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on God wants to live in peace RAW novel - Chapter 311
마신은 평화롭게 살고 싶다 311화
* * *
이해할 수 없었다.
한자끈 짧은 내가 왜 참을 인(忍)자를 외우고 있는 건지.
참을 인(忍)이 자꾸 떠올라서 그런 걸까?
그래, 그런가 보다.
지금도 머릿속에 자꾸 참을 인(忍)이 그려지고 있지 않은가?
忍, 忍, 忍, 忍, 忍, 忍!
참자.
이건 무의식이 보내는 일종의 경고다.
왜, 환 공포증의 원인이 파란고리문어 같은 맹독성 동물들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 때문이라는 가설도 있다잖나.
참을 인은 이처럼 참지 않을 시에 일어날 참사에 대한 일종의 방어적 본능인 셈이다.
“왜 대답이 없는 거지?”
“아…… 하하하! 아닙니다. 너무 뜻밖의 부탁이라 놀랐을 뿐입니다. 이걸 두고 바로 언어구단이라고 하나 봅니다.”
“도단이겠지.”
“예, 도단. 그런데…….”
“말해라.”
“제가 뭐 따로 사심이 있어서 드리는 말씀은 아닌데 설마 이번에도 화물차 운전 부탁하시는 건 아니시죠?”
“아니다.”
황태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저번에 언제였더라.
아무튼 언젠가 북촌까지 차로 바래다 줬던 적이 있지 않았던가.
그런 부탁인 거겠…….
“이번에는 버스다.”
“…….”
“남는 버스 있으면 대절도 좀 했으면 하는군. 사례는 따로 하지.”
꽈드득-!
“그러다 임플란트 한다.”
“후…….”
“이건 늘 하던 대로 부탁일 뿐이니 거절해도 상관없다.”
“제 입으로 이런 말씀드리긴 민망하지만 제가 요새 원체 바빠서 말입니다. 송구스럽지만 선택권을 주신다면 거…….”
“아, 그러고 보니 이걸 말한다는 걸 깜빡했군. 엊그제 술값 안 내고 갔다.”
“예? 제가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만취하긴 했지만 필름이 끊기진 않았다.
더군다나 그날 김관석 의원의 아들하고 푸닥거리도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더 또렷하게 기억한다.
분명 술값은 내고 왔었다.
“안 내고 갔다.”
“얼마 안 내고 갔습니까?”
“십만 원.”
후, 난 또 뭐라고. 십만 원이면 얼마 하지도 않는군.
내심 안도한 황태수는 서준이 말을 바꿀세라 얼른 지갑에서 십만 원을 꺼내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왜 십만 원 뿐이지?”
“예? 방금 십만 원 안 내고 갔다고…….”
“명색이 금융업에 종사했었으면서 원금만 내겠다는 건가? 도둑놈 심보가 따로 없군.”
“……이자가 얼맙니까?”
“칠천억.”
황태수는 두 귀를 의심했다.
‘원금이 십만 원인데 이자가 칠천억이라고?’
이 무슨 기적의 계산법이란 말인가?
“칠천 원이요?”
“칠천억.”
“아니, 무슨!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살던 세상에서는 그랬다.”
“아니, 대체 어떤 요지경인 세상에서 살다 오면 십만 원이 칠천억이 되는 겁니까?”
“이자는 목숨으로 받는 세상.”
“……하던 말씀이나 계속 나눌까요? 아까 선택권을 준다는 말씀까지 하셨었던가요?”
“내키지 않으면 안 해도 된다.”
“아뇨. 내키지 않는다뇨. 선택권을 주신다면 기꺼이 봉사하겠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었는걸요.”
“눈은 거짓말을 못하지. 진실을 말하고 있군.”
“예, 진짜입니다.”
“날짜는 이번 주 금요일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금요일에 가는 걸로 알고 버스랑 준비해 놓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 보지.”
“멀리 안 나가겠습니다.”
잠시 후.
서준이 대표실을 나서자 황태수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차라리 작년처럼 차를 빌려 달라고 하던가!”
쾅! 쾅!
“그나저나 애들한테는 뭐라고 말한다…….”
사실 금요일에는 회식이 잡혀 있었다.
그런데 일이 이 지경이 됐으니 회식은 무슨 회식이란 말인가.
취소를 하던 해야 하는데 할 말이 궁색하다.
뭐라고 말을 하겠는가.
너네 사장님 이번에 운전기사 노릇하게 됐으니 회식은 너희끼리 해라?
갑자기 말 못할 집안일이 생겼으니 회식은 나중에 하자?
뭐라 말하든 부하들 입장에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을 거다.
이 회식을 주도하고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하라 엄포를 놓은 게 자신이었으니까.
“하는 수 없군. 예희 도움을 좀 받는 수밖에.”
그런 생각을 하며 구체적인 플랜을 짜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왜, 또!”
“손님 오셨지 말입니다.”
“누군데!”
“무슨 시사민 인재 영입 위원회 어쩌고 했습니다.”
“인재 영입 위원회 같은 소리 한다. 나 없다 그러고 잡상인들 출입 금지시켜.”
“예.”
황태수가 다시 플랜을 짜는 그 사이.
“지금 사장님께서 바쁘셔서 말입니다. 다음에 오시겠습니까?”
“허허. 확실히 시사민 인재 영입 위원회에서 찾아뵌 거라고 말씀드린 게 맞나?”
“예.”
“이거 원…… 그럼 이 명함이라도 대신 전해 줄 수 있겠나?”
“그러겠습니다.”
“그럼 부탁 좀 함세.”
명함을 주고 사라지는 노인에 고형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어디서 봤더라?”
* * *
끼이익-.
버스 한 대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황태수가 몰고 온 버스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어, 뭐…….”
연준의 인사에 황태수는 멋쩍어하며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차례대로 탑승하는 가운데.
버스 뒷좌석에서는 김시현이 사색에 잠긴 얼굴로 침음을 흘리고 있었다.
“흐음.”
“갑자기 무슨 무게를 잡고 있어?”
“무게 잡긴.”
“아니면…… 너 설마 여자라도 생긴 거냐?”
“생겼으면 어쩌게.”
“생겼으며…… 네 여자 친구, 친구 많냐?”
“아니.”
“아, 그러지 말고…… 진짜 없어?”
“하…… 고 이사님아.”
“우리 김 이사님이 왜 갑자기 존댓말을 하실까.”
“너 같으면요. 그러니까 너가 나라면 여자 친구한테 널 소개시켜 주겠냐?”
“어.”
“미친…… 대체 뭘 믿고?”
“이만하면 인물 괜찮지…… 직업 나쁘지 않지…… 성격 좋지…… 벌어 놓은 돈도 제법 되지…… 여자관계 깨끗하지. 완전 일등 신랑감이잖아.”
“대단한 자신감이네. 내가 졌다. 그래. 해 줄게. 해 준다.”
“약속한 거다. 나중에 가서 딴말하면 너네 집 화장실 천장 문에 있는 현금 다 내 거임.”
“아니, 이 미친놈아! 내가 거기 현금 숨겨 둔 건 대체 어떻게 아는 건데?”
“만날 잠꼬대하잖아.”
“내가?”
“응. 다른 애들도 다 알고 있을걸.”
“시발. 당장 은행에 갖다 넣어야겠네.”
“그럴 필요 없어.”
“뭐가 그럴 필요 없어. 다 알고 있다면서.”
“내가 잘 넣어 놨거든.”
“뭘 넣어 놔?”
“그럴 줄 알고 내가 은행에 잘 넣어 놨다고.”
“미친! 그걸 왜 네 통장에 넣어!”
“누가 보면 떼먹는 줄 알겠네. 이체시켜 줄게. 걱정 마라.”
“이걸 확…… 아오.”
“그나저나 갑자기 안 어울리게 무슨 무게를 잡고 있었던 거냐.”
“그게 아니라 사장님.”
고형건이 운전석에서 승객(?)들을 맞이하고 있는 황태수를 흘겼다.
“사장님이 왜?”
“대체 왜 운전기사를 자처한 걸까?”
“운전기사?”
“그래. 운전하는 거 귀찮아하셔서 대부분 너한테 운전 맡기는 게 사장님이시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직접 버스를 몰고 오질 않나…… 심지어 운전하고 남해까지 간다고 하시질 않나.”
“사모님하고 곧 결혼기념일이라 가는 김에 데리고 가는 거라잖아.”
“사모님하고 결혼기념일인데 왜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가?”
“서준 씨한테 신세 진 게 있어서?”
“그게 다는 아닌 거 같단 말이지. 뭔가 냄새가 나. 냄새가…….”
“그거 내 방귀 냄새일 거요.”
난데없이 들린 목소리에 김시현은 화들짝 놀랐다.
분명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한데 언제 왔는지 박연이 뚱한 얼굴로 그 앞에 서 있었다.
“박 선생님.”
“코가 참 개코구려. 일부러 밖에서 뀌었는데 냄새를 맡다니.”
“방귀 뀌셨습니까?”
“뀌었소.”
“당당하시네요.”
“방귀는 생리 현상의 일종이오. 창피해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지.”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박 선생님도 이번에 여행 가시기로 한 겁니까?”
“물론. 내가 빠지면 여행에 무슨 재미가 있겠소.”
김시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덕분에 재밌는 여행 되겠네요.”
잠시 후.
설렘을 한가득 태운 버스가 출발했다.
* * *
“진짜 괜찮겠어? 네가 안 괜찮으면 지금이라도 취소할까?”
엄마의 질문에 김이슬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취소를 왜 해. 지금 한참 오고 있을 텐데. 괜찮아.”
“엄마는 괜히 받았나 걱정되네.”
“그럴 필요 없어. 나 엄마 딸이잖아.”
“그건 그런데…….”
“또 그런다. 천하의 김이슬이 설마 1년이나 된 일에 속앓이하고 있겠어?”
김이슬의 엄마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을 바라봤다.
말은 아무렇지 않다지만…… 한동안 속앓이를 했던 딸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다시 온단다.
사실 이슬의 엄마는 처음에 예약 전화를 받고 예약을 안 받으려 했었다.
실제로 통화를 하며 난색을 표하기도 했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걸 들은 딸이 나는 괜찮다고, 오히려 이런 식으로 예약 안 받으면 나만 속 좁은 여자 될 거라 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받게 됐다.
받게는 됐는데…….
막상 오기로 한 날짜가 되자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말했다시피 내색은 안 해도 한동안 속앓이를 했던 딸이었으니까.
‘이번에도 우리 이슬이 눈에서 눈물 나게만 해 봐라. 아주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놔야지.’
남녀 간의 일이 어찌 사람 마음먹은 대로 되겠냐만…… 박연이라는 그놈은 참 나쁜 놈이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딸아이에게 DVD 어쩌고 하던 문자가…….
‘얼마나 이슬이를 쉽게 봤으면 그랬겠냐구.’
잠시나마 사윗감으로 생각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똑같은…… 아니. 조금이라도 비슷한 일이 생긴다?
다리몽둥이…… 정확히는 제삼의 다리몽둥이를 확 분질러 버릴 참이었다.
그리고 이슬의 엄마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버스 한 대가 펜션으로 들어왔다.
* * *
비록 천계에서의 원탁은 아니지만, 천신들은 마찬가지로 둥근 원탁에 모여 앉아 있었다.
“시간을 더 지체한다면 손쓸 수도 없을 겁니다.”
“예. 이미 예정한 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슬슬 행동에 나설 때입니다.”
제각각 의견을 개진하는 천신들에 트빌론은 침음을 흘렸다.
그런 트빌론을 보며 헤르페테론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대답을 해 주시지요.”
“흐음.”
“언제까지 시간을 끌 참입니까? 원래라면 트빌론 님이 오자마자 행동에 나서는 게 계획 아니었습니까? 우리 천신들의 명운이 걸린 일이기에 신중을 기하는 게 좋다고 하셔서 지금껏 기다렸습니다만……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겠습니까? 이대로 천기가 바닥날 때까지요? 그래서 천신들이 하나둘 소멸할 때까지요?”
헤르페테론의 말처럼, 원래는 트빌론이 지구에 오면 행동에 나설 계획이었다.
한데 트빌론은 천계에 있던 신탁이 영 마음에 걸렸다.
신탁을 떠올릴 때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물론 그걸 다른 천신들에게 말할 순 없었다.
단지 예감일 뿐이니까.
예감 때문에 차일피일 미뤘다고 한다면 웃음거리가 될 테니까.
‘해답을 찾고 행동에 옮길 생각이었거늘…….’
하지만 천신들의 불만이 점점 고조되는 지금 상황으로 보아서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순 없을 것 같았다.
사실 헤프페테론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마르시아스와의 거래로 모든 천신들이 지구로 넘어오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건 지구의 천기와는 연관이 없다.
마석은 단지 지구로 이동하는 매개였을 뿐.
물론 이를 위해 지구의 인간들이 이상 게이트라 부르는 게이트를 소환하기도 했지만…….
인간들의 집념은 상상을 초월했다.
연합해서 이상 게이트에 대처한 것이다.
그 덕에 지금 천기는 계속해서 바닥이 나고 있었다.
인간들의 생기가 있지 않냐고?
인간들의 생기는 소모품이다.
결국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지구에 천기가 순환하게 하지 않는 이상, 천신들은 모두 소멸되고 말 거다.
“트빌론 님.”
상념에 잠긴 트빌론을 헤르페테론이 나직하게 불렀다.
그에 트빌론은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간을 오래 지체하긴 했습니다. 행동에 나서지요.”