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God wants to live in peace RAW novel - Chapter 123
마신은 평화롭게 살고 싶다 123화
* * *
사계절은 각각 다른 내음을 갖고 있다. 봄은 산뜻한 내음을, 여름은 짙은 풀 내음을, 그리고 가을은 소슬바람에 실려 오는 단풍 내음을…….
서준은 특히 봄 내음과 가을 내음을 좋아했다. 왠지 두 계절의 내음은 사람을 들뜨게 만들었다.
특히 새벽 시간 고요한 적막 속에 은은하게 날아오는 풀잎에 젖은 이슬 냄새는 모든 시름을 날려 주는 기분이었다.
이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 서준은 요즘 꼭두새벽부터 집을 나서곤 했다.
어스름한 하늘을 바라보며 길을 걸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셔 본다. 저 멀리 남산에서 날아든 풀 내음들이 폐부를 쿡쿡 찔렀다.
기분 좋은 풀 내음들을 만끽하며 서준이 도착한 곳은 시장이었다.
원래 시장은 경찰들이 순찰을 돌기 시작하는 아홉 시부터 시작해서 보통 해질 녘에 파장하고는 했다.
하지만 요즘은 새벽에도 장이 섰다. 치안이 다소나마 안정된 탓이었다.
그러고 보면 요새는 총성도 잘 안 울린다. 아예 안 들리는 건 아니지만 이전처럼 하루에 두세 번씩 울리진 않았다.
“아, 좀 더 깎아 줘요.”
“아니, 여기서 더 깎으면 나는 뭐 어떡하라고?”
“도매가 뻔히 아는데 뭘.”
“그럼 도매시장 가서 사쇼.”
“어제 담근 김치가 kg당 20만 원. 쌉니다! 파김치도 있어요!”
“에이, kg당 20만 원은 너무했다. 만 원만 깎아 줘.”
시장은 이미 사람들로 와글와글했다.
서준은 사람들 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그리고 물건을 구경했다.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는 팔딱팔딱 전어.
살이 통통 오른 고등어.
뻐금뻐금 거품을 내뿜고 있는 꽃게들.
모두 가을 제철 해산물들이었다. 하지만 서준이 찾는 건 따로 있었다.
“어서 와요. 뭐 사시게?”
막 장사를 개시한 것처럼 보이는 푸근한 인상의 생선 가게 아주머니였다.
“대하도 있나요?”
“대하? 당연히 있지 그럼. 이리 와요.”
아주머니는 빨간 고무 대야를 덮고 있는 뚜껑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살이 통통하게 오른 대하가 보였다.
“어때? 보기에도 싱싱해 보이지?”
“그러네요.”
“얼마나 싱싱하면 이거 회로도 먹을 수 있다니까? 어제 들어왔어, 어제.”
“kg당 어떻게 하나요?”
“총각도 대하가 가을이 제철인 건 알지?”
“알죠.”
“알겠지만 제철 음식들이 원래 좀 비싸잖아.”
아주머니는 슬쩍 서준의 눈치를 살폈다.
격변 이전부터 시장에서 장사를 했던 그녀였다. 그래서 손님의 표정만 봐도 이 손님이 호구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었다.
한데…….
‘도통 모르겠네.’
표정만 봐서는 알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해물에 대해 빠삭한 것 같으면서도 뭔가 맹해 보인달까?
고민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kg당 35만 원.”
“비싸네요.”
“에이, 그럼 당연히 비싸지. 저 배추김치 봐. 배추김치도 kg당 20만 원은 받고 팔잖아. 근데 대하가 kg당 35만 원이면 거저지, 거저.”
서준이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그녀가 말했다.
“에이, 선심 쓴다. 지금 가져가면 100g 더 얹어 줄게. 어때?”
“괜찮네요.”
그녀가 저울에 대하를 올리기 시작했다. 저울추가 점점 기울더니 이내 1kg를 살짝 오바했다.
“맞지?”
서준은 피식 웃었다.
1kg가 넘는 건 맞았다. 다만 대하가 든 바구니의 무게가 대략 300g은 되어 보였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가벼운 것처럼 보이지만 플라스틱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맞네요.”
서준은 흔쾌히 바가지를 썼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 바가지는 뭔가 신선한 충격이었다.
생사를 보장받기 어렵던 마계에서의 초창기 생활을 제외하면 서준은 만마(萬魔)들 위에서 군림했다.
그 누구도 그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 않았고 그 명을 거역하지 못했다.
심지어 마족들 사이에서 기만과 허위로 악명이 높은 군주 펠리알조차도 그 앞에서는 거짓을 입에 담지 못했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를 보라.
아주 당당하게 바가지를 씌우고 있지 않은가?
과한 추종은 피곤을 동반하기 마련. 그리고 서준은 수천 년간 추종받았다.
우습게 들릴지 몰라도 바가지란 서준에게 있어서 본인의 인간성을 재확인하는 행위에 가까웠다.
절대적 존재가 아닌 다른 이들과 똑같은 인간임을 증명하는 행위 말이다.
“자, 여기요. 다음에 또 와요.”
푸근한 미소로 배웅하는 아주머니에 서준도 마주 미소 지었다.
물론 다음에 또 올 생각은 없었다. 바가지는 한 번이면 족하다.
* * *
서준이 마계에서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 중 하나는 바로 대하 구이었다.
마계에서 돼지는 끄렉세그로 대체하고 닭과 계란은 데칸토와 아루트스로 대체했지만 대하를 대체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무엇보다 소금이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뷔르엘 나무라고 해서 소금의 짠맛을 대체할 조미료는 있었지만 그건 뷔르엘 나무에 나는 열매의 즙을 짜서 대체하는 것이었다.
마계 그 어디에도 대하 구이에 들어가는 굵은 소금을 대체할 만한 건 존재하지 않았다.
지구로 귀환하며 그간 먹고 싶었던 음식을 마음껏 먹느라 잊고 있었지만 마침 가을이 성큼 다가오자 대하 구이가 떠올랐다.
시장에서 대하 구이를 사 온 건 그 이유였다.
대하 구이는 의외로 간단한 요리다. 싱싱한 놈들이라면 따로 손질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기만 하면 됐다.
아, 머리만 따로 남겨서 버터 구이를 해 먹을 경우는 예외다. 이때는 머리에 난 뿔을 사전에 도려 줄 필요가 있다.
타악! 타악!
자, 손질은 다 끝났다. 이제 흐르는 물에 박박 헹궈 준 후 체에 받쳐서 물기만 제거하면 된다.
그사이 프라이팬과 굵은 소금을 준비한다.
자, 준비가 끝났다면 종이 호일이나 은박지를 깔아 주자. 없다면 안 깔아 줘도 무방하다.
서준은 종이 호일이 있음에도 굳이 깔지 않았다. 탄 소금에서 배어 나오는 짠맛과 고소함이 새우에 스며드는 걸 선호하는 탓이다.
소금을 깔아 줬다면 이제 남은 건 대하를 잘 포개서 촘촘히 깔아 주는 일이다.
다 깔았다면 프라이팬 뚜껑을 닫고 중불에서 15분~20분 정도 구워 주면 된다.
서준은 타이머를 20분으로 맞췄다. 그는 대하가 적당히 탄 것을 선호했다.
이제 남은 건 기다려 주는 일 뿐.
똑딱똑딱-!
어째 시간이 잘 안 가는 것 같았다. 수천 년 만에 대하를 먹을 생각 때문인가?
대하가 익는 사이 서준은 가게 앞을 쓸었다. 바람에 날려 온 낙엽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명랑한 인사에 서준은 고개를 돌렸다. 밝게 웃고 있는 기선혜가 보였다.
“일찍 등교하네?”
“원래 이 시간에 등교해요.”
“아직 일곱 시밖에 안 됐는데?”
“오늘 당번이거든요. 여덟 시까지는 가야 돼요. 근데 오빠도 일찍 나오셨네요? 학교 가면서 아침에 가게 문 연 건 못 봤던 것 같은데…….”
“아, 새벽 시장 좀 다녀오느라고.”
“또 뭐 맛있는 거 하려는 거구나?”
서준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선혜 너 밥은?”
“가는 길에 삼각김밥 사 먹으려고요.”
“잘됐네. 대하 구이 좋아하면 먹고 갈래?”
“없어서 못 먹죠! 헤헷.”
“들어와.”
가게로 들어온 기선혜가 코를 킁킁거렸다.
“우와, 대하 냄새!”
“거의 다 익었겠다. 기다려.”
서준은 주방으로 향했다. 마침 대하가 불그스름하게 잘 익었다.
대하 구이에 초장이 빠질 순 없는 법.
서준은 초장과 함께 대하 구이를 내갔다.
“비주얼 대박!”
“손에 냄새 밸 텐데 비닐장갑 필요 없어?”
“네, 괜찮아요. 이따 씻으면 돼요.”
고개를 끄덕거린 서준이 대하에 손을 뻗으려는 순간.
“아, 잠깐만요!”
“응?”
기선혜가 민망한지 혀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
“죄송해요. 사진 찍고 먹어도 될까요?”
“그래.”
기선혜는 다양한 각도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 보면 올 때마다 찍는 것 같네.’
기선혜는 종종 친구들과 가게를 찾았었다. 가게에 오면 주로 떡볶이를 먹고 가곤 했는데 똑같은 떡볶이인데도 매번 사진을 찍었다.
“다 됐어요.”
서준은 그제야 대하를 집었다. 짭쪼롬한 소금 냄새가 밴 대하는 냄새만으로도 그 맛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입에 넣으면 더 맛있겠지만 말이다.
‘일단 대하만.’
숙련된 솜씨로 대하를 깐 서준이 초장 없이 대하 속살을 입에 쏙 넣어 오물오물 씹었다.
예상한 맛이다. 그리고 예상한 맛이기에 더욱 맛있다.
짭쪼롬한 맛에 이어 담백하고 구수한 맛이 그야말로 별미라 부를 만했다.
씹으면 씹을수록 입안 가득 단맛도 돈다.
이번에는 초장이다. 껍질 깐 대하 속살을 초장에 콕 찍어 입에 넣었다.
“대박! 먹뒤먹!”
감탄사는 선혜의 것이었다. 기선혜는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더 크게 치켜뜬 채 감탄하고 있었다.
“먹뒤먹?”
“오빠, 먹뒤먹 모르세요?”
“뭐지 그게?”
“먹었는데 뒤돌아보니까 또 먹고 싶을 만큼 맛있다.”
“아…… 존맛탱은 아는데.”
“헐, 그거 고조선 때 쓰고 사어(死語)된 표현 아니에요?”
피식 웃은 서준이 말했다.
“선혜 너 그럼 즐은 알아?”
“즐이요? 그게 뭐예요? 즐겁게 줄임말인가?”
서준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즐의 원래 의미는 선혜의 말대로 즐겁게가 맞았다. 그게 차차 변질됐을 뿐.
그걸 단번에 맞히다니 대단한데?
“이번엔 내 차례. 톡디가 무슨 뜻이게요?”
“톡디?”
“토끼띠 줄임말?”
선혜가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조소라기보다는 희소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톡 아이디요.”
“아.”
“이번엔 오빠가 문제 내 보세요. 맞혀 볼게요.”
서준은 학창 시절 사용하던 신조어를 떠올려 봤다. 사실 당시에도 서준은 신조어에 유독 약한 편이었다.
“지못미.”
“지못미? 아, 이건 모르겠다.”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해.”
“그게 그렇게 되네요?”
그 후로 서준은 대하를 까먹으며 선혜와 퀴즈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드르르륵!
“누구인가. 누가 내 단잠을 방해하였는가?”
“어, 박연 오빠!”
“허어, 참으로 딱하구나! 짐이 지금 꿀잠을 자고 있었는데 어찌 시끄럽게 떠들 수 있느냐, 이 고등학생아!”
선혜가 서준을 돌아봤다.
“저건 무슨 드라마예요?”
“왕건이라는 드라만데, 그걸 또 용케 찾아봤나 보네.”
“거기서 저런 대사가 나와요?”
서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박연이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내가 가만히 보니 네놈 머릿속에는 마족들이 가득 찼구나. 여봐라, 내군은 들어라!”
“그만하고 콜라나 먹어라.”
박연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냉장고로 향했다.
* * *
의도치는 않았지만 잔반 처리는 박연이 하게 됐다. 박연이 남은 대하를 먹는 사이 서준은 TV를 켰다.
마음에 드는 채널이 없어 리모컨을 마구 누르고 있는데 박연이 물었다.
“마왕, 이건 뭔데 이렇게 맛있는 건가?”
“대륙에는 없었던가?”
“이것보다 작은 건 있었지. 이렇게 큰 건 없다.”
“대하라고 한다.”
“대하? 이름이 대하라고?”
“그래.”
껍질 깐 대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연이 갑자기 박장대소했다.
드디어 미쳐 버린 건가 생각하고 있는데 박연이 쿡쿡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럼 대하 사극은 대하로 만든 사극인가? 큭큭큭큭큭.”
박연의 독백에 서준은 적잖이 안심이 됐다. 진정한 아재가 저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