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God wants to live in peace RAW novel - Chapter 163
마신은 평화롭게 살고 싶다 163화
* * *
“……했었소. 그래서 드디어 악룡 데이카란투를 처치할 수 있었지.”
김성식 할아버지가 짝짝 박수를 쳤다.
“용사 최고!”
“후후…… 나도 알고 있소. 사실 내 자랑 같아서 말 안 하려고 했지만 난 참 많은 사람들을 구했었소.”
“마왕은 어떻게 됐어? 용사가 처리했어?”
“커흠! 마왕은……!”
“처리했네?”
“……소.”
“응?”
“……했단 말이오.”
“나 안 들려.”
박연은 한숨을 내쉬며 할아버지에게 속삭였다.
“아직은 못 했소.”
“응? 왜? 용사는 세다며?”
“나보다 더 세더구려.”
“용사랑 마왕이랑은 친구지?”
“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우린 적이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숙적이랄까?”
“아니다. 용사는 마왕이랑 친구다.”
“어허…… 아니라지 않소. 계속 이러면 이야기는 여기까지밖에 해 줄 수가 없소.”
“알았어. 용사는 마왕이랑 친구 아니다.”
“맞소. 용사는 마왕과 친구가 아니오.”
“그럼 나중에 용사는 어떻게 됐어?”
“세상 사람들은 용사가 마왕을 처치한 줄 알고 있었소. 용사는…… 그들의 희망을 짓밟을 수가 없었기에 그들을 계속 속일 수밖에 없었지.”
“속였어?”
“본의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리됐소. 용사가 마왕을 처치하지 못했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사람들이 불안에 떨 테니까.”
김성식 할아버지가 다시 방긋 웃으며 박수를 쳤다.
“그럼 마왕은 어떻게 됐어?”
“마왕은…… 할아버지만 알고 계셔야 하오. 남한테는 말하면 안 되고.”
“응. 나만 알고 있을게.”
“술집을 하고 있소.”
“술집?”
“그렇소. 허…… 명색이 마왕이 술집이라니. 기가 차더구려.”
“술집이 어딘데?”
“12구역에…….”
박연은 주소를 말하려다 말았다. 문 너머로 최다희가 조심스럽게 손짓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이따 마저 말해 줘도 되겠소?”
“안 돼. 지금 해 줘. 나 지금 듣고 싶어.”
“쉬 좀 싸고 오려고 하오.”
“쉬? 쉬는 싸야지. 얼른 갔다 와.”
“알았소.”
박연이 병실을 나섰다. 최다희가 콜라를 건넸다.
“아직도 여기 계셨어요?”
“자꾸 붙잡지 뭐요. 그 덕에 다른 사람들은 살피지 못했으니 내 불찰이오.”
“아니에요. 근데 박연 씨.”
“음?”
“이런 봉사 자주 다니셨어요?”
박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순례자들을 보호하고 이교도들에게서 사제들을 지키며 만인에게 봉사하는 일도 봉사라면 봉사 아닐까?
“종종 했던 것 같소.”
“그러셨구나.”
“왜 그러시오? 내가 혹시 김성식 할아버지께 무슨 실수라도 한 거요?”
“아뇨. 사회복지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여태 봉사 오신 분들 중에서 박연 씨처럼 열정적으로 환자를 보살핀 분은 처음이라고…….”
“허허. 얼굴이 살짝 비대칭이라 입이 삐뚤어져 있던데 말은 바로 하는 사회복지사구려.”
“저도 처음이에요. 박연 씨처럼 열심히 봉사하시는 분은요.”
칭찬에 약한 박연이었다. 그는 쑥스러운지 몸을 배배 꼬았다.
그런 박연에 최다희는 활짝 웃었다.
최다희는 박연 같은 사람을 처음 봤다.
이상한 말투에 이상한 화법…… 게다가 이상한 행동까지.
그래서 이상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독특한 개성을 가진 이상한 사람이랄까?
그 생각은 지금도 유효했다. 하지만 오늘 박연의 새로운 면도 보았다.
그건 봉사 정신이었다.
최다희는 우연히 김성식 할아버지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박연이 뭔가 잘못을 했겠거니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할아버지는 귀신에 홀린 듯 허공을 바라보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고, 거수경례를 하고 있었다.
남들이 본다면 치매 환자가 단지 헛것을 봤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최다희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박연의 진심 어린 위로가 통했다고 생각했다.
사회복지사도 비슷한 말을 했다.
김성식 할아버지가 경기를 일으킬 때는 단 한 번도 타인의 손길을 허락하지 않았었다고……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고.
그래서 말하고 싶었다.
“박연 씨.”
“말하시오.”
“박연 씨는 참 좋은 사람 같아요.”
“그건 다희 씨도 마찬가지요. 다희 씨도 좋은 사람이오.”
최다희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박연 씨, 영화 좋아하죠?”
“그건 어떻게……?”
“맨날 영화 이야기 하시잖아요.”
“아…… 뭐, 좋아하오.”
“괜찮으시다면 이따 끝나고 저랑 영화 한 편 보실래요? 이번에 새로 개봉한 거 있는데 혼자 보러 가긴 좀 그래서요.”
* * *
지구상에 박연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서준밖에 없다. 두식은…… 엄밀히 말하면 오크니 제외다.
서준 외에 박연의 제자였던 차진명이 그나마 박연이 보통 사람이 아니란 건 알고 있지만 그마저도 타 차원의 사람이란 건 모른다.
박연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게 내심 답답했었던 모양이다.
김성식 할아버지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으며 박연은 왠지 후련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일까?
박연은 김성식과 제법 친해졌다.
“왜 자꾸 모자란 놈처럼 헤실헤실거려?”
김성식이 실없이 웃고 있는 박연에게 물었다. 박연은 신색을 가다듬으며 밥을 떠먹여 줬다.
“아무것도 아니오. 밥이나 드시오.”
“밥은 나도 먹을 수 있어. 내가 뭐 손이 없나. 말이나 해 봐. 뭔가 있는 거 맞잖아.”
“흠. 비밀 지켜 줄 거요?”
김성식이 입에 지퍼 채우는 시늉을 했다.
“백주 대낮에 중정 놈들한테 남산에 끌려가도 비밀은 꼭 지키지. 그러니 말해 봐.”
“사실…… 데이트 신청을 받았소.”
“데이트? 남자한테?”
“아니, 여자한테!”
“크크. 발끈하긴…… 곱상하게 생겨서 농담 좀 해 본 거 가지고.”
“모욕이오. 내가 어딜 봐서 곱상하게 생겼단 말이오? 난 남자다운 사람이오.”
“그렇다 치고…… 여자라.”
“또 헛소리하시려거든 밥이나 드시오. 밥 식으면 맛없소.”
“안남미는 맛없어. 사실 내가 내 입으로 이런 말 하면 팔푼이 같긴 한데…… 지금이야 후방에서 치료받고 있는 처지지만 월남 오기 전에는 여자 여럿 울렸거든.”
김성식의 정신은 하루에도 열두 번 오락가락하는 편이었다.
아까는 어린아이 같았다면, 지금은 자신이 후방의 야전병원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이 얼굴로 안 넘어오는 처자들이 없지.”
박연은 새삼 할아버지를 훑었다.
확실히 지금이야 쭈글쭈글 주름진 얼굴에 검버섯이 번져 있지만 소싯적에는 미남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법한 이목구비였다.
“옆 동네에서도 나 한번 보겠다고 여고생들이 아주 줄을 섰었지. 이 서랍 안에도 편지 많아. 다 나 따라다니는 여자들이 보낸 거지. 오빠 무사히 돌아오라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김성식의 밥술을 떠주던 박연에게 김성식이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간호사가 데이트 신청한 거 맞지?”
김성식이 말한 ‘간호사’는 다름 아닌 최다희였다. 그녀는 다른 치매 환자의 식사를 돕고 있었다.
박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김성식이 풉……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곱긴 하네. 첫눈에 반할 만하겠어.”
“여신이 따로 없지.”
“그래. 강정희 누님만큼 예쁘긴 하군.”
“강정희 누님이 누구요?”
“아니, 강정희 누님을 몰라?”
“모르오.”
“허, 이 친구 보게…… 안 봤어?”
“안 봤소.”
“그럼 는?”
“그것도 안 봤는데.”
“하! 어디 외국서 살다가 왔나. 귀국하거든 꼭 보도록 하고…… 저 간호사가 먼저 데이트 신청을 했다는 거지? 임자한테?”
“맞소. 영화 보러 가자더군.”
“근데 표정이 왜 그렇게 어두워? 여자가 먼저 영화 보자고까지 한 거면 말 다 한 건데.”
“사실은 내가…….”
“뭐?”
“내가…… 그, 음.”
“고추 달린 놈이 뭐 그리 미적거려! 화끈하게 말해 봐!”
“후…… 사실 난 여자랑 영화를 본 적이 없소. 그래서 그게 걱정이오.”
말을 듣자마자 눈을 끔뻑거리던 김성식이 이내 배를 잡고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웃지 마시오!”
“푸하하하하! 안 웃을 수가 있어야지. 고작 그거 때문에 표정이 어두웠다고?”
“난 진지하오.”
굳은 표정의 박연에 김성식도 그의 진심을 느낀 건지 덩달아 표정을 굳혔다.
잠시 뜸을 들인 김성식이 뭔가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저 간호사랑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는 건가?”
“……손자 이름도 정했소.”
“여기 누워야 할 건 내가 아니라 임자군.”
박연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다희 씨만 생각하면 가슴이 벌렁거리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으니까. 다희 씨가 없는 내 삶은…… 내겐 죽은 삶이나 다름이 없소.”
“그 정도까지 사랑한다니 내 특별히 비법 하나 전수해 줘?”
“비법이라니?”
“저 간호사가 임자한테 뻑 갈 만한 비법.”
“그런 게 있소?”
“당연히 있지.”
“그럼 말해 주시오! 그 비법!”
“후후후. 일단…….”
김성식의 연애 비법을 들으면 들을수록 박연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정말 통할까?
이게 통했다면 왜 영화에서는 한 번도 못 봤지?
하지만 김성식은 확신했다.
“내가 이 방법으로 못 꼬드긴 여자가 없었어.”
“흠…… 알았소. 해 보리다.”
* * *
박연과 최다희는 나란히 길을 걷고 있었다.
가로등 아래 비친 두 사람의 그림자는 퍽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라고 박연은 생각했다.
반면 최다희는…….
“영화 진짜 감동적이었죠?”
방금 보고 나온 영화 생각밖에 없었다.
딴생각을 하고 있던 박연은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렇소. 감동적이더구려.”
“그래도 둘이 오해를 풀고 만나게 돼서 다행이에요. 새드 엔딩으로 끝났다면 진짜 슬펐을 텐데. 안 그래요?”
“맞소. 그래서 말인데, 다희 씨.”
“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최다희에 박연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망설일 순 없다!
“다희 씨는 그런 절절한 사랑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시오?”
“음…… 영화에 나온 두 주인공들처럼은 없는 것 같아요. 박연 씨는요?”
“나도 당연히…….”
말을 하던 박연의 뇌리에 일순 여신 이라희와 진정한 여신 김나희와 위대한 여신 임아희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들을 가슴 절절하게 사랑한 건 아니지.’
자기 합리화를 끝낸 박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없소. 그런 절절한 사랑을 해 본 적은. 하지만…….”
“네?”
“지금 시작됐을지도 모르구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몇 차례 심호흡으로 흐트러지는 정신을 가다듬은 박연이 말했다.
“혹시 다희 씨는 라디오를 들으시오?”
“라디오요? 아뇨. 운전할 때 가끔 듣는 거 말고는…… 그건 왜요?”
“부디 내일 밤 10시에 하는 를 들어 주시겠소?”
뜬금없는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던 최다희.
박연은 그런 그녀를 아련한 눈길로 쳐다보다가 휙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절반만 살짝 틀었다.
“연락…… 기다리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