간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팬 여러분. 안내 말씀 드립니다…”
“우우우우우~!! 재수 없는 유대인 놈들! 또 무슨 꿍꿍이야!?”
안내방송이 나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욕설과 비하가 쏟아졌다.
방금까지 비눗방울 불면서 낭만적인 노래를 부르던 그 사람들 맞냐?
킥오프 시간이 계속 지연되자 술렁대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욕설의 수위도 높아졌다.
이러다가 반대편에 있는 토트넘 팬들이랑 난투극이라도 벌어지는 게 아닌가 걱정될 정도였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굴러다니는 축구공을 가볍게 차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