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God wants to live in peace RAW novel - Chapter 164
마신은 평화롭게 살고 싶다 164화
* * *
윤경임은 NBC의 대표 라디오 프로그램인 를 4년 동안 책임지고 있는 베테랑 DJ였다.
그녀가 별밤을 진행한 지도 벌써 4년이나 됐지만 아직도 DJ 부스에 들어갈 때면 모든 게 꿈만 같았다.
1968년생인 그녀도 소녀 시절 별밤을 들으며 감성을 키웠던 시절이 있었다.
나이가 들며 차차 소녀 때의 감성은 사라졌지만 그때의 기억만은 아직도 또렷했다.
늦은 밤…… 소녀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라디오 주파수를 맞춘다.
그리고 자신이 보낸 사연이 나오는지 가슴 졸이며 사연을 들었다.
마침내 자신의 사연을 DJ가 읽었을 때!
그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희를 느꼈었다.
‘순수했지.’
윤경임은 당시를 회상하며 라디오 부스로 들어갔다.
“여러분, 단풍이 지고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이 성큼 다가왔네요. 여러분들은 겨울 하면 어떤 게 생각나시나요?”
베테랑답게 방송은 순조롭게 시작됐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윤경임은 모니터에서 흥미로운 사연 하나를 발견했다.
‘요즘도 이런 사연 글이 있구나.’
요즘 감성에는 맞지 않는 사연 글이었다. 하지만 그 순수한 마음을 사연자가 사랑하는 그녀에게도 들려주고 싶었다.
“이번에는 12구역에 사시는 박연 씨가 보낸 사연입니다.”
그녀는 사연자 박연의 마음을 목소리에 담아 계속해서 사연을 읽어 나갔다.
“……했소. 물론 그녀는 내 마음을 모를 테지만, 난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오. 최다희, 당신을 위한 시를 썼소. 부디 당신이 들어 주길 바라며, 라고 사연과 시를 보내오셨네요. 우와, 대단한데요. 순수한 사랑이 여기까지 전달되는 것 같아요. 그럼 시도 읽어 볼까요?”
윤경임은 호기롭게 시를 읽어 나갔다.
「만났네, 밤하늘 별빛처럼 빛나는 그대를.
보았네, 사슴 같은 그대의 눈망울을.
알았네, 내 마음에 싹튼 그대 향한 감정을.
담았네, 내가 느끼고 있는 이 모든 감정을.
나의 밤하늘이자 나의 사슴이며 나의 여신인 최다희…… 그대를 내 목숨보다 더 사랑하오.」
윤경임이 시를 낭송하자마자 메시지가 수없이 쏟아졌다.
↳진미순: 요새도 이런 사연을 보내는 분이 계시네요. 옛날 생각나고 좋았습니다 ^_^
↳김희정: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 나네요. 전화기 끌어안고 친구랑 통화하면서 별밤 듣던 그 시절…… 고마워요.
↳정진규: 손발 오그라들어서 죽는 줄 알았네요ㅋㅋㅋㅋㅋㅋㅋ
↳이태우: 최다희라는 여성분. 사연 보내 주신 분 절대 놓치지 마세요~~~~~~ 이런 사람이 진국이에여
↳고형건: 내가 아는 사람 이름이랑 같네ㅋ
* * *
최다희의 하루 일과에 마침표를 찍는 일은 감사 일기를 쓰는 것이었다.
오늘도 감사 일기를 쓰고 있던 최다희는 무심코 듣고 있던 라디오에서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자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DJ가 전한 사연 모두 자신과 박연 사이에 있었던 일들과 일치했다.
당혹스러웠다.
아니…… 솔직히 창피했다.
퇴근 시간에 맞춰 회사 앞까지 찾아와 만인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프러포즈를 받는 것만큼이나.
하지만 창피스러운 건 찰나에 불과했다.
‘이거 때문이었구나.’
살며시 미소 지은 그녀는 어느새 펜을 내려놓고 라디오에 신경을 집중했다.
-……였소. 나는 한눈에 반했지. 내가 본 그녀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여신과도 같았소…… 이거, 사연자분께서 다희 씨한테 단단히 빠진 것 같은데요? 계속 읽어 보겠습니다.
이윽고 사연은 클라이맥스에 다다랐다. DJ가 박연이 쓴 시를 읽기 시작한 것이다.
“풉.”
최다희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손발이 절로 오그라드는 시였다.
하지만 화자가 박연이라면 왠지 납득이 가는 시였다.
최다희는 박연을 떠올렸다.
살면서 최다희는 박연 같은 남자…… 아니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 누구보다 순수하고 영혼이 맑은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사랑을 고백하는 방식이 고루하고 서툴진 몰라도 그 마음만큼은 확 와닿았다.
사람이란 생물은 남자든 여자든 똑같다.
누구나 호감 있는 사람 앞에서는 잘 보이고 싶고 잘해 주고 싶어한다. 호감이 사랑으로 발전하면 그 정도는 더욱더 심해진다.
하지만 마침내 쌍방적 사랑에 다다르고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해진다.
익숙함은 본색을 드러내게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서로가 변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연애의 시작과 끝이었다.
지금껏 최다희도 그런 과정을 몇 번 겪었다. 그러다 보니 연애에 대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박연이란 사람을 만나고 이제는 그의 시를 들으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박연 씨는 좀 다르지 않을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최다희의 볼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사실 그녀 또한 박연이 마음에 전혀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두 사람 꼭 이뤄졌으면 좋겠네요. 나중에 꼭 함께 사연 보내 주세요. 결혼까지 하신다면…… 원하실 경우 사회도 맡아 드릴 수 있습니다. 자, 그럼 박연 씨가 보내 주신 신청곡과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류해준 씨의 ‘너밖에 없는 나’.
반주가 흘러나오자 최다희의 입가에는 싱그러운 미소가 맺혔다.
노래 가사를 음미하던 그녀는 노래가 끝나자 어딘가로 문자를 보냈다.
* * *
[나][오후][11:09] 솔직히 좀 오그라들긴 했죠? ㅋㅋㅋㅋㅋ [순백한 여신][오후][11:12] 아니에요!! 오그라들긴요. 좋았어요 >.<“왔다! 답장 왔다!”
박연이 호들갑을 떨며 휴대전화를 갖고 주방에 있는 서준에게 뛰어 들어왔다.
그에 서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부터 이게 뭔 지랄인지 모르겠다.
“귀찮게 하지 말고 알아서 좀 보내지?”
“그치만 난 치는 속도가 느리잖아.”
“치는 속도가 느린 게 아니라 뭐라고 답장해야 될지를 모르는 거겠지.”
“…….”
정곡이 찔려 버린 연애 고자 박연이었다.
하지만 인정할 수는 없었다. 인정하면…… 왠지 마왕 따위에게 지는 기분이었다.
“치는 속도가 느려서 부탁하는 거라니까!”
“그럼 천천히 쳐서 보내라.”
“허! 이런 걸로 유세 부리는 건가!”
“천천히 쳐서 보내라는 게 어떻게 유세인가. 천천히 쳐서 보내, 천천히.”
“……아, 또 왜 그러나.”
여태 본 적 없는 박연의 애처로운 표정에 서준은 마왕다운 장난기가 발동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나는 마왕이라서 그대를 도와줄 수가 없을 것 같다.”
“아니, 말이 왜 또 그렇게 되나…….”
“그대는 용사잖아. 마왕이 어떻게 용사를 도와줄 수가 있겠나.”
“저기, 뭐더라…… 아! 베이크론 왕국에서는 마왕이랑 용사가 합심하는 설화도 있어.”
“금시초문인데.”
“진짜 있다. 그리고…… 이건 엄밀히 말하면 도움이 아니지.”
“그럼 뭐지?”
“조언이지, 조언.”
“이번에는 뭐라고 왔는데?”
더 이상 장난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서준이 피식 웃으며 묻자 박연이 말했다.
“그럼 나두 박연 씨 따라서 개종해야지. 히읗 세 개. 라고 왔다.”
“음.”
“근데 내가 보낸 시간은 11시 13분인데 답장이 온 건 11시 24분이다.”
“그게 뭐?”
“그게 뭐라니…… 무려 11분이나 답장이 늦지 않았나.”
“아니, 그러니까 그게 왜?”
“TV에서 봤다. 남자가 여자랑 연락할 때 여자 측에서 답장이 10분 안에 안 오는 거면 여자는 너한테 관심 없는 거니까 일찌감치 포기하라고…….”
“대체 그런 건 어디서 본 건데?”
“에서.”
무슨 방송인지는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서준은 시무룩한 표정의 박연을 위로했다.
“11분 만에 온 거면 상관없다.”
“정말 그럴까?”
“땅에 떨어진 것도 3초 안에 주워 먹으면 괜찮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답장도 똑같아.”
“그럼 다행이지. 자, 아무튼 이제 뭐라고 보낼까? 같이 붓다의 가르침을 받자고 할까?”
“……붓다가 여기서 왜 나오나.”
“불교로 같이 개종한다는 답장이 왔잖아. 불교하면 붓다지.”
서준은 한숨을 내쉬며 박연을 바라봤다.
모르겠다. 진담으로 하는 말인지 농담으로 하는 말인지…….
‘표정을 봐서는 진담 같긴 한데.’
그렇다면 정말 심각한 일이다. 이건 붓다도 구원할 수 없는 연애 고자 중생이 아닌가!
“아! 그리고 히읗 세 개는 무슨 의미일까?”
“의미라니?”
“히읗은 하나만 보내도 되고 두 개만 보내도 되고 네 개를 보낼 수도 있는데 왜 굳이 세 개를 보낸 걸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
알다시피 서준은 수천 년간 마계라는 삭막하고 피폐한 곳에서 살았다.
그 덕에 인간성을 상실했다.
인간성이라는 단어에는 흔히 말하는 연애 세포도 존재했다. 그곳에서는 연애 세포 특유의 그 간질간질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색욕이 크게 느껴질 뿐이다. 그게 마계라는 곳이었다.
이 말을 바꿔 말하면 수천 년간 절간에 틀어박혀 독수공방을 했다는 말과도 같았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이런 도움은 서준이 박연에게 받아야 마땅했다. 그런데 이건 완전히 정반대가 아닌가?
히읗을 하나만 보내도 되고 두 개만 보내도 되고 네 개를 보내도 되는데 왜 굳이 세 개를 보낸 거냐고?!
“하아.”
연애 고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박연에 서준은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 * *
“난 다녀오지!”
허둥지둥 가게를 나서는 박연.
서준이 그런 박연을 붙잡았다.
“이봐, 박연! 지갑 가져가야지!”
“아, 맞다.”
블링크를 시전해 가게로 돌아온 박연이 지갑을 받아 들고 다시금 가게를 나섰다.
지난밤 최다희와 새벽 한 시까지 연락을 주고받았던 박연이었다.
늘 설ㅤㄹㅔㅆ던 교회 가는 길이겠지만 오늘은 특히 더 설레고 떨릴 터였다.
“말이나 안 더듬으면 다행이겠는데.”
뭐 본인이 알아서 잘하겠지.
어깨를 으쓱거린 서준은 주방으로 들어가 찜기 뚜껑을 열었다.
화아아악-!
뜨거운 수증기가 확 솟구친 찜기 안에는 보송보송한 자태를 선보이는 호빵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맛있겠군.’
꿀꺽.
절로 군침이 돌았다.
군필자들은 이런 추억 하나씩은 갖고 있을 것이다. 혹한기 훈련 때 추위에 벌벌 떨며 반합 라면 끓여 먹었던 추억.
물론 미필자들도 비슷한 추억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겨울에 찬바람 맞아 가며 야외에서 라면 먹던 추억.
이처럼 라면은 찬바람 맞아 가며 먹어야 그 맛이 사는 법이다.
그건 호빵도 마찬가지였다. 밖에서 호오- 불어 가며 먹어야 제맛이었다.
호빵을 쟁반에 담아 가지고 나온 서준이 호빵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아, 뜨뜨!”
입천장이 데일 것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물론 열기를 차단시킬 수도 있는 서준이었다.
다만.
‘호빵은 이렇게 호들갑 떨면서 먹어야 제맛이지.’
그런 생각과 함께 서준은 호빵을 테두리부터 공략했다.
테두리 부분은 팥소가 없어서 밋밋한 밀가루 빵만 먹는 것 같지만 이게 또 의외로 별미다.
야금야금 테두리를 공략하다 보면 드디어 달달한 팥소와 마주할 수가 있다.
‘맛있군.’
달달한 팥소와 밀가루 빵의 환상적인 조합.
그래, 호빵은 이런 맛이었다.
어떻게 이 호빵 없이 수천 년을 보냈을까?
지금 생각하면 나도 참 대단하단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서준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얼마 전, 본 적이 있는 아이였다.
그때도 얇은 긴팔 옷만 입고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이는 여전히 그 꼬질꼬질한 긴팔 옷을 입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